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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0 15:15:03

호소다 마모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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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다 마모루
[ruby(細田, ruby=ほそだ)] [ruby(守, ruby=まもる)] | Hosoda Mamo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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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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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67년 9월 19일 ([age(1967-09-19)]세)
일본 도야마현 나카니카와군 카미이치마치
학력 가나자와미술공예대학
직업 애니메이터, 애니메이션 감독
활동 1989년 ~ 현재
가족 배우자, 슬하 자녀 2명

1. 개요2. 경력3. 연출 기법4. 인간 관계
4.1. 함께 작업하는 인물4.2. 영향을 받은 인물
5. 작품 목록
5.1. 감독 작품5.2. 참가 작품
6. 평가7. 수상내역8. 국내에서9. 논란10.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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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

2. 경력

1967년, 후에 감독을 하고 연출한 늑대아이의 무대이기도 한[1] 도야마현 카미이치마치(上市町)라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서 자랐다. 외동아들로 철도직원이었던 아버지는 일에만 몰두해서 항상 집에 없었고, 어릴 적에 말더듬이 장애가 있어 초등학교 1, 2학년은 특별지원학교를 다녔다.

1979년 여름 린 타로 감독의 극장판 《 은하철도 999》를 보고 충격을 받고, 그해 겨울에는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던 그에게 어머니가 보여준 한 편의 영화 《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는다. 그리고 칼리오스트로의 성 극장용 팸플릿에 실린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림 콘티를 보고 애니메이션 제작에 관심을 갖는다. 초등학교 졸업 기념 문집에는 "장래 희망은 애니메이션 디렉터가 되고 싶다. 미야자키 씨와 린타로 씨의 연출 방법과 화면 구성을 보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라는 글을 남긴다
중학교 3학년 때, TV 방송에 나온 자작 애니메이션 특집을 보고 자신과 같은 학생이 애니메이션을 만든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A4 용지 1000장 정도를 준비하여 비행기가 총을 쏘는 약 1분 분량의 애니메이션을 제작하여 학교 내 문화제에서 상영했다. 고등학교 1학년에는 토에이 애니메이션이 제작한 카도카와 영화 《소년 케냐》(1984년, 오바야시 노부히코, 이마자와 테츠오 감독) 공개 애니메이터 모집 소식을 알게 되어 중학교 때 만든 자작 애니메이션을 보내서 응모, 최종 후보 중 한 명이 되었고[2] 프로듀서가 그 재능을 인정해서 도쿄로 와서 만나기를 권유받았으나, 학생 신분이라 학교 시험 때문에 포기한다.

1986년, 가나자와미술공예대학에 진학, 화가를 꿈꾸며 유화와 아크릴화를 전공. 5년 만에 졸업한다. 대학 시절에는 레오 카락스 등의 프랑스 영화를 접하고, 영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화가보다는 영상, 영화를 만들고 싶어졌다고 한다. 영화 동아리에서 실사 영상물을 50편 이상을 만들었다. 작품의 대부분은 비디오 아트로, 영화의 형태를 갖춘 작품은 2편이고 필름 페스티벌에 출품했으나 낙선했다.

대학 졸업 즈음에 스튜디오 지브리의 인턴 채용 시험에 응시하나 불합격했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인턴 채용 시험에는 그림을 2장 이상 그려서 제출하라는 시험에 150개 이상 제출했는데, 불합격 통보와 함께 미야자키 하야오가 쓴 "지브리는 장인의 세계라서 자네처럼 자신의 작품을 만들고 싶은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네. 자네를 (지브리에) 채용하면 오히려 재능을 없애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일부러 탈락시킨 것이라네." 라는 내용의 자필 편지를 받았다. 일용직이라도 좋으니 제발 채용해 달라고 지브리에 전화를 걸어 요청했는데, "이번 시험에서 미야자키 씨가 직접 편지를 보내준 사람은 모든 응시자 중 두 명밖에 없어요. 그중 한 사람이 당신이니 그것만으로 영광으로 여기세요."는 소리를 들었다. 당시 호소다는 좌절해서 이 편지를 마구 구겼다고 하는데, 지금은 이 편지는 소중하게 액자에 넣어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미야자키 감독은 분발하라면서 자네도 작더라도 작품을 만든다면 다시 만날지도 모르겠다고 적었는데, 10여 년 뒤 정말로 다시 만나게 돼서 깜짝 놀랐다고.

그 뒤에 카나자와시에 있는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잠시 일하다가, 《소년 케니야》 때 알게 된 프로듀서의 소개로 1991년 토에이 애니메이션에 입사한다. 호소다 마모루가 밝히기를 자신이 입사할 당시 토에이는 망해가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버블 경제로 일본 국내는 호황으로 들썩였는데 오히려 힘들게 헐떡이고 있던 곳이 아니메 업계였다고. 1980년대 일본 아니메 업계의 가장 큰 밥줄은 미국과의 합작(미국이 기획하고 돈을 대면, 일본 측이 실제작을 담당)이었는데, 엔고로 인해 제작비가 비싸져서 채산이 맞지 않자, 기획되는 작품 수가 줄어들고 그 결과 일거리도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 세일러 문》을 준비하는 시기에 입사했는데, 이 작품으로 토에이는 부활했다고 한다.

본래 연출을 하고 싶었으나 먼저 애니메이터부터 시작하라는 말을 듣고 동화와 원화를 그리는 애니메이터의 길에 들어선다. 신입 시절에는 실제 현장의 주변 동료 애니메이터의 능숙한 실력을 보고 자존심은 구겨질 대로 구겨져 애니메이터를 계속 해나갈 수 있을지 고민했다. 애니메이터로 경력을 쌓아가기를 6년, 우연히 사내에서 연출 채용 시험이 있다는 공고가 적힌 벽보를 본다. 시험 내용은 1개월 안에 TVA 1화분인 20분 분량의 그림 콘티를 그려서 제출하라는 것이었고, 낮에는 평소 하던 일을 하면서 잠자는 시간을 쪼개서 그림 콘티를 그려 응모해 합격, 1997년 게게게의 키타로 4기로 연출가로 본격 데뷔한다. 같은 해 아버지가 급병으로 돌아가셨다.

그 후 《비밀의 아코짱》(제3기)의 연출로 참여한 후, 1999년에는〈 디지몬 어드벤처 극장판〉으로 극장판 첫 감독작을 연출한다. 그리고《 디지몬 어드벤처》 TV 시리즈의 제21화를 연출, 2000년에는 디지몬 어드벤처 극장판 〈 우리들의 워 게임!〉를 감독하여, 그 연출력으로 업계 안팎에서 주목을 받게 된다. 토에이 시절 참가한 작품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작품은 《 슬램덩크 극장판 3탄》(1995년)으로 배운 것이 많았다고 한다.

2000년 8월에는 스튜디오 지브리에 놀러갔다가, '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라는 기획이 있는데 감독을 맡아보지 않겠냐며 제의가 온다. 드디어 장편을, 그것도 한번 채용에서 떨어진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맡는다고 리턴 매치라며 기뻐하며 의욕적으로 도전했지만, 기상천외한 원작을 어떻게 영화로 구상해야 할까 실마리를 잡지 못하고 난관에 처해 시간을 허비하다가 겨우겨우 그림 콘티 C파트까지[3] 완성했지만[4], 제작은 난항을 겪고, 감독 제안을 받고 제작에 매달린 지 2년 만에 2002년 4월 21일 담당 프로듀서에게서 "이건 더 이상 무리겠어"라는 말을 듣고 감독직에서 강판당하고 호소다가 이끌던 제작 팀은 해체된다. 한국에서는 한 때는 송락현이 퍼트린 엉터리 루머가 정설인양 퍼지기도 했다.

이때 지브리는 《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제작에 올인하고 있는 상황이라 제대로 지원도 받지 못해 호소다는 자신의 인맥으로 여러 스튜디오를 찾아다니며 인력을 데려왔는데, 계획이 무산되자 신뢰와 인망은 실추되었고 데려왔던 스탭들은 갑자기 하던 일을 그만두고 다음 일거리를 찾아야 했고, 그동안 일한 급료 지불이 밀리는 등의 문제까지 발생했다. 호소다는 이때를 돌이켜 "이제 애니메이션 업계에서는 일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할 정도로 인생의 큰 좌절을 맛본다. 이후 호소다 마모루는 인터뷰에서 스튜디오 지브리 미야자키 하야오에 대한 반감을 표출했고, 감독 강판 사건에 대한 속사정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죽은 후에 밝힌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본인은 억울해하는 것 같다. 그 동안에 나온 정보를 종합해서 추측하자면, 미야자키 하야오가 언제나처럼 간섭이 심해서 호소다 마모루의 작업이 늦어졌고 결국 진척이 없자, 프로듀서였던 스즈키 토시오가 "이건 힘들겠어."라며 감독직에서 해고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실은 본인이 원인을 제공했으면서도 그의 입장에서는 스태프가 갑자기 사라져서 어쩔 수 없이 감독직을 맡았다고 말을 하고 있는 상황으로 보인다. 더 자세한 것은 링크 참조.

2002년 토에이로 복귀한 뒤, 영화의 기획을 계속 내보지만 채택되지 않았고, "호소다는 끝났다"라고 업계에선 수근거렸다. 토에이에서는 《 오자마녀 도레미》와 《 내일의 나쟈》 등의 연출, 루이비통의 프로모션 애니메이션 〈SUPERFLAT MONOGRAM〉를 연출하고, 2005년에 《 원피스 극장판 6기 오마츠리 남작과 비밀의 섬[5]을 만든다.

2005년 애니메이션 제작 회사 매드하우스의 사장 마루야마 마사오가 우연히 호소다가 연출한 TV 시리즈 《 오자마녀 도레미 콰~앙!》 40화를 보고, 장편 감독직으로 발탁해서 14년간 근무한 토에이 애니메이션을 퇴사하고 프리랜서가 되었다. 그리고 2006년 7월, 《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발표하고 일본 국내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처음에는 주목받지 못하고 6개의 스크린에서 개봉했지만, 관객들의 입소문을 타고 9개월 동안 100군데 이상의 극장에서 상영되었다. 흥행 수입은 2.6억 엔. 본인 말로는 청소년들 보라고 만들었는데 막상 극장에는 아저씨 관객만 우글우글했다고 한다.

2009년 8월에는 3년에 걸쳐 만든 두 번째 감독작 《 썸머 워즈》도 좋은 평가과 흥행에서도 16.5억 엔의 히트를 기록했다. 썸머 워즈를 만들기 전, 어머니가 아파서 하던 일을 잠시 그만 두고 고향에 내려가 있었는데 가까운 친척 어른의 "너는 성공하기 위해 도쿄로 떠났으니 이곳은 가족들에게 맡겨두고 다시 올라가서 자신의 일에 집중하라"는 격려를 듣고 다시 일로 돌아와 가족들의 단합과 사랑을 다룬 《썸머 워즈》를 기획하게 되었다는 후문이 있다.

그 뒤에 애니메이션 제작사 스튜디오 치즈를 설립하고, 2012년 7월, 신작 《 늑대아이》를 발표했다. 관객 동원 수 약 340만 명, 최종 흥행 수입은 42.2억 엔으로 자신의 최고 흥행 기록을 달성했다. 2009년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리며, '엄마와 육아'라는 테마를 그린 작품이었다. 이른바 포스트 미야자키의 선두 주자로 작품성과 흥행성에 성공한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애니메이션 감독의 위치에 오른다.

2012년 9월, 늑대아이 개봉 2달 후에 장남이 태어났다. 2015년 말에는 장녀(이름은 미라이)가 태어났다.

2015년에는 《 괴물의 아이》를 공개하고 흥행 수익은 58.5억 엔으로 또다시 자신의 흥행 성적을 갱신했다. 이즈음에 호소다 마모루는 브랜드 네임류의 인기 감독이 되었다. 단 흥행과는 별개로 스토리 텔링이 부족해서 저연령층을 타겟팅한 애니같다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늘기 시작했다. 비판 부분은 항목 참조.

2018년에 또 한 편의 가족 이야기 《 미래의 미라이》를 공개했는데, 최종 흥행 수입은 일본에서 28.8억 엔으로 전편보다 훨씬 떨어진 기록이었다. 영화 내용이 사적인 가족사 이야기라서 대중적인 공감을 못 받았다는 평이 있다. 그리고 이전까지 공동으로 각본을 쓴 오쿠데라 사토코가 참여하지 않은 괴물의 아이와 미래의 미라이는 각본에서 문제점이 드러났고, 이 두 작품의 각본을 혼자서 쓴 호소다 마모루의 스토리텔러 능력을 지적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그러나 호소다는 이전에도 각본을 직접 쓴 적이 있으며 그때는 욕을 먹지 않을 정도로 실력이 있었으며 오쿠데라와 같이 작업한 작품에서도 시나리오에 관여를 많이 하였다. 저 두 작품의 경우는 호소다가 직접 써서 문제라기보단 자기 취향을 너무 드러내서 그런 것이라 봐야 한다.

활동하고 있는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 중에서는 해외 쪽 주목도가 높아서 콘 사토시 이후 3대 국제영화제에 초청받을 확률이 높은 감독이다.[6] 본인도 적극적인지 해외 출품을 자주하고 있으며 특히 미래의 미라이 칸 영화제 2부 행사인 감독 주간에 초청되면서, 어느 정도 가까워진 편. 신작인 용과 주근깨 공주 2021년 칸 영화제 비경쟁 부문인 칸 프리미어 부문에 초청되면서 처음으로 공식부문에 진출하게 되었다.

3. 연출 기법

파일:호소다마모루콘티.jpg
호소다 마모루의 콘티 ( 우리들의 워 게임!)

애니메이터 출신으로서 콘티를 상당히 잘 그린다. 인물 작화를 꽤 간단하게 그리기는 하지만 표정이나 행동 지시는 원화와 다름없을 정도로 세밀하게 들어가있고 콘티에 배경까지 그려넣는 것이 특징이다.

이야기를 세밀하게 구성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각본 단계에도 크게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같은 컷과 구도를 되풀이하는 동(同) 포지션, 실사의 카메라 워크(광각 렌즈 등)를 의식한 연출, 그림자를 그려넣지 않는 작화, CG의 움직임을 셀화의 움직임에 접근시키는 등, 실사·애니메이션·디지털의 경계를 넘나드는 독자적인 연출 기법을 가졌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멀티로 여러 가지 큰 것을 잘 다룬다면 호소다 마모루는 세세한 개인적 표현을 잘한다는 의견이 있다.

작품 속에서 비행운, 교통 표지판, 갈림길, 소녀, 노파, 주스, 디지털의 둥근 공간이 빈번히 나온다. 그 외에 비슷한 상황을 몇 번씩 반복하거나, 개그 연출로 인물의 얼굴이 만화적으로 되는 등의 표현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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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작품을 전부 본 사람이면 연출과 장르에서의 공통점 및 클리셰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가상 세계를 자주 소재로 차용하는 것이 특징인데, ' 우리들의 워 게임'의 디지털 월드, '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 타임 리프할 때 묘사된 시공간의 세계, ' 썸머 워즈'의 인터넷 세계 OZ, ' 괴물의 아이'의 또 다른 세계 주텐가이 등으로 나오는 등에서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단편인 'SUPERFLAT MONOGRAM' 에서도 가상 세계 설정이 차용되었다. 최신작인 ' 용과 주근깨 공주'도 가상 세계인 U가 배경이 된다.

때문에 호소다 마모루 작품이 연출, 내용 등을 우려먹는다는 지적이 있기도 한데, 이는 썸머 워즈 우리들의 워 게임!을 답습한 거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사실 썸머 워즈는 우리들의 워 게임의 정신적 후속작에 해당한다. 썸머 워즈 소설판에는 우리들의 워 게임이 원작이라 표기되어 있다. 사실상 리메이크판 이라서 봐도 좋으며, 또한 같은 소재를 차용하더라도 스토리나 캐릭터면의 차별화는 상당히 잘 이뤄낸다. 괴물의 아이가 전작인 늑대아이와 같은 수인을 소재로 차용했다는 점에서 이번에도 또 소재 우려먹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있었으나, 늑대아이와는 상당히 차별화된 스토리를 짜내었기에 '답습'한다거나 '우려먹는다'는 평가는 다소 비합리적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캐릭터의 표정 묘사 같은 건 좀 패턴화가 돼있긴 하나 아래와 같이 애니메이터 개인의 스타일을 존중하기 때문에 매 작품마다 꽤나 다른 영상이 나오며 새로운 시도도 끊임없이 하는 감독이다.

호소다 마모루는 모든 면에 있어서 자신의 스타일을 강요하는 미야자키 하야오 같은 스타일의 감독이 아니며 애니메이터 개인의 스타일을 존중하는 편이다. 신인 시절부터 각각의 애니메이터가 어떤 그림과 연출을 그릴 수 있는지를 분석했다고 하며 중요한 장면은 그 장면에 맡는 애니메이터에게 위임해서 마음껏 날뛰게 하는 방식을 쓴다. 이런 스타일 때문에 몇몇 장면에선 본편의 큰 작화와 연출의 흐름과는 다른 상당히 이질적이면서도 개성적인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작품은 모두 감성 드라마 → 액션 순서를 번갈아가면서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2006, 감성) → 썸머 워즈(2009, 액션) → 늑대 아이(2012, 감성) → 괴물의 아이(2015, 액션) → 미래의 미라이(2018, 모험) 등등. 시간을 달리는 소녀부터 3년을 단위로 차기작을 개봉하고 있다.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작품에서 키워드는 선택이다. 늑대아이에서 학교와 산을 사이에서 선택하는 유키와 아메, 아픈 유키를 안고 소아과와 동물병원 사이에서 고민하는 하나, 썸머 워즈 포스터에서 왼쪽과 오른쪽으로 편이 갈리는 점등을 고려하면 된다. 호소다 감독의 작품에서는 선택을 한 후에 무언가 성장하게 된다.

뭉게구름은 성장의 의미이다. 호소다 감독의 작품에서 뭉게구름 혹은 구름은 상당히 많이 사용되는 키워드이다. 늑대아이를 예로 들어보겠다. 엄마 하나가 시골 할아버지에게 농사를 배웠을 때, 유키가 엄마가 만들어준 새 원피스를 입고 인간으로서의 삶을 선택했을 때, 아메가 늑대로서의 삶을 선택했을 때도 선택 후 구름이 피어오른다.

꽃밭은 상당히 많이 사용되는 무대이다. 보통 호소다는 영화 처음에는 꽃을 피우지 않은 상태에서, 주인공이나 등장인물이 무언가 선택을 하여 성장을 할 때 이후 장면에서 꽃이 꽃봉우리를 피우는 모습으로 성장의 증거를 보여준다.

요리를 비출 때 앵글에 공을 들인다. 이토 토모히코도 이걸 말하면 "이것이 가장 맛있어 보이는 각도야, 이토!"라고 말할 것 같다면서 이 점을 짚은 적이 있다. #

호소다는 섬세한 인물 작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머리카락이 한 올 한 올 휘날린다거나, 명암을 몇 겹으로 넣는다거나. 눈, 코, 입을 뚜렷하게 그리는 작화는 그의 작품에선 별로 시도되지 않는다. 왜 음영을 넣지 않냐고 묻는 사람의 질문에 일부러 색을 구별해서 채색할 정도로 사람의 얼굴에 그림자가 있지는 않다면서 그건 오히려 애니메이션에서 굳어진 것이라고 답했다. 이런 기법을 카게나시(影なし)라고 하며, 호소다 감독의 작품 이전에는 대중적인 기법이 아니었지만, 그가 성공한 이후로는 여러 작품에서 시도되고 있다.

명암을 묘사하는 대신에 움직임과 감정 표현을 중시하는데 카게나시도 움직임을 극대화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이다. 명암이라는 게 채색 쪽에서 칠하기 전에 애니메이터가 이렇게 칠하라고 명암 구분선을 한 번 쳐주는데 명암을 안 넣으면 선 치는 수가 줄어드니 실력있는 애니메이터가 더 많은 작화를 할 수 있다. 움직임을 그려내기도 더 쉬워진다. 인물만 그런 것이 아니라 디지몬을 할 때도 중요한 액션 장면에선 디지몬의 몸에 있는 문양이나 선을 없애서 애니메이터들의 부담을 줄이고 대신 액션에 전념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가 주로 기용하는 애니메이터인 모리 히사시 니시다 타츠조도 이러한 특징을 가졌다. 이렇게 인물은 매우 단순한데 배경이나 이펙트는 매우 화려하게 넣는 특징도 있다.

단순하고 명암 없는 작화를 선호하는 그의 취향 때문에 한국에서는 비슷한 영역(애니메이션 영화)에서 활동하는 신카이 마코토에 비해 작화에서 저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더 실력 있는 작화가를 기용하는 건 호소다 마모루이다.[7] 히구치 신지 말로는 일본에 그림을 제대로 그리는 애니메이터가 50명이 있는데 미야자키 하야오, 오시이 마모루, 오토모 카츠히로, 호소다 마모루가 다 데려가서 쓸 사람이 없다고 하기도 했다. # 그래서 작품 전반적으로 움직임이 매우 뛰어나다. 신카이 마코토가 정적인 연출에 배경, 채색, 촬영을 최대한 활용하는 반면 호소다 마모루는 애니메이팅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호소다 마모루가 아예 촬영, 채색, 배경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매드하우스에서 작업한 작품들과 스튜디오 치즈 설립 후의 작품들은 어느 정도 기본적인 명암은 넣었고, 배경 미술과 미장센은 굉장히 디테일하고 수려하다. 또한 그의 인물 작화는 전체적인 색채에 비해 어두운 색감으로 칠해진다. 이동진 평론가도 영화당에서 호소다 마모루의 장점 중 하나는 사실적인 배경 미술과 빛의 반사를 이용한 작화 표현이라고 말한 바 있다. 어디까지나 신카이 마코토에 비해 덜 신경쓸 뿐, 극단적으로 애니메이팅에 집중하지 않고 양쪽의 균형을 맞추고자 한다. 호소다가 촬영을 신경쓰지 않았던건 토에이 시절 얘기고 매드하우스 시기부터는 작화의 의도를 가릴 정도로만 안쓸 뿐 기본적인 촬영은 넣으며, 채색도 공들인다. 곤 사토시와 비슷한 경우다. 호소다 마모루는 젠카게 기법을 많이 쓰는데 이는 어느 정도 조명과 명암을 고려하기 때문에 쓰는 기법이다.[8]

채색할 때 보라색은 의도적으로 배제한다고 한다. 본인이 싫어해서 그런 건 아니고 오히려 보라색을 너무 좋아해서 보라색을 한 번 쓰면 그것만 쓰게 되어 다른 색을 안 쓰게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

원래는 굉장히 우울한 연출, 충격적인 연출 전문가였다. 호소다의 후기 작품을 본 사람들이 그가 감독을 안 하고 콘티 연출가로 활동하던 시절 작품을 보면 큰 충격을 받을 수 있다. 우울증도 심했었다고 한다. 슈도 타케시도 "호소다 마모루 작품은 어딘가 어둡다." 라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을 달리는 소녀부터 밝고 희망적인 작품이 많아졌다. 시달소는 호소다의 작품이 밝아진 기점으로 꼽히는데 이 작품을 만들 때 현재의 아내와 연애를 했으며 그때부터 세상이 달리 보이게 되었다고 한다.

4. 인간 관계

4.1. 함께 작업하는 인물

4.2. 영향을 받은 인물

미야자키 하야오의 제자로 잘못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은데 전혀 아니고 오히려 존경하고 있다는 공식적인 말도 없다. 위에 언급된 대로 한때는 제자가 될 생각이 있었으나 미야자키에게 거절당했고, 나중에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연출을 그만둔 이후론 별로 마땅한 인연이 없다.

오히려 호소다 마모루가 존경하는 감독은 타카하타 이사오 스기이 기사부로이며 이 둘의 연출 기법과 유사한 연출을 많이 사용한다. 타카하타 이사오하고는 개인적으로도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호소다가 미야자키의 초기작을 좋아하는 만큼 그 영향도 있겠지만 다카하타 이사오에 비하면 크지는 않다. 호소다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은 미야자키 씨와 전혀 다른 것이다"라고 여러 번 인터뷰에서 밝힌 바가 있다. 단적으로 카메라 앵글 활용법만 비교해도 미야자키와는 다르다. 미야자키는 카메라 앵글이 역동적으로 움직이지만 호소다 마모루는 카메라를 단단히 고정하고 이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10] 극적인 장면에서만 움직이는 연출을 주로 쓴다. 그러나 콘티를 그리는 구성과 방법은 미야자키의 영향이 크게 느껴지는데 두 사람의 콘티를 늘어놓고 비교해보면 기술적으론 거의 동질의 것이란 걸 알 수 있다.

한편 그림의 스승은 야마시타 타카아키인데 호소다 특유의 명암을 안 넣는 그림은 그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둘은 한때 절연할 뻔도 했으나 화해해서 지금도 계속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한편으론 연출의 기초를 가르쳐준 스승들은 의외로 미소녀 전사 세일러 문 당시의 선배들이다. ( 사토 준이치, 이쿠하라 쿠니히코) 호소다는 신인 시절의 작업물이 부끄럽다고 공개하지 않아 세일러 문에 얼마나 많이 어디에 참여했는지 알려져있지 않으나 꽤 많이 참여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은 나중에 소녀혁명 우테나도 작업했으며 호소다 마모루의 결혼식에는 세일러 문과 우테나 주요 스태프들이 전원 참석했다고 할 정도로 긴밀한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특히 동일한 컷을 반복하는 연출의 경우는 이쿠하라의 영향이 크다. 그 외에 연출을 배운 인물로는 드래곤볼 야마우치 시게야스 바람의 검심 -메이지 검객 낭만기- 후루하시 카즈히로를 꼽는다.

요컨데 호소다 마모루는 스튜디오 지브리와 관계가 있는 인물이라 생각할 수 있으나 실은 그쪽하곤 별로 관계가 없고 토에이 애니메이션이 키워낸 감독이라고 봐야한다.[11]

좋아하는 영화 감독으로는 빔 벤더스, 우디 앨런, 에드워드 양, 빅토르 에리세, 소마이 신지 등을 꼽는다. 특히 소마이 신지의 열렬한 팬이라 각본에 오쿠데라 사토코를 기용한 것도 소마이 신지의 이사 각본을 담당해서였다고 한다. [12] 일본에서 있었던 소마이 신지 회고전에 게스트로 참석해 대담을 나누기도 했다. 가장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으로는 빨강머리 앤[13]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을 주로 언급하며 그 외에도 내일의 죠, 전설거신 이데온, 은하철도의 밤 ( 스기이 기사부로 판), 안녕 은하철도 999: 안드로메다 종착역, 기동전사 건담 F91 등을 꼽는다.

5. 작품 목록

5.1. 감독 작품

호소다 마모루 감독 연출 작품
,(TVA 참가작 제외),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디지몬 어드벤처: 운명적 만남
1999년
디지몬 어드벤처: 우리들의 워 게임!
2000년
오마츠리 남작과 비밀의 섬
2005년
시간을 달리는 소녀
2006년
썸머 워즈
2009년
늑대아이
2012년
괴물의 아이
2015년
미래의 미라이
2018년
용과 주근깨 공주
2021년
}}}}}}}}}

이외에도 2000년 7월 20일에 공개한 7분짜리 단편 애니메이션 영화 디지몬 어드벤처 3D: 디지몬 그랑프리에서도 감독을 맡았다.

5.2. 참가 작품

5.2.1. TV 애니메이션

호소다가 감독하지 않고 TV 애니메이션에서 콘티와 연출만 한 작품도 완성도가 높고 다른 연출가에게 맞추거나 원작대로 만들기를 싫어하는 호소다 마모루의 성향상 개인 성향이 강한 단편 완결인 작품이 많으므로 호소다 마모루 팬이라면 보는 것을 추천한다.
<rowcolor=#fff> 년도 제목 회차 연출 콘티 비교
1995 꾸러기 수비대 27공동, 33, 37화 [14]
1996 게게게의 키타로 4기 94, 105, 113화
1996 바람의 검심 -메이지 검객 낭만기- 8, 18, 24, 29, 40, 43화 [15][16]
1997 소녀혁명 우테나 7, 14, 18, 23, 29. 33, 39화 [17][18][19]
1998 비밀의 아코짱
3기
6, 14, 20, 30화 [20]
1999 디지몬 어드벤처 21화 [21]
1999 천사가 될 거야 6, 14, 20, 30화 [22]
2002 꼬마마법사 레미 Vivace 40, 49화 [23][24]
2003 내일의 나쟈 OP, ED, 5, 12, 26화 [25]
2004 원피스 199화 [26]

5.2.2. 그 외

작화를 관리하는 걸 잘하는 거지 작화를 직접 잘 그리는 걸로 유명한 사람은 아니므로 원화 애니메이터로 참가한 작품은 안 봐도 무방하다.

6. 평가

" 미야자키 하야오 이후는 확실히 호소다 마모루!" #
"호소다 마모루의 여름 안에서 살고 싶다."
영화 평론가 이동진[28]
"새로운 시대를 만들었다고 해도 좋다."
"본 작품 앞에서 과거의 영화 등은 그저 시대에 맞춘 수법을 모방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이러한 작품을 만날 수 있어서 같은 제작자로서 행복하다."
"애니메이션으로 한정 짓는 것이 아쉽다. 애니메이션의 가능성을 개척해 준 감독 이하 모든 제작진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애니메이션 감독 토미노 요시유키 - 늑대아이 평가.[29]

7. 수상내역

수상 연도 시상식 부문 작품
2006년 제39 회 시체스영화제 최우수 애니상 시간을 달리는 소녀
2007년 제31 회 안시 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 장편영화 특별상
2009년 제42 회 시체스영화제 최우수 애니상 썸머 워즈
2010년 제33 회 일본 아카데미상 최우수 애니메이션 작품상
2012년 제45 회 시체스영화제 최우수 애니상 늑대아이
2013년 제36 회 일본 아카데미상 최우수 애니메이션 작품상
2015년 제53 회 히혼국제영화제 특별언급 괴물의 아이
2016년 제39 회 일본 아카데미상 우수 애니메이션 작품상
2018년 제51 회 시체스영화제 최우수 애니상 미래의 미라이
2019년 제46 회 애니어워드 최우수 독립 장편 애니메이션
제42 회 일본 아카데미상 우수 애니메이션 작품상

8. 국내에서

2009년 썸머 워즈 개봉 기념으로 내한한 적이 있다. 차기작인 늑대아이 때는 첫 아들이 태어나서 내한을 못했지만 다음 작품인 2015년 괴물의 아이 국내 개봉 때도 내한을 했다. 괴물의 아이 내한 때는 11월 11일 괴물의 아이 라이브톡, 11월 12일 늑대아이 시네마톡 및 티브이데일리와의 인터뷰로 총 2박 3일의 일정을 마쳤는데, 티브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차세대 미야자키라는 평가는 달갑지 않다는 입장 # 과 함께, 현재 한국 영화의 수준은 일본 영화가 쫓아갈 수 없을 정도로 높아져 있으며 봉준호, 나홍진 감독 등의 작품에 자극을 많이 받고 있다 #는 견해를 밝혔다. 2019년 12월 13일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 "굉장한 영화"라고 절찬하는 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다.

9. 논란

10. 여담



[1] 늑대아이의 무대는 사는 집을 비롯한 초등학교, 폭포, 논밭 모두가 실제 존재하는 장소를 화면으로 옮겼다. [2] 다른 두 명은 우루시하라 사토시 후쿠다 미치오로 후쿠다와는 지금도 친하다고 한다. [3]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그림 콘티는 ABCD 네 파트로 나뉜다. 즉, 4분의 3까지 그림 콘티를 그렸다는 말이다. 이 호소다 마모루가 만든 하울의 성의 그림 콘티를 보고 싶어하는 팬이 많이 있지만, 아직도 공개되지 않았다. 몇 장인가 유출된 그림 콘티만을 보면 자동차가 나오고 길거리 장면을 보면 무대 설정이 현대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4] 호소다 마모루는 후에 인터뷰에서 "토에이에서 배웠다는 이상한 자부심 혹은 싸구려 프라이드 같은 것이 있어서, 미야자키 씨와 타카하타 씨에게 상담을 받거나 일종의 가르침을 청하는 것도 지금 생각하면 조금 정도는 좋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 "이거다 저거다" 지적당하는 것이 싫었다고 한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타카하타 이사오, 미야자키 하야오야말로 토에이 애니메이션의 대선배다 [5] 이 작품은 스튜디오 지브리 시절의 쓰라린 경험을 투영하고 있다. [6] 3대 국제영화제에 애니메이션, 그중 일본 애니메이션이 초청받는 일은 손에 꼽을 정도다. 미야자키 하야오, 오시이 마모루, 콘 사토시 정도만 경쟁에 초청받았을 정도. 2023년 신카이 마코토 스즈메의 문단속으로 제73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받으면서 한 명 더 추가되었다. [7] 사실 신카이는 작화가 아니라 촬영에 강점이 있는 감독인데, 한국은 촬영도 작화라고 생각해서 벌어지는 현상. [8] 젠카게를 많이 쓰는 감독으로 사쿠라비 카츠시, 나가이 타츠유키가 있는데, 두 사람도 촬영을 어느정도 신경쓴다. [9] 호소다를 처음 발굴하고 밀어준 프로듀서이다. 현재는 호소다가 토에이를 나가서 관계가 없지만 한때는 진짜 허물없는 사이라 호소다가 세키 앞에서 줄담배 피우면서 인터뷰하는 영상도 있다. [10] 후술하듯이 호소다는 소마이 신지나 빅토리 에리세, 에드워드 양을 좋아하는데, 이 감독들의 영화는 카메라를 거의 움직이지 않고 롱테이크 연출을 즐겨 쓴다. 거기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1] 다만 스튜디오 지브리의 주역들 일부는 토에이 애니메이션의 전신인 토에이 동화 출신이니 같은 토에이 애니메이션 출신이라고 볼 수는 있겠다. [12] 소마이 신지는 소년소녀들을 주인공으로 롱테이크 위주의 성장물을 내놓은 감독이라, 영향을 받은 걸로 보인다. [13] 역사상의 모든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가운데 가장 좋아한다고 인터뷰에서 말했다. [14] 해라가 주연인 에피소드를 주로 연출했다. [15] 소다마 모루호 명의 [16] 천상용섬이 나오는 43화가 유명하다. [17] 하시모토 카츠요 명의 [18] 연출뿐만 아니라 액션씬 애니메이터로도 참여했다. [19] 호소다의 연출 출세작. 담당 에피소드는 전부 유명하다. [20] 스승 야마시타 타카아키와 같이 만든 14화가 유명하다. [21] 원판 에피소드 제목은 '코로몬 도쿄 대격돌' 이고 국내판 에피소드 제목은 '현실 세계로 돌아온 태일!' 디지몬 팬들에게 유명한 에피소드이다. [22] 하시모토 카츠요 명의 [23] 40화가 유명하다. 더빙판은 삭제된 에피소드가 3편이 있어 37화. [24] 사쿠라 미라이가 나오는 중요한 이야기로, 기존의 동화풍의 그림과 전혀 다른 방식의 현실적인 연출을 선보이며 말도 안 되는 퀄리티를 뿜어냈는데, 원래 4기 극장판으로 예정된 시나리오였다고 한다. 스폰서의 요구에 의해 일이 잘못되어 TV판 시나리오로 들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도레미 시리즈의 극장판은 재생 시간이 26분으로 TV판과 큰 차이는 없다. 따라서 TV판화되었다 해도 크게 누락된 부분은 없을 것이다. 마루야마 마사오 프로듀서는 40화를 보고 감명을 받아 호소다를 감독으로 밀어주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25] 26화가 유명하다. [26] 극장판 장편 오마츠리 남작과 비밀의 섬의 연출 제의를 받고, 그 전에 먼저 TV용 1편을 연출해 보라고 해서 만들었다. TV 시리즈물이라서 스타일을 맞추기 위해, PAN이라든가 QTB[36]라든가 이전과는 다른 카메라 워크 연출을 집어넣었다. [27] 엔딩 영상이 실사인데 그걸 카메라로 찍은 사람이 호소다 마모루다. [28] 이동진 평론가는 2009년과 2015년에 호소다 마모루 감독이 각각 썸머 워즈, 괴물의 아이 개봉 기념으로 내한했을 때 두 내한 행사 모두 사회자를 담당하였다. [29] 토미노는 호소다의 작품은 웬만하면 호평한다. 대담에서는 "내가 전설거신 이데온을 만들지 않았다면 당신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을 것." 이라고 한다. [30] 예시로 타이치 코로몬 수박을 먹었지만 히카리는 먹지 않은 장면을 30세 본처(히카리)와 20세 애인(코로몬)이 간에 남편(타이치)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수박을 줄 테니 남편 돌려줘 하고 말하는 걸 뜻하는 것이며, 니네들은 디지털 월드에서만 알았지만 난 8년 동안 알고 지냈다고 주장하며 오빠를 돌려받으려는 질척질척한 얘기라고 말했다. [31] 정확히는 콘티를 맡았는데 각본이 마음에 안 들어서 감독한테 말했더니 새로 만들어라고 했고 각본을 보지 않은 채로 콘티를 그렸는데 방영되니 각본가 이름이 시라이 치아키라는 이름으로 나왔다고 한다. [32] 실제로 디지몬 20주년 기념 아트북에서 공개된 오메가몬의 러프 디자인은 지금보다 훨씬 강인하고 육중한 디자인이었다. [33] 쿤이 강아지 꼬리를 엉덩이에 달고 반 강아지화 되는 장면이 있다. [34] 도쿄에서 아버지와 남동생 토모와 함께 살고있는 14살 소년. 가상 세계인 U에서 아바타인 AS가 용으로 나온다. [35] 2019년 작품인 날씨의 아이는 중국 정부가 민감하게 반응할만한 내용(범죄, 기후 문제, 사회 비판 등)을 하나도 아니고 여러 개를 동시에 다루고 있음에도 통과됐다. 중국이 심의를 얼마나 기준 없이 대충 하는지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