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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5 09:11:56

가토 마사오

가토 마사오
加藤正夫 / Katō Masao
파일:가토_마사오.jpg
<colbgcolor=#000000> 직업 <colbgcolor=#fffff9,#212121> 바둑기사
출생 1947년 3월 15일
사망 2004년 12월 30일 (향년 57세)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출신지 후쿠오카 현 아사쿠라[1]
입단 1964년
단급 九단
문하 기타니 미노루 九단
누적우승경력 47회

1. 개요2. 생애3. 기풍4. 주요 기사들과의 상대 전적
4.1. 일본 기사4.2. 한국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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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바둑 기사. 같은 기타니 미노루 九단 문하인 이시다 요시오 九단, 다케미야 마사키 九단과 함께 황금 트리오로 불렸다.

2. 생애

현실에서는 온후한 인품과 주변을 잘 돌보는 인자한 성격으로, 주변의 인망이 무척 두터운 사람이었다. 2004년에 일본기원 이사장에 취임하면서 일본 바둑을 개혁하고자 노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뇌경색으로 세상을 떠나며 많은 바둑팬들을 안타깝게 했다.[2] 특히 가토 마사오의 개혁이 실패한 이후 일본 바둑계는 급격한 갈라파고스화의 길로 치닫고 말았다. 일본 바둑팬과 심지어 한국 바둑 관계자들도 매우 안타까워한 것은 덤이다. 일본 바둑이 국제 경쟁력을 상실해버리자 중국 의존도가 지나치게 커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일본 바둑 관계자들은 "가토 九단이 5년만 더 살았더라면..."이라면서 아쉬워하기도 한다.

2005년 2월에 일본 정부에서 욱일소수장을 수여했다.

3. 기풍

기보로 남아있는 반상 위에서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바로 윗 문단에서 '온화한 사람'이란 평가가 잘 믿기지 않을 만큼 괴리가 꽤 심하다. 가토가 한창 활약하던 20세기 후반의 일본 바둑은 실리와 견제 위주의 소위 '점잖은 바둑'이 핵심인데[3], 가토는 이런 기원의 기풍이나 흐름을 비웃기라도 하듯 공격적인 힘바둑을 구사했다. 그 강력한 공격력으로 대마를 때려잡고 불계승을 거두는 일이 많아지면서 전성기 가토에게 붙은 별명은 살인청부업자(일본어로는 '[ruby(ころしや, ruby=코로시야)]'). 이는 당시 같은 시대를 풍미했으며 '폭파전문가'라는 별명이 있는 조치훈과 비슷하면서도 또한 차이가 분명한 바둑이다.[4]

정확히 말하자면, 그 차이는 두 기사의 기풍을 따져 보면 구분할 수 있다. 조치훈의 공격적인 기풍은 상대의 실리나 세력을 철저히 파괴하는 데에 있다. 이미 자리가 잘 잡혀서 집으로 굳어질 가능성이 높은 곳에 거침없이 걸치고 뛰어들어가서는, 모양을 파괴하고 살아남는다. '거칠게 공격적인'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반면 가토의 공격적인 기풍은 잦은 견제와 날렵한 행마로 모양새를 흐트러뜨리는데 있다. 상대가 그런 견제에 세력이 흔들리면 그 순간 퇴로를 끊고 몰아붙여서 마지막에는 숨통을 끊는 것이다. 대마가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치는 방향이나 수순을 잘 읽어내는 집중력과 섬세함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괜히 대마불사라는 사자성어가 존재하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대마를 잘 잡아내는 것이, '부드럽게 공격적인' 가토 바둑의 매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기풍은 비단 기보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칼럼이나 강좌용 저서에서도 엿볼 수 있는데, '상대의 돌을 잡기 위해 달려드는 공격보다는 상대의 행마와 모양을 공격하라, 상대에게 손해본다는 느낌을 주면서 이득을 착실히 챙기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정확한 수읽기나 한 국면에서의 싸움보다는, 판의 흐름을 잘 잡아내고 손익을 잘 잡아내는 법을 먼저 익히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다[5]. 이처럼 독특하고 또 확고한 자신만의 논리를 갖추었고, 일본 바둑의 약체화를 국내 기전 한정이라는 부분과 반상에서 싸움을 피하는 기풍을 이유로 들어 비판했으며[6], 이를 개혁하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이다.

가토 마사오는 공격으로 이득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파하면서 자기 책들에 자신의 기보를 전부 사용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관례적으로 기사들(또는 기원)에 보장되는 기보 저작권을 포기했다. 책의 인세도 저렴하게 받았다. 가토는 자기 책에 적을 때 "나처럼 앞뒤 안 보고 공격을 좋아하면 반드시 판세를 그르친다. 분명한 것은 공격에 투자하는 돌이 공격에 투자하지 않는 돌과 균형을 맞춰서 이득을 얻어낼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다."라는 문장을 수도 없이 적었다. 이를 위해서는 복기를 할 때 단순히 복기를 하는게 아니라 "내가 이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 상대방은 어떤 생각을 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하고 대답하라고 하였고, 필요하다면 노트에 필기를 하라고 하였다.

가토 마사오의 일본 7대 기전 주요 성적

위 성적을 보면 알수 있듯 기성(棋聖)전 우승 경력이 없는 것을 제외하면 커리어가 상당히 출중하다. 일본 7대 기전 전체에서 우승 경력이 있는 기사는 최초가 조치훈, 다음이 장쉬로 극소수이기 때문에 흠이 되지 않고, 55회 도전기를 벌여 31회 우승했다는 것은 엄청난 커리어이다. 조치훈과 고바야시 고이치를 제외하면 동시대에 활약한 기사 중 가토보다 우위에 있는 기사가 없으며, 저 둘에게도 크게 밀리지 않는 기사는 가토가 유일하다. 다케미야 마사키를 드는 사람도 있으나, 셋의 커리어에 비하면 확실히 떨어진다.[8] 다만 다케미야는 국제 기전인 후지쯔배 세계 바둑 선수권 대회 2연패, TV 바둑 아시아 선수권대회 4연패가 있으니까 다케미야는 가토와 완전히 다른 길(가토: 일본기전, 다케미야: 국제기전)로 간 것이라 봐야 한다. 가토 마사오는 애석하게도 국제 바둑 기전에서의 성적은 좋지 않았다. 가토의 최고 성적은 1993년 제6회 후지쯔배에서 3위한 게 최고이다. 상세히 알고 싶다면 기타니 미노루 문서 참조.

특히 82년~89년의 8년 동안 왕좌전을 8연패한 것은 영광스러운 기록. 80년대 중반 이후 조치훈 고바야시 고이치를 중심으로 돌아갔던 일본 바둑계에서 다케미야 마사키 등과 함께 최정상의 두 기사에 격렬히 대항한 대표적인 기사이기도 하다. 또한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꾸준한 활약을 펼쳐, 50대 중반인 2002년에 혼인보 타이틀을 따는 저력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여담으로, 1976년 5월 십단전 우승을 시작으로 1990년 11월 하네 야스마사 九단에게 왕좌전에서 패배할 때까지 14년 6개월간 7대 기전 타이틀을 최소 한 개 이상 보유[9]라는 기록을 세웠다.[10]

4. 주요 기사들과의 상대 전적

4.1. 일본 기사

고바야시 고이치 九단 61:54
다케미야 마사키 九단 44:31
린하이펑 九단 60:58
오타케 히데오 九단 40:49
이시다 요시오 九단 31:14
조치훈 九단 42:71:1 무승부[11]

4.2. 한국 기사

서봉수 九단 2:1
유창혁 九단 0:1
이창호 九단 2:4
조훈현 九단 3:4


[1] 현재 아사쿠라시이다. [2] 그래도 이사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승단전을 폐지하는 등 성과도 있었다. 다만 강단(降段) 기준 제정 및 일본의 7대 기전을 오픈화시키려는 개혁안은 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인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관련 기사1 관련 기사2 [3] 2010년대에도 일본 바둑계의 주류 기풍은 여전히 점잖은 바둑이다. 다만 호전적인 기풍의 야마시타 게이고 九단이나 공격적인 힘바둑을 구사하는 이야마 유타 九단같은 예외도 있다. [4] 참고로 가토와 조치훈은 공식전에서만 100번 넘게 맞붙었는데, 상대전적은 조치훈이 71승 42패 1무승부로 앞선다. 그러나 조치훈과 가토는 나이가 9살이나 차이나기 때문에 동시대 인물이 아니라서 동일 선상에서 비교하기는 어렵다. 가토와 조치훈의 대국에서는 조치훈이 가토의 세력을 삭감하거나 침투할 때 가토가 정말 다 잡아 먹으려고 달려드는 바둑이 많이 나왔다. [5] 1992년 하서출판사에서 번역/발행한 저서 '공격과 방어'에는 이러한 그의 논리를 확실하게 잘 드러내고 있는데, 특이한 것은 보통의 바둑 교본과는 상당히 다른 논리 전개를 보인다. 보통의 바둑 교본은 기보와 함께 직관적인 설명이 들어가있는 학습서에 가까운데, 이 책은 바둑 교본치고는 특이하게도 저자인 가토 마사오 자신과 함께 가상의 인물 '5급 씨'와 '초단 씨'를 등장시켰다. 집바둑 위주로 소극적인 운영을 하는 '5급 씨'와 과격한 바둑을 구사하지만 조심성은 모자란 '초단 씨'의 아웅다웅을, 가토 마사오가 부족한 공격력과 방어력을 어떻게 보강하는지 알려주는 식으로 강좌 내용을 전개하는 형태. 이러한 스토리텔링 기법을 이용해서 바둑 지식이 모자란 독자도 자연스럽게 기량을 익히도록 만드는 것에서, 그가 선생으로서 얼마나 출중했는지를 알 수 있다. [6] 지금은 고인인 후지사와 슈코 9단 또한 일본 바둑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를 같은 두 가지를 들어 꼬집었다. 둘 다 전투를 지향하는 기풍으로 유명하다. [7] 특히 82년~89년 동안 왕좌전 8연패라는 위업을 달성, 명예 왕좌 칭호를 받기도 했다. 명예 왕좌 칭호는 일본 바둑계에서 현재까지도 가토 마사오가 유일하게 보유하고 있다. [8] 다케미야 九단은 7대 기전 전체에서 10회 우승. [9] 일본 바둑계 최장 기록이다. [10] 공교롭게도 하네 야스마사 九단은 2020년 10월 15일, 1254승으로 일본 바둑 기사 최다승 공동 5위를 기록하였는데 가토 마사오 九단과 타이 기록이다.[12] [11] 여담으로 조치훈과 고바야시 고이치의 상대 전적은 조치훈 기준 66승 63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