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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15:04:47

교육용 PC 사업


1. 개요2. 상세3. 시대적 배경
3.1. 시장 상황: 8비트 PC 3.2. 시장 상황: 16비트 PC
4. 결과, 그 이후5. 기타6. 관련 문서

1. 개요

노태우 정부 초중반기였던 1989년, 문교부[1]에서 각급 초/중/고등학교에 교육용 PC를 보급하기 위해 수립/시행했던 계획이다.

기종으로는 1983년부터 진행된 교육용 PC 지정[2] 이래 학교와 일부 사용자들에게 보급되어 왔던 기존의 8비트 컴퓨터와 보다 성능이 뛰어난 16비트 컴퓨터 중 어느 것을 채택할 것인지에 대해 상당한 갑론을박이 있었으나 결국 16비트 PC를 교육용 PC로 결정, 이듬해인 1990년부터 각급 학교에 컴퓨터 수업이 신설되고 16비트 컴퓨터가 보급되었다.

2. 상세

1988년, 문교부가 사업을 처음으로 입안했을 당시에는 컴퓨터 수업을 위한 전산실 구축을 위해 초/중학교는 기존에 보급했던 8비트 컴퓨터를 추가로 보급하고 고등학교는 16비트 컴퓨터[3]를 신규보급하는 것을 전제로 계획을 수립했었다. 각 학교 당 8비트, 혹은 16비트 컴퓨터 30대(+교사용 1대)와 프린터 1대, LAN 환경 구축까지 하는 것이 목표였으며 이에 대한 1989년도 예산 39억원까지 구체적으로 책정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체신부[4]가 한국전기통신공사[5] 공중전화 낙전수입 중 일부인 80억원을 교육용 PC 보급 사업에 지원해 주기로 약속함에 따라 1989년 2월 경에 급속히 모든 학교급에 16비트 컴퓨터를 보급하는 것으로 사업의 방향을 선회하였고 이는 1989년 상반기 컴퓨터 업계 최대의 논쟁으로 비화되었다. 기종 전환에 반대하는 논리는 다음과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학교급에 16비트 보급을 주장하는 측에도 나름의 논리가 있었다. 일본, 미국 등 해외 선진국 컴퓨터 환경 추세가 8비트에서 16비트로 이미 옮겨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시대에 뒤처진 8비트 PC를 언제까지 붙들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 첫번째 논리였고, 한편으로는 기존에 행정전산망 표준 규격에 따라 국가 기간 전산망에 설치된 PC는 IBM PC 호환 기종이었는데, 장기적으로는 각급 학교에 설치된 컴퓨터도 국가 기간 전산망에 연결되어 관련 정보를 공유/교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찬성측의 주장이었다. 게다가 IBM PC는 개방형 아키텍처였으므로 특정 기종(=특정 기업) 밀어주기 시비와 호환성 문제에서 원천적으로 자유롭다는 이점도 있었다.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컴퓨터 수 업시간을 개설할 예정이었으므로 호환성 통일 문제가 중요했다. 당대의 컴퓨터들은 제조사가 다르면 운영 체제부터 시작해 모든 소프트웨어 체계가 제각각 달랐고 BASIC 명령도 기본적인 키워드만 비슷하고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다 제각각이라서 학교 교육을 위해서는 통일된 체계가 필요했다. 당장 1983년 교육용 5대 PC로 선정되었던 다섯 개 기종( 삼성전자, 금성사, 효성, 삼보, 한국상역)의 아키텍처가 모두 달랐고 어느 정도 8비트 시장이 정리가 된 1989년 당시에도 애플 II MSX, SPC-1500으로 시장이 3분되어 있었던 것만 보아도 통일된 교육 커리큘럼으로서 IBM PC를 지정하는 것은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이미 상당수 보급되었던 8비트 PC와, 성능이 좋은 16비트 컴퓨터 중 어느 것을 채택할 것인지에 대해 상당한 갑론을박이 있었으나 결국 정부는 16비트 PC를 교육용 PC로 지정했다. 보급 대상 기종은 학생용으로는 IBM PC XT 호환 기종, 교사용으로는 IBM PC AT 호환 기종이 선정되었다. 1989년 당시 한국컴퓨터연구조합과 전산망조정위원회가 문교부에 제출한 사양은 다음과 같다.
매킨토시 아미가, PC-9801 처럼 다른 아키텍처를 채용한 16비트 PC들도 당시에 한국에 소수 들어와 있었으나 디자인, 영상 편집, 산업용 기기 등의 특수 분야나 일부 극소수의 마니아층에만 소량 보급된 상태였고 그에 따라 소프트웨어 기반도 마땅하지 않았다. 그에 비해 IBM PC 호환 기종은 오래전부터 기업 소비자층을 중심으로 사무실에 제법 보급되어 있었고, 정부가 사용하는 행정전산망 표준도 IBM PC 호환 기종이었던데다, 한국 기업에서도 이미 오래전부터 기업 소비자층을 대상으로 IBM PC 호환 기종을 생산하고 있었으므로, 16비트 PC라는 전제를 까는 시점에서 기종은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사실 1988~1990년쯤의 한국 전자전 출품제품을 보면, 기업용 소프트웨어 시장도 이미 성장 중이어서 8비트 시장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여담으로 이 사업의 예산이 공중전화 낙전수입으로 충당될 수 있었던 것은 1980년대 당시에는 공중전화가 매우 일상적인 실외 통신 수단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휴대전화는 군용 무전기마냥 커다란 게 PC 가격에 준할 만큼 매우 비싸서[8] 부유층조차 업무용으로나 사용했고, 상대적으로 쌌던 무선호출기마저 대중 보급이 거의 안 되었던 때였다. 무선호출기가 대중적으로 보급된 것은 1990년대 중반 무렵이고 휴대전화는 그보다도 이후였다. 공중전화 요금은 1989년 당시 1도수(시내통화의 경우 180초)당 20원이었는데, 예를 들어 50원을 넣고 2도수만큼 통화를 하면 돈이 10원이 남는다. 그러나 공중전화에는 거스름돈 기능이 없어 통화가 예상보다 빨리 끝나 통화할 수 있는 금액이 남았더라도 남는 금액은 돌려주지 않았다. 그 상태에서 수화기를 내리면 그대로 한국통신공사의 수입이 되었는데 이것을 낙전(落錢) 수입이라고 한다. 남은 금액이 1도수 이상인 경우에는 뒷사람이 쓰라고 수화기를 내리지 않는 인심을 쓰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1도수 미만의 금액이 남은 경우 그냥 수화기를 내려버리는 경우도 흔했으므로 한국통신공사의 연간 낙전 수입은 상당했다. 당시 낙전 수입은 최대 연 1천억원(!)을 넘었던 적도 있었다고 하며 때문에 당시 공중전화에 낙전 수입으로 교육용 PC 보급 사업 비용을 충당함을 알리는 홍보 스티커가 붙어 있기도 하였다.

3. 시대적 배경

1989년 당시 대한민국 사회의 PC 보급률은 매우 저조한 상태였다. 1970년대 후반에 일부 관공서에서 컴퓨터를 들여놓기 시작한 이후로 컴퓨터가 조금씩 확산되어 1989년 시점에서 상당수 기업과 공공기관, 학교에서 컴퓨터가 설치되어있었으나, 컴퓨터를 능숙하게 쓸수있는 사람은 소수에 머물렀기 때문에 문서를 여전히 수기로 작성하는 경우가 대다수였으며, 가정용 컴퓨터는 잘 사는 사람들이나 가지던 사치품이었던 시절이었다. 학교에서 집에 컴퓨터 있는 사람 손 들어 보라고 할 정도였다. 지금 같으면 큰일날 일이지만 1980년대 당시에는 가정 환경 조사라고 해서 학교에서 가정의 경제적 형편, 학부모의 학력 및 소득을 일상적으로 조사했다. 집에 자가용이나 PC, 컬러 TV 등이 있는지를 설문지로 조사하거나 간략하게 교사가 학생들에게 손을 들게 해서 조사하는 것은 흔한 풍경이었다.[9] 그나마 이것도 대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었고 지방 소도시나 농촌 지역에서는 컴퓨터가 있는 것 자체가 사치스러웠던 시절이다. 당장 컬러 TV 방송이 시작된 지 10년이 채 안 된 시점[10]이었던 1989년에는 흑백 TV가 상당수 남아 있던 시기였기도 했다. 사실, 이 보급 사업 전까지는 컴퓨터가 생활 필수품이 아니었고 각 가정의 전자 제품 구입은 TV, VTR, 오디오, 냉장고, 전자레인지, 세탁기 등 소득 수준 향상에 따라 새로이 시장이 열린 영상, 음향, 생활 가전에 집중돼 있었다. 그리고 컴퓨터는 1980년에 이미 각 매체로 교육용으로 소개되기는 했지만 이때까지도 사무용이 아닌 이상 아이들 교육용 아니면 '오락용'(=게임용)으로 인식되어서[11], 서울이라고 해도 "집에 컴퓨터 있는 사람 손들어보라"할 때 손드는 게 자랑이지 안 든다고 창피할 일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12]

이보다 6년 전인 1983년, 전두환 정부 시절에 '정보산업의 해'라는 기치를 내걸고 10억원의 예산을 들여 각급 학교에 꼴랑 5천 대의 8비트 컴퓨터를 보급하는 사업을 벌였던 적이 있었는데 이것이 각급 학교에 교육용 컴퓨터를 보급했던 첫 사업이었다. 컴퓨터 대수를 보면 알겠지만 각 학교에 1대씩 보급하기에도 턱없이 모자란 수량인지라 정보화 교육의 첫 테이프를 끊었다는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서울 같은 대도시 학교 중에서 앞서갔던 곳은 재단 예산이나 대개는 학부모 후원회의 지원[13]으로 통크게 10여대 이상의 8비트 컴퓨터를 구입해서 전산실을 구성하고 특별활동 시간에 전산부를 운영해서 재능있는 학생들을 교육하거나 컴퓨터에 관심이 많은 교사가 학교 성적처리에 8비트 컴퓨터와 도트 매트릭스 프린터를 도입한다거나 하는 선구적인 사례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학교현장에서는 본 사업이 개시되기 직전인 1988~89년 시점에도 1983년에 보급받거나 그 이후 추가로 구매한 1~2대 정도의 8비트 컴퓨터를 가끔 한번 꺼내기도 아까운 신주단지(...) 취급하여 잘 모셔두기만 한 경우가 태반이었다.[14] 교사들 중에서 컴퓨터를 다루고 가르칠 역량이 있는 교사가 드물었던 탓도 컸다.다만 국민소득이 급상승하던 1980년대 중반부터는 사용자도 늘어 관련잡지도 잇달아 창간되는 식으로 분위기는 바뀌고 있었고, 각급 학교의 컴퓨터반은 8비트 각 기종 사용자를 대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의 16비트 정책이 결정된 이듬해부터 8비트 컴퓨터 사용자는 배제된다.[15]

이러한 상황에서 16비트 PC 도입은 아무리 미래를 내다본다지만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거기에 많지 않은 수량이라 하더라도 이미 보급되어 있던 8비트 컴퓨터 인프라가 상존하는 상황에서 이 파격적인 결정이 반발에 부딪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3.1. 시장 상황: 8비트 PC

1983년 각급 학교에 8비트 컴퓨터 5개 기종[16]이 시범도입된 이후 자료에 따라 다르지만 최대 약 70만대의 8비트 PC가 학교, 가정과 일부 기업 등에 보급되어 있었다. 다만 1989년 당시 시장은 1984년에 뒤늦게 뛰어든 대우전자 IQ-1000과 그 후속작인 IQ-2000, X-II를 필두로 하는 MSX 호환 기종과 세운상가의 중소기업들이 제조하는 애플 II+ 호환 기종으로 양분되어있다시피 한 상황이었다. 한국상역과 효성그룹, 금성사는 일찌감치 리타이어했고 삼성전자만이 SPC-1000과 후속기인 SPC-1500으로 저 양분된 시장 틈새에서 일부 파이를 차지하고 있던 상황. 그리고 당연하지만 저 기종들 사이엔 모두 소프트웨어 호환성이 없다.[17] 시장이 애플 II와 MSX로 수렴이 된 이유도 그나마 이쪽은 호환 기종들 사이에서는 소프트웨어 호환성이 담보되었기 때문인 탓이 컸다.

학교 쪽은 상황이 약간 달랐는데, 애플 II는 어느정도 규모가 있는 중견기업이었던 삼보의 트라이젬을 제외하면 주로 세운상가제였기 때문에 대량 납품을 해야하는 학교 쪽에서는 보기 어려운 편이었고 대신 삼성전자 SPC-1000과 대우전자의 MSX 규격 컴퓨터인 IQ-1000(DPC-200), 금성 패미콤의 MSX 규격 컴퓨터인 GFC-1080 등이 주로 전산실에 들어왔다. 대신 애플 호환 컴퓨터는 소프트웨어의 풀이 가장 넓었기 때문에 학교 업무 처리 관계상 관련 교사가 개인적으로(혹은 학교의 예산 지원으로) 1~2대 소량 구입하는 사례는 제법 있었다. 대체로 비싸게 주고 도입한 PC로 전산실을 구축한 후에는 PC를 잘 바꾸지 않았기 때문에 삼성전자 SPC-1500이나 대우전자 X-II 같은 1980년대 중후반 이후에 나온 후속기들은 전산실에서는 역시나 보기 어려웠던 편.

정부가 8비트 PC를 교육용으로 밀었지만 온전히 자리잡기에는 여러가지 문제점이 있었는데 무엇보다 한글 표현에 어려움이 있었다는 점이 가장 컸다. 한글을 표현할 수 있긴 했지만 8비트 컴퓨터는 기본적으로 해상도가 허큘리스 그래픽 카드의 1/4 정도, 대략 CGA와 비슷하거나 그보다도 조금 낮은 정도의 해상도로 텍스트를 표현했기 때문에 당시 문자 처리 표준인 한글 40자×25줄을 표현할 수 없었다. 알파벳의 경우에는 8×8픽셀 정도면 1개 문자를 표현할 수 있어 40자×25줄, 일부 고급형 8비트 기종에 있었던 고해상도 모드로 가면 80자×25줄도 처리할 수 있었지만[18] 한글은 적어도 16×16픽셀이 필요했던 터라 적어도 640×400 근처의 해상도가 필요했다. 이 비슷한 해상도로 표시할 수 있는 8비트 컴퓨터 중 한국에서 유통되던 제품은 MSX2(대우전자 IQ-2000, X-II)와 SPC-1500 뿐이었던데다 그나마도 제한적인 조건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실용적이지 못했다. 애플 II는 그나마도 불가능했다.[19][20]

이런 이유로 한국 사무용 시장에서는 일찌감치 IBM PC 호환 기종이 자리잡아 가정용/교육용의 8비트와 사무용의 16비트로 별도 시장이 형성되어있는 상태였다. 아직 개발도상국 시절의 대한민국에서 PC 같은 첨단 제품의 가장 큰 수요는 개인이 아니라 기업이었던 시절이다. 나중에 한글 입출력 속도를 향상시키고 40자×25줄을 구현하게 해주는 한글 카드 같은 게 나오기도 했지만 이미 사무용 시장에 8비트 PC가 들어갈 구멍은 없었고 개인용 시장은 아직 마니아층이 중심이었던 시절이라 빠른 한글처리가 그다지 수요가 많지 않았던 관계로 대충 묻혀 버렸다. 이렇다보니 8비트 PC에서 돌아가는 행정전산망용 워드 프로세서 같은 것도 없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쓸 사람은 있었던지라 소프트웨어로 한글을 에뮬레이션하여 동작하는 원시적인 워드 프로세서도 있었고 1980년대 중반 8비트 컴퓨터를 도입해 성적 전산 처리를 하는 학교도 있기는 했다.

거기에 전술했듯 소프트웨어 호환성이 뒤죽박죽이었던 것도 교육 목적에는 문제가 되었다. 교육을 위해서는 일관적인 커리큘럼이 필요한데 당시의 8비트 컴퓨터들은 기종간 호환성이 없었다. 애초에 일본에서 MSX가 표준 규격으로서 제안되었던 이유도 이런 소프트웨어 호환성이 없는 기업간 독자규격의 난립 때문이었다. 물론 애플 II나 MSX는 그나마 좀 상황이 나아서 다양한 호환 기종이 시장에 나와있고 호환 기종 내에서는 소프트웨어가 호환되고 있었지만 당연히 애플 II와 MSX 사이에는 눈꼽만큼도 호환성이 없었다. 이것은 단순히 소프트웨어 호환 뿐만 아니라 교육에 필요한 BASIC 문법 같은 것도 마찬가지였는데, 예를 들어 화면을 지우고 텍스트 화면의 가로 열 번째 칸, 세로 열 다섯 번째 줄에 'HELLO'로 찍는 간단한 BASIC 코드를 짠다고 했을 때, 애플 II MSX에서 짜는 코드는 다음과 같다.
10 HOME
20 HTAB 10:VTAB 15
30 PRINT "HELLO"
40 END
10 CLS
20 LOCATE 10, 15
30 PRINT "HELLO"
40 END

위쪽은 애플 II Applesoft BASIC의, 아래쪽은 MSX BASIC의 코드이며, 몇 줄을 제외하고 명령어와 형식이 아예 다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교과서를 쓰는 것부터 문제가 생겼다. MSX 기준으로 적혀 있는 교과서를 가지고 애플 II로 수업을 할 때 지도교사가 진도를 나갈 때마다 코드를 일일이 애플 II에 맞게 바꿔서 인쇄물로 나눠줘야 하는 수고를 해야 하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각 기종에 맞는 코드를 교과서에 다 싣는 것도 비효율적이고, 그렇다고 정부 입장에서 특정한 한 기종만을 밀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오픈 아키텍처에 가까워서 특혜시비 걸릴 일 없고 이미 가전 3사가 모두 생산라인을 가지고 있는 IBM PC 호환 기종으로 통일하는 것은 교육 커리큘럼을 만드는 문교부 입장에서는 매우 매력적인 선택지였을 것이다.

여담으로, 1989년 당시 8비트 컴퓨터의 다수가 MSX 호환 기종이었는데, 게임을 하는 용도로 쓰기에 적당했던 터라 부모님 입장에서는 큰 맘먹고 컴퓨터를 장만해줬더니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자식놈은 컴퓨터로 게임만 줄창 하는 상황이 빈발해서 학부모들에게 그다지 인식이 안 좋았다. 당시 사회 초년생의 두세달치 월급은 너끈히 될 컴퓨터 세트를 장만해줄 정도의 집이면 경제적 형편은 물론 교육열도 높은 집이었을 터이며, 그렇다 보니 눈치빠른 학부모들이 8비트 컴퓨터 도입을 강력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컬러도 아닌 단색에, 스프라이트같은 게임 그래픽 기능은 없고, 변변한 사운드 칩셋 없이 PC 스피커만 달려 있는 16비트 컴퓨터는 게임용으로는 최악의 조건이었다. 물론 미래의 컴덕후 어린이들은 그 '교육용 PC'로도 열심히 게임할 방법을 찾았지만.

3.2. 시장 상황: 16비트 PC

상술했듯 1989년 이전의 한국 16비트 PC 시장은 주로 기업이나 기관의 사무행정처리 분야, 대학교 연구실의 과학기술 분야를 대상으로 IBM PC 호환 기종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사무처리에 필요한 한글처리 능력이 뛰어나고 연산속도도 8비트와 비교할 수 없이 빨랐지만 가격은 8비트의 몇 배는 될 정도로 비싸고, 개인용 시장에 어필할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 기능(그래픽, 사운드)은 시궁창인 16비트 PC의 특성상 개인용 시장보다는 사무용, 행정처리용으로 시장이 형성되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한글 코드 통일에 많은 난항을 겪기는 했으나 1989년 당시에는 기존에 많이 쓰이고 있던 상용 조합형 한글과 정부 행정전산망 표준이었던 KS C 5601 완성형 한글로 수렴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여담으로 교육용 PC 사업은 이 한글 코드 전쟁이 완성형 쪽으로 보다 기울게 한 손을 보탰던 사건이었다. 결정적으로 조합형에 사형선고를 내린 것은 역시 윈도우 95의 등장.

삼성전자의 SPC-3000, 금성사의 마이티 시리즈, 삼보 트라이젬 88등 중견~대기업을 중심으로 1980년대 중반부터 IBM PC XT, IBM PC AT 호환 기종이 8비트 PC들과 병행하여 생산되어 기업과 기관에 납품되고 있었고 세운상가의 중소기업 중 일부도 애플 II 호환 기종과 더불어 IBM PC 호환 기종도 만들어 대기업보다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사무용 PC를 필요로 하는 소비자에게 판매하고 있었다. 1986년에는 국가행정전산망이 도입되었는데 당연히 여기에서도 IBM PC 호환 기종을 도입했다.

기업시장이 개인용과 다른 길을 걷게 된 이유는 무엇보다 한글처리 측면에서 IBM PC 호환 기종이 유리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사무행정작업에는 결국 한글 표현 능력이 1차적으로 중요한 기능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한글이 잘 찍혀야 무슨 문서를 작성해도 할테니 당연한 일이다. 실제로 1980년대 북미권에서는 IBM PC보다 해상도가 낮은 CP/M 머신이나 애플 II도 사무용으로 널리 사용되었는데 이는 알파벳은 한글에 비해 낮은 해상도로도 표현에 문제가 없기 때문이었다. 허큘리스 그래픽 카드를 장착한 IBM PC 호환 기종은 높은 해상도 덕에 40자×25줄로 한글을 표시할 수 있었고 글꼴도 8비트에 비해 미려한 명조체 글꼴을 사용할 수 있었다. 도깨비 카드 같은 별도의 한글 카드를 사용하거나 NKP 같은 한글 에뮬레이터를 필요로 했지만 가장 느린 경우라고 해도 8비트보다는 몇 배나 빠르게 한글을 처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무 행정용으로는 압도적인 우위를 가지고 있었다. 너무 비싼 가격 때문에 개인 시장에의 보급은 느렸지만 기업이나 기관은 높은 능률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비용을 치를 준비가 되어있었기 때문에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개인용 PC 선택시에는 중요한 요소인 컬러 그래픽스나 사운드 같은 기능 역시 사무용 시장에서는 무시되어도 좋은 요소였기 때문에 이런 부분이 취약한 IBM PC의 단점은 큰 의미가 없었다. 워드프로세서 같은 사무용 소프트웨어 역시 '글벗 16', '보석글 III' 등 독자적인 한글 워드프로세서가 다수 개발되어 8비트보다 여건이 훨씬 나았으며 무엇보다 사무 능률을 현저하게 향상시키는 스프레드시트 LOTUS 1-2-3가 있어 1989년 교육용 PC 사업 이전에도 사무용 시장에서의 IBM PC 호환 기종의 위치는 매우 확고했다.

물론 애플 II도 비지캘크라는 원조 스프레드시트가 있었고 MSX도 Z80 기반에 MSX-DOS가 MS-DOS의 축소판이라 CP/M용 소프트웨어는 호환이 잘 됐기 때문에 MSX 멀티플랜, 파소칼크 같은 스프레드시트도 있었다. 그러나 한글 표시가 제대로 안 되거나 느린 이들 기기를 가지고 사무 작업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은 한글 처리가 가장 큰 문제였다. 이를 극복하려고 삼보컴퓨터에서 비지캘크를 한글화 했지만 느리고 불편해서 널리 보급되지 못했다. 대신 이런 노력은 16비트 업무용 시장에서 꽃을 피웠다.

이렇게 이미 1980년대 중반부터 제조 기업들이 나름대로의 시장과 함께 생산 기반 시설과 기술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16비트로의 전환은 정부의 결정이 떨어지면 즉각 전환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미 준비는 다 되어있었던 셈. 이런 기반을 바탕으로 당시 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PC 업계에서 교육용 PC는 16비트 IBM 호환 기종으로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의견을 개진했으니 16비트로의 전환은 당연한 결과였다.

게다가 미국에서 처음 발생한 PC 문화가 본바닥인 북미 지역과, 한국, 일본 및 동아시아 몇개국 및 영국 등 극소수의 유럽 국가 빼고는[21] 비교적 늦게 세계적으로 전파되다 보니 대다수의 국가들이 8비트 시대를 건너 뛰고 막바로 IBM PC 호환 기종으로 PC문화를 시작한 탓에 세계적으로 해당 기기의 수요가 많았고, 이때부터 일찌기 체계적으로 IBM PC 호환 기종 관련 부품을 제조, 세계적 수요를 충당하기 시작한 대만의 저가 부품들이 1980년대 중후반부터 한국에도 들어와서 세운상가 등지에 보급되었다. 규모의 경제로 인해 국산보다 가격도 저렴하면서 품질도 좋다 보니 조립 시장에서는 규격화된 대만산 부품들이 급속도로 보급되었고 이는 세운상가에서 소량으로 만들던 8비트 기종보다 오히려 더 가성비가 좋기까지 했다.[22] 이런 탓에 이제는 16비트가 비싼 가격이라는 단점까지 덜어낸 셈이니 더더욱 8비트가 설 자리가 없었다.[23]

여담으로 당시 PC를 생산하던 대기업 중에서 교육용 PC로 16비트를 지정하는데 반대한 기업은 대우전자 하나였다고 한다. 대우전자는 이미 MSX로 8비트 시장의 승자 위치에 있었고 그 때문에 미리 확보해둔 MSX 부품 재고도 상당히 많았기 때문. 그리고 그 부품은 재믹스 슈퍼 V와 코보로... 나머지 업체는 8비트 시장을 이미 손절했거나(금성사) 마지못해 유지하는 수준(삼성전자)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기존 생산 노하우와 인프라도 있고 교육 시장 납품과 그에 따르는 새로운 개인용 PC 시장을 창출할 기회도 있는 16비트 전환을 지지하는 것이 당연한 상황이었다.

4. 결과, 그 이후

16비트로의 전환 과정에서 다소 진통은 있었지만 현재와 달리 그냥 관에서 밀어붙이면 민간은 따를 수밖에 없던 군사 정부 시절의 그림자가 여전히 남아있던 노태우 정부때였던지라 어쨌거나 전환은 성공적이었다. 게다가 당시 PC업계를 주도하던 재벌 대기업의 이익과도 맞물리는 일이었고 길게 보면 시대적 흐름과도 부합하는 결정이었으므로 결정이 일단 내려지고나서의 컴퓨터 생태계 전환은 상당히 빨랐다. 이듬해인 1990년에 이르면 시장의 신규 제품 광고는 대기업 중소기업을 막론하고 '학교에서 가르치는' 16비트 기종인 IBM PC XT 호환 기종이 90% 이상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컴퓨터학습 등의 학생 컴퓨터 잡지들도 8비트 관련 기사는 최소한으로 줄이고 16비트 위주로 기사 비중을 재편하였다.[24] 기득권을 주장했던 가전 3사(라고 하지만 사실상 대우전자) 역시 기존의 8비트를 포기하고 얌전히 16비트로 사업 주력을 변경하여 대우전자 '아이큐 슈퍼'[25], 삼성전자 '알라딘', 금성사 '마이티', '파트너'가 시장에 발매되었고 기존에 IBM PC 호환 기종을 제조하고 있던 삼보컴퓨터를 비롯, 대우통신이나 현대전자 등 대기업들이 경쟁적으로 교육용 PC 시장에 뛰어들었다.

학교 현장에서도 정부 시책에 따라서 PC 교육을 16비트로 온전하게 이행했다. 각급 학교에는 IBM PC XT 호환 기종이 1학급 분 학생 수에 맞추어 최소 2인당 1대씩은 돌아갈 수 있도록 페어 프로그래밍? 구비된 컴퓨터실이 설치되었으며 주당 1회 정도의 컴퓨터 교육시간에는 MS-DOS GW-BASIC을 교육하였다. 전술했듯 학교당 교사용 포함 31대씩을 보급했는데, 1989년 당시 초·중·고등학교의 학급당 인원 수는 대략 50~60명 선이었다. 기존에 특별활동부로 전산반을 두고 있던 학교들도 당연히 16비트로 전환했다. 그 전엔 전산반이래봐야 애플 II나 MSX 몇 대 있는 게 전부라 당연히... 이에 따라 학생들이 신규로 컴퓨터를 구입하는 추세가 8비트 시대에 비해 크게 늘어났으며 당연히 이들은 IBM PC 호환 기종을 구입했다. 그에 따라 가격면에서도 대기업 제품이 기존의 세운상가제 물품 수준으로 떨어져 대기업 제품도 사양을 타협하여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 1개에 램 256KB 정도를 달면 본체 기준으로 50만원대에도 구입할수 있었고 심지어는 30만원대 컴퓨터까지 나오기에 이르러 PC 보급률은 괄목할만큼 늘어났고 교육용 PC 사업은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었다. 사실 가격이 낮아진 것이 긍정적이지만은 않은데 일부 대기업 제품들 중에는 원가 절감을 위해 내부에 이런저런 수작을 부린 게 많았고 그렇다보니 살 땐 대기업 제품을 세운상가제 가격에 살 수 있다고 좋아하며 샀다가 컴퓨터에 대해 잘 알게 된 다음에 자기가 뒤통수를 맞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격이 낮아진 덕에 절대적으로 낮았던 PC 보급률이 크게 높아졌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26]

이렇게 전년인 1989년에 논쟁을 벌인 것 치고는 꽤 깔끔하게 패러다임 시프트를 이뤄냈는데 가정용 전기의 승압(110V→220V) 사업과 마찬가지로 보급률이 높지 않은 만큼 기회비용도 적은 이유로 과감한 선택을 할 수 있었던 사례라고 하겠다. 개구리 뛰기 효과(leapfrogging)[27]의 전형적 사례였다. 게다가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현대 PC 아키텍처 시장 환경을 돌이켜보면 IBM PC 호환 기종 중심으로 컴퓨터 생태계를 재편한 것은 엄청나게 현명한 선택이었다. 물론 여기까지 읽고 사업을 진행하지야 않았겠지만 사업은 제법 성공적이었으며 상당한 파급효과가 있어서 1990년에 한국에 보급된 퍼스널 컴퓨터는 1989년도에 비해 55.7%가 증가한 68만5천대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 보급된 IT 인프라와 교육으로 인해 컴퓨터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인재들이 대학교에 진학하거나 사회에 나갈 무렵이 된 김대중 정부 시절에 대한민국이 IT 강국을 자처하게 될 만큼 성장하는데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는 사업.

그러나 이 사업은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 어디까지나 학교에서 정식으로 컴퓨터 교육을 하기 위해 학교에 교육 인프라를 구축하는 사업이었으므로 한계도 있었다. 이 사업의 여파로 16비트 PC의 가격이 크게 내려가 여유가 있는 중산층 이상의 가정은 미래를 위한 교육 투자 차원에서 PC를 많이 구입하기는 했지만 교육용 PC 사업이 성공적으로 완수되고 가정에 PC 보급률이 그래도 제법 올라갔던 1990년대 중반 즈음에도 PC는 일반인이 구입하기엔 좀 비싸다는 인식이 강했으며, 1995년 통계기준 37.4%에 그치는 수준이었다. # 오늘날처럼 대부분의 가정에 PC가 보급되게 된 것은 다시 10년이 지난 1999년 10월, 김대중 정부가 국민PC 사업을 진행한 이후였다. 그만큼 대한민국의 정보화 과정에는 많은 역경이 있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2001년 4월 20일에 전국 초.중등학교 정보인프라 구축 사업이 완료됨에 따라, 컴퓨터실에 가지 않아도 교실 내에서 컴퓨터로 수업하는 것이 보편화 되었다.

4.1. 8비트 대멸종

우려했던대로 이 사업 시행의 여파로 그때까지 잔존하고 있던 8비트 PC 시장은 순식간에 멸망해 버렸다. 1989년 당시 한국 8비트 컴퓨터 시장은 세운상가제 애플 II+ 호환 기종, 대우전자 IQ-2000/X-II, 삼성전자 SPC-1500의 세 기종이 삼분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애플 II 호환 기종 시장은 급속하게 소멸해 버렸다. 기존에 애플 II 호환 컴퓨터를 제조하던 세운상가, 용산상가 등에 위치했던 소규모 업체들이 거의 모두 16비트 IBM PC 호환기종 생산으로 전환한 것이 그 이유였다. 애플 II나 IBM 호환 기종이나 어차피 대만에서 부품가져다가 한국에서 조립하는 양태는 똑같았고 비슷한 사양(RAM,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 등)으로 제조할 경우 크게 가격 차이가 날 만한 부분이 없기 때문에 전환도 빨랐다. 문제는 그 여파로 기존 애플 호환 컴퓨터 대상 컴퓨터 잡지들이나 소프트웨어 판매점이 모두 소멸되는 바람에 기존 애플 II 사용자들을 멘붕하게 만들었다.[28] 특히나 당시 애플 호환 기종이 거의 모두 II+였는데 1988년에 유일하게 애플 IIe 호환 기종인 'MR-128'을 제조했던 물론 부품은 대만산이다 '미래교역'이라는 업체는 단 1년만에 완전히 새됐다고 할만큼 타격을 입었다.[29]물론 이 업체도 대세에 따라 IBM PC 호환 기종 생산으로 전환했다.

세운상가에서 애플 II+ 호환 컴퓨터가 IBM PC 호환 기종보다 저렴했던 것은 사양 차이 때문인데, 특히 메모리가 차이가 많이 났다. 당시 메모리는 단가가 꽤 비싼 부품이었는데 풀 스펙 기준으로 애플 II+는 64KB, IBM PC XT는 640KB니 여기서만 10배의 차이가 난다. 얼마 있지도 않았던 애플 IIe 호환 컴퓨터인 MR-128을 가져다 대도 128KB로 5배 차이. 예를 들어 1988년 세운상가 가격 기준 RAM 128KB의 애플 IIe 복제품이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 1개를 포함, 모니터 제외 가격이 40만원대 중반인데 비해 IBM XT 호환 기종을 256KB RAM,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 1개로 구성하면 50만원대 초반이었다. 세운상가에서 애플 II+를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 없이 본체만 구입하면 10만원대 중반까지 구입할 수 있었고 IBM PC XT 호환 기종에 가장 일반적인 옵션인 640KB RAM+ 허큘리스 그래픽 카드+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 2개를 달았을 경우 모니터를 제외하고 70만원대에 이르렀기 때문에 차이가 컸지만 그만큼 사양 차이도 컸기 때문에 가격이 불합리한 것은 아니었다.[30] 물론 본체 가격만 100만원이 훌쩍 넘어가던 삼성전자이나 금성사 같은 대기업 제품과 비교하면 가격 차이는 훨씬 크게 벌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교육용 PC 사업으로 그 비쌌던 대기업제 16비트 PC도 모니터 빼고 50만원 근처의 가시권 안에 들어오게 되었으니 생산자 입장에서나 소비자 입장에서나 포지션이 상당 부분 겹치는 애플 II+ 호환 컴퓨터가 IBM PC 호환 기종에 밀리기 시작했다.

삼성전자 역시 SPC-1500의 생산을 출시 약 2년여만에 접고 ' 삼성 알라딘' 브랜드를 출시하며 주력을 IBM PC 호환 기종으로 선회하였다. 교육용 PC로의 '브랜드'를 출시했다는 것이며 기존에도 삼성전자는 업무용 시장을 타겟으로 IBM PC 호환 기종인 SPC-3000 시리즈를 오래 전부터 생산하고 있었다. '알라딘' 브랜드로 나온 IBM PC XT 호환 기종도 내부적으로는 SPC-3100이라는 모델명을 가지고 있었다. 3대 기종 중에 가장 세가 약했던데다 일본의 샤프 X1 turbo 기반 컴퓨터라 애플 II나 MSX처럼 해외에서 소프트웨어를 직수입해서 쓸 수 없었던 SPC-1500은 제조사인 삼성전자의 외면과 동시에 순식간에 멸망의 길을 걸었다. 샤프 X1의 100%는 아니지만 90% 이상 클론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 소프트웨어도 일부 자체 개발한 것들을 제외하면 게임의 경우는 샤프 X1 소프트웨어를 약간 손봐서 내놓았던 것이 대부분.

그나마 8비트 중에서 오래 버틴 게 대우전자의 IQ-2000/X-II, 즉 MSX2 였는데, 다른 이유보다도 게임 때문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애플 II+와 달리 IBM PC와는 포지션이 겹치지 않는 영역이 꽤 컸던 것이 생존의 비결. 당시 한국에 보급된 IBM PC 호환 기종에 설치된 그래픽 카드는 허큘리스가 대부분이었고 모니터 역시 단색이었던데 반해 MSX, 특히 MSX2는 기본적으로 EGA보다는 확실히 낫고 VGA와 비교해도 크게 꿀릴 것이 없는 그래픽을 제공했다. 1989년 당시는 이미 EGA VGA가 개발된 시점이었지만 비싼 전용 컬러 모니터와 그래픽 카드 가격 때문에 보급이 거의 되지 않았다. 다만 일부 대기업 기종들 중에는 한글 표시를 위해 CGA를 개조한 변종 CGA를 내장한 경우가 있었다. 물론 640×400 해상도를 출력해야 했기 때문에 모니터는 단색이라 허큘리스보다 나을 건 없었지만 이런 기기에서는 SIMCGA가 필요없었다는 장점은 있었다. 스프라이트 기능까지 더하면 확실히 당시의 PC보다는 MSX 쪽이 게임 성능이 압도적으로 나았다. 사운드 역시 AdLib 같은 확장 장비가 없으면 귀가 따가워 듣기 어려운 PC 스피커 밖에 안달린 PC에 비하면 기본적으로 3채널 사운드를 제공하는 PSG가 달려있고 FMPAC 같은 확장 사운드까지 동원할 수 있는 MSX 쪽의 장점은 아직 남아있었다고 볼 수 있었다. 소프트웨어 역시 1992년 무렵까지는 비교적 원활하게 공급되었다. 그러나 이 역시 2~3년 정도가 지나면서 일반적인 PC 환경이 AT~386급으로 업그레이드 되고 SVGA급 그래픽카드와 컬러모니터, 사운드 블라스터, 옥소리 등의 사운드카드가 일반적인 옵션으로 들어가며 게이밍 환경이 급격히 개선됐고 한편으로는 메가드라이브, 슈퍼패미컴 등의 16비트 게임 콘솔이 나오며 게임 성능의 우세함을 잃은데다 일본 현지에서도 그 무렵에는 슬슬 끝물을 타고 있어 1993년경부터는 소프트웨어 공급도 크게 줄어들었기 때문에 MSX 역시 자연스럽게 도태됐다.

교육용 PC 사업이 한국 8비트 시장을 순식간에 전멸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해외 선진국 컴퓨터 환경 추세가 16비트로 이동 중이었고, 이는 해당 기종들의 원산지인 미국,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애플 II는 1986년에 애플 IIGS를 출시하였으나 반응이 신통치 않았고 애플도 주력을 매킨토시로 옮겨간지 오래였다. MSX 역시 1988년에 새로운 규격인 MSX2+를 공개했으나 MSX2 시절에 수많았던 참여업체들이 다 빠져나가고 산요, 소니, 파나소닉의 3사만 남은 상황이었다. 참여업체 중 가장 큰 빅 3가 남아있었으니만큼 당장 망했다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확실히 쇠퇴를 예고하는 조종임에는 틀림없었고 1995년에 마지막 남은 MSX 제조업체였던 파나소닉이 생산중단을 선언하며 12년만에 MSX 규격의 종지부를 찍었다. 다만 이르건 늦건 다가왔을 패러다임 시프트가 정부 사업으로 조금 더 앞당겨진건 사실이다.

5. 기타

6. 관련 문서


[1] 현재 대한민국 교육부의 전신 [2] Apple II PLUS 호환기종 [3] 본문에서 16비트 컴퓨터라고 하면 별다른 언급이 없는 이상 IBM PC XT 호환 기종을 가리킨다. [4] 현재 대한민국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전신 [5] 현재 KT의 전신. 당시에는 공기업이었으며 1990년 한국전기통신공사의 약칭인 '한국통신'으로 개명했다가 1997년에 민영화를 위해 정부투자기관에서 정부출자기관으로 전환, 2001년에 국가 지분을 매각하면서 2002년에 완전 민영화되었다. [6] 당시에는 마우스는 일반적인 입력 장치가 아니었고 키보드만이 기본 입력 장치로 쓰였다. GUI가 일반화되기 이전이기 때문. 그래픽 디자인이나 특수한 업무를 하는 사람들이나 사용하는 장치였고 그에 따라 가격도 제법 나가는 장치였다. 마우스는 1990년대 중반 멀티미디어 PC 및 윈도우 95가 보급되면서 일반적인 입력장치로 자리잡았다. [7] 대부분의 당시 자료(잡지, 신문 기사 등)에는 교사용은 IBM PC AT 호환 기종을 선정한 것으로 되어있으나 문교부에 제출된 사양은 8088이었다고 한다. 이 부분은 추가적으로 자료 조사가 필요한 부분. [8] 물론 현재도 자급제로 구입하면 PC 가격과 비슷한 금액이지만 보조금으로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2020년대의 생활 수준과 물가를 고려하면 PC와 휴대전화 모두 1980년대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싸졌다. [9] 요즘으로 치자면, 집에 80인치 OLED TV 있냐고 손 들어보라는 정도이다. [10] 대한민국의 첫 지상파 TV 컬러 방송 송출은 1980년 12월 1일이다. [11] 지금 컴퓨터의 큰 용도가 통신, 게임, 온라인화된 공공 인프라 이용인데, 그 당시에는 웹 브라우저도, 전자정부도, 인터넷 뱅킹도, HTS도 없었다. TCP/IP 인터넷 인프라와 WWW가 전세계적으로 1990년대에 상용화된 것이다. 포털을 대신한 PC통신 서비스는 있었지만 문자 게시판 수준인 데다 1200~9600bps 전화 접속 모뎀은 옵션 장비로 비쌌고 전화 회선은 통신 중에는 통화를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청소년이 사용하는 컴퓨터는 대부분 게임용으로 소비되었다. [12] 소형차(지금 기준으로는 경차 이하 수준)가 5백만원할 때 8비트 컴퓨터 본체와 단색 모니터는 가장 값싼 세운상가제 조립인 애플이 50만원, 1990년대이후같이 컬러모니터에 마우스와 프린터(복합기는 없었고 스캐너값은 또 수십만원+)를 포함한 기본 세트라면 8비트라도 백만원 이상, 16비트면 2백만원하던 시절이었으니까. '성능이 괜찮으면서 지금 잘 팔리는 컴퓨터 세트 = 2백만원'이란 공식은 1990년대까지 이어진다. [13] 지금도 이런 경우가 드물지 않은지 가끔 보도에 나오지만 그때는 더 해서, 공립 학교를 지어 개교하면 있는 것은 건물과 책걸상, 칠판, 교무실용 집기 정도였다. 신발장, 악기부터 교실용 문구, 추가 냉난방 대책에서 환경 미화용 시계와 화분 하나까지 나머지는 전부 새로 구성되는 학부모 후원회에서 갹출해 사보내는 게 관행이었고 그걸 원만하게 끌어내는 게 교장의 일 중 하나였다. 그래서 가장 부잣집 학부형에게 학부모 회장(육성회장)을 맡겼다. [14] 사립학교재단에 대학교까지 같이 있었던 중,고교에서는 해당 대학이 썼던 8비트 컴퓨터 수대~수십대를 기증받는 경우도 있긴 했다. 대학에서는 이미 1980년대 중반부터 16비트 전환이 이루어졌기 때문. [15] 무자르듯이 싹둑 잘려서 아예 입부를 안 받아주기도 했다. [16] 삼성전자 SPC-1000, 금성사 FC-100, 삼보전자엔지니어링 트라이젬 30, 동양나이론 하이콤8, 한국상역 스포트라이트 1 [17] 심지어 동일한 회사에서 만들었고 CPU까지 같은 PC끼리도 그랬다. 이는 당시 일본도 마찬가지. [18] 이것이 CP/M 컴퓨터들과 애플 II가 영어권에서 1990년대까지도 업무용으로 사용된 이유 중 하나이다. [19] 소프트웨어적으로 구현한 게 있었으나 너무 느려서 사용하기 어려울 정도다. 이를 응용, 한글 VISICALC라는 물건도 삼보컴퓨터에서 만들었지만 같은 이유로 인기가 없었다. [20] 애플은 바이덱스 카드가 있었고 MSX2는 정내권씨의 고속 한글 입출력 소프트웨어(VDP인 V9938의 하드웨어 기능을 사용해 IBM PC XT의 문자 모드 한글과 비슷한 성능을 구현했다)가 나왔지만, 출시가 늦었거나 납품회사의 정식 사양이 아니었다. 애초에 CPU 자체의 성능부터 8비트 1~4MHz/ 최대 64kB 주메모리에서 더 나아질 전망이 없던 8비트와 해마다 쑥쑥 발전해가는 16비트 8~16MHz/ 최대 640kB 주메모리라는 차이는 넘사벽이어서 8비트는 전망이 없었다. [21] 유럽 국가들도 동아시아보다 PC 문화의 전파가 늦은 나라들이 많다. [22] 이 무렵 마이크로소프트웨어 등 한국 PC잡지에는 대만산 부품의 범람으로 한국 PC 부품 산업이 무너진다라는 우려(?) 섞인 기사와, 이른바 국산 부품을 썼다는 애국심 마케팅을 하는 조립 PC 업체 광고도 있었다. [23] 절대 가격은 그래도 8비트보다 비쌌지만 사양이 넘사벽이다. 64K와 640K의 차이이니. 게다가 640KB 대신 256KB 정도로 줄이고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도 1개만 넣은 보급형 기종들은 8비트 애플 II 호환 기종을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와 같이 구매하는 가격에 비해 큰 차이도 없었다. [24] 마이크로소프트웨어 등의 잡지는 이미 1988년부터 8비트 기사는 그냥 업계동향 뉴스 등만 싣지 프로그램이나 게임 포함 소프트웨어 패키지 분석기사는 싣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1988년 중순쯤 되면 특정 기종 혹은 특정 컴퓨터기업에서 내는 비매품식 잡지 외에 종합 컴퓨터 잡지 중에서 8비트를 다루는 곳은 컴퓨터학습 하나였고, 타 잡지가 8비트를 포기하는 바람에 8비트 프로그래밍 필자들은 모두 컴퓨터학습으로 몰렸다. MSX 파워업 테크닉이 이때 나왔다. [25] 원래 대우전자가 16비트 브랜드로 사용하던 '코로나 PC'(CPC-4000)를 리브랜딩했다. 기존 MSX 기종인 'IQ-1000', 'IQ-2000'의 브랜드를 계승하였다. 당대에 TV 광고에 '속도가 10MHz나 되어 숙제도 빨리 끝낼 수 있어요'라는 멘트를 내보냈다가 당시의 컴덕들에게 숙제랑 컴퓨터가 무슨 상관이 있냐고 빈축을 샀던 모델이다(...). 요즘이야 인터넷이 있으니 상관이 매우 많지만 당시엔 정말 상관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컴퓨터를 사주시는 부모님들에게는 이게 먹혔는지 삼성전자 알라딘도 나중에 지면 광고에다 똑같은 문구를 집어넣는다(...). [26] 여기에 질세라 세운상가제 PC들도 가격을 더 낮추게 되었고, 이는 급격한 16비트로의 전환의 한 축이 된다. [27] 산업 발전 과정에서 후발 주자가 선발 주자보다 최신 기술을 먼저 받아들이는 현상을 말한다. 간단한 예로 몽골 휴대전화 보급이나 중국 핀테크 보급을 들 수 있다. [28] 어떤 정책의 변화 등이 일어날 때면 준비과정 등의 이유 때문에 경과조치기간이라는 게 있기 마련이고 당연 애플 II 사용자들도 이런 생각을 했지만, 그냥 일시에 소멸했다. 만일 애플 II가 한국에서 제조, 생산하는 물건이였다면 제조설비의 감가상각이나 부품재고의 소진 등의 이유로 얼마간은 더 생산하면서 서서히 점유율이 떨어져가는 식으로 사라졌겠지만 그게 아니다보니 그냥 소멸. [29] 애플 IIe는 원산지인 미국에서는 1983년에 출시해 단종 전까지 애플 II의 주류 기종이었으나 이상하게 한국에서는 1979년에 출시된 오래된 모델인 애플 II+ 호환 컴퓨터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주류였고 애플 IIe 호환 컴퓨터는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가 끝물에 저 MR-128이 들어온 것이 전부. 애플 IIc 역시 비슷한 시기에 홍콩산 애플 IIc 호환 컴퓨터인 LASER 128이 잠깐 들어온 것이 전부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는데 기존 애플 II+는 특별한 칩셋(커스텀 IC) 필요 없이 74시리즈 등 표준화된 IC를 사용하여 만들 수 있었다. 6502 CPU 및 관련칩들도 다 시중에 판매하는 물건이였다. 따라서 이것 가지고 기판 만들어 생산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IIe는 몇개의 커스텀 칩이 들어가는데 당연 기기의 수요가 어느 이상 되지 않으면 생산하기 어렵고, 또 칩만을 따로 파는 경우도 드물었다. 한국 대기업들은 일본제 PC를 개조한 자체개발 PC나 MSX PC 등 일본 기종을 모델로 해서 판매하고 있었고 애플II 호환 기종의 제조자는 거의 전부 중소기업수준도 아닌 가내수공업 수준이라 이런 물건을 새로 만들어낼 여력도 없었으며, 1980년대 중반만 해도 1인당 국민소득이 한국의 1.5배였던 대만에서 만든 메인보드를 직수입하기에는 당시 분위기상 안맞았다. 당시 한국 분위기는 8비트 중에서 애플II 호환 기종은 가내수공업 제품이고 성능도 별로지만 싼 맛에 사는것, PC에 돈을 들일수 있으면 그래픽이 상대적으로 화려하고 대기업 제품이라 AS 등에서 믿을만한 MSX나 SPC(삼성전자) 제품을 샀다. 이렇게 양분되어 있다보니 애플 II 계통은 '가격'에 민감, 굳이 높은 비용을 들이려 하지도 않았다. 대만산 보드의 가격이 많이 내려가서 미래교역에서 이걸 사와 IIe를 팔았던 시기에도 IIe는 II+의 2배나 되는 가격이였다. (여담으로 이무렵(87년 말)부터 8비트 16비트 할 것 없이 대만산 보드의 가격이 많이 내려가 그전만 해도 부품만 도입해서 완전 한국생산했었던 IBM PC 호환 기종은 대기업제품을 제외하고 중소기업이나 전자상가 제품들은 모두 대만산 메인보드로 대체되었다. 당시 컴퓨터 잡지를 보면 대만산으로 점령되어 문제, 국산품을 애용하자 같은 주장을 하는 컬럼이나, 마지막 남은 한국 업체가 애국 마케팅 광고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30] 애플 II 같은 8비트 PC는 최소 비용으로 돌리려면 성능의 하락이나 사용의 불편함을 감안해야 하지만 모니터도 집의 TV로 대체, 보조 기억 장치도 카세트테이프로 대체하거나, 심지어 그조차도 없이 BASIC 언어로 간단한 프로그래밍만 하고 바로 삭제하는 식으로 해서 본체 1대만으로 최소 '돌릴 수'는 있다. 하지만 IBM PC XT 호환 기종은 TV 출력 기능이 없어 단색 모니터라도 구입해야 했고, 카세트테이프도 없어 보조 기억 장치로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 한 개 정도는 반드시 장착해야 하며, ROM BASIC 인터프리터 같은 것도 없다. 다시 말해 컴퓨터답게 쓰려면 비용 차이가 크지 않지만 화면에 ' Hello, world!'나 출력하는 수준의 비용 차이가 컸다는 뜻이다. [31] 실제로 재미나는 재믹스 시장을 타겟으로 1992년까지 MSX 게임을 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