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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8 01:44:56

1972 뮌헨 올림픽/농구 결승전

1. 개요2. 전개
2.1. 개괄2.2. 어두운 국제 정세2.3. 빌 월튼의 불참 선언, 하지만...2.4. 시작은 순조로웠다2.5. 그러나 만만치 않았던 소련2.6. 반전2.7. 주최 측의 미숙한 운영으로 인한 불행한 결말2.8. 은메달을 뿌리치다2.9. 그 이후
3. 출처4. 창작물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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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

1972 뮌헨 올림픽 남자 농구 결승전에서 일어난 사건이자 미국 농구 국가대표팀 흑역사, 그리고 올림픽 농구 역사상 최악의 오심과 최고의 이변.

2. 전개

2.1. 개괄

올림픽 종목에 농구가 채택된 이래 미국은 늘 세계 무대의 정상을 달리고 있었다. 훗날 '드림팀'으로 회자될 농구 국대가 2002년 세계 선수권 대회와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내리 망신을 당하기 전까지 미국을 꺾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1972년 올림픽에 출전한 미국 국대 역시 이러한 자신감을 지니고 있었다.

2.2. 어두운 국제 정세

1972년 8월 27일부터 9월 9일까지 서독의 뮌헨에서 열린 올림픽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한 후 새로 태어나려는 독일의 의지를 극명히 보여준 대회였다. 이에 미국 소련을 중심으로 양측의 대립이 팽팽했다. 그러나 9월 5일에 팔레스타인의 독립운동 단체인 PLO 계열 과격파인 검은 9월단 이스라엘 선수촌을 납치해 선수단 11명의 생명을 빼앗은 뮌헨 올림픽 참사라는 끔찍한 참사가 일어났다.

이러한 국제 정세 가운데 미국과 소련은 어느 종목에서든 지지 않으려는 의지를 맹렬히 드러냈다. 이는 농구도 매한가지여서 미국의 농구협회는 정예 멤버를 꾸리는 동시에 7회 대회 연속 금메달 획득을 목표로 했다. 반면 스파르타크 레닌그라드 감독인 블라디미르 콘드라신(1929~1999)이 국대 감독까지 겸한 소련은 새 멤버를 찾을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 왔고 그 팀웍은 상상을 초월했다.[2]

2.3. 빌 월튼의 불참 선언,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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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미국 국대 선수단 사진.

당시 미국 국대는 덕 콜린스(일리노이 주립대), 바비 존스(UNC), 드와이트 존스(1952~2016, 휴스턴대), 에드 래틀리프(롱비치 스테잇), 마이크 밴텀(세인트 조지프대)[3] 등을 중심으로 짜였다. 감독에는 오클라호마 주립대학교의 전설적인 감독이자 1964년과 1968년 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각각 두 번 딴 바 있는 68세의 백전노장 헨리 아이바(1904~1993)[4]가 앉았고 코치직에는 당시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교의 감독이자 훗날 시카고 불스에서 텍스 윈터와 함께 필 잭슨을 보좌할 조니 바흐(1924~2016)와 1966년 텍사스 대학교 엘패소 캠퍼스(UTEP)를 맡아 흑인 다섯 명으로 전국대회 우승을 이끈 돈 해스킨스(1930~2008) 두 명이 가세했다. 이런 식으로 전국의 명석한 두뇌들이 모인 코치진이었기에 미국의 우승에 대한 기대는 엄청났다.

그런데 선수 구성에서 약간 차질이 생겼다. 전미 최고의 선수였던 센터 빌 월튼을 소집하지 못한 것이다. 이는 UCLA 측이 월튼을 대표팀에 넣길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는 무릎 부상이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에 존 우든(1910~2010) 감독은 "여름에는 좀 쉬는 게 좋겠다는 의사의 소견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실제로 월튼은 연습 전후로 30분이 넘게 무릎 치료를 받아야 했을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다. 거기에 월튼이 1970년 세계선수권대회에 참가하는 등 당시 빡빡한 스케줄로 매우 힘들어했다는 말도 있었다. 일각에선 만일 대표팀 트라이아웃과 같은 절차만 없었다면 월튼이 국대 합류를 수락했을지도 모른다는 말도 있었다.

그러나 덕 콜린스의 말에 의하면 "아이바 감독은 모든 선수가 공평히 대접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 아이바 감독은 독불장군으로 악명이 높던 밥 나이트 전 인디애나 대학교 감독조차 롤모델로 정했을 정도로 원리원칙에 충실한 사람이었으며 결국 월튼은 국대에 들어오지 못하(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국대의 우승에 대한 기대감은 변함이 없었다. 저돌적이고 파워가 넘쳤던 골밑과 섬세한 가드 라인이 조화를 이루었으며, 그 시너지 효과는 여느 미국 국대 못지 않았다.

2.4. 시작은 순조로웠다

미국은 A조에 편성되어 올림픽 첫날인 8월 27일에 체코슬로바키아를 66-35로 가뿐히 눌렀다. 이어 다음 날에 호주도 81-55로 꺾었고 29일에는 쿠바 역시 67-48로 이겼다. 점수차에서 볼 수 있듯 미국 국대는 수비에 중점을 둔 팀이었다. 몸싸움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공격에선 차분히 기회를 노렸다. 이는 아이바 감독이 늘 추구해 온 철학이었다. 이 올림픽에서 9경기를 뛰며 6.4득점을 기록한 에드 래틀리프도 "감독님께선 우리가 슛을 던지기 전에 꼭 6~8번의 패스 플레이를 하라고 지시하셨다"고 회고했다.

이후 30일에는 브라질을 상대로 61-57로 다소 고전했지만 9월 첫 날에 이집트를 맞아서는 96-31로 완승을 거두었다. 이어 3일에는 일본을 99-33으로 잘근잘근 씹어먹어 '완승'을 거두었다. 이 경기에서는 무려 7명의 선수가 두 자릿수 득점을 올렸다. 예선에서의 선전 덕에 미국은 금세 준결승까지 올라갔다. 7일에 열린 준결승 상대는 바로 이탈리아. 그러나 포워드인 제임스 포브스(UTEP)와 토머스 헨더슨(산 하신토 칼리지)의 활약을 앞세워 68-38로 쉽게 승리해 마침내 결승 진출을 확정지었다. 이때까지 미국은 올림픽 농구 63연승을 달렸다.

2.5. 그러나 만만치 않았던 소련

우리가 질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 마이크 밴텀

하지만 밴텀의 생각은 오산이었다. 아래에 서술될 '그 사건'을 떠나 소련의 전력은 막강했다. 예나 지금이나 미국 국대와 그 외 유럽 국대의 훈련기간은 비교가 불가능했다. 대다수 유럽 국가들은 클럽 유스 시스템으로 선수를 육성해서 10대 중후반에 프로 데뷔를 시키기 때문에 미국과 프로 경험이 비교가 안 되고 연령별 국가대표 대회도 발달해 있는 터라 짧게는 3~5년, 길게는 10년 가까이 청소년 대표부터 같이 지내 오면서 팀웍을 다져 온 반면 미국은 길어야 2~3개월 손발을 맞추고 국제대회에 출전해 왔다. 이에 따라 부족한 팀웍은 감독의 용병술과 선수들의 개인기가 커버해 주었다. 그러나 이는 소련에게 잘 통하지 않았다. 소련은 평균연령 20세의 어린 미국을 상대로 거칠면서도 정교한 플레이를 펼쳤다. 존 바흐 코치는 "소련은 400경기 이상을 함께 해 온 저력이 있었고, 우리는 겨우 12번의 연습 경기를 치르고 올림픽에 나온 팀이었다."고 밝혔다.

다시 경기 얘기로 돌아가 보자. 9월 9일에 순조롭게 결승에 들어온 미국이 전반 초에 6개의 실책을 범하는 동안 소련은 19-9로 앞질렀다. 미국은 소련의 에이스인 세르게이 벨로프(1944년생, 190cm, CSKA 모스크바)[5]를 당해내지 못했다. 그는 팔이 길었고 스크린을 잘 이용할 줄 아는 슈터였으며 슛 거리도 당시 보통 선수들보다 길었다. 그는 소련의 첫 15점 중 8점을 올리면서 미국을 당황시켰다. 206cm의 알렉산드르 벨로프(1951~1978, 스파르타크 레닌그라드)도 전형적인 유럽 스타일의 빅맨으로 훅 슛과 골밑 플레이에도 능했다. 탄력은 떨어졌으나 영리했다.

미국의 중거리슛이 림을 번번히 외면하는 와중에 소련은 그 틈을 노리지 않고 역습을 노렸다. 이에 아이바 감독은 기브-앤-고, 백도어 컷 등 다양한 팀 플레이로 소련을 깨고자 했으나 여의치 않자 수비 스타일을 2-3 지역방어로 바꾸면서 분위기 전환을 꾀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소련의 정교함에 밀리면서 결국 전반을 26-21로 밀린 채 마쳤다. 후반에도 소련이 점수차를 5~10점차로 리드하고 미국이 계속 쫓아가는 판이었다. 미국에서는 짐 브루워(미네소타대)가 중거리에서 힘을 내고 마이크 밴텀과 에드 래틀리프가 포스트에서 리바운드와 몸싸움, 텁-인 등으로 팀에 힘을 보탰고 기습적인 프레스를 시도해 상대의 실책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2.6. 반전

그러나 다툼도 있었다. 후반전 리바운드 다툼을 하다가 서로 감정이 격해진 드와이트 존스와 소련의 미헤일 코르키아(1948~2004, 디나모 트빌리시)가 주먹다짐을 하면서 동시에 퇴장을 당한 것이다. 또 바로 몇 초 뒤 공격권을 다투기 위한 점프볼 상황에서 이번에는 브루워가 공중에서 그대로 떨어지면서 머리를 다쳤다. 그런데 이것이 전환점이 된 듯했다. 미국이 좀 더 결속력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다. 밴텀의 텁-인과 케빈 조이스(사우스캐롤라이나대)의 드라이브 인으로 점수차를 44-40으로 쫓은 미국은 이어 종료 2분 32초를 앞두고 조이스의 추가 득점으로 점수를 44-42로 좁혔다.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태어난 조이스는 국대에서 돌파와 풀업 점프슛이 제법 안정적이었던 몇 안 되는 선수였다.

남은 시간은 55초, 여전히 소련이 48-46으로 앞서는 상황이었다. 조이스와 콜린스가 한 번씩 공격을 실패한 가운데 골 밑에서 분투하던 밴텀마저 5반칙으로 파울-아웃당했다. 미국은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게다가 미국의 팀 파울로 자유투 라인에 선 선수는 가장 정확한 슛을 자랑했던 세르게이 벨로프였다.

그러나 벨로프가 첫 자유투를 놓치고 말았다. 2구는 들어갔지만 점수는 49-46. 좀 나은 상황이었다. 이에 미국은 40초를 남기고 브루워의 중거리 슛으로 49-48로 점수차를 좁혔다.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한 수비가 이어지는 가운데 소련은 벨로프가 공격을 시도했으나 포워드 톰 맥밀렌(210cm, 메릴랜드대)[6]에 의해 막혔다.

이때를 놓칠 미국이 아니었다. 미국은 덕 콜린스가 재빨리 공을 몰고 들어갔고 이에 소련이 거친 파울로 그의 움직임을 차단했다. 남은 시간은 3초. 콜린스는 자유투 2개를 얻었다. 그가 거친 파울을 당해 한동안 일어나지 못하자 코치진들은 안절부절 못했다. 콜린스는 올림픽 대표팀에서 가장 많은 자유투를 얻어냈던 선수였기 때문이다.

이 상황이 되자 코치진은 교체까지 거론했지만 아이바 감독은 "걸을 수만 있다면 자유투는 그가 던질 걸세"라며 신중함을 보였다. 콜린스는 그 기대에 부응하여 침착하게 자유투 두 개를 전부 넣어 49-50으로 미국이 경기에서 처음 앞서게 되었다. 모두가 환호했다. 이때 콜린스는 "그때 내 머릿속에서는 단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어떻게든 슛을 넣어야겠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내게 자유투를 던질 수 있겠냐고 물었다만, 난 자신감이 가득한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2.7. 주최 측의 미숙한 운영으로 인한 불행한 결말

파일:external/www.sportsonearth.com/1972_1_66zjvuil_otf7nwof.jpg

그러나 이 사진이 우승 기념 사진으로 쓰이는 일은 없었다.

남은 시간은 3초, 다급해진 소련이 마지막 공격을 위해 하프라인으로 달려가는 순간 심판이 갑자기 경기를 중단시키면서 타임아웃 제스처를 취했다. 심판이 경기를 중단시키던 시점에 남은 경기 시간은 1초였다. 심판은 "콜린스가 자유투를 성공시킨 뒤에 소련 측의 타임아웃 요청이 있었다."고 해명하면서 남은 시간을 3초로 돌려놓았다. 소련측의 타임아웃 요청을 받아들였으면 깨끗하게 진행되었을 경기가 이 미숙한 운영으로 말미암아 이때부터 이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이에 미국 선수들과 아이바 감독들이 분노하며 항의했다. 그러나 심판은 경기를 속개했고 미국 선수들 역시 당황했지만 어쨌든 수비에 임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타임 아웃을 불러도 경기 재개 위치는 하프라인이 아닌 엔드 라인이었다. 단 3초만에 소련이 경기를 뒤집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다시 경기가 시작되었다. 소련의 인바운드 패스가 이뤄지고 얼마 되지 않아 경기 종료 버저가 울리고 미국 선수들은 우승을 자축하며 서로 부둥켜안았다. 그렇게 경기는 끝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 때 또 하나의 미숙한 운영이 문제가 됐는데 시간계시원이 전광판의 시간을 3초전으로 되돌렸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은채 경기가 진행되었던 것이다.[7] 이 전광판 실수가 분명히 재경기의 사유가 될 수는 있었지만 계속해서 소련측에게 유리해지면서 미국이 반발을 불러왔다.

아수라장 속에 FIBA의 사무총장인 레나토 윌리엄 존스(1906~1981)[8]가 양 팀 선수단에게 경기를 재개할 것을 호소했는데 이때 미국 카메라에 존스가 손가락 3개를 펼치는 것이 포착되어 사무총장까지 심판의 진행에 개입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어찌됐건 경기는 다시 3초에 맞춰진 채 진행되게 되었고 소련의 인바운드 패스로 경기를 재개하게 했다. 3초라는 시간이 두 번이나 되돌려진 것이다.

결국 또 경기가 시작되었다. 소련은 롱 패스를 던졌고 이미 미국 측 골대에 있던 알렉산더 벨로프가 골밑슛을 성공시키면서 소련의 기적적인 역전승으로 경기가 끝나게 되었다. 어이없어하던 미국은 그렇게 은메달로 떨어졌다. 에드 래틀리프는 이 상황을 "그때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다. 정신이 없었다."고 회상했다.

미국측 뮌헨 올림픽 주관 방송사인 ABC는 미국이 인바운드 패스를 방해하기 위해 가까이 붙자 심판이 뒤로 멀찌감치 떨어지도록 지시하는 장면과 인바운드 패스 자체도 라인을 밟고 하는 장면이 포착되었다. 일각에선 벨로프가 공을 잡는 상황 역시 공격자 파울이라 불러도 무방했다는 말도 있었지만 이미 결과는 소련의 승리였다.

2.8. 은메달을 뿌리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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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이런 상황.
시카고 시어스 타워 꼭대기에서 파티를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건물이 무너졌다. - 덕 콜린스

경기가 끝나자마자 콜린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선수들이 은메달 수상을 거부했다. 이들은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다. 미국은 승리를 강탈당했다."고 입을 모았다. 의외는 소련에서 뛰었던 선수들도 훗날 그 사실을 인정하는 눈치였던 것이다. 그만큼 경기 운영 면에서 미숙했다. 마지막에 결정적인 패스를 했던 이반 에데시코는 언젠가 LA 타임스의 인터뷰에서 "미국은 공격당했고, 그것은 정당하지 못했다. 그 패배를 인정하는 건 아마 선수가 아닌 국가의 자존심 문제에서였을 것."이라며 미국을 위로했다. 하지만 그 인터뷰는 소련이 무너진 지 얼마 안 된 시점인 1992년에 한 인터뷰였다. 다들 궁핍해서 인터뷰비 얼마 받고 미국이 듣기 좋은 소리를 해 주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실제로 이들 중 우승이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특히 당시 소련 국대 감독이었던 블라디미르 콘드라신은 1999년에 사망할 때까지도 그 때의 우승이 정당하다고 믿었다. 소련은 결정골을 만들어낸 패스를 'Golden Pass'라고 불렀고, 미국은 이를 'Cheated'라고 받아 적었다. 더불어 미국 언론은 이를 'Gold Medal Game Controversy'라고 불렀다.

이에 억울하게 지고도 나앉을 미국이 아니었다. 우선 미국은 패배 직후 국제올림픽위원회에 이의제기를 했다. 그리고 그 이의가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헝가리, 쿠바, 푸에르토리코, 이탈리아, 폴란드인으로 구성된 배심원들과 만나 그들을 설득해야 했다. 당연히 헝가리와 쿠바, 폴란드가 미국의 편을 들 리는 없었다. 결국 과반수를 넘기지 못한 미국은 패배가 확정되었다. IOC 측은 올림픽이 끝난 뒤 다시 한 번 메달 수여를 설득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 메달은 스위스 제네바 IOC 본부에 보관 중이다. 훗날 국대 멤버 중 케니 데이비스(조지타운 칼리지(켄터키))만 그 메달을 받아갔다는 후문이 있다.

사무총장인 윌리엄 존스가 왜 갑자기 판정에 개입했는지도 의문이다. 훗날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는 이 사건을 ' 냉전 시기의 또 다른 산물'이라고 회고했다.

2.9. 그 이후

뮌헨에서의 비극 이후 미국은 1976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유고슬라비아를 꺾어 금메달을 따서 만회하긴 했지만 이후 소련과의 관계가 더욱 악화되면서 1980 모스크바 올림픽에 불참하는 바람에 금메달 행진을 더 이어가는 데 실패했다. 하지만 소련이 참가하지 않은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밥 나이트 감독과 마이클 조던이 결승전에서 스페인을 꺾고 미국에 금메달을 선사하면서 농구 강국으로서의 명성을 다시 이어나갔다. 이 영광의 순간에 나이트 감독은 "이 금메달을 헨리 아이바 감독님께 바칩니다."고 하면서 그를 기념했다.[9]

이후 1988 서울 올림픽 4강전에서야 다시 미국-소련 경기가 열렸는데 소련이 반미감정이 남아 있던 서울 시민의 열렬한 응원을 등에 업고 미국을 꺾고 결승에 진출한 후 유고까지 꺾고 금메달을 획득했다.[10] 이후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미국은 프로선수 출전 제한을 해제해줄 것을 요청했는데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드림팀을 결성했고 이후 모든 올림픽에 가용 가능한 최대한의 전력을 들고 나오게 되었다.

사족으로 2012 런던 올림픽의 펜싱에서도 이와 비슷한 오심이 있었다.[11]

3. 출처

4. 창작물

5. 관련 문서



[1] 경기 장면은 2분 15초에서 1시간 30초까지. [2] 소련의 대표팀 구성 방식은 1980년에 일어난 레이크플래시드의 기적을 다룬 아이스하키 영화 <미라클(2004)>에도 나온다. [3] 1973년 NBA 드래프트에서 전체 8번으로 피닉스 선즈에 지명되어 NBA에서 9년을 저니맨으로 보내다가 1989년에 이탈리아에서 은퇴했다. 은퇴 이후 NBA의 해외 라이센스 사업부장을 거쳐 선수개발부 부회장, 심판운영부 부회장 등을 지냈다. [4] 현대 미국농구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운 인물로서 맨 투 맨 디펜스를 한 단계 끌어올리고 공격에선 위브(weave) 플레이를 비롯한 각종 팀 플레이를 개발해내 후배 농구인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현재 오클라호마 주립대 측은 홈구장에 '아이바 감독님의 자리(Mr. Iba's Seat)'를 만들어 그를 기리고 있다. [5] 1967년 대표팀에 합류한 이래 1980년까지 뛰면서 4번이나 올림픽에 출전한 그는 유럽 최고의 농구 선수로 꼽혔으며 1995년부터 3년간 러시아 농구협회장을 지냈다. [6] 1975년에 1986년까지 프로 농구선수로 활동한 뒤 1987년부터 6년간 메릴랜드 주 하원의원을 지냈다. [7] 전광판의 시계가 1초인 상태에서 진행되었다는 기사와 50초에서 시작되었다는 기사가 있는데 어떤 게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전광판의 시계가 3초에서 시작되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8] 이탈리아계 영국인. 1932년부터 1976년까지 무려 45년 간 FIBA 사무총장을 역임했고 1936 베를린 올림픽부터 농구가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는 데 기여했다. 1977년부터 매년 대만 타이베이시에서 열리는 국제농구대회 윌리엄 존스 컵이 이 사람의 노고를 기리는 의미에서 만들어졌다. [9] 조던은 1972년의 이 경기를 어린 시절 TV로 본 뒤 어머니에게 "내가 반드시 미국에게 메달을 가져다 줄 것이다"라고 맹세한 적이 있었다. [10] 이 경기는 그냥 빼도박도 못하는 미국의 흑역사 [11] 그것도 펜싱 3종목(플뢰레, 에페, 사브르) 중 심판 판정이 개입될 여지가 극히 적은 에페에서 터졌다. 피해자는 다른 나라도 아닌 대한민국 신아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