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원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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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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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 1993 | 1996 | 1997 |
1993 KBO 퓨처스 남부리그 최우수 평균자책점 |
{{{#fff [[해태 타이거즈|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51번}}} | ||||
결번 | → |
강태원 (1989~19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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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훈 (1991~1993) |
해태/
KIA 타이거즈 등번호 20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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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영록 (19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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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원 (1991~2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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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옥 (2002~2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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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27024><colcolor=#ffffff> 신안산대학교 야구부 감독 | |
강태원 姜泰遠 | Kang Tae-w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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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colbgcolor=#fff> 1971년 5월 15일 ([age(1971-05-15)]세) |
전라남도 순천시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해남옥동초 - 화순중 - 순천상고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좌투좌타 |
프로 입단 | 1989년 고졸 연고구단 자유계약 ( 해태) |
소속팀 | 해태- KIA 타이거즈 (1989~2001) |
지도자 |
전주고등학교 야구부 코치 (2017) 광주동성중학교 야구부 코치 (2018) 세한대학교 야구부 코치 (2019) 덕수고등학교 야구부 코치 (2020) 안산 U-16 클럽팀 코치 (2021~2022) 신안산대학교 야구부 감독 (2022~) |
프런트 |
KIA 타이거즈 스카우트 (2002~2009) 삼성 라이온즈 스카우트 (2010~2016) kt wiz 스카우트 (2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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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現 신안산대학교 야구부의 감독이자 前 해태- KIA 타이거즈의 좌완투수. 해태에서 보기 드문 왼손잡이로 주로 마당쇠로 전천후 등판하며 활약을 했다.여담으로, 80년대~2000년대까지 타이거즈에서 팀을 한 번도 옮기지 않고 원클럽맨으로 뛴 유일한 선수다.
2. 선수 경력
광주상고에 입학했으나 순천상고로 전학하여 졸업한 뒤[1] 1989년에 입단한 후, 두각을 보이진 못했으나 꾸준히 실력을 키워 오다, 1994년부터 본격적으로 주축선수로서 활약했다. 최고 구속이 135km/h로 야구 선수로서는 다소 불리했으나, 타자와의 수싸움에[2] 진가를 발휘하며 자리를 잡아갔던 것. 1995년부터는 선수 달력에서도 제법 크게 사진이 실리는 등 비중이 부쩍부쩍 늘어났다. 2001년 은퇴할 때까지 '왕조'의 최전성기 막바지에 데뷔하여 후기 왕조에 기여하고 해태의 쇠퇴기를 함께한 선수.통산 성적은 16승 24패 6세이브 6홀드 평균자책점 4.39. 커리어하이는 1995년. 십년을 넘게 뛰었음에도 차명석이나 방수원, 송유석처럼 홀드가 늦게 집계되어 성적에서 꽤 손해를 본 케이스. 여담으로 김응용 감독 참외 사건의 원인 제공자이기도 하다.
3. 은퇴 후
현역 은퇴 후 KIA 타이거즈, 삼성 라이온즈, kt wiz 등 다수의 프로야구단에서 스카우트로는 활동했으나 지도자의 연과는 닿지 못했다. 2017년 kt wiz의 스카우트를 그만둔 후 전주고등학교 야구부 코치를 시작으로 광주동성중학교, 세한대학교, 덕수고등학교, 안산 U-16 클럽팀 등 코치를 역임하다가 2023년 새롭게 창단된 신안산대학교 야구부의 초대 감독으로 선임됐다.4. 플레이 스타일
인터벌이 역시 느린 공 투수였던 당시 삼성의 성준과 맞먹는 '공포의 투수'이기도 하다. 한동안 농담소재로 곧잘 쓰였던 박한이 vs. 성준은 성준이 1999년에 은퇴한 후 박한이가 입단하면서 상상으로 남았지만, 강태원 vs. 성준 두 '라이벌' 간의 대결은 이미 수 차례 펼쳐진 바 있다.[3][4]구종이 별로 많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LG 트윈스에서 이적해 온 이병훈이[5] "구종도 많지 않으면서 왜 그리 포수 사인을 자주 거부하느냐?"고 묻자, "그렇게 하면 상대가 내 구종을 쉽게 짐작못할 것"이라 답했다고 한다.[6]
5. 여담
- 표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던데다, 얼굴까지 +5살 ~ +10살의 노안이었기 때문에, 이따금 해프닝도 있었다고 한다. 사우나에서 김성한 전 감독이 "나이도 젊은 놈이 그라운드에서 땀을 빼야지 왜 여기서 땀을 빼냐?"고 꾸짖자, 그걸 들은 나이 지긋한 분이 "왜 나이든 사람한테 함부로 말하냐"고 오히려 김성한 감독을 나무랐다고 한다. 강태원이 1971년 5월생이고 김성한 감독이 2001년에 취임했으니, 이제 갓 서른 넘겼을 때 생긴 일이다. 여전히 노안인지라 전설의 타이거즈 방송에서 최해식이 이를 갖고 '웬 할아버지가 나와서 방송하는 줄 알았다'며 놀리기도 했다.
- 이승엽의 홈런 기록과 관련된 인연이 많은데, 1997년 시즌 말 이승엽에게 시즌 31호 홈런을 헌납하며 홈런왕 경쟁에서 30개로 동률이었던 같은 팀의 이종범과의 경쟁에서 앞서나가게 한 경험이 있으며[7], 1999년 7월 25일에는 시즌 42호 홈런을 헌납한 적이 있다. 뉴스기사 이는 전년도 타이론 우즈가 수립했던 시즌 최다 홈런의 타이 기록이었으며, 이후 이승엽은 홈런을 12개 더 치면서 시즌 최다 홈런을 경신한다. 여담으로 장외 홈런이었다고. 그리고 그 시즌 이승엽의 54호 홈런도 헌납했다.
- 은퇴 직전 이상윤[8]의 제안으로 2002년부터 2009년까지 KIA 타이거즈의 스카우트를 맡았다가 삼성 라이온즈, kt wiz 스카우트도 경험했다.. 삼성 시절에 삼성 프런트 직원들은 무려 영감님이라고 부른다고.
- 전설의 타이거즈 8월 26일 공개분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김선빈의 계약금을 1천만원 내려치려던 단장의 패악질을 막았다고 한다. 내려치려던 이유가 "신장이 이렇게 작은데 야구를 얼마나 잘하겠냐, 회삿돈을 니들 맘대로 쓰냐?"라는 식이었다고. 3번째에 겨우 원안대로 승인받았는데, 이후 김선빈이 데뷔시즌부터 빼어난 활약을 보여주자 술자리에서 사과받았다고 한다.
- 전설의 타이거즈 출연 후 김성한, 최해식이 출연한 후속편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탈모가 있다고 한다. 사실 방송 중 선배인 이건열 앞에서도 계속 실내에서 모자를 착용하고 있었다.[9] 가발을 착용하고 방송에 출연한 최해식의 ' 가발 하나 100만원 밖에 안 하는데 안 산다고?'라는 발언에 더해 모자를 안 벗긴 것은 제작진의 실책이었다는 김성한의 합작 디스는 덤이었다.
- 별명은 쌀봉이.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본인이 밝히길 고교 졸업 후 입단해서 매일 부페식으로 식사가 제공되자 계속 선배들 테이블 앞을 지나가며 밥을 많이 먹는다고 해서 김종모가 붙여준 별명이라고 한다.
- 유독 긴 인터벌이 특징이었다. 1루수 이건열은 마운드로 가서 "힘들어 죽겠다. 빨리 좀 던져라"하고 타박하고, 중견수 이순철은 공수교대 후 덕아웃에서 "아야, 너 이리로 와 봐봐"하면서 한소리했다고 한다.
- 전설의 타이거즈 미방영분에서 강태원이 스스로 밝힌 일화로 신인 시절 라커룸에 앉아있는 강태원을 보고 선배로 착각한 이강철, 이광우, 조계현, 문승훈, 김태완, 윤재호가 다 인사를 했다. 고교 졸업후 프로로 직행한 강태원과 달리 이들은 대졸 선수들로 적어도 4세 위로, 해태가 워낙 군기가 센 팀이라는 걸 대졸 신인들도 알고 있기 때문에 인사를 철저히 했다고 한다. 인사를 처음엔 받았다가 나중에 '선배님 제가 4살 아래입니다' 슬쩍 말하자 '야 이 xx야! 그럼 진작 말했어야지!'라고 역공을 당했으며 상대팀 선배선수들도 강태원에게 인사를 할 정도였다.
6. 관련 문서
[1]
당시 동기생이
이경복,
조웅천이었고, 조웅천과는 둘 다 팀의 간판 미들맨이었던지라 현대와 해태가 맞붙은
1996년 한국시리즈나
홀드 제도가 처음으로 도입된 2000년에 조웅천과 강태원을 라이벌로 엮은 기사가 종종 나오곤 했다.
[2]
상단의 사진에서 보듯 표정 변화가 별로 없다. 1류 도박사처럼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으면서 타자들과 머리 싸움을 할 수 있는 선수였다는 것.
[3]
이병훈 해설위원이 "강태원과 성준이 맞대결을 펼치면 경기 막바지에 어느새 수염이 덥수룩하게 나 있더라"라는 우스갯소리를 한 적이 있고 2004년
브레인 서바이버에 나와 추가로 썰을 풀기를, 경기 시작 전에 경기 끝나고 가질 지인과의 술 약속을 잡고 시간까지 정해놨다가 선발 매치업이 강태원 vs 성준이면 그 지인에게 다시 전화해 "야 그냥 전화하면 나와"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4]
전설의 타이거즈에서도 김정수의 증언으로, 성준과 강태원은 인터벌이 길어서 장점을 발휘한 투수였는데, 그 당시에는 지루하고 루즈한 플레이를 같은 야구선수들 입장에서는 상당히 힘들었다고 말했다.
[5]
이 무렵이
김응용 감독이 "타자로 대성할 선수"라며 이 선수에게 애정어린 갈굼을 시전하던 시기. 나중의 갈등과는 별개로 "대성할 수 있었는데, 술이 그를 망치고 말았다."며 인터뷰에서 안타까움을 표시한 바 있다.
[6]
이병훈이 해설가로 활동할 무렵 이 일화를 얘기하며, "우리 마누라도 강태원 구종이 2개인거 다 알아요!"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7]
최종 성적은 이승엽 32개, 이종범 30개로 딱 두 개 차이였다. 이종범은
스톡킹에 출연해 '차라리 볼넷을 내주지 홈런을 맞냐고 농담삼아서 욕을 살벌하게 했다'고 술회했다.
[8]
강태원이 은퇴하던 시기, 해태 투수코치였다.
[9]
서양식 모자는 실내에서 벗고 실외에서만 착용하는게 모자 착용 예의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