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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에 세 형제가 내조하여 각각 받은 칭호. 시기 불명. 고려사상 확인됨. ** 백제 문주왕에게 담왕이 받은 칭호로 족보상 기록됨, 후대 도동음률(명칭에 이설 있음)은 삼국사기상 좌평으로 확인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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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福壽
(? ~ ?)
1. 개요
공민왕 시기의 탐라 성주다.2. 행적
고복수가 성주로서 남긴 가장 큰 행적은 몽골인 목호들과 함께 고려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50여년 전 성주 고인단이 원나라에 청해 탐라국은 다시 고려에 예속됐다. 그러나 제주도 현지에서 말을 키우던 몽골인 목호들은 키운 말을 모국에 바치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목호들은 원나라를 배격하고 명나라를 따르게 된 공민왕을 달가워하지 않았을 것인데[1], 마침 제주도의 유력 토호인 고복수가 이들과 손을 잡았다.
공민왕 11년(1362) 8월 24일 고복수는 목호 초고독불화(肖古禿不花), 석질리필사(石迭里必思)와 함께 고려에 배반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고복수 등은 원나라에 예속되기를 요청함과 동시에 새 만호 임명을 부탁했다. 10월 22일 부추 문아단부카가 탐라만호로 새로 임명됐으며 반란 세력은 기존 제주만호 박도손(朴道孫)을 살해했다. 고복수가 세운 새 탐라만호 체제는 공민왕 12년(1363) 6월 만호 문아단부카가 고려에 동생 문인부를 사절로 보낼 때까지도 유지됐다. 『 신증동국여지승람』과 『 선조실록』에 따르면 고려에서 임명한 제주목사 성준덕이 반란군을 진압하며 끝을 맺는다. 『 고려사』에 따르면 성준덕이 목사에 오른 것은 문인부의 내방 6개월 뒤인 12월 5일의 일이다.
성주 고복수는 이후 기록에서 나오지 않지만 초고독불화와 석질리필사 두 목호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이 둘은 원수 최영이 목호의 난을 진압할 때 죽임을 당한다. 『 동문선』의 「성주고씨가전」에서 주요한 역대 성주의 이름과 행적이 나열되는데, 고복수의 일은 부끄러운 역사라도 되는지 별도로 언급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