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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3월 29일, 경기도경찰부 형사과에서 촬영된 사진. | |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918년 |
경기도
수원군 성호면[2] 세교리 (現 경기도 오산시 세교동 큰말마을)[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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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미상 |
사망지 미상 |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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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2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918년 경기도 수원군 성호면 세교리(현 오산시 세교동)의 평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이후 상경하여 경기도 경성부 수은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묘동)에 거주하면서 종업원으로 일했다.그녀는 1933년 8월 적색 노동조합을 조직해 활동하던 김상근(金相根)을 통해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교육을 받고 감화되었고, 1934년 3월에는 김상근에게서 사회주의 사상 관련 교양자료를 받기도 했다. 그해 4월 30일 경기도 인천부(현 인천광역시)에서 김상근이 5월 1일 노동절에 맞춰 격문을 배포했는데, 최경창은 당시 안양인견회사(安養人絹會社)에 여성 근로자로 근무하면서 통신 연락을 담당했다.
1934년 5월부터는 경기도 경성부에서 김희성(金熙星) 등이 주도한 비밀결사 '콤그룹'에 홍종갑, 홍종례 등과 함께 참여하여 활동했다. 이 콤그룹은 경성콤그룹이라고도 하는데 유명한 1939년 만들어진 경성콤그룹과는 다른 경성콤그룹이다. 이후 시흥군 서이면 안양리(현 안양시 만안구 안양동)에 있던 종연방직(鍾淵紡織) 제사공장(製絲工場)으로 이직해 직공을 근무했다.
그러나 1936년 12월 경기도경찰부에 검거되었고, 이후 1937년 5월 11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기소유예를 선고받고 출옥했다.
출옥 후의 행적은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녀의 공훈을 기려 202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