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쿠사 참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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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bfff><colcolor=black> 겔론 1세 Gelon 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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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478년 |
출생지 | 시칠리아 |
사망지 | 시칠리아 시라쿠사 |
지위 | 시라쿠사 참주 |
국가 | 시라쿠사 |
가족 |
데이노메네스(아버지) 히에로 1세(형제) 트라시볼로스(형제) 폴리젤로스(형제) 디마레티(아내) 카드모스(아들) |
참전 | 시칠리아 전쟁[1] |
시라쿠사의 참주 | |
재위 | 기원전 484년 ~ 기원전 478년 |
전임 | 민주정 |
후임 | 히에로 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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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라쿠사 초대 참주.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활약하며 시칠리아의 여러 그리스 도시국가 중 하나였던 시라쿠사를 서지중해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육성시킨 인물이다.2. 생애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아버지는 데이노메네스였으며 그의 조상은 델로스 출신이다. 또한 그의 집안은 린디아 정착민들을 따라 시칠리아 남부의 젤라 시를 건설하는 데 참여했다. 또다른 조상인 텔린스는 겔라에서 발생한 내전을 치토닉(Chthonic: 지하 세계) 신들의 도움으로 끝낼 수 있었고, 이후 그의 후손들은 이 신들의 제사장 직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겔론에게는 세 형제 히에로 1세, 트라시볼로스, 폴리젤로스가 있었다.그는 본래 겔라의 참주 히포크라테스의 경호원으로, 주변의 도시 국가들과 원주민에 대한 전쟁에서 뛰어난 활약을 선보였다. 이후 겔라 기병대 사령관으로 진급한 그는 갈리폴리, 낙소스, 레온티네, 자글리 시 공략에 기여했다. 오직 시라쿠사만이 가혹한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맺고 자치를 인정받았다. 그러던 기원전 491년 히포크라테스가 토착 시칠리아인들과의 전투에서 사망하자, 아들들이 참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겔라 주민들은 더 이상 참주를 원하지 않아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반란을 진압했지만 병사들의 추대를 빋아들여 히포크라테스의 아들들을 축출하고 참주가 되었으며, 동쪽의 낙소스, 북동쪽의 자글리, 남쪽의 카마리나를 지배했다.
기원전 488년, 그는 제73회 올림피아 제전에 참가하여 4종 경기에서 우승하여 인기를 더욱 높였다. 기원전 485년, 민중의 혁명으로 시라쿠사에서 축출된 가모로스 귀족들은 겔론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기원전 484년 군대를 이끌고 시라쿠사로 진군해 별다른 저항없이 입성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그는 시라쿠사에 흥미를 느끼고 동생 히에로 1세를 겔라의 참주로 삼고 자신이 파괴한 카마리나의 모든 주민을 시라쿠사로 데려와 시민으로 삼았다고 한다. 기원전 483년 메가라 이블라이아를 정복한 뒤 이곳의 귀족을 시라쿠사로 옮기고 나머지 주민들을 시칠리아 외곽에 노예로 팔았다.
그가 참주로 군림한 이래, 시라쿠사는 특별한 경제적, 군사적 힘을 얻었다. 토목 공사가 집중적으로 이뤄졌는데, 특히 본토에 있는 아흐라디나 요새에서 바다까지 이어지는 성벽을 건설하여 시라쿠사를 사실상 난공불락으로 만들었다. 또한 토착 시칠리아 부족에서 끌어온 강력한 용병 부대가 창설되었으며, 그리스에서 온 1만 가량의 부대가 별도로 편성되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그는 1만 그리스 병사 모두에게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주었다고 한다. 그는 인근의 강력한 도시 국가 아카간타와 동맹을 맺고, 이 도시의 통치자였던 티론의 딸 디마레티와 결혼하여 아들 카드모스를 낳았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기원전 481년 가장 강력한 시칠리아 그리스 통치자로 여겨지던 그는 그리스 본토의 도시국가들로부터 크세르크세스 1세의 페르시아군에 맞서는 데 힘을 보태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고대 카르타고와 전쟁을 벌일 때 그리스인들이 돕지 않아서 시칠리아 전역의 그리스인들이 야만인들의 노예가 될 뻔했다며 질책했다. 그러면서 28,000명의 병사, 200척의 배, 그리고 전쟁이 지속되는 동안 군용 식량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그리스 연합군 육군이나 함대를 직접 지휘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스파르타와 아테네 사절이 이를 거절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들은 지도자들과 함께 이곳에 왔지만, 이제는 지휘할 사람이 없을 것이오. 그리스로 돌아가서 그 해에는 봄이 없을 것이라고 전하시오."
봄은 그리스에서 최고의 계절로 여겨졌다. 즉, 그는 자신의 군대가 그리스인들 중 최강인데 자신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페르시아에 맞서 병력을 보내지 않겠다는 것이다. 사실 그는 그리스군이 페르시아를 이길 수 없으며, 다음 차례는 자신이 될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는 스파르타의 명령을 받고 싸우기를 원하지 않았기에, 델포이에 사신을 보내 사태의 추이를 살피라는 명령을 내렸다. 만약 크세르크세스가 이기면 돈, 흙, 그리고 물을 주고 그리스가 이긴다면 돈을 가지고 돌아오도록 했다. 그리스가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자, 사절은 돈을 가지고 시라쿠사에 복귀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기원전 480년 하밀카르가 지휘하는 카르타고군 30만 명(현대 역사가들은 2만 명으로 추정한다)이 시칠리아 북쪽의 파노르모(현재 팔레르모)에 상륙하여 히메라를 향해 동쪽으로 진격했다. 도시에 접근한 하밀카르는 육군과 해군 진영을 별도로 설치하고 히메라 인들의 탈출을 막았다. 장인 테론으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은 겔론은 5만 보병과 5,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히메라로 진격했다. 그러던 중 장병들이 하밀카르에게 서신을 전하러 가던 셀리눈도스의 전령을 붙잡자, 그는 자신의 기병들에게 셀리눈도스의 전령인 것처럼 속이고 적진에 들어가라고 명령했다.
약속 날에 겔론의 기마병들이 카르타고 진영의 경비병들을 속이고 진영 안에 들어와 제물을 바치고 있던 하밀카르를 죽이고 배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신호가 올라오자 겔론은 본대를 이끌고 적진을 공격했다. 양군은 곧 격전을 벌였는데, 함선에서 화염이 치솟고 하밀카르가 죽었다는 사실이 전해지자 카르타고인들은 달아났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사망자는 15만 명에 달했고 포로는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디오도로스는 히메라 전투가 테르모필레 전투와 같은 날에 벌어졌다고 기술했지만, 헤로도토스는 살라미스 해전과 일치한다고 기록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카르타고는 나중에 이 소식을 듣고 전쟁 배상금 2,000달란트를 겔론에게 지불하고 조약의 내용을 보관한 두 개의 사원을 짓는 조건으로 평화를 맺자고 호소했고, 겔론은 이를 수락했다고 한다. 겔론은 시라쿠사와 히메라의 사원을 장식하기 위해 전리품 중 가장 가치있는 것을 보냈고, 전투에서 활약한 이들에게 보상을 제공하고 나머지 전리품과 많은 포로를 동맹국에 분배했다. 전투 직후, 라이벌 시칠리아 도시 국가들의 사절단이 화해를 요청하기 위해 그를 찾아왔다. 그는 모든 사람을 관대하게 대했다. 이후 페르시아에 대항할 원정을 준비했으나,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리스가 승리하고 크세르크세스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계획을 중단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그는 시라쿠사로 돌아온 뒤 시민들에게 무장을 갖춘 채 회의에 소집하게 했다. 그는 비무장인 상태로 회의에 참석한 뒤 자신의 행동에서 잘못된 점이 있었다면 지금 즉시 자신을 죽이고 시라쿠사를 장악하라고 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를 카르타고의 침략으로부터 자신들을 구한 영웅이라고 떠받들며 그를 계속 모시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그는 시라쿠사에서 2년 더 통치할 수 있었다고 한다.
기원전 478년 중병에 걸린 그는 동생 히에로 1세에게 권력을 넘겨주고 호화로운 장례를 금지하는 시라쿠사의 법을 자신의 장례에도 엄격하게 적용하라고 명령했다. 그를 존경했던 시라쿠사인들은 그의 무덤 위에 기념비를 세웠다.
[1]
1차 시칠리아 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