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14:36:48

고트프리트 페더

1. 생애2. 히틀러에게 끼친 영향
2.1. 정당에 들어가기까지

1. 생애

파일:고트프리트 페더.jpg
고트프리트 페더
Gottfried feder
(1883년 1월 27일 ~ 1941년 9월 24일)
'이자 노예제(Interest Slavery)는 인류가 고안한 가장 최악의 제도이다.'
독일 육군에서 페더의 교육중 아돌프 히틀러를 감명시킨 주제이다.
고트프리트 페더(Gottfried Feder, 1883년 1월 27일 ~ 1941년 9월 24일)는 독일의 건축기사이자 경제학자로, 초기 나치당의 주요 당원으로서 경제 이론가를 맡았다. 아돌프 히틀러를 당에 끌어들인 장본인이기도 하다.

1883년 1월 27일 독일 제국 뷔르츠부르크에서 공무원 한스 페더와 마틸데 페더의 아들로 태어났다. 안스바흐 뮌헨에 있는 인문주의 학교를 다닌 후 베를린 취리히에서 공학을 전공하였다. 졸업 후, 1908년에 건설 회사를 설립하였다. 후에 불가리아에서 활동하면서 수많은 공공 건물을 세웠다.

1917년부터 스스로 재정 정치와 경제학을 공부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부유한 은행을 향한 적개심을 키워나갔으며 1919년에 《Brechung der Zinsknechtschaft》를 저술하였다. 나중에 모든 은행을 국유화하고 이자를 없애기 위한 일종의 대책 위원회를 창립하였다.

같은 해에 안톤 드렉슬러, 디트리히 에카르트, 카를 하러와 함께 나치당의 전신인 독일 노동자당을 창당하였다.

그러나 후에 히틀러의 신임을 얻은 우익 경제인들이 페더를 공격하였고, 1934년 히틀러가 당내 좌익 세력을 숙청하자 페더는 내각에서 사임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에서 교수로 있다가 1941년에 사망했다.

2. 히틀러에게 끼친 영향

그는 '창조적' 자본이나 '생산적' 자본과 대비되는 '투기적' 자본이 독일의 경제를 좀먹는다는 견해에 사로잡혀 있었다. 페더는 이 목표를 관철시키기 위해 '이자 노예제를 철폐하기 위한 독일 투쟁' 동맹을 조직한 바 있었다. 경제학에 절륜은 커녕 무지했던 히틀러는 이러한 페더의 강의에 감복하였으며 이자 노예제 철폐라는 페더의 호소에서 '신당 설립의 필수 전제들' 중 하나를 발견했고 "나는 다가오는 투쟁에 필요한 강력한 표어를 떠올렸다."라고 히틀러는 말했다.

2.1. 정당에 들어가기까지

아돌프 히틀러 독일 노동자당을 조사하라는 독일 육군 본부의 명령에 따라 독일 노동자당에 대해서 별 생각없이 조사를 하고, 페더의 연설 차례가 나온후 별다른 소득없이 귀가하려던 찰나, 아달버트 바우만이라는 교수가 페더의 연설에 ' 바이에른 프로이센과 결별하고 오스트리아와 함께 남독일 국가를 수립해야한다'고 반론을 하는 것을 듣는다. 이에 히틀러는 갑자기 돌연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훗날 회고하기로 '그 박식한 신사'라고 언급된 교수에게 강력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그런데 얼마나 심하게 몰아세웠는지 교수는 '흠뻑 젖은 푸들'처럼 행사장을 떠났고 연설에 소질이 없던 안톤 드렉슬러 히틀러의 연설에 감복하여 독일 노동자당 입당을 제안하였다. 이제 히틀러는 독일 노동자당 당원 번호 555번, 독일 노동자당 위원회의 일곱 번째 위원으로 등록됐다.

히틀러 안톤 드렉슬러에게 제안서를 받은 다음날 제2보병연대에서 일어나 그의 제안서를 찬찬히 읽어나갔고, 그 제안서에 자신의 의견과 상통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기에 입당을 결심하게 되었다. 사실 히틀러는 공산주의 정권에서 보수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정권으로, 또 공산주의 정권으로 계속해서 바뀌는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자신이 직접 정당을 만드는것을 생각했지만 결국 페더의 연설과 그에 반박을 한 교수, 그리고 그것을 반박하며 자신의 연설 실력을 대중들에게 처음으로 시험하여 감복한 드렉슬러의 제안으로 인하여 결국 정당을 설립하지 않고 정당에 들어가게 된다.

히틀러"내가 가난하고 재력이 없다는 것[1]은 그나마 감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정작 이름 없는 사람들 축에 든다는것, 우연에 따라 살 수도 있고 거들먹거리는 가까운 이웃조차 전혀 모르게 횡사할 수도 있는 수백만 명 중 하나라는 것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고 말할 정도로 그의 의지는 확고했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만약 페더가 없었고, 히틀러가 교수에게 반론을 하는 일도 없어, 드렉슬러에게 눈에 띄는 일이 없었더라면, 히틀러 혼자 당을 설립했더라면, 히틀러가 지금처럼 입지전적인 사람이 되었을 수 있는지에 대해선 미지수이다.[2]

[1] 본인 자서전 나의 투쟁에서도 본인이 가난했다고 되어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가 세무공무원으로 벌어놨던 것이 꽤 된데다 고모들로부터 받은 유산도 제법 되었다. [2] 당장에 안톤 드렉슬러도 정비공이었고 그러한 상황에서 독일 노동자당의 40명 이상도 구해내지 못했다. 그리고 그러한 정당들은 대개 쉽게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