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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2 23:18:17

과학과 종교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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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과학과 종교는 충돌한다.3. 과학과 종교는 무관하다.4. 과학과 종교는 서로 보완적이다.5. 그 밖의 의견들6. 기타7.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다룬 다큐8. 사회과학과 종교의 관계9. 관련 문서10.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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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자가 충돌하는 주된 쟁점들은 고전적인 창조 대(對) 진화, 영혼 뇌 과학, 인간 복제와 같은 생명 공학 관련 주제 등이 있다. 이를 다루는 분야는 과학 철학· 과학 사학· 인류학· 종교학· 사회학 등이며, 케임브리지 패러데이 과학 종교 연구소 등이 유명하다.[1] 템플턴 재단 같은 곳에서도 이 주제를 다루긴 하지만 여긴 애초부터 '과학과 종교는 충돌하지 않는다'로 미리 결론부터 내려놓은 상태이다.

과학과 종교의 충돌은 다윈의 진화론이 나타나던 시기인 19세기부터 본격적으로 다뤄졌다. 당시 과학 문화의 메카였던 영국에서도 과학 논설의 주류는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다룬 논설들이었다. 참고로 초반부에는 과학과 기독교의 유화를 강조하던 과학 논설들이 19세기 후반부로 갈수록 단순한 과학의 소개에 주력하는 쪽으로 변했다는 사실은 꽤 흥미롭다.[2][3]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접근하는 방식에 관한 대표적인 분류 체계를 마련한 인물 중 하나는 과학과 종교 연구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이언 바버(Ian Barbour)이다. 바버가 1988년에 처음 발표한 '과학과 종교의 관계 설명 방식' 유형론은 지금까지 이 분야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분류 체계이다. 본래는 갈등/독립/대화/통합의 4가지로 분류되나 여기서는 대화와 통합을 하나로 묶어서 설명한다.

다만 실제로 각각의 견해를 분석해 보면 위와 같은 구분을 깔끔하게 적용할 수 없을 때가 많음에 유의해야 한다. 여기 나온 입장들을 병용하거나 절충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대표적 예시로 가톨릭의 경우도 그 입장을 어느 한쪽으로 명확하게 구분짓기 힘들다. 예를 들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경우 진화론을 인정했지만 우주의 기원은 하느님의 역할이므로 학자들이 탐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적이 있으며,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인간의 진화는 진화론으로 설명하지 못하며, 인간과 유인원 사이에 영혼이 들어가서 인간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2. 과학과 종교는 충돌한다.

갈등 모델/이론 (conflict model/theory)
지적인 정직성을 견지하다 보면 종교는 더 이상 인류에게 필요 없는 (meme) 같아 보입니다. 유효 기간이 지나 버린 밈인데도 사람들이 거기에 뭐가 더 있을 줄 알고 계속 그 주위를 맴도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그렇다면 종교는 과학에 의해 대체되거나 아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하는 유물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장대익, 『종교 전쟁』, 53쪽
신앙은 천연두 바이러스에 비견할 만하지만 그보다 더 근절하기 어려운, 세상의 큰 해악 중 하나이다.
리처드 도킨스, 미국 인문주의 협회에서의 연설 中[4]

과학과 종교는 태생적으로 서로 충돌할 수밖에는 없다는 관점. 둘 중 한쪽이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고 보는 적극적인 입장과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한쪽이 도태될 수밖에 없다고 보는 소극적인 입장이 존재한다. 쉽게 말해 "과학이 발전한 21세기 현대 사회에 종교는 박멸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적극적인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과학이 발전하면 언젠가는 종교가 지금의 연금술이나 점성술처럼 사라지거나 매우 미미한 수준으로 쇠락할 것이다"고 보는 소극적인 입장도 이쪽에 포함된다는 이야기. 무신론자 샘 해리스 정도가 적극적 입장, 서울대학교 장대익 교수가 소극적 입장으로 거론될 만하다. 위의 문구는 과학자의 어록만 인용했지만 이 모델은 반종교적인 과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생물학적 진화라는 개념에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는 극단적인 반지성주의 광신도들과 극단적인 반종교주의 무신론자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당연히 근본주의 종교인들 중에도 이런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꽤 많다. 지금도 중동이나 아프리카 혹은 그 외 국가들의 소규모 공동체 같은 곳을 살펴보면 과학을 악마의 지혜나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신성 모독적인 행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창조과학회로 대표되는 창조설자들을 떠올리기 쉬운데, 사실 이들은 진화론이 비과학적이라고 까면서 과학이 창조를 지지한다고 주장하는지라 이쪽 입장이라기보다는 아래에 나오는 보완 모형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역사학계와 철학계에도 한때 휘몰아쳤던 주장이기도 하다. 이 강력한 모델은 19세기 후반에 출판된 영향력 있는 저서, 드레이퍼의 『종교와 과학 간 갈등의 역사』와 화이트의 『과학과 기독교 신학 간 전쟁의 역사』에 잘 드러나 있다. 실제로 화이트나 드레이퍼 같은 학자들은 서구 역사의 발전을 과학과 종교의 대립 관계로 풀어낸 인물들로서, 이들은 "종교는 인류 역사의 발전을 저해하고 탄압해 왔다"는 논증이 본격적으로 자리 잡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연구 자료들에도 많은 문제가 있었고, 매우 복잡한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지나치게 단순하게만 보았다든가, 그들이 말했던 이성에 의한 밝은 미래상이 세계 대전 등을 거치면서 유명무실해진 점 등으로 인해 이들의 모델은 지금에 이르러서는 학계의 주류에서 멀어진 상태이다. 지금은 보다 온건한 관계를 말하는 학자들이 많은 편이며 충돌을 이야기한다 해도 단순하게 한두 마디로 정의하기보다는 보다 유연하고 복잡한 관계를 이야기한다고 보면 된다. 또한 계몽주의자들 중에도 이미 종교의 무용성을 주장했던 경우가 있었다.

3. 과학과 종교는 무관하다.

독립 모델/이론 (independence model/theory)
신화는 과학과는 전연 무관한 인간의 심리적이거나 영적인 본성의 필요를 충족시킨다. 신화를 과학으로 바꾸거나, 과학을 신화로 바꾸는 것은 신화에 대한 모욕이며, 종교에 대한 모욕이며, 과학에 대한 모욕이다. 창조론자들은... ...창조와 재창조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가졌으면서도 그것을 망쳐 버렸다.
마이클 셔머,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 243쪽
종교와 과학은 서로 다르고 배타적인 인간 사고 영역이다. 이 둘을 동일선상에 놓을 경우 과학 이론과 종교 신앙 모두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미국 국립 과학원, 1981년 정책 선언문 中

몇 차례 논쟁을 겪은 많은 이들은 '전쟁' 또는 '갈등' 모델을 불신하게 되었으며 일단 이것은 역사적으로도 의심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소위 '갈등론'이 과학이나 종교에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높아졌다. 그리하여 두 분야를 완전히 상호 독립적인 것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과학과 종교는 저마다의 규칙과 언어를 지닌,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학문 분야 혹은 실재의 영역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과학은 종교적 신앙에 관해 할 말이 별로 없고, 종교 역시 과학 연구에 관해 할 말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과학과 종교는 싸울 이유도 없고 서로 영역이 겹치지 않는다고 본다. 이런 입장은 방법론적 자연주의와도 약간 관계가 있다.[5]

쉽게 설명을 하기 위해 비유를 들자면, 화가와 시인이 각자의 규칙을 가지고 각자의 방식으로 예술을 표현하듯이 과학자와 성직자도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의 언어로 진리를 탐구한다는 이야기이다. 화가와 시인이 모두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듯이 과학자와 성직자도 진리를 추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서로의 영역이 만나는 접점에서 대화를 해볼 수도 있고 때로는 서로에 대한 무지로 인해 다툼이 일어날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전혀 다른 분야라는 것이다.

과학자들 중에는 이 독립 모델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다.[6] 이런 견해를 가진 몇 사람 예를 들자면 스티븐 제이 굴드와 마시모 필리우치[7]를 들 수 있다. 물론 이런 입장을 취한다고 해서 종교에 호의적이라는 보장은 없다. 단지 과학적 입장 혹은 종교적 입장에서 종교 또는 과학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입장을 취하는 경우 종교에 대한 입장도 가지가지이다.[8] 또한 종교적 문제에 무관심한 사람들도 대체로 이쪽의 스탠스를 취하는 편이다.

굴드는 겹치지 않은 각자만의 교도권이라는 의미의 NOMA(non-overlapping magisteria)를 제안했다. 과학이 설명하는 영역은 종교가 끼어들 자리가 없고, 종교가 설명하는 영역은 과학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 모델의 바탕에는 과학과 종교가 서로 다른 방법론 및 해석 영역을 갖고 있음을 상호 존중하고 인정한다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나는 이 교도권들 간에 상호 존중 및 우호의 협약, 즉 NOMA 해법이 있음을 진심으로 믿는다. NOMA는 그저 외교적인 태도가 아니라 윤리적이고 지성적인 토대 위에서 원칙에 입각한 입장이다. 또한 NOMA는 양쪽에 똑같이 적용된다. 더 이상 종교가 과학의 교도권에서 사실적 결론의 본질을 제대로 밝힐 수 없다면, 과학자 역시 세상의 경험적 본질에 관한 우월한 지식을 바탕으로 도덕적 진실에 관한 더 높은 혜안을 지녔다고 주장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상호 겸손한 태도는 이토록 다양한 열망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현실적으로 중요한 결과를 가져온다.

많은 과학자들과 신학자들이 NOMA의 기본적인 견해, 즉 과학과 종교가 분리된 영역을 가진다는 점에서는 동의한다. 하지만 NOMA의 세부적인 내용에서,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비판 의견도 만만치 않다. 결국 종교는 과학이 아직 밝혀내지 못한 틈새에 기생할 뿐이며 그 틈새들은 과학의 발전으로 점점 메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제리 코인의 경우 굴드가 "과학 대 종교"의 구도에 너무 집중하여 다른 학문(윤리학이나 철학 등)을 소홀히 다루어서 사실상 "과학 대 과학이 아닌 것"의 구조가 되었다고 비판했다. 한편 필리우치는 '이것은 과학이 아니다'에서 NOMA를 까면서 굴드가 둘의 관계를 너무 순진하게 봤다고 평가했다. 필리우치는 종교는 형이상학의 한 분야이고 과학은 형이하학의 한 분야이기 때문에 둘이 충돌할 여지 자체가 없다고 말한다. 과학이 방법론적 자연주의와 뗄래야 뗄 수 없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할 때 굴드의 견해와 차이가 생기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는 굴드의 NOMA에서는 종교가 창조 과학을 주장해도 종교가 NOMA를 들먹이면 마땅히 대응하기가 어렵다. 반면에 피글라우치의 견해에서는 종교가 형이상학의 한 부분으로 묶여있기 때문에 종교가 창조 과학 등을 주장할 여지가 없어진다.[9] 물론 필리우치가 종교가 과학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한 건 아니고, 형이상학-형이하학은 단순한 영역의 차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위에 언급한 갈등론자인 도킨스는 한술 더 떠서 굴드가 좋게 말해서 순진한, 적나라하게 말하면 어리석은 행동을 했다고 주장한다. 굴드의 NOMA는 결국 종교에게 비판과 반박을 피할 피난처이자 방패막이를 제공했을 뿐이며, 종교의 과학에 대한 간섭은 여전히 지속될 것이라는 게 도킨스의 주장이다.

미국의 신학자 랭던 길키는 이 굴드의 견해를 약간 다르게 표현한다. 그는 1959년의 저서 『천지의 창조주』에서 신학과 자연 과학은 실재에 접근하는, 서로 독립적이고 다른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자연 과학에서 '어떻게'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종교는 '왜'라고 묻는다. 전자가 2차적 원인(즉, 자연 영역 내의 상호 작용)을 다루는 반면, 후자는 1차적 원인(즉, 자연의 궁극적 기원과 목적)을 다룬다고 주장했다.

독립 모델은 많은 과학자들과 신학자들에게서 환영받는다. 각자의 고유 영역에서, 다른 교도권(영역)으로부터 자신의 교도권이 침해당하지 않으면서 원하는 바를 자유롭게 얻을 수 있고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종교가 없는 사람들이나 유신론 중에 이신론(理神論)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여기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다.

4. 과학과 종교는 서로 보완적이다.

통합 모델/이론 (Integration model/Theory)[10]
...면목 없는 패퇴가 계속 반복된 결과 근대의 종교 사상가들의 지적 권위는 거의 완전히 손상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낡은 과학 이론이 폐기되었다고 해서 과학이 패배했다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이 손상을 종교의 패퇴가 아니라 신학적 통찰의 진일보로 받아들여야만 할 것이다. 종교도 근대 과학과 같은 정신으로 변화에 대처할 것이 요구되며, 영원한 종교의 근본 원리를 표현하는 방식은 계속 발전되어야만 할 것이다.
성영곤의 <과학 종교 윤리의 대화> 中 <서양 과학의 역사와 기독교> 178쪽
종교가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요, 과학이 없는 종교는 맹인이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과학과 종교가 서로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같이 발전해야 한다는 관점이다. 보다 세부적으로는, 양쪽이 모두 서로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고 보는 관점, 한쪽이 다른 쪽에 일방적으로 도움을 준다는 관점,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양쪽을 병행하는 쪽이 더 유리하다고 보는 관점 등등 입장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다. 이 관점을 가지고 있는 종교인들은 보통 자연에 대한 탐구가 종교적 깨달음의 원천이 되며, 종교적 믿음이 과학적 발견에 의미를 더해주고, 서로가 서로에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고 본다.

이 모델에서는 참여자의 서로 다른 정체성을 존중하면서 공동의 전제와 가정을 탐구한다. 바버는 가능한 접근법 중에서 이 모델을 가장 만족스러운 것으로 여긴다. 현대에는 종교인들 중 이쪽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꽤 많아졌다. 또한 종교를 가진 과학자들과 신학자들 중 일부 그리고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 중에도 일부 존재한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경우 해당 항목에도 있지만 1941년 출판한 책에 "신앙심 없는 과학은 불완전하며 과학 없는 신앙심은 맹목적이다" 라는 글을 남겼다. 미국의 과학자들과 가톨릭 주교들로 구성된 <대화 모임>에서도 "과학과 종교는 최근 부각되는 생명 공학과 같은 복잡한 주제에 더 통찰력 있게 접근하도록 상호 보완할 수 있다"고 단언한다.

비종교인들 중에 종교의 사회적 책무나 개인에게 주는 소속감 및 위안감 등에서 종교의 역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오해하기 쉬운 것이 이런 입장은 "종교의 고유 영역"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분리론과 더 가깝다. 사실 이 분류 자체가 그렇게 무 자르듯 깔끔하게 나뉘지 않지만 어쨌든 보완 이론의 입장은 "종교가 어쨌든 필요하다" 가 아니라 "과학에게 종교가 and/or 종교에게 과학이 필요하거나 혹은 도움을 줄 수 있으며, 상호 간 교류가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역사적인 예로는 초창기의 과학 혁명 당시의 고전 과학자들이 여기에 속한다. 대표적인 사례로 당시 공인 예수쟁이 소리를 듣던 마이클 패러데이 같은 경우. 이 당시의 과학자들은 실제로 "하느님의 창조물인 자연을 연구하지 않는 것은 게으름의 소치이다"고 여겼으며, 자연을 '또 다른 성경'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논리 정연하고 확실한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명료한 세계라는 이들의 주장은 최소한, 비록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격이라 할지라도, 초창기 과학의 근간이 되는 기본 법칙들과 원리들을 밝혀내는 데에는 큰 도움을 주었다. 반대로 그레고어 멘델 같은 성직자도 당대의 과학자들에게서 과학을 배우기도 했다. 배워둔 과학은 나중에 과학 교사로 봉사 활동 할 때 썼는데, 멘델의 경우 도플러 효과를 제안한 물리학자인 크리스티안 도플러에게서 물리학을 배웠다.

더 파고들자면 서양의 과학사는 철학, 종교와 엄밀히 구분되지 않았었는데, 당시 과학의 목적이 종교와 동일한 '진리'를 찾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당대의 수도자는 연구도 하며 글을 읽을 줄 알던 식자층이었다. 그러나 이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 철학부터 지속된 절대적 '진리'라는 개념은 과학과 종교( 기독교)에서도 오염된 개념이라는 지적이 나왔고, 절대적 진리의 대한 반박이 등장하면서 과학혁명을 기점으로 과학과 종교의 분리가 일어나기 시작했었다.

좀 의외일지 모르지만 창조 과학자들 중 일부도 여기에 속하는데, 특히 창조과학회에서는 현재의 과학적 지식들로 하느님의 존재를 어느 정도 증명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다만 창조과학회가 전혀 과학적인 집단이 아니라고 까이는 이유는 여기서 사용되는 과학적 방법론이 심각하게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결론을 미리 내려놓고 증거를 골라내거나, 대놓고 증거를 조작하거나, 다른 연구 결과에서 전체 맥락을 무시한 채 일부 내용만 뽑아서 호도하는 등 여러 면에서 과학 단체라고 보기엔 무리가 많다. 즉, 여러모로 전형적인 유사 과학의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종교계에서는 대부분 이런 입장에 호의적. 다만 신학계의 일부에서는 이것이 신학이 과학에 의존하게 되는 게 아니냐고 하여 비판하기도 한다. 물론 소수의 견해. 그러나 보완 모형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지적 설계나 창조 과학 등에 대해서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위에서 언급되었다시피 잘못된 방법을 사용하기 때문. 테오도시우스 도브잔스키나 데니스 알렉산더 등의 학자가 대표적. 창조과학회가 보완 모형을 취하기는 하지만, 보완 모형을 취하는 사람들이 모두 창조과학회에 동조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즉 보완 모형 자체는 유사 과학적 관점이 아니다! 이들은 반진화론 운동을 오히려 과학에 대한 종교의 잘못된 열등감에 의해 탄생한 사생아 같은 것으로 취급한다. 과학 만능주의를 경계하는 사람들 중에도 이쪽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은 편이다.

이러한 대화 모델에서 한발 더 나아가 특정한 종교적 신념과 개별적인 과학 이론들 간의 좀 더 체계적이고 폭넓은 동반자 관계와 밀접한 연관성을 모색하는 '통합' 모델을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과학과 종교의 상호 작용에 관한 4번째 모델은 종교적인 과학적이든 인류의 모든 지식 탐구에 동일한 기본 방법이 적용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더 나아가 우주 전체를 분할할 수 없는 하나로 다루는 단 하나의 이야기를 할 것을 주문한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현실적으로 종교인들의 바람에 가까운 수준이라 비종교인들에게는 그다지 설득력 있는 이야기는 아니라 하겠다. 굳이 따지자면 종교인이자 과학자인 사람이 양쪽에 대한 신념을 조화시키게 도와주는 정도.

5. 그 밖의 의견들

바버는 위의 4대 유형을 일종의 지식 탐구 여정의 단계로 제시한다. 지식 여행자는 처음에 갈등을 겪은 다음, 독립을 거쳐 짧고도 불만족스러운 연애를 하다가 마침내 대화 혹은 (더 바람직하게) 일종의 통합에서 만족스러운 안식처를 찾는다고 할 수 있다. 갈등과 독립 모델은 옳지 않으며, 대화와 통합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바버는 결론을 내린다. 실제로 과학계나 종교계나 대다수 학자들은 바버의 의견을 따르는 편이다. 물론 갈등 이론을 지지하는 일부 사람들 때문에 언제나 소규모 분쟁은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고, 일반인들은 그런 싸움 소식만을 들으면서 갈등 이론이 전부인 줄 안다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대해 딱 잘라 설명하는 것 외에도, 더 복잡 미묘한 의견들도 존재한다. 예를 들면 "과학과 종교에 대한 현재까지의 논쟁은 '종교'라는 현상을 어디까지나 서구 중심적으로 해석했다"는 식의 의견, 즉 인도 계통의 종교나 동양의 도 계통의 종교 등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비판이나, "종교는 과학의 발전을 때로는 경탄의 눈으로, 때로는 경계의 눈으로 대하는 유동적 태도를 지녔다"는 식의 복합적인 의견도 있다.

또한 위의 4가지 분류법은 역사의 복잡성을 제대로 다루기에는 미흡하다는 지적 또한 있다.역사는 극단적으로 단순화된 분류법으로는 수용하기 어려운 일련의 복잡한 사건들로 구성되기 마련이며, 현실의 사건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측면과 문화적 측면 또한 고려되어야 한다. 바버의 4대 유형은 분명 지적으로 효과적인 분석 유형이긴 하지만 그 단순성이 곧 약점이 된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바버의 이론 외에 스웨덴의 미카엘 스텐마크라는 사람은 무려 수십 가지의 서로 다른 관계 모형을 만들었다고 한다. 존 호트는 위의 대화 이론과 통합 이론을 묶어서 '접촉 이론'을 만들고 4번째 이론으로 '긍정 확인 이론'을 소개하기도 했다. 또한 테드 피터스는 갈등 이론을 과학주의, 과학적 창조주의, 교조주의로 세분하는 등 좀 더 정교한 8가지 분류 체계를 제안했다. 빌럼 드리스는 과학과 종교를 종과 횡으로 각각 셋으로 나누어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9가지 이론으로 분류함으로써 종교에 대한 인지적 해석은 물론 경험적, 문화적 해석을 강조했다. 즉 위에 적힌 유형으로 대개 묶이기는 하지만, 그 외의 소수 의견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6. 기타

문서명에서 과학이 종교 앞에 오는 것은 가나다순 기준으로 배열한 것이다. 같은 이유로 영어 위키백과에는 ABC순에 따랐는지 종교가 앞에 나와 있고, 한국어 위키백과에는 가나다순에 따라 과학이 앞에 있다. 그런데 일본어 위키백과에는 50음도 순서에도 불구하고 종교가 앞에 있다(宗教と科学(しゅうきょうとかがく)).

7.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다룬 다큐

8. 사회과학과 종교의 관계

사회과학에 속한 종교학의 설명에서도 볼 수 있듯이 사회과학은 신의 말씀과 존재 여부 보다도 종교의 형성 원리와 효능, 그리고 종교인과 신자들의 행동에 훨씬 많은 관심을 가진다.[11] 쉽게 말하자면 신보다도 종교에 관심이 더 크다는 것이다. 이런 영향 때문인지 굉장한 업적을 남겼다고 평가받고, 성향이 각기 다른 네 경제학자 카를 마르크스, 존 메이너드 케인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밀턴 프리드먼 의 공통점은 무종교라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반신론자로서 신의 존재 여부에 관심을 가진 경우이나, 다른 셋은 신의 존재여부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 불가지론자이다.

이러한 태도는 사실상 신이 없음을 인정하는 쪽에 더 가깝다. 종교의 생성은 신의 말씀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개인측면에선 인간이 종교와 같은 어떠한 믿음을 가지는 것이 삶을 살아가는 것에 있어 효능이 있었기 때문에, 사회단위에선 종교의 기능에 사회의 안정적 유지가 있었기에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사회학에서 앞선 경제학자들처럼 굉장한 업적을 세웠다는 뒤르켐의 주장 중 굉장히 작은 일부분을 요약한 것과 유사하다.[12][13] 그리고, 역시 뒤르켐도 앞선 네명처럼 무종교이며 세명처럼 불가지론자이다.[14]

결국 사회과학에서 종교를 대함은 "신이 행한 모든 일은, 종교가 행한 모든 일과 같다." 라는 문장으로 줄일 수 있다.

9. 관련 문서

10. 같이 보기



[1] 디스커버리 연구소라는 곳에서도 이 주제를 다루긴 하는데, 거긴 연구소가 아니고 지적 설계 홍보 단체다. [2] 이는 19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과학의 입지가 강화되고 과학자가 과학커뮤니케이션 분야에 더 많이 뛰어든 것이 이유로 보인다. [3] 이영석,'영국제국의 초상',푸른역사.2009,p249 [4] 단, 지상 최대의 쇼에서 '과학과 종교가 양립하는 게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등 강경적인 입장에서는 한 발자국 물러난 추세이다. [5] 완전히 같지는 않다. 방법론적 자연주의는 애초에 과학이 종교의 영역에 끼어들 이유가 없음은 보여주지만, 종교가 과학의 영역에 끼어들지 않는다고 보장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6] 마이클 셔머도 이 사실을 넌지시 언급했다. 참고로 셔머는 무신론자 내지는 불가지론자이기는 하지만 종교에 대해서도 꽤 호의적인 사람이다. 셔머는 실제로 << 현대 과학 종교 논쟁 >>이라는 책에서 반종교주의를 거세게 비판하기도 했다. [7] 생물학과 철학을 전공한 과학 철학자. [8] 가령 굴드의 경우에는 종교에 호의적이다. 그리고 필리우치의 경우에는 중립적이라고 볼 수 있다. [9] 쉽게 말해 굴드의 견해에는 종교의 영역이 명확히 정의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서로 건드리지 말자고 합의가 되었어도 여전히 충돌이 생겨날 여지가 있지만, 필리우치는 애초에 과학의 영역을 형이하학적인 영역으로 한정함으로서 충돌의 여지 자체를 없앴다는 것이다. [10] "통합 모델/이론" 대신에 "보완 모델/이론"이라는 용어를 쓰기도 한다. 통합 모델이라는 용어를 쓰는 이유는 아마도 이 문서가 이언 바버의 분류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바버는 '보완' 대신 '대화'와 '통합'의 2가지 분류를 사용했다. [11] 물론 이들을 더욱 쉽게 이해하기 위해 경전에 나온 뜻을 연구하기도 한다. [12] 앞선 요약은 뒤르켐의 문서에도 나오듯 인간의 '믿음', 그리고 그것의 영향과 관련지은 글이다. [13] 이 '믿음'을 흥미롭게 다룬 소설은 서영은의 <사막을 건너는 법> 이다. [14] 뒤르켐에 더해, 오귀스트 콩트, 막스 베버, 애덤 스미스의 종교관을 파악해보고 종합하여 사회과학과 종교의 관계, 사회과학이 바라보는 종교를 알아보는 것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