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3-10-09 02:38:33

히에로 2세

히에론 2세에서 넘어옴
파일:external/92d427a920cd1e7d61ba5978617b8514c354d8e7eba84637d62fea6d5b1ff9d4.png
시라쿠사 참주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font-size: 0.95em; letter-spacing: -1.4px"
겔론 1세 히에로 1세 트라시볼로스 대 디오니시오스 소 디오니시오스
디온 칼리포스 히파리노스 니사이오스 소 디오니시오스
티몰레온 아가토클레스 히케타스 티니온
소시트라토스
피로스 1세
히에로 2세 겔론 2세 히에로니무스 아드라노도로스 에피키데스
히포크라테스
}}}}}}}}}}}}
<colbgcolor=#00bfff><colcolor=black> 히에로 2세
Hiero II
파일:Hiero II.jpg
생몰년도 기원전 306년 ~ 기원전 215년
출생지 시칠리아 시라쿠사
사망지 시칠리아 시라쿠사
지위 시라쿠사 참주
국가 시라쿠사
가족 레프티네스(장인)
필리스티스(아내)
겔론 2세(장남)
네레이다(며느리)
데마라타(딸)
아드라노도로스(사위)
헤라킬라(딸)
조이푸스(사위)
피로스 2세(사돈)
히에로니무스(손주)
참전 피로스 전쟁
포에니 전쟁
시라쿠사의 참주
재위 기원전 270년 ~ 기원전 215년
전임 피로스
후임 히에로니무스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시라쿠사 16대 참주.

피로스 전쟁 포에니 전쟁 기간 동안 강적인 로마, 피로스 1세, 카르타고 사이에서 시라쿠사를 지켜낸 인물이었다. 피로스가 로마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자 시라쿠사인들의 지지를 받아 왕으로 즉위하여 무려 56년 간 집권했다. 히에론으로도 표기된다.

2. 생애

그의 기원에 대한 정보는 폴리비오스의 《역사》와 유스티누스가 전하는 폼페이우스 트로구스의 《필리포스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트로구스에 따르면, 그는 히에로클레스의 아들이었으며 기원전 480년 히메라 전투에서 카르타고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시라쿠사의 초대 참주 겔론 1세의 후손이었으나 어머니는 노예였다고 한다.

유스티누스는 다른 기록에서 그에 대한 몇 가지 전설을 인용한다. 이에 따르면, 히에로가 아기였을 때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지만 벌들이 여러 날 동안 꿀을 먹여준 덕분에 살았고, 히에로클레스는 그가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집에 데려가서 양육했다고 한다. 또한 학교에서 공부할 때 늑대가 히에로에게서 필기용 서판을 훔쳤고, 그가 처음으로 전쟁에 나갔을 때 독수리는 방패에 앉고 올빼미가 창에 앉았는데 주변 사람들은 이를 좋은 징조로 여겼다고 한다.

반면 폴리비오스는 히에로의 고귀한 신분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고, 단지 누구에게도 부나 영광을 물려받지 않았으며 모든 것을 스스로 성취했다고 서술했다. 이와 관련해 골동품 수집가 토마스 렌쇼는 히에로가 완전히 무명이었으며, 겔론 1세로부터 혈통이 전해진다는 이야기는 그가 권력을 가진 뒤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지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필리포스 역사》에 따르면, 그는 어린 시절부터 용기, 힘, 지성 및 아름다움에 있어서 타인을 능가했다고 한다. 폴리비오스 역시 그가 천부적으로 왕권과 사무를 관리하는 데 타고난 재능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기원전 278년 에페이로스 왕국의 군주인 피로스 1세가 카르타고군에게 포위된 시라쿠사를 구하기 위해 시칠리아 섬에 상륙했을 때, 그는 피로스와 합류하여 카르타고와의 전쟁에 참여했다. 히에로는 전장에서 용맹을 떨쳐 피로스로부터 많은 상을 받았다.

기원전 276년 피로스가 시칠리아 섬의 그리스인들과 심각한 갈등을 벌이다가 결국 시칠리아를 떠났다. 그후 시라쿠사가 이끄는 그리스 연합군은 카르타고의 대대적인 침략을 독자적으로 막아야 했다. 현재 남아있는 고대 기록에는 이 전쟁의 진행 상황에 대한 정보가 전혀 전해지지 않는다. 히에로는 이 전쟁에 장교로 참전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활약상은 전해지지 않는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이무렵 시라쿠사 공통체와 용병으로 구성된 군대 사이에 투쟁이 벌어졌다. 기원전 275/274년, 메르간 시 근처에 주둔한 군대는 사령관을 몰아내고 아르테미도로스와 히에로를 새 지휘관으로 선정해 시라쿠사로 진군했다. 히에로는 "몇 몇 친구"의 도움으로 시라쿠사를 성공적으로 점령하고, 자신에게 적대적인 정치 집단을 무력화시켰는데, 그 과정에서 어떠한 처형이나 보복은 없었다고 한다.

그는 시라쿠사 정부로부터 유일한 사령관 직위를 확인받았고, 대 디오니시오스 형제의 후손인 레프티네스의 딸 필리스타스와 결혼함으로써 시라쿠사 과두파와 정치적인 연맹을 맺었다. 그후 시라쿠사와 군사 동맹을 맺은 여러 이웃 도시의 군대도 통솔했다. 이 도시들은 레오티노이, 기블라, 메가라, 겔로르, 니톤, 아크레이였다. 하지만 히에로는 세간의 예상과는 달리 자신의 직위를 카르타고와의 전쟁에 활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카르타고와 평화협약을 맺고 전쟁을 종식했다. 그 대신, 전임 참주인 아가토클레스에게 고용되었다가 아가토클레스 사후 메사나를 무단 점령하고, 20여 년간 주변 그리스 도시들을 습격하여 약탈을 자행한 마메르티니인과의 전쟁에 집중했다. 기원전 271년, 히에로 2세는 용병과 민병대를 포함한 시라쿠사군을 이끌고 메사나로 진격했다. 키아모소르 강 전투를 치렀을 때, 그는 용병들이 시라쿠사의 정치에 지나치게 간섭하고 다른 경쟁자를 지원할 조짐을 보이는 걸 감지했다. 이에 일부러 용병들을 마메르티니군에게 노출시켜 몰살당하게 하고, 민병대는 안전한 곳으로 빼두었다.

그렇게 기존의 용병들을 죽게 만든 뒤 새 용병을 고용하여 전쟁을 재개한 히에로 2세는 기원전 270년 시칠리아 북부 해안의 밀라, 틴다리다, 타우로메니움 시를 공략했고 269년 롱가노 강 전투에서 마메르티니인을 물리친 후 메사나를 포위했다. 그러나 도시가 함락되기 직전에 카르타고 사령관 한니발 기스코의 함대가 나타나 중재를 제안했다. 그는 카르타고와 마찰을 벌이고 싶지 않았기에 이를 받아들이고 마메르티니인과 화해하기로 했다. 시라쿠사인들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히에로 2세를 왕으로 추대했다. 당시 그의 영토는 메사나를 제외한 시칠리아 섬 동부 전체를 통제했으며, 시라쿠사의 동맹 도시 뿐만 아니라 다른 그리스계 도시국가들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몇년 후, 그는 마메르티니인과의 전쟁을 재개했다. 마메르티니인들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이탈리아 본토 전역을 지배하고 있었던 로마 공화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원로원은 처음에는 같은 라틴족이라지만 그동안 저지른 만행이 심각해서 도와줄 수 없다며 거절했지만, 카르타고에게도 도움을 요청했다는 말을 듣자 자국 영토 코앞에 카르타고 같은 강대한 국가의 함대가 활개친다면 큰 문제가 발생한다고 여겨 개입하기로 했다. 로마의 소규모 병력이 메사나에 들어갔고, 얼마 후 히에로 2세의 시라쿠사 군대가 메사나를 포위했다. 기원전 264년, 로마 집정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가브덱스는 2개 군단과 함께 카르타고 함대의 감시를 피해 시칠리아 섬에 상륙했다. 이후 벌어진 메사나 전투에서 로마군에게 패배한 히에로 2세는 시라쿠사로 후퇴했다.

뒤이어 카르타고군도 격파한 로마군은 시라쿠사를 포위했다. 파울루스 오로시우스에 따르면, 히에로 2세는 배상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클라우디우스와 평화협약을 맺었다고 한다. 반면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이듬해 집정관인 마니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코르비누스와 마니우스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와 평화협약을 맺었다고 한다. 배상금 규모는 25달란트, 100달란트, 또는 200달란트로 기록마다 다르게 서술되었다. 나중에 로마에 곡물을 공급하는 대가로 배상금을 절반으로 줄였다고 한다. 또한 시라쿠사는 로마의 동맹국이 되었고, 왕국의 영토는 시칠리아 섬의 남동쪽으로 좁혀졌다.

이후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하여 20여 년간 이어졌다. 히에로 2세는 전쟁 내내 로마를 끝까지 지지했다. 만약 그가 동맹을 유지하지 않았다면, 처음에 함대를 보유하지 않았던 로마인들은 시칠리아 섬에 주둔한 로마군을 보급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또한 시라쿠사 함대는 로마군이 아크라가스와 릴리바이움을 공략하고 시칠리아 주변의 여러 섬을 공략하는 걸 도왔다. 그 결과 로마는 승리를 거두었고, 히에로 2세의 왕국을 제외한 시칠리아 섬 전체가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기원전 241년에 체결된 로마와 카르타고의 평화협정에는
"카르타고인들은 히에로와 싸우지 않고, 그의 동맹국에 대항하여 전쟁을 벌여서는 안 된다."
라는 조항이 있었다.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로마에 충성했다. 제2차 포에니 전쟁 도중 트라시메누스 호수의 전투에서 로마군이 한니발 바르카에게 크게 패배한 뒤, 히에로 2세는 밀 3만 모디(262,500리터)를 로마로 보내 로마 시가 굶주림에 시달리지 않도록 도왔다. 다만 로마만 도운 것은 아니었다. 기원전 230년대에 용병대가 심각한 봉기를 일으키면서 카르타고가 위험에 처하자, 히에로 2세는 상당량의 자금과 물자를 지원해줘서 그들이 용병 반란을 극복하는 데 힘을 보탰다.

이렇듯 로마의 충실한 동맹자로서 입지를 굳힌 히에로 2세는 왕권을 다지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의 칭호와 궁전, 왕족들의 생활 등은 헬레니즘 제국과 매우 유사했다. 히에로 2세는 시라쿠사 민병대를 이끄는 것 외에도 용병 분견대를 구성하고 유지했으며, 사비로 해군을 건설했다. 또한 소지주와 소작인으로부터 10분의 1 세금을 철저하게 징수하는 <히에로 세법>을 도입하여 국고 수입을 증진했다. 이 법에 적용되지 않는 귀족과 대지주들은 자신들에게 정치적, 경제적 후원을 해주는 그를 절대적으로 지지했다. 반면에 소지주와 소작인들은 이런 상황에 불만을 품었다. 고대 기록에는 빈민들 사이에 히에로 2세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는 구체적인 설명은 없지만, 말년에 히에로 2세가 권력을 포기하고 싶다고 여러 차례 밝혔던 점, 그가 사망한 뒤 후계자로 지명된 어린 히에로니무스가 얼마 안가 피살당한 점, 시라쿠사 공방전 때 시라쿠사 시민들이 로마와의 전쟁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던 점 등을 볼 때 막대한 재원을 가져가는 로마와 이를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히에로 2세에 대한 반감이 상당했음을 암시한다.

그는 <히에로 세법>을 통해 벌어들인 막대한 수입을 토대로 토목공사를 단행했다. 오르테가에 궁전 요새를 신설했고, 시라쿠사 광장에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을 세웠으며, 길이가 200m에 달해 고대 세계에서 가장 큰 제단으로 손꼽히는 제단을 세웠고, 극장을 여러 개 신설했다. 그는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시라쿠사'호를 건조하도록 했다. 이 배에는 체육관과, 전망대, 투석기 및 기타 방어 무기, 마구간 및 목욕탕이 갇춰졌다고 한다. 배가 건조되었을 때 시라쿠사와 알렉산드리아를 제외하고는 어떤 항구도 수용할 수 없었다고 한다.

히에로 2세는 프톨레마이오스 3세에게 이 배를 선보임으로써 이러한 치명적인 결함을 도리어 선전용으로 활용했다. 한편 기원전 227년 대지진으로 인해 막심한 피해를 입은 로도스 섬에 막대한 자금과 보호를 위한 투석기를 보내주는 등 지중해 세계의 여러 국가들을 상대로 후원하여 시라쿠사의 명성을 드높이고자 했다. 히에로 2세는 이와 더불어 당대 최고의 과학자로 알려진 아르키메데스의 후원자로도 유명하다. 플루타르코스는 아르키메데스가 히에로 2세의 친척이었다고 기술했으며, 아르키메데스가 기이한 기계를 제조할 수 있도록 물신양면으로 지원해줬다고 기술했다.

히에로 2세는 아내 필리스타스와의 사이에서 겔론 2세, 데마라타, 헤라칼라를 낳았다. 모종의 시기에 아들 겔론을 공동 참주로 세워서 후계자로 공인했지만, 기원전 216년에 겔론이 그보다 먼저 사망했다. 이에 겔론 2세의 아들이자 자신의 손자인 히에로니무스를 후계자로 삼았다. 기원전 215년 임종을 눈앞에 둔 히에로 2세는 히에로니무스의 나이가 어린 것을 염려하여 사위 아드라노도로스와 조이포스 등 15명의 고명 대신에게 히에로니무스의 보좌를 맡겼다. 그가 사망한 뒤, 히에로니무스는 아드라노도로스와 조이포스, 트라소를 제외한 고명대신들을 모두 해임하고 카르타고와 연합해 로마와 전쟁을 벌이려고 했다. 그러나 기원전 214년에 피살당했고, 시라쿠사는 로마의 침략에 직면하면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