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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5 17:42:44

강유/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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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긍정적 평가
2.1. 전근대의 평가2.2. 현대의 평가
3. 부정적 평가
3.1. 전근대의 평가3.2. 현대의 평가
3.2.1. 강유가 가족을 버린 이유에 대한 소고3.2.2. 왜 그렇게 북벌에 목숨을 걸었는가?
4. 강유 VS 등애
4.1. 강유 우위론4.2. 강유 열세론

1. 개요

강유의 평가를 다룬 문서.

정사의 평은 좋은 평과 나쁜 평이 갈린다. 요컨대 강유는 당대부터 현대까지 평이 극히 갈린다. 촉한의 마지막 충신이라는 호평부터, 촉한 멸망의 원흉이라는 비판까지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린다. 이렇게 평이 극에서 극을 오가고 사람들이 강유에 대해 왈가왈부 하는 걸 보면 아니라 과거에서 현재까지 강유는 꾸준히 논란의 대상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강유가 군부에서 일하였고 한나라의 대장군까지 오르면서 수많은 전장을 경험한 인물임에도 그의 군사적 능력 자체에 대한 평가는 비판과 옹호가 크게 갈렸고, 주로 군대를 동원한 것에 대한 비판이 학자들의 비판에 있어서 주가 된다는 것이다. 그외에는 그의 성품이나 개인적인 미덕은 고평가하는 의견이 다수다.

2. 긍정적 평가

제갈량으로부터 " 마량 이상의 재능의 소유자, 양주 최고의 인물이자 기린아"라고 불리는 절찬을 받았다. 위나라 출신의 항장으로, 개국공신 가문도 아니고 촉한에 아무런 연고가 없음에도 촉의 대장군[1]까지 오른 입지전적의 인물이기도 하다. 강유를 부정적으로 평가한 진수도 강유가 문무를 아울러 갖추었다고 묘사하며, 그가 최후에 63세의 노구를 이끌고 적병 5~6명을 직접 제거한것은 그의 범상치 않은 무예를 입증한다.

또한 위나라라는 삼국지에서 가장 강대한 세력을 상대로 수만 단위의 피해를 입힌 몇 안되는 인물로서 그의 전술적인 능력은 당대 최고로 여겨지며 강족의 반란 당시 이에 호응해서 촉한의 번현에 강족 수만부락을 안착시킨 전공이나, 적도전투에서 상대의 항복을 활용해 대승을 거둔것이 주요 전공으로 꼽힌다. 촉한멸망전 당시 제갈서를 상대로 보여준 퇴각전도 그의 전술적 재능의 편린을 보여주는 예시이다.

그가 촉에 맹목적으로 바쳤던 충성심이나, 극정이 그를 두고 청렴하고 일세의 모범이라 평한것을 보았을 때 개인의 인품 또한 훌륭했음을 알 수 있다.

2.1. 전근대의 평가

일단 제갈량이 아직 공업을 이루기 전 젊은 시절의 강유를 보고 양주 최고의 인물이라면서 극찬한 건 위에도 나왔으니 이번엔 제갈량 시대 이후 한 세대 뒤인 강유 당대와 그 직후의 평가를 더 보자.
당시 촉(蜀)의 관속들이 모두 천하의 영준(英俊, 영민하고 준수함)이나 강유보다 나은 자는 없었다.
배송지 주 세어(世語)의 평가, 이는 《 세설신어》에도 그대로 실려있다. 그런데 삼국지 집해에 실린 청나라 시대 학자 조일청(趙一淸)은 "蜀(촉) 위에 征(정) 자가 탈락된 것으로 의심된다"라고 하였다.(趙一淸曰, 蜀上疑落征字) 즉, 조일청의 견해에 따르면 세어의 기록은 촉한의 관속이 다 뛰어나지만 그 중에서도 강유가 으뜸이라는 소리가 아니라, '당시 촉을 정벌한(征蜀) 등애나 종회, 두예를 비롯 위진의 인사들은 모두 천하의 영준이나 강유보다 더 뛰어난 인물은 없었다'로 풀이된다는 것이다. 확실히 조일청의 해석이 문맥상 더 자연스럽기도 하고, 당시 위진에서 촉한의 인물 가운데 강유 이외에는 높이 평가하던 인물이 없었다는 걸 감안한다면, 게다가 아무리 공치사라 할지라도 망국의 신하들인 촉한의 인사들에게 굳이 "영준"이라 좋게 표현할 이유가 없기에 조일청의 해석에 더 무게가 실린다.
종회는 강유와 함께 밖으로 나갈 때는 같은 수레를 타고 좌정할 때는 같은 자리에 앉았다. 장사(長史) 두예에게 말했다,

"백약(강유)을 중원의 명사에 비교하자면 공휴( 제갈탄)나 태초( 하후현)가 그보다 더 낫지는 못할 것이오."[2][3]
종회의 평가
"강유는 본래 한 시대의 영웅이었지만, 나를 만났기 때문에 곤궁해진 것일 뿐이다."
(주위의) 식견 있는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다.
등애의 평가

당장 강유와 직접 대적한 동시대의 등애나 종회도, 당대에 세간에 떠돌던 세설의 평가들도 모두 강유를 일세의 영걸로 평가했기 때문에 강유 당대의 평가는 대체적으로 높았다고 짐작은 할 수 있다. 한편 손성의 《진양추》에 따르면 환온이 촉을 평정할 때에 촉의 여러 나이든 이들을 만났는데 그들이 말하길 강유가 이미 항복한 뒤에 은밀히 유선에게 표를 올려 ‘종회에게 거짓으로 항복하여 섬기고 이를 틈타 그를 죽이고 촉 땅을 회복하고자 한다.'라고 말했으나 때마침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여 마침내 멸망되기에 이르렀으니 촉인들이 지금도 그를 안타깝게 여긴다고 하였다고 한다. 살아생전 촉한 사람들에게 비난도 받았던 강유였지만 그래도 그의 죽음은 촉한 사람들을 안타깝게 한 듯하다.

극정은 강유에 대하여 우호적으로 평하였다.
강백약은 상장(上將)으로서의 중임을 맡았지만, 초라한 집에 살면서 불필요한 재산을 모으지 않았다. 측실에서는 첩잉(妾媵,첩실)을 총애함이 없고 후정에서는 음악을 즐기는 일이 없었으며 의복은 제공된 것을 입고 수레와 말은 준비된 것을 타고 음식은 절제되어 사치하지도 인색하지도 않았으며 관에서 공급하는 비용은 손에 주어지는 대로 소진하였다. 이러한 행동은 남을 질책하거나 자신의 욕망을 버리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 그는 만족을 알던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만 칭찬하고 실패한 사람은 비난한다. 또한 높은 사람에게 기대고 낮은 사람은 무시한다. 많은 사람들이 강유가 종회와 같은 하찮은 인간에게 의지하여 자신과 종족을 멸망시켰다고 비난하고 그의 다른 측면은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춘추》에서 그릇된 사람을 폄하하는 것과 전혀 다른 짓이다. 강유는 배우기를 좋아했으며, 성실, 청렴, 소박, 검소를 행동의 준칙으로 삼았으니 한 시대의 모범이라 할 만하다.

육조시대 유송 대의 배송지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신이 보건대 극정의 이 평가는 칭찬할만한 것을 취했지 강유가 모든 측면에서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한 시대의 모범이 될 만한 것은 그가 학문을 좋아했고 검소하게 살았다는 것뿐입니다. 또 강유전이나 위략에선 강유가 본디 배반하려는 마음이 없었지만 내몰려서 촉에 귀순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손성이 어머니를 저버렸다고 비난한 것은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머지는 지나치게 가혹하게 질책하고 폄하한 것이므로 손성이 극정을 비판할 이유는 없습니다.

배송지는 또 손성이 강유를 비판하였었던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단의 예를 들어가며 반박했다.
신 송지가 보건대, 손성이 강유를 비난하는 말이 또한 합당하지 않습니다. 당시 종회의 대군이 이미 검각에 이르자 강유가 제장들과 더불어 군영을 벌려세우고 험요지를 수비함으로써 종회가 진격할 수 없어 이미 되돌아갈 계획을 의논하였으니 촉을 온전히 지키는 공이 거의 이루어졌었습니다. 다만 등애가 기만술로 측면으로 침입하여 그 배후로 출병하니 제갈첨이 패한 뒤에 성도는 스스로 무너졌을 뿐입니다. 강유가 만약 회군하여 내부를 구원했다면 곧 종회가 그의 배후를 틈탔을 것입니다. 당시의 사세로 어찌 양쪽을 다 구제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강유가 면죽 아래에서 절의를 떨치지 못하거나 촉주를 옹위하지 못했다고 책망하는 것은 이치에 맞는 않는 말입니다. 종회는 위장들을 모두 구덩이에 파묻어 죽이고 강유에게 대군을 주어 선봉으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만약 위장들이 모두 죽고 군사가 강유의 손에 주어졌다면 종회를 죽이고 촉을 회복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릇 이치를 넘어 공이 이루어진 연후에 이를 가리켜 기(奇)라 하는 법이니 그 일에 차질이 있었다고 하여 그리 해서는 안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설사 전단의 계책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면 또한 그를 가리켜 어리석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화양국지》에 실린 촉한-서진 시대 당대의 인물인 왕숭은 강유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중략)[4]등애는 피곤한 병사 2만을 이끌고 강유성에서 쏟아져 나왔다. 강유는 남쪽으로 귀환하여 십만의 군대를 일으키는 것을 목적으로 군을 이끌어서, 등애는 집에서 기르는 (사로잡힌) 동물의 꼴이 되었다. 등애를 사로잡는 것을 이미 끝 마치고, 다시 돌아와 종회를 막아내었더라면, 곧 촉의 존망을 가늠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이에 강유는 파의 도로에 돌아와서, 멀리 오성에 이르었다. 설사 등애가 가볍게 전진하였다 해도, 지름길을 통해 성도에 이를 수 있었을 것이다. 병사가 분할되어 도성이 멸하니, 스스로가 자초한 것이다. 명백하게 종회의 지략은, 자방의 것이라 칭해졌다고 한다. 강유는 적이 이르지 아니하였음에도 함락되었는데, 강유와 종회가 책략, 지모를 서로 맞아 어울려하여 우열을 가린다면 강유가 승리하여 종회를 물리칠 것이다. 아깝도다!

조익(趙翼)의 이십이사차기, 전대흔(錢大昕)의 이십이사고이와 함께 청대사학삼대명저(清代史學三大名著)로 꼽히는 십칠사상각(十七史商榷)의 저자 왕명성(王鳴盛)[5]은 다음과 같이 찬(贊)했다.
거짓 없는 참된 마음이 천 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아직도 살아있는 듯하다.(赤心千载如生)

한편 조선의 문신 홍대용의 <담헌서>에서도 강유를 평한 적이 있다. 다음은 해당 내용.
강유(姜維)는 무후(武侯)의 재주는 없으면서 무후의 사업을 하려고 했으니, 그 뜻은 충성스럽지만, 그가 자신의 힘을 헤아리지 못하여 결국 멸망하게 되었던 것이니, 그것은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 요화(廖化)가 이른바 ‘지모(智謀)도 적(敵)만 못하고, 병력(兵力)도 적보다 적으면서 용병(用兵)하기를 싫어하지 않으니 어찌 생명을 보존할 수 있겠느냐?’라는 말은 참으로 알고 하는 말이다. 또한 모사(謀事)를 잘하는 자는 그 근본부터 먼저하고 끝은 나중에 하며, 안의 일부터 급히 하고 바깥일은 천천히 한다. 소인(小人)이 안에서 일을 주선하는데, 장수가 밖에서 성공(成功)한 자는 있지 않다. 그런데, 강유는 정권을 제 마음대로 하는 황호(黃皓)를 능히 억누르지 못하고 저 억센 적에게 뜻대로 하려고 했으니, 지혜롭다 할 수 없다.

강유(姜維)는 양안(陽安)과 음평(陰平)을 방비하고자 했으나 황호(黃皓)에게 저지(沮止) 당했다. 만약 강유의 계획 대로 했다면 등애(鄧艾)가 음평으로 한 걸음도 들어올 수 없었을 것이다. 등애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종회(鍾會)는 스스로 달아나게 되었을 것이니, 촉한(蜀漢)이 이같이 빨리 멸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강유(姜維)가 죽을 임시에 꾀한 것은 뜻만은 독(毒)하였으나 계획은 소루(踈漏)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漢)나라에 충성한 마음은 죽을 때까지 변함이 없었고 무후(武侯)가 인정하던 것도 손상시키지 않았으니, 또한 아름답다 하겠다.

한 마디로 '제갈량의 능력도 없이 북벌을 하려고 했던 것은 요화의 말 따라 무모했고, 일단 내정을 정비하고 소인(황호)부터 억눌렀어야 했다. 하지만 간신배 황호 같은 무리 때문에 그 계책이 쓰이지 않았던 점도 있고, 마지막까지 노력했던 그 충심은 끝까지 아름다웠다고 할 만하다.'쯤 될 것이다. 또 보면 홍대용은 호삼성과는 달리 변경된 강유의 한중방어선 전략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2.2. 현대의 평가

중국의 근대사학자 여사면은 자신의 저서 《삼국사화(三國史話)》에서 이렇게 그를 평가했다.
제갈량이 죽은 후 촉한은 29년간 더 유지됐다. 이 29년 중 앞의 12년 동안은 장완이, 가운데 7년동안은 비의가, 마지막 10년동안 국정을 총괄한 것은 강유였다. 장완과 비의가 국정을 총괄할 때는 위나라를 정벌하는 대대적인 출병이 없었다. 강유는 누차 대병을 일으키고자 했으나 비의가 항상 그를 막아서 많은 수의 병마를 주지 않았다. 비의가 죽고 난 다음 강유의 일처리가 겨우 비의의 손에서 벗어났으나 역시 큰 공이 없었고 오히려 이로 인해 조국이 피폐해졌다. 당시 그(강유)를 강하게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후의 독서가들도 역시 촉한이 멸망한 것은 강유가 병사를 일으킨 책임이라고 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위나라 제왕 조방이 세워진 후부터 고귀향공이 피살당할 때까지의 21년은 삼국시대로 접어든지 21년에서 41년에 이르는 시간으로 실로 위나라에 여러 가지 일이 많았던 때로서 촉한이 북벌을 해야 한다면 그 기회는 절대적으로 이 기간 안에 있었으며 그 기회는 이르면 이를수록 좋았는데 이르면 이를수록 위나라의 국정이 더욱 불안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간 중 태반은 장완과 비의가 정권을 잡고 있었고 강유가 병권을 장악한 때에 이르러서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그러므로 촉국의 멸망을 강유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실로 억울한 것이다. 장완과 비의에 이르러 응당 비교적 큰 책임이 있는 것이다.

강유의 전략적, 군사적 식견은 분명히 허점이 많으며, 그가 북벌을 여러 차례 감행함으로써 촉한이 피폐해졌으며 문무만민들의 원성을 들은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강유는 왜 그렇게 북벌이라는 목표에 매몰되었는가?'인데, 강유의 북벌은 촉한 내에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한 쇼에 불과했다는 시선도 있는 반면, 강유의 북벌에 대한 예방전쟁으로서의 사상 긍정, 그리고 강유 개인에 대한 성품과 충성심에 대한 소고를 담은 기록과 고찰을 통해 강유는 북벌에 사심을 담지 않고 충심으로 임했다는 주장 또한 계속 등장하고 있다.

강유의 북벌 집착을 국정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강유에게 있어 최선의 북벌 타이밍은 그 때밖에 없었다. 2천년 가까이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좀만 버티면 팔왕의 난도 일어나고 오호십육국시대도 도래하고 그랬을 텐데'라고 강유를 참을성이 없었다 비판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강유가 미래 예지라도 할 수 있지 않은 이상 이 이상 혼란한 시대가 오리라고 알 수 있을 리 없다. 강유가 처한 상황에서 조위는 사마씨가 일으킨 고평릉 사변과 그로 인한 정치적 혼란이 발생했고, 이 때문에 수춘삼반이 연달아 일어나고 하후패는 투항했으며, 강족의 촉한 협력도 약속받은 상태였다. 촉한에게 이 이상의 좋은 기회가 더 올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었을까? 오더라도 촉한의 군사, 인재 역량이 멀쩡한 상태에서 올 수 있을까? 우리는 그 답을 알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더 좋은 기회를 노리는 것이야말로 도박수였다. 심지어 그 당시 강유 본인이 오십줄을 넘고 장익, 요화 같은 노장들은 70살을 바라보는 시점이니 말이다. 즉 북벌에 성공하지 못해 국력을 낭비한 실책은 비판받아 마땅하나, 그렇다고 북벌 자체가 문제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또한 강유의 전술적 능력은 평범한 수준은 아니었다. 강유는 흥세 전투에서 공로를 세운 것은 물론이고 246년의 곽회, 하후패 격파, 이를 압도하는 도서 전투의 공로가 있었다. 다만 호제와의 연계가 실패한 단곡에서의 패배가 이러한 전술적 성과들을 덮을 정도의 오점이 되었다. 결국 위나라를 압도하지는 못해 낮게 평가되는 것이지만, 위나라 입장에서 서부 방어를 위협하는 위협적인 인물이었음은 분명하다. 이는 적들의 평가에서 역력히 드러난다.

흥세 전투는 방어전에 왕평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소수군으로 험지에서 적의 발목을 붙잡는 데에 있지 이를 실질적으로 섬멸한 것은 비의의 본대였고, 왕평의 역할이 작은 것이 아니지만 왕평이 모루 역할을 했다면 비의는 더불어 망치 역할과 퇴로 차단의 역할을 충실히 했는데, 그의 공로는 잘 언급되지 않는 면이 있다. 255년의 도서 전투의 경우에는 공격전에서 왕경의 수만 군을 통째로 섬멸시킨 전투로 강유 자체가 총사령관으로 출전한 경우이기에 비의와 그 공을 갈라먹어야 하는 흥세 전투의 왕평보다 지분이 훨씬 높다.

강유가 對 조위 전략으로 세운 한중을 포기하고 방어선을 후퇴해 위군이 쳐들어오면 포위 섬멸한다는 전략은 정말 군사적으로 틀려먹은 전략이었는지, 그것보다 좋은 방법이 있었을 것인지는 지금도 논쟁거리로 다뤄지고 있다. 강유의 한중 방어 시스템, 즉 축병집곡(敛兵聚谷, 군사를 거두어 거점에 머물다)은 저 키워드로 검색해보면 축병집곡은 최악의 실책이다, 아니다 축병집곡이야말로 최선이었다는 논쟁과 연구 또한 진행 중에 있다. 축병집곡을 긍정하는 이들은 지리적으로만 보았을 때는 강유의 방어 시스템은 허점이 많았으나, 그 당시 촉한의 군사적 역량으로는 기존의 시스템만으로 조위의 남하를 저지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강유가 제시한 것이 그나마 최선이었다는 쪽에 무게를 싣는다.

무엇보다도 인재난에 시달리던 촉에서 그나마 가장 군사적으로 뛰어난 역량을 갖고 있는 것은 강유 뿐이었다. 강유의 행적이나 조정에서의 시선이 어땠든, 결국 산을 넘어온 등애군을 막아낼 장군은 조정에 없었다. 강유가 중앙 조정과의 사이가 안 좋았고 화양국지의 기록대로 역심의 가능성까지 있었다면, 강유를 막아설 정도의 전력이나 지휘관을 중앙군에 갖추어두거나 강유군의 전력을 약화시키거나 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산을 넘어와 만신창이였던 등애군의 공격에 중앙군은 맥없이 무너져버렸고, 이는 역설적으로 중앙군과 조정의 처참한 군사적 역량, 또는 강유를 의심하면서도 이를 대비하지 않았을 정도의 태평함을 반증한다.

결론내리자면 강유의 역량은 국력 차이를 뒤엎을 정도는 되지 않아 북벌의 성공 가능성은 낮았고 결국 촉한의 국력을 갉아먹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북벌에 나서지 않으면 결국 위에게 밀리게 될 것이 뻔한 촉에서 하던 강유가 못 하면 아무도 못 하는 게 북벌인 것 역시 사실이었고, 군사적 측면에서 원맨쇼를 할 수 있었던 인물도 강유 뿐이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단곡에서의 패배로 그를 원망했던 촉한의 백성들도 결국 강유가 처형당하자 안타까움을 품었다는 민간전승을 보면, 강유의 실제 품성과 능력을 떠나 그는 촉한 말기의 희망이자 상징이었다.

이러한 점들 덕분에 강유는 특히 소설의 캐릭터로써는 사랑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특히 "한 가닥 이상을 품고 처참한 현실에 대항하며, 근성으로 붙잡고 구르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는 비극적 서사"는 소설의 주인공으로서는 너무나도 매력적인 소재다. 여기에 더해 《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의 후계자라는 버프를 받고 뒤떨어지는 국력, 암군 유선 환관 황호의 환상적인 태클, 뛰어난 정치가였으나 북벌에 관해선 의견이 달랐던 비의의 반대 등을 짊어지고 장익, 요화 등과 고군분투하며 늙어가는 모습으로 묘사되었으며 현재도 수많은 촉빠들의 아쉬움 섞인 지지를 받고 있다.

3. 부정적 평가

무릇 선비가 비록 백가지의 행실을 하고 만가지의 서로 다른 일에 종사하더라도 충성과 효행과 의로움과 절의야말로 수많은 일의 으뜸이다. 강유가 위나라에 몸을 맡겨 임관하였으나 바깥의 촉나라로 달아나 임금을 저버리고 이로움을 좇았으니 충성이라 일컬을 수 없다. 혈육과 친지를 버리고 구차하게 화를 면했으니 효행이 있다고 일컬을 수 없다. 예전에 섬기던 나라에 해를 가했으니 의로움이 있다고 일컬을 수 없다. 싸움에 패해 국가가 위태로움에 처하였는데도 죽지 않았으니 절의가 있었다고 일컬을 수 없다. 게다가 덕망 있는 정치를 아직 펼치지도 못했는데 자기 마음대로 백성들을 피폐하게 하고 적을 막는 임무를 맡았으면서도 적을 불러들여놓고 수비를 그르쳤으니 필부의 지혜와 용기에 관해선 말할 것도 없다. 강유에게는 이 여섯 가지 중 단 한 가지도 없었다. 실로 위나라에선 도망간 신하이자 (촉나라에선) 나라가 망하도록 어지럽힌 재상인데 다른 사람이 본받을 만한 사표라 말하니 이 또한 미혹된 말이다. 설령 강유가 책을 좋아하고 미미하게 청렴함이 있었다 한들, 도둑질한 이가 재물을 나누어주는 의로움이나 소인배에 불과한 정정(程鄭)이 지위를 낮추는 방법에 관하여 질문한 선의와 무엇이 다르겠는가?[6]
동진의 역사가 손성

실제 역사적 인물인 강유는 제갈량-장완을 이은 제갈량의 진정한 후계자 비의가 암살당한 이후, 촉 말기 10여년 간 북벌에 엄청난 국력을 소진하였다. 또한 근본적으로 강유의 대위 방어 정책도 도박적이어서 유비-제갈량 시절에 구축된 방어 정책과 비교했을때 위험성이 높았기때문에 결국 촉이 멸망하게 만든 원인중 하나가 되었다. 사마소가 촉한멸망전을 감행한 것도 강유가 부족한 정치력으로 고립을 자처해서 촉의 정예군을 이끌고 주요 방어선에서 멀리 이탈한 것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애당초 강유의 북벌은 촉 조정의 지지를 점차 잃어갔다. 때문에 촉 유력자들은 모두 강유를 저지하고자 목소리를 높였으며 최후의 몇년간은 진지, 황호, 동궐, 제갈첨, 번건, 요화, 장익, 초주, 염우 등 정견도 입장도 출신지도 다른 촉의 주요인사들 거의 전부가 강유를 막기 위해 단합했을 정도로 강유는 촉 정계에서 촉을 위험에 빠뜨리는 공공의 적으로 인식되었다. 이 중에선 제갈량이 신임하여 같이 일한 사람들, 그가 성실하고 뛰어난 사람들이라고 뒤를 맡긴 사람들도 있어서 제갈량의 후계자는 강유뿐이라는 연의류의 인식과 정 반대의 상황이 실제 역사상 촉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촉의 멸망 이래, 강유는 역사학자들의 비판을 꾸준히 받아왔으나 낭만서사인 삼국지연의에서 미화된 나머지 오히려 촉을 위해 강유를 막으려던 사람들이 간신으로 치부되는 역사 인식 왜곡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

강유의 북벌과 한중 방위책은 결국 촉한 멸망의 원인으로 작용했지만, 제갈량 이후 유의미한 원정을 시도한 게 강유뿐이기 때문에 촉한 중심으로 전쟁사를 이어가려면 강유를 어떻게든 띄워주는 수밖에 없었다. 강유 사후에 서진이 삼국통일을 이루기까지는 무려 16년이라는 세월이 더 걸렸고 오나라도 그 긴 세월을 서진에게 호락호락 당하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원말명초 당대사람들에게 오나라의 서사는 이미 상당히 관심에서 멀어진 상태였던 것이다. 때문에 나관중이 아예 생략해버린 독발수기능의 반란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극적인 요소가 당대 삼국지 이야기에 형성되기 어려웠다. 기껏해야 양호와 육항의 심리전 정도랄까. 사실 삼국통일이 촉 멸망 이후에 10년 이상 늦어진 것도 손오의 저항, 독발수기능 토벌과 사마염의 의지부족 때문인데 나관중이 이걸 생략해버려서 사마염이 괜히 뜸들이다가 한참 나중에야 오나라를 정벌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3.1. 전근대의 평가

일단 촉한의 존립 명분은 촉한이 정통이고 조위는 역적이니 토벌해야 한다는 촉한정통론이며 촉의 국시를 제갈량이 북벌로 삼은 이후 장완, 비의 등도 자기 나름의 방식대로 북벌을 하려고 하긴 했다. 그러나 강유의 북벌은 유독 주변의 공감을 받지 못했다. 강유의 북벌에 대해 당대 사람들이 비판한 주요 의견은 다음과 같다.
이렇듯이 촉 조정 전체에서 비판에 더해 동맹국, 적국 불문하고 강유를 비판하고 든 점을 보건데, 강유만 정상이고 나머지가 다 보신주의자였다는 해석보다 오히려 강유가 쓸데없이 누구의 지지도 받지 못하는 급진적인 북벌을 주장했다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는 것이다.

정사의 저자 진수는 극정의 말을 빌려 강유의 장점을 논한 후 '강유는 대체로 문무를 갖추고 공명을 세우는데 뜻을 두었으나 군사들을 경시하며 군대를 남용하고, 분명하게 결단하였으나 주밀하지 못하여 끝내 죽었으니 작은 나라에서 요란하게 일을 벌인 것 때문이다'라고 비판했다.
"'전란이 끊이지 않으면 스스로를 불태운다'고 하더니 백약을 두고 하는 말이로구나. 지모가 적보다 뛰어나지 않고 역량도 적으면서 용병이 끊이지 않으니 어찌 스스로를 보존하리? 시경에서 말하는 '나를 일찍 낳던지 늦게 낳던지 하지 않으시고(不自我先, 不自我後)'[8]라는 것이 바로 지금의 일을 가리키는 것이로다"
262년, 4년만에 적도로 다시 출격하는 강유를 보고 말한 요화의 평가

여기서 '전란이 끊이지 않으면 스스로를 불태운다'는 발언은 손자병법에 위무제 조조가 단 주석인 '久則不利 兵猶火也 不戢將自焚也'(질질 끄는 것은 무익하다. 병(兵)은 불과 같아서, 멈추지 않는 장수는 스스로를 태워 죽인다.)는 장수 평가에 기인한 것이다. 또 시경을 인용한 발언의 경우 원본은 '父母生我 胡俾我癒 不自我先 不自我後'으로, 해석하면 "부모님은 왜 (하필 이 시국에) 나를 낳아 괴롭게 하시는가, 더 일찍 낳거나 더 늦게 낳거나 하시지."라는 셀프 탈룰라다. 쉽게 말하면 "왜 하필 이런 때에 이런 놈이 나와서 (자신을 비롯한) 동시대의 촉인들을 고통으로 몰아넣는가, 차라리 이 꼴은 안보게 다른 시대에 태어나는 게 옳다."라는 꽤 강도 높은 비판을 한 것이다. 즉 요화는 출병해봤자 별 소득도 못 건지고 패주만 하지만 그럼에도 북벌을 해야 한다고 출병을 강요하던 강유에게 질린 것이며, 이런놈이랑 같은 시대, 같은 나라에 사는거 자체가 불행이라는 식의 극언을 할 정도로 강유를 몹시 혐오하고 있었던 것을 보여준다. 이렇듯 동시대 강유의 북벌을 옆에서 지켜본 요화의 경우엔 강유의 지나친 북벌에 지쳤는지 "재능도 역량도 형편없으면서 병력을 남용하는데만 힘을 쓰니 저러다 망할것"이라며 대놓고 비판했다.

한편 동진의 간보는 '임금이 모욕을 당하고도 살았으면서 나중에 종회의 난에서야 죽었으니 애석하다, 죽더라도 올바로 죽었어야 하지 않느냐' 정도로 평가했으며 비슷한 시기 인물인 손성은 강유를 제대로 된 계책도, 충성심도 찾아볼 수 없으며 오로지 군주의 명보다 자신에게 유리한 행동만 일삼은 쓰레기 같은 자라 신랄하게 비판했다. 손성은 잡기의 저자로서, 강유의 당기-원지 일화의 출처가 잡기다. 손성의 강유평은 다음과 같다.
극정의 말은 잘못되었다. 무릇 선비란 백 가지의 행동과 많은 일을 처리하는 것이 뛰어나더라도 충(忠), 효(孝), 의(義), 절(節)을 다하는 것을 최고의 행동으로 삼는다. 강유는 위를 채찍질한다는 명분으로 촉 왕조를 바깥에서 분주하게 만들었으니 군주의 뜻을 어기고 자신에게 유리한 일만 했으니 충이라고 말할 수 없다. 어머니를 버리고 살 길을 찾았으니 효라고 말 할 수도 없다. 자신이 섬겼던 위나라를 해쳤으니 의라고 말할 수도 없다. 패하고도 죽음을 피하려고 했으니 절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또 덕정을 베풀지 않고 전쟁을 자주 하여 백성들을 피로하게 했으며, 어명에 따라서 임무를 맡았으나 적을 막지 못했으니 지혜와 용기가 있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이 여섯 가지 가운데 강유는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 그는 사실 위에서 살 길을 찾아 도망친 신하에 불과했다. 이러한 망국의 혼란을 초래한 인물을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된다고 했으니 사람들을 혼란하게 만든 말이 아닌가? 강유가 배우는 것을 좋아하고 청렴하게 살았다고 하지만, 이는 도둑이 훔친 재물을 나누어주면서 의롭다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또 그는 진양추에서 촉인들이 강유를 안타깝게 여긴다는 얘기를 듣고 '강유는 절의도 지키지 못하고 촉주를 옹위하지도 못한 주제에 뒷날 도모할 계책을 생각하다가 이랬다 저랬다 했고 역심과 순종 사이에서 이래저래 왔다갔다 했다고 하여 그의 충심을 의심하였다. 또한 기대하기 어려운 기회에서 물정에 어긋나는 것을 희망함으로써 나라를 쇠약하게 만들며 삼진(三秦, 관중關中)에서 여러 번 군세를 과시하였고, 이미 나라가 멸망한 뒤에 이치를 넘은 대단한 성공을 바랐으니 또한 어리석지 않은가!'라고 준엄하게 그를 비판했다.
손성이 영화(永和)[9] 초에 안서장군 환온을 따라 촉(蜀)을 평정할 때에 여러 노인들을 만났는데 그들이 말하길 강유가 이미 항복한 뒤에 은밀히 유선에게 표소를 올려 '종회에게 거짓으로 항복하여 섬기고 이를 틈타 그를 죽이고 촉 땅을 회복하고자 한다.'라고 말했으나 때마침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여 마침내 멸절 되기에 이르렀으니 촉인(蜀人)들이 지금도 그를 안타깝게 여긴다고 하였다.

손성이 생각건대, "옛 사람이 이르길 '시달릴 바가 아닌데 시달리면 이름이 반드시 욕되고 의거할 바가 아닌데 의거하면 몸이 반드시 위태로워질 것이며, 욕되고 또한 위태로워지면 죽을 날이 장차 닥칠 것이다.' 하였으니 바로 강유(姜維)를 일컫는 말이로다! 등애(鄧艾)가 강유(江由)로 들어올 때 군사들이 매우 적었으나 강유는 나아가서는 면죽(緜竹) 아래에서 절의를 떨치지도 못하고 물러나서는 다섯 장수를 총수하여 촉주(蜀主)를 옹위하지도 못하였고, 뒷날 도모할 계책을 생각하다가 역심과 순심 사이에서 이랬다저랬다 하였으며 기대하기 어려운 기회에서 물정에 어긋나는 것을 희망함으로써 나라를 쇠약하게 만들며 삼진에서 여러 번 군세를 과시하였고, 이미 나라가 멸망한 뒤에 이치를 넘은 대단한 성공을 바랐으니 또한 어리석지 않은가!"라고 하였다.

화양국지의 저자이자 성한- 동진 시대 인물인 상거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강유의 재주는 제갈량에 필적하지 못한데도 뜻은 그 넓은 법도를 계승하였으니(志繼洪軌) 백성들이 그 수고로움을 싫어하여 집과 나라를 잃었도다.[10]

이로부터 약 천여년 뒤, 자치통감의 주를 단 호삼성은 강유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비의가 죽자 촉의 모든 신하는 모두 강유의 아래에 있었으므로 이를 제지할 수 없었다. 석영은 동정의 서남쪽에 있으니 강유는 무도에서 석영으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적도현은 농서군에 속하는데, 강유를 위하여 백성들을 노역시켰으므로 촉이 망하게 된 원인을 제공하였다.[11](자치통감 권 76권)
강유가 수차례 전쟁을 하여 촉나라를 망하게 했으니 마침내 초주의 말대로 되었다. 험요를 내주고 강역을 개방하여 촉나라를 망하게 한 장본인이다.(자치통감 권 77권)
이처럼 호삼성은 강유의 수차례 북벌과 한중방어선 변경에 대해서 비판했다. 근데 정작 이후 강유가 촉을 부흥시키려 할 때는 진수, 간보, 손성 등의 평을 모두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주를 달았다.
강유가 실로 지혜로워 족히 종회를 손바닥과 허벅지 위에서 갖고 놀 정도였으나, 시세에 핍박당하고 운명에 제지되었으니 어찌하겠는가! 강유의 마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漢)을 위하였으니 천년의 세월 동안 단(丹)처럼 밝게 빛나는구나. 진수, 손성, 간보가 그를 폄하한 것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자치통감 권 78권)

호삼성의 경우엔 강유의 능력은 촉을 망하게 한 장본인 그 자체지만 충심 하나만은 평가할 가치가 있다고 본 것으로 보인다.

3.2. 현대의 평가

많은 사람들이 삼국지를 처음 접하는 계기인 연의에서, 강유는 제갈량의 후계자, 촉 최후의 충신으로 좋게 그려진 만큼 현대 대중의 인식은 좋은 편이다. 하지만 정사의 행보로 따지면, 강유의 북벌은 촉의 국력을 소모시켜 멸망의 계기가 된 주요한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전투 지휘관으로써는 좋은 능력을 갖추었지만, 난세에 한 국가의 외치를 일임하고 장기적인 국가 전략을 세우기에는 능력이 많이 모자랐다. 굳이 말하자면 열심히는 하지만 투입된 자원에 비해 성적은 안 좋은 타입의 장군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대에 있어서 역사적 인물 강유에 대한 평가는 그렇게까지 좋은편은 아니다. 일단 근성가이였다는건 누구나 인정한다. 단 현대의 많은 이들은 그를 국력이 약한 촉한을 말아먹은 전쟁광으로 보고 이에 대해 극렬히 비판하고 있다.

강유의 주된 비판점은 다음과 같다.
사실 북벌 자체가 성공하면 대박, 실패하면 안 하느니만 못한 것이기 때문에 북벌 담당자라는 강유의 포지션 자체가 성공하면 충신, 실패하면 역적이 되기 매우 쉬운 포지션이다. 그리고 강유는 실패했다. 노력과 근성이야 가상하지만 그의 사투는 결국 안 하느니만 못한 것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역사상의 평가는 의도는 좋았다. 하지만 그 노력이 촉한의 멸망을 부른 원인이다 정도로 깔끔하게 끝난다.

일반적으로 약소국이 대국 상대로 승리를 따는 방법이 '나라의 명운을 건 영혼의 한타로 한판 뒤집기'밖에 없긴 하다. 하지만 '나라의 명운을 건다'는 것은, 실패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뜻이지 않던가? 그래서 천하통일 각이 안 보이면 그냥 현실과 타협하고 장완이나 비의, 공손찬처럼 우주방어를 시전하는 게 낫다. 촉을 멸망시키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촉을 먹었을 때의 리턴보다 크게 만들면 더러워서라도 안 건드릴 테니까. 적어도 유비, 제갈량, 장완·비의는 각각 한중 공방전, 제갈량의 북벌, 흥세산 전투에서 위를 물리칠 만한 상황을 만들어 그를 증명하기라도 했다. 하지만 강유는 사람은 적군이고 아군이고 잘 죽였다(…)는 것 외엔 국가를 유지하는 계책에 있어선 그 어느 것도 증명하지 못했고, 오히려 본인이 촉을 멸망시키면서 안 좋은 쪽으로 자신이 삼국시대를 종결시킨 희대의 괴재인 사실만 증명해버렸다.

사실 강유의 북벌을 살펴보면 부족한 자원과 본인의 전략적 열세를 한판의 대승으로 타개하려는 의도가 역력하다. 앞에서 말한 대로 전략적으로 천하통일을 노리겠다면 이게 맞긴 하다. 그런데 이게 말이 쉽지 디테일을 보면...

...즉 대첩 십수회를 연속으로 일으키면 된다. 참 쉽죠? 한두번 이겨도 이걸 묻고 더블로 가서 후속 전투들까지 죄다 이겨야 성공이므로, 한 번이라도 지는 순간 그동안 이긴 보람도 없이 판돈은 바이바이.. 실제로 한두번 정도는 거의 성공해서 조수 전투에서는 순수한 전술적 승리로 등애마저 농서 일대를 포기하자고 건의할 만큼의 전략적 승리를 거둘 뻔했으나 여기서 더블로 갔다가 털리는 바람에 본전도 못 찾았고, 강유의 전략적 식견을 파악하고 있는 인재들이 곽회, 등애, 진태를 비롯해서 위측에 여럿 있었기 때문에 이 전략은 결코 성공을 거둘 수 없었다. 이 무렵 위나라 입장에서 강유의 위협은 단곡 전투 후에 조모의 조서에서 "역적 강유가 해마다 교활한 행동을 하여 백성들과 만족을 동요시켜 서쪽 땅은 편안할 수 없었다"고 언급될 정도로 적극적이며 지속적이었으나, 강유는 그 우위를 단 1년만에 상실할 정도로 잘 싸우지도, 유지하지도 못했다. 애초에 한 번만 이기면 되는 함대결전사상도 웃음거리 취급받는데 수십번을 연속으로 이겨야 하는 강유식 북벌이 일말의 현실성이라도 있을지도 미지수.

촉한이 북벌에 나서 이 정도의 성과를 거둔 적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고, 또 대승을 거둔 곳이 적도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 가치는 더욱 커진다. 촉한의 북벌은 위나라에 큰 선을 그어 량주 일대를 먹어 버리는 것에 중점을 둔 적이 많았는데, 이런 목적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던 때가 바로 이 때였다. 하지만 위나라에는 진태·등애와 같은 대촉 전문 장수들이 있었다는 점, 그리고 그들의 전략적·전술적 시야와 재능이 강유를 앞선다는 점, 결정적으로 촉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북벌로 강유가 무리수를 남발했다는 점 때문에 촉의 북벌은 실패한다. 강유가 전략·전술안이 지금보다 뛰어났다면, 혹은 그런 자가 사령관이었다면[16], 촉의 북벌은 뭔가 다른 성과를 좀 더 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북벌을 그렇게 말아먹었으면 국력을 정비하고 나라를 보전하는데 신경을 써야 함에도 강유는 이런 배려가 전혀 없었다. 애초에 일개 장수 정도로만 활동해야 하는 역량의 인물이 정치적 안배까지 고려해야 하는 대장군이라는 직위에 올라 권력을 위해 온갖 실책을 남발한 것이 강유의 행태였던 것이다.

강유의 실질적인 전술적인 패배로 유추되는 것은 256년의 단곡 전투와 262년의 후화 전투인데 둘 다 이전의 공적을 가릴 정도의 패배였다. 나머지 역시 지속적인 소모전, 잠시 맞붙은 다음 성과를 얻지 못하면 후퇴하는 경우, 전술적으로 승리를 거두되 전략적으로 소득을 얻지 못한 전투들이었다. 당대에 그 나름대로 성과도 올렸으나 제갈량을 계승한 북벌정책과 대패 때문에 내부에서도 비판을 받았다. 이런 북벌에서의 지속적인 실패는 촉한 멸망 당시 촉의 재정상태가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전쟁 피로도를 야기했고, 이것이 내부에서의 강유에 대한 비판점이 되었다.

삼국연의 같은 로망스 문학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역사적 인물로써 강유의 전략·정략 능력은 이전부터 꾸준히 저평가를 받아왔다. 적국인 위나라와 비교하면 항상 국력, 군사적으로 열세적인 위치였고 항장이면서 군부의 1인자라는 자리는 정치적으로 치명적인 약점이고 아예 숙청 1위 대상이었다. 강유는 이런 위치에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군사력을 남용하고 촉의 국력을 소모하여 많은 사람의 원망을 받았으며 잘못된 방어정책으로 촉한을 망하게 한 일은 동진 손성, 자치통감의 음주자 호삼성 등 두고두고 많은 역사가들이 비판했다.

실제 촉한의 멸망 당시 강유의 군사적 행동을 보면 한중을 제대로 소개할 능력도 없어서 한중 대부분을 위나라에 내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것은 유선이 제때 병력을 지원했느냐 아니냐를 떠나 애초부터 초기에 강유가 설정한 청야전술부터 제대로 되지 않았기에 강유가 한중의 방어작전을 제대로 짜지 못했음이 드러난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강유가 한중의 방어력을 약화시킨 탓에 많은 한중 내 요새가 그대로 항복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강유의 방비 계획은 처음부터 몹시 허술하였다.

거기다, 애초부터 부현에서 대기해야 할 본인의 위치를 거부하고 실각을 피하기 위해 서쪽으로 멀리 떨어진 답중에 오래 주둔함으로써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며 본인이 세운 계획도 망그러 뜨렸다는 부분에까지 이르면 유선에게 촉 멸망의 책임이 있다고 보기 보단 강유에게 촉 멸망의 가장 큰 책임이 돌아가야 하는 게 맞지 않느냐는 지적은 당연한 일이다. 애초에 강유가 답중에 가 있는 게 아니라 원래 계획대로 부현에 있었으면 음평교두, 음평에서 강유군을 보호한다고 이렇게 난리를 칠 이유가 없다. 강유가 위의 침공을 인지했다면 답중에서 무슨 지원군을 요청할게 아니라 바로 한중이나 부로 철수를 했어야 한다. 근데 강유는 원래 계획대로 하지 않고 지원군을 더 보내달라고 하고 있다. 이미 성도 중앙조정에서 온갖 사람들이랑 다 마찰을 빚어놓고선 답중에 틀어박혀서 방어선을 방기하고 있는데 대체 이런 장군을 어떻게 믿고 촉 조정에서 지원군을 보낼것인가? 그나마 촉 조정 역시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있었기에 곧 지원군을 보내기는 했지만 덕분에 지원군은 당장 위급한 한중을 지원하는 게 아니라 음평에서 한달이나 허송세월하며 대기하고 있는 꼴을 맞이했다.

또한 촉한 말기 국력 부족에 대한 자료가 부족한 점 때문에 강유의 실책은 그동안 가려진 면이 있었다. 특히 촉한이 정벌된 이후 등애가 익주의 풍부한 물자를 강조하며 가까운 시일 내에 오를 치자고 주장했기 때문에 이를 보면 자원도 충분한데 싸우기도 싫고 강유가 공적 세우는 게 눈꼴시려서 비협조적으로 군 촉한 인사들 때문에 망했다는 구도가 세워지기 쉽다. 그러나 촉한이 경제력은 괜찮았던 것은 사실로 보일 수 있을 지는 몰라도, 문제는 인구력이다. 그 중 특히 젊은 남성의 인구가 크게 문제되었을 확률이 높다.[17] 이는 단곡 전투에서 수만 명에 달하는 인명 피해를 입은 이후로 강유에 대한 여론이 급격히 악화되고 후화 전투의 대패 이후엔 촉 정계 모두가 강유를 적대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미 이릉대전, 제갈량의 북벌( 가정 전투) 당시부터 수많은 인재 뿐만 아니라 싸울 수 있는 젊은 장정들도 크게 잃었던 경우가 촉의 전쟁사에서 다수 발견되는데, 이로 인한 세대 교체의 어려움은 인재 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에게도 생겼을 것이다. 애초에 비의 집권 당시부터 위를 상대로 지속적으로 군사를 동원했음에도 마땅한 성과는 없이 병력만 소모하던 강유의 지속적인 북벌을 비의가 어떻게든 제어하면서 추가적인 전쟁 수행을 저어한 이유가 있을만했던 것이다.

결국 비슷한 시기에 이 정도 대패를 당한 제갈각이 끝내 손권의 보정대신이라는 위치에도 불구하고 오나라 정계의 공적이 되어 참살당한 것을 생각해봤을 때, 오나라보다 더 열악한 상황의 촉에서 요식행위에 불과한 벼슬 강등 퍼포먼스를 실행하고, 별다른 공로도 없으면서 그 어떤 일말의 책임조차 지기를 거부하고 금세 군부의 최고 권력자라는 원래 위치로 복귀한 강유에 대한 촉의 여론이 바로 최악으로 굴러 떨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당장 제갈각이 그 때문에 위험분자로 인식되어 제거됨으로써 오나라가 오멸망전까지 30여 년의 유예를 얻은 점을 감안했을 때 똑같은 짓을 저지른 강유를 촉 조정이 제거하지 못하고 그의 전횡이 계속됨에 따라 결국 멸망의 위기를 맞은 점은 매우 의미심장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선 같은 말기 상황에서 촉보다 오의 정치가 그만큼 더 건전했다고 볼 여지까지 있다.

이처럼 강유의 실제 행적을 돌이켜봤을 때 그가 촉 멸망의 1등 공신이 분명함에도, 촉한정통론로 인해 생겨진 민간전설, 소설 삼국지연의의 영향력이 대중들에게 너무 크기 때문에 과도한 옹호를 받는 부분이 있다는 점은 명백하다.[18] 제갈량과 촉한의 가장 큰 실책은 이런 분탕질을 일삼는 야심가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높은 자리에 기용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인데, 후대에 제갈량의 발탁을 받은 인물 + 최후의 행적인 촉 부흥 시도라는 점들이 제갈량의 유지를 이어받은 충신의 행보로 여겨져서 미화를 받은 측면이 있다.

3.2.1. 강유가 가족을 버린 이유에 대한 소고

강유는 나쁘게 말해서 모친의 안위보다 자신의 출세, 자신의 신념만 중요시한 인물이라는 시각도 있다. 당장 손성부터가 '강유는 가족을 버렸는데 무슨 본받을 것이 있느냐?'라고 일갈했고, 강유의 행적에 대해서 손성의 의견을 모두 반박하며 강유를 옹호한 배송지 역시 이 부분은 손성의 의견에 동조했다.

남안과 천수의 백성들이 주멸되었을때 강유의 가족들은 이 주멸에서 면제되어 강유에게 다시 위로 복귀하라는 편지를 보낼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의미에선 이미 기현이 위군의 보복에서 안전해져 있는 상황이었고 따라서 강유가 다시 위로 돌아와서 기현 관련 증언을 하지만 않는다면 강유의 집안 자체가 위의 유공자인만큼 그냥 넘어갈 소지가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강유의 모친 역시 기현이 이미 안전해졌고 강유가 돌아와도 생명이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강유가 불가피한 상황에서 항복했으며 다시 돌아갈 의지가 있다고 증언하고 위에 돌아갔다면 강유의 일족들이 완전히 사면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서 편지를 보낸 것일터이다. 이 상황에서 강유가 다시 돌아가지 않은것은 돌아가서 위나라의 일개 지방관리로써 변변치 않게 사느니 촉에서 더 대우를 받고자 하여 가족들을 버린것이 맞으며, 강유가 본인의 이런 야심을 총족시키기 위해 일족들을 확실하게 사면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한 것이라고 볼 여지가 있다. 손성과 배송지 역시 관련 기록들을 유심히 읽어 봤음에도 최종적으로 강유는 가족을 저버린 패륜아가 맞다고 한 점은 바로 이 점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렇게 서술했다고 볼 여지가 있다.

3.2.2. 왜 그렇게 북벌에 목숨을 걸었는가?

촉한의 건국 명분 상, 북벌을 대놓고 포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19] 하지만 현실적으로 촉과 위의 국력 차는 최소 5배였기 때문에 촉과 위의 소모전 양상 전쟁 상황이 계속될 경우 명백히 촉이 더 큰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촉 정권은 핵심 지역인 삼촉, 한중 외에 파나 남중에 대한 특별한 개발을 진행하지도 않고 오로지 국력을 북벌에만 쏟아부었기 때문에, 각지에서 개발을 시행하며 국력을 증진시킴과 동시에 북벌을 했던 오와도 다른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20]거기에 이런 무모한 북벌의지를 통제해야 할 후주 유선의 권력은 성도에서 단순히 궁정의 일을 처리해야 할 수준으로 약했으며, 제갈량 사후 제한된 국력으로 북벌을 효율적으로 수행할 인물도 없었기 때문에 촉은 북벌에 쏟을 에너지를 줄이고 내실에 최대한 집중해야 하는 상황임이 명백했다.

때문에 촉은 위와의 적대 관계와 북벌 추진 의지 자체는 대외적으로 유지하되, 실제 군사행동은 최대한 줄이고 국력을 보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오와의 동맹이 손권의 칭제 등으로 인해 삐걱이기는 했으나 나름 굳건하게 유지되었고, 위의 촉 정벌 의지도 사마소 시군 전까지는 적극적이지 않았던 터라 마음만 먹으면 촉은 삼국 중 최하위로나마 생존할 수 있었다.[21] 이 상황에서 장완과 비의는 북벌을 자제하고 제갈량의 남정 이후 방치되었던 남중에 손을 대어 월수군울 수복하고 남중에 익주계 인사를 내항도독으로 지정하는 등 익주계 인사들과 손을 잡아 지방정권으로써의 생존을 도모했다. 하지만 이들의 뒤를 이은 강유는 촉한의 다른 인물들에 비해서도 유독 북벌에 대한 주장이 강했다. 제갈량의 명령까지 무시하며 북벌을 진행하려 한 위연은 물론 장완, 비의 등도 제 나름대로 북벌을 진행하긴 했지만 강유는 다른 사람들이 '아 이건 좀?'이라고 하는 수준까지 북벌을 밀어붙였다. 물론 강유의 북벌 20년간 위는 거의 수비에 치중했고, 일진일퇴를 반복했기에 국소적인 전투에서 촉의 승리도 많아 위 입장에서도 강유는 굉장히 거슬리는 존재였다. 하지만 충분히 감당 가능한 피해만 입은 위에 비해, 촉의 북벌은 한 번 한 번이 총력전에 가까운 것이었고 강유의 권력이 강해지며 내정과 개발을 하지 않고 무의미한 북벌에 국력을 쏟을때마다 촉은 갈수록 피폐해지고 약체화되었다.

비의 사후 이런 강유를 통제할 유일한 인물은 바로 촉주 유선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유선은 그럴 깜냥이 전혀 되지 못했다. 촉한 출신도 아닌 강유가 왜 그렇게 북벌에 집착했는지는, 당시 촉 조정 내에서의 강유의 불안한 입지를 감안하면 간접적인 추론이 가능하다.

촉한의 형성은 유비 군벌집단과 형주지식인 계층의 결합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형주학을 구성하는 명사들 중에서 양양그룹은 관치를 계속하는 유표에 실망하고 있었다. 이러한 거리감을 유비는 놓치지 않고 양양그룹에 접근했다. 유비는 초기 신하들 가운데 명사가 없었다. 양양그룹 입장에서도 한실의 말예이자 영웅이었던 유비는 주목할 만한 존재였다.

삼고의 예는 당시 좌장군인 유비가 지위 없는 제갈량을 맞이하기엔 지나쳤다, 유비는 서서에게 와룡을 데려오라 요구했으나 서서는 제갈량 혹은 나아가서 자신을 포함 양양그룹이 높이 평가받도록 유비가 몸을 낮춰 찾아가도록 했다. 유비가 제갈량에게 기대한 능력 중 하나는 형주출신 명사를 끌어오는 것이었다. 출사 후 제갈량의 입지가 최고위였던 것은 아니었다. 입촉 후에도 제갈량의 위치는 미축보다 아래였으며 법정 사후에야 제갈량은 유비 정권 최고위에 올랐다. 때문에 제갈량은 세력기반 구축과 자신의 포부 실현을 위해 양양그룹을 포함한 형주명사들을 중용하도록 유비에게 권했다.

입촉 후 익주 출신자가 정권에 우대받았다 보기는 어렵다. 유비는 법정의 헌책에 따라 행동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를 상서령에 임명했다. (근본없는 직위를 가진) 군사장군 제갈량에 비해 법정은 정당하게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입장이었다. 유비는 법정을 제갈량의 대항세력으로 만들려 했다. 형주 명사층과 유비 사이의 대항이다. 방통이 전사하고 마량, 요립, 반준 등이 형주에 잔류하자 제갈량의 세력은 감퇴했다, 이에 제갈량은 익주에 거주하는 형주명사를 등용하여 세력 보강을 시도했다. 이들이 이엄, 동화, 비의, 유파 등이다. 제갈량은 이엄에 대한 높은 인물평가를 한 후 관직을 상서령 중도호에 이르게 하였고, 비의를 우대하여 후계자의 한 사람으로 지명했다.

유비는 관우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제갈량의 기본 전략과 조운의 현실적인 간언을 모두 저버리고 이릉에 갔다가 자기 세력을 깡그리 말아먹었다. 대항세력이던 법정은 병으로 죽고 맹달도 항복하며 익주파의 중진인 황권도 전투 중 고립되어 항복함으로써 제갈량에 대항한 세력은 소멸했다. 한편 제갈량은 법정 사후 후임 상서령으로 유파를 앉혀 자신의 세력을 신장했다.

군주권의 가장 중요한 기반인 군사력이 괴멸상태였기 때문에 유비는 제갈량이 정권을 스스로 차지해도 좋다고 말했다. 왕부지의 평에 따르면 이것은 군주가 내려선 안 되는 난명이다, 신뢰관계가 있다면 이 따위 지킬 수 없는 난명을 내리지 않는다. 유비는 관우만큼 제갈량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비가 이릉에서 대패한 이후 제갈량과 형주인사의 확고한 우위 때문에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유비 친정기에는 익주에 특별한 배려가 없었다. 그러나 형주 상실로 익주가 촉의 유일한 근거지가 되자 제갈량은 익주 지배를 확립할 필요가 있었다. 제갈량은 본인이 정점으로 있는 형주 명사사회에 익주인을 끌어들인다. 강유를 평가할때 제갈량은 이소와 마량을 비교대상으로 하고 있는데 이소는 익주, 마량은 형주의 명사였다. 익주명사가 형주출신과 일체화된 명사사회 형성을 알 수 있다.

조위의 구품관인법 같이 특별한 인사제도를 촉에서 제도화하지 않은 것은 유선과 대항할 필요가 없어서 제갈량의 인물평이 그대로 관직에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제갈량은 '익주 사람들은 제갈량이 당시 사람들의 재능을 다 발휘할 수 있도록 기용해준 것에 감복했다'고 평가될 정도로 익주 지배를 확립한다.

또한 제갈량의 익주 통치는 익주 호족과 경제적으로 다투지 않음이 특징이다. 도강언 수리, 소금, , 비단, 둔전등의 정책을 핀 제갈량의 거듭되는 북벌에도 익주 출신자들의 비판이 없었다는 것은 제갈량의 경제정책이 익주 호족들에게 우호적으로 받아들여졌음을 증명한다. 제갈량이 정치적으로는 공정한 법률을 적용하되 엄격하게 통치했다라고 이래저래 칭찬이 나오지만 중요한 것은 제갈량이 익주인의 기득권을 침해하지 않음으로써 익주 출신자들이 형주명사의 정치적 우위를 인정하고 그에 편입되는 명사사회가 성립되는 것이며, 그것이 제갈량 보정시기의 특징이다.

제갈량은 왜 북벌을 했는가? 첫째 제갈량이 익주는 피폐해졌다고 인정하면서 북벌을 단행한 것은 한실 부흥을 위해서다. 촉한은 병사가 총인구의 10%를 차지하는 군국주의 군사국가였다. 그 군대에는 비익주 출신자들이 다수 포함된다. 즉 외래 정복자가 익주에 뿌리내리기 위한 정통성이 한실 부흥이란 국시인 것이다. 한실 부흥이라는 국시를 수행하지 않는 촉한은 존재할 이유가 없다. 제갈량은 국가의 존재의의를 걸고 북벌에 임했던 것이다. 제갈량의 북벌에서 두번째 목적은 제갈량 본인의 군사력 장악을 위한 것이다. 유비 생전에 제갈량이 군을 이끌었던 것은 방통이 전사하고 형주에서 유비를 구원하러 갔던 것이 유일하다. 유비 생전 군주권의 물리적 기반인 군사력은 유비와 일족이나 다름없는 관우 장비가 장악했다. 제갈량은 유비에게 그럴 정도의 신뢰관계가 없었다. 유비 사후 제갈량은 유비 사후 남정과 북벌로 군권 장악을 이루었으며 승상부는 촉한의 실질적 정부로 기능했다. 제갈량은 자신의 신념인 한대적 정신으로 인해 선양받지 않았으나 그것조차 가능할 만큼의 권력을 북벌을 통해서 장악했던 것이다.

익주명사의 제갈량 정권 지지의 또다른 이유는 그가 촉학을 보호해줬기 때문이다. 제갈량 본인은 춘추좌씨전을 중심으로 하는 합리적 형주학을 배웠다. 그러나 익주의 전통적 유교는 미래 예언을 기록한 위서를 중시하는 것으로 촉학이라 했다. 촉학은 유비 정권에 협력하기도 했지만 한나라를 대신할 자 당도고라는 예언이 존재하기도 했는데 이는 촉에서 촉'한'을 경영해야 하는 제갈량에게 곤란했다. 일단 제갈량 생전에는 타협이 가능했지만 근본적으로 형주학과 촉학의 해석이 다르므로 문제가 생겼다. 이 문제는 북벌과 내정 사이에서 일단 균형을 잡은 장완, 비의 대에는 수면 아래에 잠들어 있었다. 그러나 강유가 무분별한 북벌을 되풀이하자 촉 내부에서 불만이 퍼져나갔고 당도고 예언이 다시 공공연하게 퍼져나갔다.

강유 이전 장완과 비의의 보정기는 출병을 멈추고 익주 토착정권으로서 존속을 도모했다. 형주세력이 상대적 감퇴했으나 촉한 명사사회가 존속하므로 거기서 높은 평가를 받은 장완과 비의 지배는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익주정권화는 정권의 정통성 약화를 부채질했고, 장완의 침공 계획은 그 때문이 짜여진 계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장완과 비의가 제갈량보단 못해도 조정과 한중 막부내 지도력이 있었으므로 이 시기까지는 어디까지나 내부에서 합리적 논의에 따라 북벌 계획이 재조정 되었고, 제갈량이 죽은 이후에도 20여년간 촉한의 내부 정세는 평온하게 안정될 수 있었다. 그러나 강유가 군권을 잡은 이후부터는 이런 내부 구성원들을 배려한 합리적인 논의가 통하지 않았다. 촉한 정계에 포진해있던 형주, 익주 사인층과 관계없는 양주 천수군 출신의 강유는 제갈량의 북벌을 계승하여 한실부흥이라는 국시를 무대뽀로 수행함으로써 정권 내에서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려 했다. 강유의 기반이 그가 육성한 군권외엔 취약했음을 반증한다고 할 수 있다. 조위에서 촉한으로 항복했고 익주에 세력을 갖지 못했으며 동향의 사람도 적었던 강유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제갈량의 평가와 그가 쥔 군사력 뿐이었다. 따라서 강유의 기반은 자신이 이끄는 중앙군 뿐이었으며 강족과 호족의 사정에 밝은 강점을 활용해서 공적을 올리는 것 이외에 권력을 확립할 방법이 없었다.

즉, 유비의 이릉대전으로 파탄난 촉한 정권의 존립 근거를 박박 긁어모아서 다시 꽤 그럴듯하게 세운 제갈량과 그거 이어 받아서 익주 적당히 운영하면 되는 정식 후계자 장완, 비의와 달리 강유는 제갈량의 권위 없으면 끈 떨어진 연이었다. 그래서 제갈량의 권위를 거의 그대로 이어받은 장완이나 비의와 달리 강유는 스스로 제갈량의 권위를 이어받아야 할 당위성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젊었을 적 제갈량과 같이 강유도 공명심과 권력에 대한 갈망이 있었고 위나라로 그냥 돌아가면 평생을 촉한에 부역한 인물로써 천수에서 썩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장완, 비의 상태에서 만족하면 절대 금의환향으로 천수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강유는 촉의 국력을 갈아가면서 제갈량이 세웠던 국시를 이용해 병력을 남용하는 짓을 일삼고 촉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 할 말도 안 되는 군사적 무리수를 지속적으로 감행했다.

적어도 제갈량의 북벌은 유비가 이릉대전으로 피폐화시킨 익주 경제력을 어느정도는 배려하여 이뤄졌고 물자와 병력을 소모하긴 했지만 익주민들에게 대놓고 원망을 받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 이는 제갈량에 대한 현대의 평가가 이러느니 저러느니해도 제갈량이 본인의 정치력과 확고한 국정장악력을 토대로 촉 내부 여론을 성공적으로 장악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22] 그러나 그러한 정치적 배경도, 정치적 능력도 없으며 오로지 권력욕과 공명심에 눈이 먼 강유는 제갈량과 달리 그런식으로 여론을 장악할 능력도, 배려도 전혀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 익주민들은 제갈량처럼 자신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납득시키고 설득해야 할 대상이 아닌, 공명에 대한 허영심과 부질없는 야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자원에 불과했다. 태생부터 전략적, 군수보급적 시각이 백치 상태에 가까웠던 군인인 강유는 제갈량처럼 내정과 군사의 균형을 갖추며 국가를 운용할 능력이 없었고 결국 무리한 북벌 추진은 촉이 멸망에 이르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강유는 요화가 지적했듯이 적을 과연 아군이 압도할 수는 있는지 의문인 상황에서 익주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면서 동원할 수 있는 군사력인지도 전혀 배려하지 않고 그저 미친듯이 병력을 뽑아가기만 급급했다. 결국 적의 상태도, 나의 상태도 어느 정도 였는지조차도 제대로 몰랐다는 것이다.

단적으로 한중을 적에게 내주고 청야를 벌인단 작전 자체가 한중 주민들을 큰 위험에 빠뜨리고 나아가 자기를 출세시켜준 은인 제갈량의 묘까지 적군에게 내준다는 무책임하기 그지 없는 작전이었다. 종회가 현지위무책을 쓰고 민심을 안정시킬 용으로 한중에서 이러저러한 백성들에 대한 배려와 정치적 퍼포먼스를 선보일 줄 아는 인물이어서 그렇지, 그런 인물이 아니었더라면 한중은 끔찍한 일을 당할 수도 있었다. 또한 왕부지는 강유가 둔전하지 않아 촉의 멸망을 초래했다고 비판했다. 이런 강유의 끊임없는 폭거와 독단적인 북벌로 인해 형주와 익주 출신 모두 강유를 비판하여, 촉한 명사사회는 분열되었다. 강유 보정기의 형주명사는 제갈첨, 동궐, 번건, 염우, 종예, 요화였는데 이들 모두 강유의 북벌에 비판적이었다. 촉학의 대표 초주 또한 구국론을 저술해 출병을 반대했다. 위에서 말한 당도고 예언은 유씨가 조위로 대체된다는 뜻으로 해석되었다.

강유 보정기에 익주 출신 중 최고위인 장익 역시 강유에 정면으로 반대한다. 강유가 장익을 데리고 다닌 것은 그가 좋아서 대리고 다닌게 아니다. 역시 강유를 대놓고 비판한 요화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강유가 이들을 억지로 끌고 다닌것은 군부 핵심인 이들의 이반을 경계하기 위해서였다. 강유의 기반은 중앙군 뿐이었는데, 거기서조차 반대자가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촉한의 명사사회는 강유, 강유에 비협력한 형주명사, 익주의 보전을 원하는 익주명사 세 갈래로 분열했다. 이를 틈타 유선의 총애를 받은 진지와 환관 황호가 실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그들의 권력은 촉한 명사사회의 분열에 따른 권력투쟁의 결과로 장악하게 된 것에 불과했다. 즉, 원래대로라면 동맹인 오나라인들이 평가했듯이 그렇게 쉽게 망할 국가가 아니었던 촉한을 멸망시킨 책임은, 잘못된 방어체계를 구축하고 촉한 내부의 분열과 국력 쇠퇴의 근본 원인을 제공한 강유에게 있으며, 난신적자[23] 강유의 폭거로 인해 촉한은 그가 집정한 10여년간 천천히 약체화되어 멸망의 길밖에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상의 평가는 일본 와세다대학 문학학술원 문화구상학부 교수 와타나베 요시히로의 저작 '삼국지의 정치와 사상'을 토대로 작성한 것이다.

정리하면, 촉한은 삼국 중 최약체이긴 했으나 그리 쉽게 망할 나라는 아니었다. 위가 압도적인 국력을 갖춘 건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위 입장에서 촉은 익주의 경제력과 유비와 제갈량이 갖춰놓은 행정 체계, 그리고 험준한 지형 때문에 내실이 있고 공격하기는 까다로운 난적이었다. 촉의 북벌 기간 위는 줄곧 수세였고 흥세 전투 이래 촉을 역공해도 성공적이지 못했으며, 고평릉 사변 등으로 인해 내부도 극히 혼란스러운 상태라 촉을 위협할 상황이 전혀 되지 못했다. 공동의 적을 둔 오와의 관계도 굳건하게 유지되었기에, 보신만 잘 하면 충분히 장기간 생존할 수 있었던 촉한을 멸망시킨 책임에서 강유는 자유로울 수가 없다.

4. 강유 VS 등애

라이벌 등애와의 누가 낫냐는 논쟁 또한 삼국지의 대표적인 얘깃거리 가운데 하나다. 이 역시 강유에 대한 긍정 평가와 비중 평가를 가르는 중요한 부분으로 의견이 갈리고 있다.

당대에는 기록상 등애가 "강유는 영걸이지만 날 만나 곤궁해진 것"이라 자뻑하자 식견있는 자들이 내심 비웃었다고 한다. 즉 당대 인물들이 보기에 강유가 비록 등애에게 패배했지만 등애보다 능력이 부족한 인물로 치부되지는 않았다.

일단 빠와 까를 떠나서 삼국연의가 쓰이기 이전, 당과 송대에 무성왕에게 제사를 지내며 안진경등이 무성왕에게 배향시킬 역대 명장 70여명을 등애는 계속해서 뽑혔지만 강유는 뽑히지 않았으며, 삼국지 후기 인물로는 등애 이외에도 양호와 육항이 뽑혔다. 이때 뽑힌 사람들은 삼국지의 커버 범위로는 제갈량, 관우, 장비, 장료, 등애, 황보숭, 주유, 여몽, 육항, 양호인데 강유의 상관인 제갈량은 전대의 백기 한신, 후대의 이정 등과 함께 이 70여명 중에서도 상석에 배향되었다. 70여 명 뽑았는데 10명이 삼국지의 인물인 걸 보면 당대에도 삼국지의 인기가 얼마나 좋았는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듯.[24] 이해응(李海應)이 작성한 <계산기정>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 순조 시기에서야 강유도 청나라 태공묘에 겨우 배향되어 명장의 말석으로 인정받았던 모양이다. 해당내용 다만 해당 청나라 시기에는 삼국연의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인기가 높았던 것을 감안해야 한다.

4.1. 강유 우위론

강유가 항상 등애에게 패했다는 이유로 무조건 강유가 등애와 진태에 비해 뒤떨어진다 볼 수는 없다는 주장이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북벌에 있어서는 공명의 시대에 비해 강유의 시대는 인재난이 더 심해져서, 위연, 왕평, 오의 등 숫적으론 부족해도 질적으로는 크게 밀리지 않았던 제갈량 시절의 명장들이 죽거나 노쇠하여 시간이 흐를수록 강유는 총사령관 겸 야전사령관 겸 야전지휘관적인 존재가 되어 홀로 군부를 지탱해 나가야 했다고 본다. 인재가 얼마나 부족했으면 촉 내부에서 상당히 아니꼬왔을 항장 출신+외지인+젊은 나이였던 강유에 전적으로 의지해야 했다. 왕평 역시 강유와 비슷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인재 풀이 중간만 됐어도, 왕평과 강유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났어도 쉽게 중용되지 못했을 텐데 둘은 중용을 넘어 군에서 최고위직에 올랐으니 인재가 진짜 부족한 것을 새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강유는 과거 제갈량이 받았던 바와 같은, 촉의 전 국력을 기울인 지원을 받은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비의 생전에는 1만 명을 한도로 하는 소수 전력만을 부여받았고 비의 사후 대장군직에 오른 이후에도 강유가 지원받은 병력 규모는 '수만 명'을 넘지 못한다.[25] 북벌을 수행했던 제갈량이 동원한 '최소 병력'이 진창 공격 당시의 '수만 명'이었고 최대 10만까지 동원했던 걸 생각하면 본국의 지원 규모는 현저히 적다.

강유의 이용 가능한 자원을 진태나 등애가 이용할 수 있던 자원과 비교해보면 강유의 어려움을 이해할 수 있다. 강유의 적도 전투 당시 정서장군 진태가 등애에게 합류, 신속하게 구원하는 것 이외에도 강유의 적도 공격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사마사는 양주군과 사마망군을 합류, 적도로 진군하도록 명령을 내린다. 문제는 이 과정, 즉 적도의 상황이 사마사에게 전하여진 뒤 의사결정이 내려져서 군사 행동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단 20여 일만에 이루어졌다는 점. 게다가 사마사의 경우 600리의 거리 이상에서 하게 되는 군사 행동은 하나하나 보고하지 않겠다는 진태의 말을(진태전) 허락할 정도로 진태에게 많은 자율권을 준 상태였다. 음평과 한중 일대를 막기 위해 요화 장익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성도에 하고서도 1년을 기다려야 했다는 강유의 상황과는 다르다.

등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등애의 요청 역시 사마사 사마소는 적극 지원했으며, 적어도 등애가 정촉(征蜀)하여 올린 상소문에 대하여 사마소가 거부의 의사표시를 하기 전까지는 등애는 사마 집안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위와 촉의 국력 차이와 더불어 상관과의 관계에까지 진태와 등애가 위 조정 및 사마 가문으로부터 받았던 지원은 강유와 유선과의 관계와는 비교할 수 없다. 한 마디로 강유는 스스로 처음부터 끝까지 없는 것도 만들어내가며 싸워야 했던 입장이었으며, 진태와 등애는 자급자족에는 신경 쓸 필요 없이 충분한 지원을 토대로 하여 자신들의 모든 역량을 강유와의 싸움에 쓸 수 있었다. 즉 진태와 등애, 강유간의 전적 차이를 가지고 세 사람의 능력상 우열을 논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결론적으로 현대에서 강유와 등애의 능력 비교에 대한 물음에 대하여 등애빠들은 주로 정사에서의 결과를 내세워 등애를 우월하다 주장하고, 강유빠들은 주변 상황 등이 불리한 위치에 있었던 것을 고려했을 때 개인의 능력은 강유가 등애보다 위였을 거라 주장하는 편이다.

4.2. 강유 열세론

일단 정사 기준으로 봤을 때 강유는 등애에게 패배하기만 한 걸로 나온다. 정사 강유전과 등애전 및 후주전에서 대패와 그 여파가 자세히 묘사된 단곡 전투, 후화 전투를 비롯한, 많은 전투에서 등애는 강유의 앞길을 가로막는 역할을 한다. 아무리 승자의 역사라고는 하지만 연의 및 후세 매체에서의 라이벌 이미지 치고는 강유가 일방적으로 당한 감이 없지 않다.

그렇기에 강유의 북벌에서 승리의 가능성이 있었느냐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일관적으로 예스라 답하기는 어렵다. 물자, 병력, 병종(촉은 보병 위주인데 비해 위는 정촉(征蜀) 기병을 따로 편성하여 운용할 정도였다), 원정 거리, 본인의 전략전술적인 우위 등 물리적, 정신적인 조건에서 어느 것 하나 위군보다 우세할 것 없는 촉군으로 전쟁을 하기 위해서라면 기동력을 이용, 특정 시점에 특정 지점으로 군의 전력을 이동 & 공격을 집중시켜 상대의 수비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강유가 수로를 이용, 촉군을 이동시켰기에 강유의 촉군이 기동력의 측면에서는 위군보다 뛰어난 전력을 보유했다고 볼 수도 있다.

사실 국력의 열세외에도 진태, 등애 등의 방어를 볼 때 그가 자신이 원하는 지역에서 효과적으로 전력을 집중, 공격을 감행했다 보기에는 어려운 점도 있다. 즉 근본적인 군사적 능력으로 봐도 진태나 등애에 비하면 강유는 이들보다 뒤떨어졌다는 것이다. 일례로 255년의 적도 전투의 경우, 진태의 거짓 소문에 속은 강유가 복병을 엉뚱한 곳에 배치하면서 진태의 적도 구원을 막지 못해 점령을 포기해야 했으며(진태전) 256년의 경우 등애의 방어에 강유가 말렸다고 추측할 수 있다.

결국 강유가 진태와 등애보다 불리한 객관적 요건을 뒤엎을 정도로 뛰어난 점을 갖추고 있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정사 촉서 종예전에서 강유와 동시대인이자 여러 전투에 함께 참전했던 요화가 262년 무렵의 강유의 후화 전투를 보며 "강유는 적보다 병력과 지모가 뛰어나지도 않으면서 용병(출진)이 끊이지 않으니 스스로를 태울 것이다."라 평한 것도 이를 어느정도 뒷받침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언제나 등애, 진태, 곽회 등 위나라 서부 방어군 실세들이 죄다 포진한 위군과 싸운 것들을 보자면 강유가 진태나 등애 등을 압도하고 뛰어났다고 주장하기 위한 근거가 미흡하다. 강유는 이들 상대로 어느 누구를 상대로 우세를 접하지 못하고 이들의 전공에는 강유를 격파한 내용이 꼭 하나씩은 들어가는 상태다. 그리고 촉에서 지원을 안했다고는 하는데 비의가 죽은 이후부터는 강유가 혼자로 군권을 오로지 했으므로 촉 사람들은 매년 강유의 총력전에 시달리느라 심신이 지쳤고, 이기지도 못하는 싸움에 자꾸 끼워넣어서 피곤하다는 기록이 계속 나온다.

무엇보다도 촉한멸망전 당시의 행적만 봐도 두 사람의 군사력 능력은 판이하게 우열을 가릴수 있다. 강유는 잘못된 작계로 촉한을 망하게 했던데 반해서 등애는 난관에 빠진 촉정에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촉을 멸망시키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 마지막 전장에서 서로간의 실적이 이토록 분명한데 등애가 강유보다 뛰어난 장군인것은 당연한 것이다.

거기에다가 등애와 강유의 라이벌리는 "강유는 본래 한 시대의 영웅이었지만, 나를 만났기 때문에 곤궁해진 것일 뿐이다."라고 등애가 강유를 띄워준 것에서 비롯되는데, 상술했듯이 주위의 식견 있는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다고 전해진다. 여기서 식견 있는 사람들의 성향에 따라 이 비웃음의 의미가 달라질텐데 강유를 높게 평가했던 사람이라면 강유를 이겼다는걸로 본인의 능력을 자랑하는게 아니꼽게 느껴졌을 것이고 강유를 저평가하는 사람들 입장에는 마치 그의 옛 상관인 사마의가 제갈량을 일세의 기재라고 띄워주면서 자기 PR를 했던거마냥 강유 같은 졸장을 영웅으로 띄워주면서 그걸 자신의 평가로 올리는 속보이는 짓을 했다고 비웃었을 것이다. 주위의 식견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극정처럼 강유에게 온정적인 사람들도 물론 있었겠지만 상당수는 강유와 대적하며 오랜기간 그를 적대했던 위군 장수들이나, 강유를 극렬히 비판하던 촉의 사대부들이었을 테니 후자의 의미가 다분히 있었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다.

또 강유를 두고 한 등애의 말이 비웃음을 당한것은 등애의 능력이 강유보다 떨어져서가 아니라 등애의 출신이 미천하고 말을 더듬는다던지, 임지에서 지나치게 병사들을 부려먹었다던지 하는 일로 욕을 많이 먹는 등 개인적인 매력이 강유보다 떨어지기 때문도 있다. 강유는 그를 비판하는 측에서도 개인적인 미덕은 충분했다고 평가받는 등 사생활에 있어서는 깨끗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1] 첫 등장 당시 임팩트로 인해 조운과 함께 '청년 장군' 이미지가 강한 강유지만 그가 촉한에서 봉직한 세월만 근 40여 년이고 그 자신의 재능만으로 고위직에 올랐으며 최후까지 노장의 몸으로 촉한을 위해 충성하면서 고군분투하다가 편하게 눈을 감지도 못했다. 충분히 노장, 노익장 소리 들을 만한 인물이나 요화, 장익 같은 숙장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강유의 최측근이자 부장인 유은과 왕사도 강유보다 나이가 많을 정도로 당시 촉한에 강유보다도 더 나이가 많은 노익장들이 군부에 넘쳐나 부각되지 않았을 뿐이었다. [2] 백약을 중원의 명사에 비교하자면 공휴나 태초도 그보다 더 뛰어나진 않을 것."이라는 종회의 평가는 발언자는 물론 논하는 대상, 대조군 두 명, 심지어 들어주는 사람(두예)까지 삼국시대 말기의 슈퍼스타들이라 유명한 발언이다. 다만 제갈탄과 하후현(그리고 강유)가 각각 유명한 포인트가 너무 다르기 때문에 왜 저들을 나란히? 싶은 반응이 나올 수도 있는데, 사실 하후현에 비해 좀 묻히는 감이 있다 뿐이지 제갈탄도 나름 당대의 손꼽히는 셀럽이었다. 하후현의 최고 간지 일화가 사실 제갈탄의 일화였다는 기록도 존재하고. 한편으로 종회와 관련된 모든 이야기가 그러하듯, 훨씬 간단한 접근법도 있다. 바로 얼평이었다는 것. 하후현이야 말할 필요가 없는 자체발광 미남이었고, 제갈탄 역시 그의 사위였던 왕광이 아내에게 '장인 어른은 그렇게 잘생겼는데 자기는 왜 이 모양임'이란 뉘앙스의 발언을 했다 역으로 털렸다는 일화가 있는데, 아내 얼굴에 대해 장모님도 아니고 장인어른을 들먹인 걸 보면 확실히 한 얼굴했던 모양. 결국 종회의 발언은 강유가 하후현 못지 않게 낭랑하고 제갈탄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기품있는 얼굴이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는 것. [3] 다만 말하는 대상이 두예라는 점에서 이 시점에서 군사 분야는 물론 이렇다 할 능력을 드러낸 바 없는 그를 종회가 눈여겨 봤다는 부분이 흥미로운데, 하안 살롱 붕괴 후 왕필, 하후현, 부하까지 연달아 죽어버려 지적/철학적 교류에 대한 갈증이 심각했던 종회가 훗날의 좌전벽이자 경전 연구에 있어 큰 족적을 남길 인재인 두예를 눈여겨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추론이 가능하다. 만약 이 관점에서 접근할 경우, 문제의 발언과 얽힌 인물 중 종회, 두예, 강유 모두가 무장이지만 경서에 꽤 통달해 있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제갈탄이 애매하지만), 종회가 한 것이 얼평이 아니라 이런 '인텔리' 적인 동질감의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4] 앞부분은 그냥 유선을 극딜하는 말들이다, 왕숭 문서에서 확인할 것. [5] 1722~1797,청나라 중기의 역사학자 1754년 진사(進士)가 되었으며 광록시경(光禄寺卿)을 퇴관하고 30년간 연구에 전념했다. [6] 춘추좌씨전 노양공 24년 조에 나오는 일화: 진후(晉侯)가 정정(程鄭)을 총애하여 하군(下軍) 부장으로 삼았다. 정(鄭)나라의 행인(行人) 공손휘(公孫揮)가 진나라를 방문하니 정정이 그에게 물었다, "감히 묻건대 어찌해야 지위를 낮출 수 있습니까?" 공손휘가 대답하지 못하고 (정나라로) 돌아가서는 연명(然明)에게 이에 관해 말하였다. 연명이 말했다, "이 사람은 장차 죽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장차 도망칠 것입니다. 귀해지면 두려움을 알게 되고 두려워지면 내려갈 것을 생각하게 되니 이에 알맞은 지위를 얻어 남의 아래가 되면 그뿐인데 또 어찌 새삼 묻는단 말입니까? 게다가 무릇 높은 지위에 오른 뒤에 지위를 낮추는 방법을 구하는 자는 지혜로운 사람이나, 정정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에게 도망칠 만한 허물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에게 의심하는 병이 있는 것이니 장차 걱정하다 죽을 것입니다." [7] 명색이 대장군을 이렇게 대놓고 씹을 수 있었던 것은 뭐니뭐니해도 요화가 나이와 촉에 사관한 경력 면에서 강유를 압살하는 군 최고 원로였기 때문이다 [8] 시경(詩經) 소아(小雅)편 제4 절남산지십(第四 節南山之什)에서 인용. [9] 동진 진목제의 연호 345-356년. [10]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사천성 검각 강유 사당인 평양후사 현판에 쓰인 글이 바로 지계홍궤(志繼洪軌)이다. [11] 253년 비의가 죽자 강유가 자신의 뜻을 시행할 수 있게 되어 (제갈각과 호응해) 마침내 수만명을 거느리고 석영을 나와서 적도를 포위했을 때 달린 주석. [12] 촉 후기 촉의 대승이라는 흥세산 전투만해도 일단 왕평이 어떻게든 한중을 필사적으로 틀어막으면서 위군이 보급이나 기타 문제로 약해질때까지 버티고 이 사이 중앙의 지원군을 영끌해 어떻게든 이긴 전투로, 사실 위군의 총지휘관이 조상이라는 능력없는 지휘관이 아니었더라면 (같은 전투에서 별 피해없이 퇴각한 곽회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위군이 그렇게까지 큰 피해를 입을 전투는 아니었다. 따라서 이런 촉의 수비역량을 과신해서 한중을 미드오픈 하면 위군 일망타진이 가능하다고 망상에 가까운 행동을 벌인 강유가 얼마나 전략적으로 무능했는지가 명백해지는 것이다. [13] 특히 강유는 보급을 지나치게 경시하는 단점이 있었다. 예컨데 단곡에서 등애에게 패할때는 보급대를 중간에 죄다 내다버리고 닥치는대로 여기저기를 무질서하게 찔러보면서 급속기동으로 공격을 시도했는데, 결국 군대가 보급이 없어 쫄쫄 굶고 피폐해져서 등애에게 대패를 당하는 한심한 작태를 보여준다. 여기서 강유라는 이름값을 빼고보면 냉정하게 이 전투에서 강유는 그냥 촉의 모전구렴야나 다름이 없다.사실 모전구렴야가 총사령관인 나라가 안 망하는 것도 기적일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이 전투의 대패로 촉나라인들이 강유를 원망하고 이를 간 것도 당연하다. [14] 당장 서진마저 평정에 10여년이나 걸릴 정도로 고생한 독발수기능의 난이 강유 사후 불과 6년만에 일어난다. [15] 사실 촉 내부로 시선을 돌리면 성도 주변에서조차 반기를 드는 이민족이 나타날 정도로 촉 내부에 촉 조정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많았으므로 이들을 평정하고 촉의 신민으로 만들면 개발을 통해 국력을 증진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옆나라이자 촉의 동맹인 오나라는 북으로는 위나 진을 공격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이민족을 신민으로 편입하고 행정구역을 더 설치하는 식으로 국력을 키웠다. 하지만 촉은 장완과 비의 시절에는 그런 노력을 진행하긴 했으나 강유가 집권한 이후로는 거진 내부를 방치한 채 제갈량 시절에나 했을 법한 오로지 북벌에 국력을 낭비하면서 국가 전반의 국력이 쇠퇴의 국면에 접어든다. [16] 문제는 그런 사람은 이릉에서 다 죽었다.. [17] 사실 전근대, 나아가 현대까지도 인구가 국력이고 그 중에서도 실제 일할 수 있는 연령대의 노동력이 매우 중요한 국력의 척도로 인식되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식의 인력 남용은 단순히 물자가 촉 내에서 풍부하다는 것 정도로는 만회하기 힘든 국력 손실을 부를 여지가 충분하다는 점을 부정하기 힘들다. [18] 비단 강유 뿐만이 아니라 유비, 제갈량, 관우 등 촉한의 인기 인물들은 대부분 이런 과도한 인기 때문에 실제 학계의 평가보다도 대중들의 평가가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다. [19] 당장 유비가 촉을 건국하며 하늘에 올린 표문에서 대놓고 "조조와 조비가 무력으로 천하를 어지럽히고 사직을 위태롭게 하니 제가 나서서 이것을 막고 천벌을 내리겠습니다." 라는 말을 한다. 애초에 촉 자체가 위를 막기 위해 건설된 나라라는 것. [20] 서구학자들이 촉 정권을 두고 장기적인 계획이 없는 군벌정권 수준으로 촉의 평가가 낮은 이유가 이것이다. 위와 오는 국가로써 발전 체제를 갖추고 정권을 운용하였으나 촉은 건국의의부터가 “한나라를 죽인 위나라를 죽인다. 처음부터 그 생각뿐이었다.” 로 귀결된다. 그런 주제에 그 이념에도 충실하질 못해서 이릉대전 꼴박쇼 같은 것도 저질렀고(...) [21] 이는 전적으로 흥세 전투의 덕택이었다. 흥세 전투에서 '관중이 텅 비었다'는 표현이 나올 만큼 대패한 위는 촉으로 쳐들어가긴 좀 그렇다는 인식을 갖게 된 것. 흥세 전투로부터 약 20년이 지나고도 종회 같은 몇몇 인물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대신들은 촉 정벌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22] 아무리 권력을 제갈량의 후계자들이 꽉 잡고 있든 위나라에 분란이 생기든 간에 공식적으로 중앙정부에서 파악한 인구 100만짜리 국가에서 위나라 상대로 제대로 된 원정 갈 병력 뽑으려면 촉인들의 협력을 받아서 호적에 올라오지 않은 백성들도 징집할 필요성이 있는데 호족들한테 떡고물 쥐어주고, 설득 반 협박 반 하면서 그게 가능한 정치력 있었던건 사실상 촉에서 제갈량 뿐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23] 나라를 어지럽히는 신하와 어버이를 해치는 자식이라는 뜻으로 보면 위나라에서는 부모와 처자를 버린 적자이고 촉나라에서는 나라를 어지럽힌 난신인 강유만큼 이런 난신적자라는 평가에 적합한 중국 삼국시대 인물도 드물다. [24] 조조 등은 언급되지 않았는데 이는 그의 군사적 재능이 과소평가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선정 범위에서 군주들은 아예 처음부터 빼고서 군주 밑의 장수들로 한정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다른 건국군주들 역시 명단에는 없다. [25] 일반적으로 '수만 명'의 최대 한도는 3~4만 정도로 예측된다. 5만이 기준선이 되는 경우가 보통. 5만을 넘어간다면 과장해서 10만을 일컬을 수도 있을 정도이다. 적벽대전의 백만대군을 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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