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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4 00:44:10

가이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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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1. 개요2. 제원3. 개발 배경
3.1. 시초3.2. 초창기3.3. 설계 변경
4. 양산5. 특징
5.1. 장점5.2. 단점
6. 유사품7. 운용 및 실적8. 기타9. 대중매체에서

1. 개요

[ruby(回天, ruby=かいてん)] / Kaiten

파일:external/blog-imgs-35.fc2.com/200910080105324f7.jpg

구 일본 해군이 제조한 '유인유도 어뢰'로, 사람이 안에 타고 조종하여 표적에 들이받는 자폭 병기다.

오카 같은 경우에는 기지를 출발한 뒤 작전이 돌연 취소되거나 불시착(또는 이를 가장한 전열이탈)하는 방법, 혹은 불발 등으로 특공대원이 생환할 일말의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지만[1], 이건 한번 발사하면 그대로 끝이다. 설령 탄두가 불발되더라도 수압 때문에 출입구를 열 수 없으므로 100% 죽는다.

관련 기사: 세상 바꾸고 싶었던 법학도 청년, 그 끝은 '인간어뢰'

가이텐이란 회천의 일본어 음독으로 바로 새기면 ' 하늘을 되돌린다'는 뜻으로 제왕의 마음을 되돌림의 비유로 쓰이면서 형세나 국면을 크게 바꾼다는 뜻으로 확장되었으니 당시의 불리했던 전황을 되돌릴 획기적인 병기라는 뜻이다. 현실은 전황은커녕 아무것도 못바꿨다

2. 제원

항목 가이텐 1형 가이텐 4형
전장 14.75m 16.50m
직경 1m 1.35m
배수량 8.30t 18.17t
출력 550마력 1,200마력
속력 최고 30노트 최고 40노트
무장 폭약 1.55t 폭약 1.8t
잠항심도 80m 100m
승조원 1명 2명

3. 개발 배경

파일:external/www.airgroup4.com/kaiten-kamikaze.jpg

가이텐의 모체가 된 93식 어뢰

일본 해군은 93식 어뢰가 너무 많이 쌓인 것을 보고 개량하여 사용할 만한 무기로 바꾸고자 하였다.

3.1. 시초

일본 해군 태평양 전쟁에 돌입할 무렵부터 지속적으로 인간어뢰를 추진한 기록이 있다.

일단 소형 잠수정 갑표적의 승조원이었던 구로키 히로시(黒木博司) 일본 제국 해군 대위, 니시나 세키오(仁科関夫) 해군 중위는 일본과 미국간 공업력의 차이가 크므로 자원소모가 많은 함대간 결전을 하지 말고 유인 수상병기로 적 함대를 괴멸하는 것만이 승리에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주장하였지만 당시 해군은 생환을 고려하지 않은 출격은 용인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2] 이런 주장을 배척했고 구로키 무리는 해군 내부에서 고립되었다.

과달카날 전투의 패배 후 일본 해군 내부에서도 유인어뢰를 만들자는 여러 안이 나왔다. 치쿠마 츄우조(竹間忠三) 대위가 "전세를 돌리기 위해선 필중필살의 육탄공격이 필요하다." 하며 유인어뢰 제작을 추진하자고 군령부 이우라 쇼지로(井浦翔二郞) 해군 중좌에게 건의했고, 이우라 중좌가 실현성을 타진했다. 하지만 해군본부는 소극적이었고 군령부 수뇌들도 인정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1943년 12월에 伊 165 잠수뢰장(潜水雷長) 이리사와(入澤) 대위와 항해장 고노에(近江) 중위가 전황을 타개하려면 필요하다면서 독자적으로 유인어뢰를 연구한 성과를 군령부와 연합함대에 제출했지만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로키 대위와 니시나 중위가 1943년과 1944년에 걸쳐 군령부를 두 번 방문하여 군령부와 군무국 제1과장 야마모토(山本) 대좌를 만나 상담했다. 이에 1944년 2월 26일 '승조원의 탈출장치가 없는 병기는 절대 채용불가.'라는 조건을 달고 시험제작을 허락받았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마치 정신나간 소수가 계획을 주도했고 일본 해군의 수뇌부는 어쩔 수 없이 승인했다는 인상을 받지만 이것은 수뇌부한테는 잘못이 없다고 강변하기 위한 구실에 불과하다. 게다가 저런 괴짜는 당시 추축국 군인들 중에서는 어디서나 있었는데, 특히 일본군이 그런 증상이 심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받아들이는 때부터 수뇌부도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지휘관의 지휘책임이 바로 이렇게 문제를 회피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부여된 것이다.

이 착각의 원인은 현대에도 일부 남아있는 문화에서 기인하는데, 요새 말로는 답정너식 문화. 네마와시(根回し)[3]라 하는 악습으로, 회의 전 관계자로부터 미리 양해를 구해놓고 회의를 시작하는 문화이다. 당시 일본군의 회의란, 정식으로 안건을 올려 승인을 받기 전에 미리 의사를 타진하여 확인하고, 되겠다 싶으면 그제서야 정식 절차를 밟는 형태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정식 절차를 밟은 시점에서 상급자고 하급자고 이미 '정해진 결론'이 있음을 알고 있었으며, 정식 절차란 회의의 형식과 간부의 체면을 위해 하는 요식행위였다. 미리 확인한 각본에 따라 정해진 하급자가 계획을 제안하면 상급자가 못 이기는 척 수락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2014년에 NHK에서 방송된 일본해군반성회 스페셜에서 구로키와 니시나의 일화는 '신화'일 뿐, 실상은 군령부와 해군성에서 그 전에 이미 자폭병기 제작에 나섰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겉으로는 장병들을 위하는 척했지만, 실상은 전부 가식이었던 것이다.

3.2. 초창기

최초 개발품은 인간 자폭 병기가 아니었다. 적당한 위치에 도달하여 조준을 고정한 후 승조원이 탈출하는 방안도 있었다. 해군 수뇌부가 500kg짜리 어뢰용 탄두로는 위력이 모자라므로 더 큰 탄두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여 더 큰 것을 달았는데,[4] 그 때문에 어뢰가 불안정해져서 적함에 들이받을 때까지 계속 조종해야 했다. 기술자를 좀 더 이용해서 탑승원이 탈출할 방법을 마련해줄 수도 있었지만, 바다에는 파도가 일기에 중간에 사람이 빠져나가면 명중률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그러지도 못했다.

뭐 사실 탈출장치를 만들어봤자 대양 한가운데+적함 근처라는 인간이 생존하기 최악의 환경에서 탈출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 수 있냐는 반론도 가능하다. 적함 근처에서 탈출해봤자 탈출만 하고 이탈을 하지 못해서 폭발에 휘말리면 당연히 죽는 거고, 또 적함의 근처라면 당연히 적 함대 쪽에 자리하고 있을 텐데 이런 곳에선 탈출해봤자 다른 적군의 대함사격 혹은 적함의 충각 공격이나 스크류 등에 휘말리면 사망할 수밖에 없다. 설령 적 함대가 후퇴를 택하더라도 망망대해에 홀로 남겨진 이상 근처에 섬이 없다면 반드시 죽는다. 그러나 어쩌다 인심이 좋은 적군에게 구조받아 생존할 가능성 정도는 있으니 아예 처음부터 살릴 방도를 없애는 것과 비교할 수는 없다.

쓸데없이 큰 탄두를 달았음이 가이텐이 실패한 가장 큰 이유일 수도 있다. 기존 500kg 탄두도 조종하기에는 벅차고 일본군 물자부족 문제도 있었으므로, 차라리 400kg급이나 그 이하로 줄이면 조종성도 나아져서 승조원이 탈출할 방법을 넣어주거나 명중률을 높이거나 할 수 있었을 것이다.[5] 설령 300kg대로 줄인다고 해도 이론상 중순양함 격침까지는 충분히 가능했다.[6] 가이텐 한 발로는 대본영이 원하던 미 해군 모함 격침은 무리겠지만, 어차피 역사대로 만들어진 가이텐이 얼마나 형편없었는지 생각하면 차라리 이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1944년 7월 25일 오오이리시마(大入島) 발사장에서 시험제작기를 시험하였다. 탈출장치는 미완성이었기 때문에 장비하지 않았고, 병기로서의 특성에도 문제가 있음이 지적되었다. 주된 결함사유는 어뢰를 개조한 물건이라 후진이 불가능하단 점과, 방향타 뒤에 스크루가 달린 구조상 선회 반경이 너무 크고 잠항 심도가 최대 80m밖에 안 되어 함인 대형잠수함의 심도를 약화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운반용으로 쓰일 대형 잠수함이 대부분 격침된 상황이라 이 문제는 끝까지 해결되지 못한 채였다. 그리고 탈출장치는 끝까지 완성되지 않았다.

결국 이런 상태로 1944년 8월 1일 해군 대신 요나이 미쓰마사가 결재하여 정식병기로 채용되었다. 명칭은 구로키 대위가 제안한 대로 가이텐(回天)이라 명명되었다.

3.3. 설계 변경

일단 가이텐은 길이 14.7m, 직경 1m짜리 동체에 무게가 780kg인 탄두를 장착했다. 크기에 비해 탄두가 크고, 중심에는 사람 하나가 간신히 웅크리고 들어갈 만한 공간을 만들었다. 위에는 작은 잠망경도 달아서 외관상으로는 마치 소형 잠수정 같은 모양.

파일:external/www.webmodelers.com/201209haya033.jpg
크기가 크기라 모선이 될 잠수함의 어뢰발사관에 넣지 않고 갑판 위에 설치했다. 탑승자는 잠수함 내에 특별히 설치한 연결통로를 따라 탑승했으며, 가이텐에 탑승하기 위해 잠수함이 굳이 부상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잠수함의 선체를 개조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가이텐 전용 잠수함을 따로 준비하였다. 보통 잠수함 한 척당 가이텐 4~6척을 달고 작전에 투입되었다. 다만 일부 작전사례에서 잠수함을 부상시킨 후 가이텐에 옮겨 탄 사례가 없지는 않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aiten_Type_1_launch_test_from_starboard_of_Japanese_cruiser_Kitakami.jpg
잠수함 말고도 수상함을 가이텐 모함으로 개조시키기도 했는데, 쿠마급 경순양함 3번함 키타카미가 가이텐모함으로 개조되었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0px-Fig_of_IJN_DD_Take_1944-1945.gif
심지어 전쟁 후반에 가서 만들어진 양산형 구축함인 마츠급에도 가이텐을 장착했다.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일본군의 막장전설의 끝인 1945년 8월의 일러스트다.

4. 양산

1944년 9월 5일에는 야마구치 현에 오오츠시마(大津島) 기지를 신설하여 본격적인 전력화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이텐 1형을 8월 말까지 100기 생산할 계획이었으나 9월 중순에는 하루 2기, 그 후에는 하루 3기만 생산하는 정도에 그쳤다. 미군이 수송물자를 봉쇄하여 자재가 모자랐고, 피해함선도 수리해야 하는데 숙련공도 없고 식량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가이텐의 모체가 된 93식 3형 어뢰가 산소를 사용하려면 발사 전에 시간을 들여 정비해야 했다. 한 번 발사하려면 지상에서 3일간 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이유로 특공대원들이 충분히 연습할 시간이 부족하여, 정비대원들은 상부로부터 가이텐을 3일에 2개씩 정비하라는 닦달을 받았다. 9월 6일 훈련 도중 가이텐의 창안자 구로키 대위가 정비불량 사고로 사망했는데 오히려 이것이 "구로키를 뒤따르자." 하며 특공대원들이 사기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는, 전형적인 일본식 영웅담 만들기 일화도 전해 내려온다.

5. 특징

5.1. 장점

기본적으로 눈에 띄지 않게 수면 아래서 접근하므로 멀리서 탐지할 수 있는 카미카제보다는 더 위협적이었다.[7] 게다가 조종성을 개판으로 만든 거대한 탄두는 명중할 경우 정말로 치명적인 수준이다, 명중을 한다면 말이다.

5.2. 단점

조작이 굉장히 어려웠다고 한다. 훈련을 받았으나 출격 전에 전쟁이 끝나 살아남은 특공대원은 "눈이 6개에 손이 6개여도 조종하기에 모자랄 지경이었다."라고 평하였다. 그 때문에 위에서 이야기한 가이텐의 최초 개발자 구로키 대위를 포함하여 훈련 중 사망자가 7명이나 나왔다. 자업자득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태생부터 조타기능이 없는 무유도 직진 어뢰였는데, 이것을 사람이 조종할 수 있도록 억지로 개조한 물건이다보니 상하용/좌우용 타륜을 동시에 조종할 수가 없었다. 비유하자면 자동차에 왼쪽 바퀴용 핸들과 오른쪽 바퀴용 핸들이 각각 따로 달려있고, 엑셀레이터 페달을 밟았다 때도 페달이 원위치로 돌아오지 않아서 의도적으로 당겨야 하는 꼴. 잠망경 역시 조정해서 자기 위치를 파악해야 하는데… 그런데 승조원의 조종편의성을 고려했다면 아마 일본은 잠수함째로 들이박는 전술을 택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이 외에도 조종관련 사소한 문제점으로는, 항주하며 연료를 소모할수록 가이텐의 무게가 가벼워지게 되어 심도유지가 불가능해지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항주하면서 서서히 밸브를 열어 소모하는 연료만큼 해수를 채워야했는데 이 밸런스가 안 맞으면 그대로 부상하거나 착저. 위의 골때리는 조작난이도에 해수밸브 조작까지 더해져 말 그대로 손이 여섯 개여도 부족했을 지경.

또한, 장시간 운행할 경우 유독가스가 발생했다. 컴퓨터 등으로 유도하는 기술이 거의 없던[8] 시대에 어뢰를 유도하려고 전자장비 대신 사람을 넣었는데, 내부에서 사람이 의식을 잃게 하는 가스가 나왔다. 그리고 해결할 방법도 없었다. 전지어뢰 개조형은 축전지에서, 산소어뢰 개조형은 엔진에서 가스가 발생했다고 한다. 원래 어뢰란 것이 승조원을 탑승시킬 용도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데다가, 전쟁 말기로 갈수록 조악해지는 제조기술까지 합쳐진 결과였다. 그래서 실제 운용시에는 쏘는 놈이 목표에 최대한 접근한 다음에 가이텐을 출진시켜야 했다. 즉, 사냥하려고 접근하다 역으로 들켜 사냥당할 위험이 높아진다는 의미. 실제로도 멀리 있어도 모함인 잠수함이 포착되기 쉬운 판국에 스스로 가까이 다가가기까지 해주니 발진도 못시켜보고 모함과 함께 사이좋게 수장되는 경우가 압도적이었다. 이래저래 답이 없다.

6. 유사품

독일 해군이나 이탈리아 해군, 영국 해군도 이와 비슷한 인간어뢰를 운용했지만 자살용은 아니었다. 어뢰 외부에 손잡이가 있어서 잠수복을 입고 어뢰 외부에서 조종하는 방식을 채용했으므로 어뢰에 이상이 발생하면 그냥 어뢰조종간에서 손을 떼고 멀리 헤엄치면 끝이었기에 사용자의 안전을 크게 도모했으며 애초에 이런 방식의 어뢰로는 장거리 작전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어서 아군항에 접근이 용이한 지중해 근방 지역에서 주로 투입되었다.

무엇보다도 이런 어뢰에 탑재되는 탄두는 어뢰 자체를 돌격시켜서 터뜨리는 용도가 아니었고, 목표물 근처에서 수동으로 탄두를 분리한 후, 폭탄처럼 설치가 가능한 물건이었다. 따라서 어뢰라기보다는 사용자와 탄두를 운반하는 소형 수중 추진기로 사용했으므로 작전을 끝낸 후에 다시 어뢰를 조종해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9] 실제로 이탈리아 해군소속 부대인 Decima Flottiglia MAS는 1941년 알렉산드리아의 영국 해군의 전함 HMS 발리안트와 HMS 퀸 엘리자베스에 폭탄을 설치한 후 탈출하려다가 영국 해군에게 발각당해 잡혔고[10], 그들이 폭탄을 설치한 바로 그 배에서 심문을 받았다.

그때 이탈리아 해군 장교 루이지 듀랑 드 라 펜느의 한 마디가 "15분 후 이 배는 폭발한다!"였고, 곧바로 배는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이 작전에서 이탈리아 해군은 유인어뢰 3기를 소모하고 운용요원 6명이 포로로 잡히는 경미한 피해만 입었지만[11], 영국군은 전함 2척과 대형 유조선 1척이 항구 내에 착저해서[12] 고정포대 이하의 존재로 전락하는 참담한 피해를 입었다. 이 사태로 인해 영국군은 동지중해의 제해권을 상실할 뻔했고, "이탈리아군의 용기는 타고 있는 배의 크기에 반비례한다."라는 말을 남긴다.[13]

그리고 그 작전에 참여한 이탈리아 해군은 잘 살아남았다. 폭발한다고 말한 그 포로들도 경미한 부상만 입은 채 살아남아서 나중에 이탈리아로 귀국했으며 훈장까지 받았다. 또한 이 부대는 43년까지 유인어뢰를 동원한 침투, 파괴공작으로 통상파괴작전을 시행, 상당한 전과를 기록했다. 나중에 이런 공격법이 발전해서 ' 수중침투-파괴 전략'이 되었다. 이 때문에 영국도 비슷한 물건인 채리엇을 개발하겠다고 열을 올렸다.[14]

그러나 가이텐은 그딴 거 없었다. 전자가 많이 위험하지만 살아서 돌아올 수는 있고, 돌아오는데 성공만 하면 영웅이 될 수 있다!였다면, 후자는 닥치고 죽어라! 그럼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져 신이 될 것이다!라고 할 수 있겠다. 문제는 정신 못 차리고 가이텐에다가 어뢰 2발 더 달아놓은 것에 불과한 카이류도 개발했다는 것이다. 답이 없다. 더더욱 문제는 이것에서 더 나아가서 이놈들이 그 병맛나는 대전차총검술 내지는 자돌폭뢰의 대함버전도 만들었다는 거다. 후쿠류 참고.

7. 운용 및 실적

파일:external/www.pacificworlds.com/mssnwa1.jpg

1944년 9월 중순부터 가이텐은 서서히 그 숫자를 증가시켜 나갔지만 제일 큰 문제는 승조원을 뽑아 자살공격대로 내보내는 것이었다. 이로서 앞서 설명한 승조원들의 사기진작이 헛소리였음이 입증되었다.[15] 10월 초부터 카이텐 탑재의 공사가 마무리된 제 15잠수대의 카이텐이 최종훈련을 마치자, 제6함대사령부는 겐(玄) 작전을 입안해 이 카이텐 공격대를 키쿠스이대(菊水隊)라 명명했다.

1944년 11월 캐롤라인 제도의 울리시 환초에서 미군 급유함인 USS 미시시네와를 격침시키며 요란하게 데뷔했다. 이후 미군이 항구의 경비를 강화하자 가이텐은 해상에서의 공격으로 전법을 바꾸고 키쿠스이대 이후 콘고대(金剛隊)ㆍ치하야대(千早隊)ㆍ진부대(神武隊)ㆍ타다라대(多々良隊)ㆍ텐부대(天武隊)ㆍ신부대(振武隊)ㆍ토도로키대(轟隊)ㆍ다몬대(多聞隊)라는 가이텐 부대를 창설하고, 해당 인원들이 패전 일주일 전까지 148기의 카이텐에 타고 출격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1년이 안 되는 기간동안 격침 3척( 호위구축함ㆍ급유함ㆍ상륙정 각 1척), 대파(大破) 1척(수송함 1척), 소파(小破) 4척(구축함ㆍ수송함 각 2척)에 그쳤다. 한마디로 말해서 개조한 비용도 제대로 못 뽑고 끝났다. 당장 일본에서의 추산도 해당 전과를 기록하면서 가이텐 106기의 대원들이 불귀의 객이 되었으며, 종전 당시까지 가이텐의 대원들은 총 1,375명이었는데 정비 도중 사망한 자까지 합하면 총 사망자는 145명이라고 적었다. 그에 비해 미국에서 확인된 미군 사망자는 187명이라고 한다. 개조까지 해서 자폭무기를 운용한 것치고는 비참한 교환비다.

이렇게 된 이유는 앞서 설명했던 주옥같은 단점 외에도 가이텐을 싣고 출격할 잠수함도 부족했고, 그나마 출격한 잠수함도 가이텐을 출격시키기도 전에 들켜서 격침당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결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는 가이텐이 소정의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게 있다. 예를 들어 일본 위키페디아의 가이텐 항목에서는 가이텐의 역사를 서술하며 「일본 해군 입장에서 보자면 다몬대는 1척의 잠수함을 잃는 일도 없이 가이텐의 초진이었던 키쿠스이대를 뛰어넘는 전과를 이뤄, 가이텐 작전의 유종의 미를 장식할 수 있었으며, 미군도 전쟁 종결 전의 일본 해군의 커다란 성공이라고 평가했다.」라는 문장으로 마무리짓고 있다. 가이텐을 둘러싼 국뽕짓이 어찌나 심한지 이런 낭설의 출처를 파헤치는 서적까지 출간되었다.

8. 기타

파일:external/www.vaq136.com/kaiten-01b.jpg
리모델링 전 유취관 전시 이미지

히로시마현 우지츠 항을 통해 갈 수 있는 에타지마 구 일본제국군 해군사관학교이자 현 해상자위대 해군병학교에 있는 견학 투어를 통해 일본 해상자위대 역사관에서 가이텐과 같이 자폭부대인 카미카제 부대원의 그보과 유서, 사진 및 신상이 있다.

히로시마 현 구레시에 있는 야마토 박물관에서도 가이텐 모형이 전시되어있다. # 해당 전시실 소개에는 전쟁의 비참함과 평화의 소중함을 전달한다고 되어있지만, 가이텐에 대해서는 담백하게 해설이 붙어있을 뿐이고 로비에서 외국인을 위한 해설을 해주는 헤드셋을 장착하고 가이텐 앞에서면 '인간어뢰'라고 무미건조하게 설명한다.

오이타현 히지마치(日出町)에는 이름부터 카이텐신사(回天神社)인 신사가 있는데, 이곳은 상술한 야스쿠니신사처럼 전쟁과 특공을 정당화하기 위한 곳이라기보다는, 작전에 끌려간 동원된 청년을 위령하고자 그 후손이나 생존자가 모이는 장소로써의 성격에 가깝다. 전쟁중에는 카이텐 기지 내부에 있었으나 패전 후 생존장병들의 탄원으로 신당을 기지 바깥으로 빼내어 근처 신사에 합당하는 형태로 지어졌다. 따라서 신사 근처에는 구 카이텐기지의 유적이 있다. 건립목적을 보면 카이텐이라는 병기의 탄생을 가리켜 "잔혹함을 후세에 알린다"고 적혀 있으니, 혹시 태평양전쟁과 관련된 신사에 흥미는 있는데 거부감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한 번 들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오이타현 관광정보사이트 히지마치 관광정보사이트

2009년 가을 일본의 '쉽스'라는 회사에서 가이텐과 오카의 휴대폰 고리를 해상자위대 기지에서 판매하는 초유의 사고를 터트려 각계의 비판이 일자 결국 2010년 1월에 전량 회수하였다. 기사링크 하지만 제품이 품절되자 일본 경매사이트에서는 최고 1만 2천 엔에 경매에 나오기도 하는 등 이상과열 현상도 빚어졌다.

파일:attachment/kaiten_cellphone_chain.jpg

파일:external/www.finemolds.co.jp/FS1-1.jpg

파일:external/www.ms-plus.com/20195_2.jpg

이와는 별개로 파인몰드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가이텐을 모델화 시켜왔다.

http://www.academy.co.kr/1p/1p_plaview.asp?pView=PLA0000003&pCode=1129&pScale=SCALE00001

아카데미에서 인디애나폴리스 침몰사건을 구현했고 I-58에는 가이텐이 달렸다. 이는 인디애나폴리스를 격침시킬 당시 가이텐 승조원들이 저런 큰 목표는 가이텐이 나가야 한다고 격분했다는 증언에 맞춘 고증이다. 그러나, I-58의 함장 하시모토 모치즈라 중좌는 가이텐 승조원들의 출격 요청을 거부하고 산소어뢰로 USS 인디애나폴리스를 격침시켰다.

9. 대중매체에서



[1] 실제로 탄두 불발과 기적적인 충격 각도로 충돌 이후 생존한 경우도 있었다. [2] 전쟁 초기만 해도 일본 해군은 합리적이었다. 근데 갑표적은 왜 만들었대 카미카제 같은 자살공격을 지시한 건 필리핀 해 해전 이후부터였다. [3] 본래는 나무를 옮겨심기 전의 준비작업을 뜻하는 단어이다. 2000년대 초반까지는 한국에서도 흔한 행위였다. 물론 양국 다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서 점차 사라져 가곤 있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곳도 많다. [4] 가이텐의 모태인 산소어뢰에는 780kg짜리 탄두를 단 것도 있다. [5] 가이텐이 쓰일 만한 바다에서라면 승조원이 탈출해도 근처 선박이나 수상기 등이 구해주러 오지 않는 이상 생존을 기대할 수 없었다. 대전 말기 일본 해군이 과연 가이텐에서 탈출한 승조원을 일일이 구하러 올 역량, 혹은 의지가 있었느냐? 절대로 아니다. 따라서 가이텐에 타면 탈출하든 못하든 죽기는 매한가지였다. [6] 현대의 중어뢰 탄두가 대개 300kg대 중량인데, 이것만으로도 1만 톤을 넘는 군함을 일격에 격침할 수 있다. 물론 현대에는 폭약 성능이 더 향상되었음도 감안해야 한다. [7] 카미카제의 압도적인 인지도에 가려서 좀 떨어지지만 전과도 올린 바 있다. 효율이 영 별로여서 그렇지… [8]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미해군은 잠수함에 TDC라는 원시적인 어뢰 유도 컴퓨터를 달았는데 어뢰의 자이로스코프 등과 연계하여서 Fire and Forget 처럼 발사하면 어뢰가 알아서 목표물로 유도되었다. 이런 기술에 어뢰마저 개선되자 일본 해군의 수상함대 수송함대는 모두 씨가 말라버린다. [9] 현대에서도 국군, 북한군을 비롯하여 여러 나라의 군대에서 비슷한 원리로 작동하는 수중추진기를 해상침투에 이용하고 있다. [10] 잠수복에 이상이 생겨서 오랫동안 차가운 물 속을 다니는게 힘들어 잠시 떠올랐다가 발각당했다. [11] 나머지 4명은 이집트에서 그리스 선원으로 위장하고 도망가려 했으나 붙잡혔다. [12] 수심이 얕은 항구라 망정이지, 전함 2척이 격침당한거나 마찬가지다! [13] 당시 이탈리아 해군의 주력 수상함대는 연합군과의 교전을 피해서 꼭꼭 숨어 다녔다. 사실 추축국들 중 해군을 해군답게 쓴 나라가 일본군 밖에 없단 아이러니도 있다. 이탈리아의 전함은 좁은 지중해에서 쓰기 알맞게 항속거리가 짧은 대신 속력을 높게 내도록 설계한 것도 한 몫했다. [14] 위에서 언급한 이탈리아 부대가 연합군 소속이 되자 이 유인어뢰를 사용했다. [15] 최소한 임무취소, 불시착 등으로 조금이라도 살 가능성이 있는 카미카제와 비교하면, 해치 닫고 모선과 분리하자마자 100% 사망 확정인 카이텐에 타기를 승조원들이 두려워함도 이해가 된다. [16] 사실 일본군 중에서 잠수함 쪽은 함이 격침되면 잠수함 특성상 다같이 죽기에 승조원들에게서 일본군의 고질적인 문제점인 병영부조리도 거의 없었고, 함 승조원들이 서로 가족처럼 대하며 생활했다. [17] 순도 100%의 산소는 오히려 독이지만, 좁은 잠수함 내부가 이산화 탄소로 가득 차서 산소가 부족한 상황인 만큼, 연료통 내에 들어있는 산소를 뿌리는 정도로는 산소중독에 이를 만큼 위험하지는 않다. 무엇보다도, 이미 잠수함 내부엔 70% 정도의 질소가 있다. [18] 가이텐도 일단 인간이 탑승하는 기동장비인지라 속도조절기능이 있어서 이걸 이용해 2기를 일거에 발사, 마치 잠수함이 움직이면서 스크류 2개가 움직이는 듯이 속였다. 현대의 어뢰기만체계와 비슷한 원리다. [19] 폭뢰 공격에 잠수장치가 고장나서 잠수가 불가능하였다. [세이렌섬스포일러] 사실 해당 회차의 가이텐 설정은 단순한 지나가는 뒷설정이 아니라 작중 배경인 '세이렌섬'이 그와 같은 이름이 붙은 이유이기도 하다. 구 일본군의 패망 후 이 섬에 상륙한 미군들이 마치 그리스 로마신화 속 세이렌의 노랫소리와 같은 기이한 음성이 주기적으로 섬의 해안가에서 들려오는 것에서 착안해 이런 이름을 붙였는데, 이 세이렌 울음소리의 정체는 다름아닌 해식동굴 깊숙한 곳에 반파된 채 방치된 가이텐의 금속부가 파도에 쓸려 진동하면서 내는 파동음이었다. 해식동굴이 워낙 은밀한 곳에 있었던지라 반파된 가이텐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일평생 해식동굴의 비밀을 감추기 바빴던 섬의 최장수 주민 노파(87세)를 제외하면 없었던 탓에 가이텐의 존재는 몰랐지만 일단 세이렌섬 토박이라 노랫소리가 시간대별로 달라진다는 것까지는 알고 있었던 진범이 이를 범행 트릭에 요긴하게 써먹었으나, 김전일이 삽시간에 세이렌 노랫소리의 수상함을 파악해버린 데다가 김전일이 사람들 앞에서 비밀을 밝히는 과정에서 그를 돕기 위해(종전과 동시에 일본군과 맺은 비밀유지 조약을 세이렌섬 주민이 본인 1명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며 깨버렸다) 노파가 해식동굴 숙 가이텐의 존재는 물론 시간대별로 달라지는 세이렌 노랫소리가 사실 조류의 흐름 변화에 따라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것과 그 상세한 법칙까지 폭로하는 바람에 결정적 트릭이 까발려져 폭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