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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12월 3일, 경성부 서대문경찰서에서 촬영된 사진. | |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홍종석(洪鍾石) |
본관 | 남양 홍씨[1] |
출생 | 1902년 11월 23일[2] |
경기도
수원군 문시면 세교동 (현 경기도 오산시 세교동 큰말마을)[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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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미상 |
상훈 | 대통령표창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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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2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2. 생애
1902년 11월 23일 경기도 수원군 문시면 세교동(현 오산시 세교동)의 평민 가정에서 아버지 홍재전(洪在田, 1854. 7. 16 ~ ?)과 어머니 영월 엄씨(1864 ~ ?)[5]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숙종 때 형조 참판(종2품)을 지낸 홍수주(洪受疇)의 7대손이다. 이후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그는 1933년 8월, 적색노동조합 재건을 준비하던 김만석(金萬石)에게서 "현재 사회제도로 인해 무산계급에 있는 농촌 청년들이 부당한 압박을 받고 있으며, 이러한 모순된 사회제도는 변혁을 일으켜야 한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이에 감화된 그는 1934년부터 경기도 수원군 성호면(현 오산시)에서 안승락 등이 주도한 비밀결사 적색노동조합에 홍종례, 최경창, 안임균(安任均)[6], 홍순회(洪順廻), 안용봉, 이주몽(李柱夢) 등과 함께 참여했고, 1935년 3월부터는 수원군에서 공장에 근무하던 노동자들을 포섭하고 사회주의 운동 자금을 지원, 조달했다.
그러나 1935년 9월 경성부 서대문경찰서 고등과에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검거되어, 그해 12월 16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그리고 12월 26일 예심에 회부되었다.
이후 1936년 12월 28일 예심에서 면소 처분을 받고 출옥하였다.
출옥 후의 행적은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202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
당홍계-남양군파 32세 종(鍾) 항렬.
[2]
남양홍씨남양군파세보 8권 1270쪽에는 1877년 11월 28일생으로 등재되어 있다.
[3]
남양 홍씨 집성촌이다. 홍씨가 많이 살아 '큰말'을 '홍촌말'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독립유공자
홍종례·
최경창도 이 마을 출신이다.
[4]
출생지 388번지는 현재 -1부터 -8까지로 지번이 분리되어 있는데, 388-2번지는 1976년 3월 3일 장남 홍순정(洪淳貞, 1935. 5. 10 ~ 1999. 10. 6)에게로
소유권이 이전되었다가, 1999년 12월 20일부로 맏며느리
영암 박씨(靈巖 朴氏) 박동선(朴童仙, 1942. 11. 24 ~ )과 장손자 홍민표(洪玟杓, 1970. 3. 29 ~ )의 공동소유로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5]
엄동주(嚴東柱)의 딸이다.
[6]
이명 안인균(安仁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