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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17 16:12:13

간도 출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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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전개4. 대응5. 여담6. 참고문헌7. 같이 보기

1. 개요

간도 출병(間島出兵)은 1920년 일본 제국이 만주 지역의 간도(현재의 중국 지린성 옌볜 조선족 자치주)에 군대를 파견한 사건이다. 이는 한국 독립군의 활동을 탄압하고, 해당 지역에서의 일본의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일본제국군은 그곳에서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학살인 간도 참변을 일으켰다. 경신참변이라고도 부른다.

2. 배경

1919년 후반기 이후 한반도에서 3・1독립운동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고, 이른바 문화통치를 실시하기 시작했다고 해도, 같은해 9월 신임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齊藤實)를 향해 폭탄을 투척한 윤봉길의 폭탄투척이 일어나는 등 식민지 조선의 상황은 여전히 불안정했다. 3.1 운동에서 제암리 학살사건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야만적인 탄압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 여론도 여전했다.

일본의 간도 출병의 이유는 첫째 간도의 독립군 탄압 및 독립운동의 기반 파괴, 둘째 식민지 조선에 대한 통치의 안정성 확보, 셋째 국제정세의 변동과 만주에서의세력을 확장을 통해 경제권을 장악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 의 경제공황 타개책 마련으로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3・1독립운동을 전후한 시기, 조선총독부는 해외 거주 한인들의 규모를 대략 100여만 명으로 추산하면서, 그 중 대다수인 약 80%에 해당하는 80만 명 정도가 만주에 거주하고 있다고 조사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두만강의 대안인 북간도 지역은 한인 거주의 밀도가 매우 높아서 만주 거주 한인들의 절반에 가까운 30만 명 이상이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중국인 거주자의 수배에 해당하는 규모이기 때문에 수적으로 중국인들을 완전히 압도한다고 파악하였다.

1920년 5월 즈음에는 독립군의 무장상태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음을 인식하고, 그로인한 국경 지역의 현실적인 위협을 예측하는 동시에 한인사회 전체가 반일적이어서 독립군과 독립운동을 지지하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게다가 러시아의 시베리아로 출병한 일본군의 탄압을 피해 연해주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던 한인 독립군 부대 수백명이 간도 방면으로 이동 중이라는 확실한 정보까지 접하게 되자, 조선총독부와 조선군이 감지하는 현실적인 위협은 더욱 높아졌다.

또한 일본군은 시베리아의 파르티잔을 탄압하기 위해서는 우선 한인과 그 근거지를 일소해야만 하였다. 이러한 군사전략상 필요에 따라 일본군은 간도와 연해주 일대의 독립군과 그 근거지인 지역 한인사회를 탄압하고자 간도침략을 계획하였다.

3. 전개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과 교전한 일본군은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중국군을 강제로 동원하여 토벌 작전을 실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맹부덕의 중국군이 먼저 독립군과 비밀리에 교섭해 버려 독립군은 1920년 8월부터 지린성으로 떠났다. 중국군은 빈 주둔지를 불태운 뒤 일본군에겐 이미 독립군이 도주해서 토벌에 실패했다고 변명했다.

중국의 손을 빌려 독립군을 토벌하려던 계획이 무산되자 훈춘 사건을 빌미로 8~9월에 계획을 수립해 함경도 회령을 통해 25,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투입하여 두만강 압록강의 대안인 간도를 침략하였다. 일본은 중국 측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간도를 자기네 앞마당인 것처럼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19사단을 주축으로 한 일본군은 3개의 토벌 지역을 편성해 독립군 섬멸 작전을 펼쳤지만 이미 독립군은 피난한 상태였기 때문에 효과가 없었다. 이런 학살에 살인, 체포, 강간, 방화로 인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준으로 약 3,016명[1]이 사망했고 한인 지역들은 초토화됐다.

간도를 근거지로 독립전쟁을 준비 중이던 독립군은 일본군과 충돌을 피해 이동하였다. 하지만 일본군이 조기에 주요 지역을 선점하면서 독립군과 일본군 간의 전투가 벌어졌다. 청산리 일대에서도 독립군은 일본군과 충돌하였다. 이른바 청산리 대첩이었고, 일본군이 간도 출병이라고 지칭하는 간도침략이었다.

4. 대응

5. 여담

6. 참고문헌

7. 같이 보기



[1] 박은식, 독립 운동 지혈사 [2] 하지만 얼마 안 있어 또 다른 참변이 기다리고 있었다. [3] 칼로 찌르고, 불에 태우고, 생매장시키고, 솥에 삶아 죽이는 등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약탈, 방화, 구타, 고문, 강간 등 군대가 민간인에게 범할 수 있는 온갖 범죄가 함께 저질러졌음은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