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문서: 도미네이션즈/건물 및 병력/기타(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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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3cca2><colcolor=#ffffff,#dddddd> 의무 | <colbgcolor=#a3cca2><colcolor=#ffffff,#dddddd> 컨셉 | 고문관 |
리더 | 성군 | 로버트 더 부르스 | |
탐험가 | 붉은 에이리크 | ||
정복자 | 알렉산더 대왕 | ||
알크마이온 가문의 마지막 후예 | 알키비아데스 | ||
성녀 | 잔 다르크 | ||
사무라이 | 검사 | 미야모토 무사시 | |
왕족 | 스파르타의 왕 | 레오니다스 | |
신라의 여왕 | 선덕여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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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시티 불독 | 윈스턴 처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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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미라의 여제 | 제노비아 | ||
나일강의 여왕 | 클레오파트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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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 장군 | 여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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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독 | 제독 | 이순신 | |
해적 | 정일수 | ||
학자 | 과학자 | 마리 퀴리 | |
발명가 | 새뮤얼 모스 | ||
발명가 | 알프레드 노벨 | ||
정치인 | 페리클레스 | ||
등불을 든 여인 |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 ||
혁명가 | 하얀 쥐 | 낸시 웨이크 | |
저항의 여왕 | 부디카 | ||
엘 리베르타도르 | 시몬 볼리바르 | ||
건국의 아버지 | 조지 워싱턴 |
1. 개요
Marie Curie과학자
인생에서 두려워할 것은 없다. 오직 이해할 것만 있을 뿐.
인생에서 두려워할 것은 없다. 오직 이해할 것만 있을 뿐.
The Scientist
Nothing in life is to be feared; it is only to be understood.
Nothing in life is to be feared; it is only to be understood.
2. 협의회 의석 주개
<colbgcolor=#a3cca2><colcolor=#fff><rowcolor=#fff> 고문관 등급 | 적 방공 시설 데미지 | 공격 헬리콥터 데미지 및 HP | 전투기 데미지 | 전투기 HP | 폭격기 데미지 및 HP |
일반 | -5% | N/A | N/A | N/A | N/A |
고급 | -6% | +4% | |||
희귀 | -7% | +5% | +5% | ||
특급 | -9% | +6% | +7% | +7% | |
전설 | -12% | +8% | +10% | +12% | +10% |
3. 협의회 의석 전쟁개
<colbgcolor=#a3cca2><colcolor=#fff><rowcolor=#fff> 고문관 등급 | 방어 타워 데미지 | 방공 시설 데미지 | 방공 시설 데미지 및 HP | 침략 전투기 데미지 및 HP | 모든 방어 타워 데미지 및 HP |
일반 | +5% | N/A | N/A | N/A | N/A |
고급 | +6% | +7% | |||
희귀 | +7% | +9% | +5% | ||
특급 | +9% | +11% | +7% | -7% | |
전설 | +12% | +14% | +10% | -10% | +10% |
4. 추가 정보
마리 살로메아 스크워도프스카 퀴리는 가난과 수많은 고난을 극복한 끝에 과학계를 바꿔 놓았습니다. 어릴 적 마리는 학문에서 뛰어난 성취를 거두었습니다. 마리는 16살에 러시아에서 고등 교육을 수료하고 금메달을 수여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가 연달은 경솔한 투자로 인해 가족의 재산을 탕진하면서, 마리는 교사로 일하기 시작해야 했습니다. 18살이 된 마리는 의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언니에게 학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가정교사로 일했고, 언니 역시 때가 되면 마리의 학자금을 지원해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1891년, 마리는 파리에 있는 파리 대학교(소르본)로 유학을 떠났으며, 이때부터 '퀴리'라는 성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마리는 파리에서 가브리엘 리프만, 폴 아펠, 에드몽 부티 등 저명한 물리학자들을 만났습니다. 대학 시절 마리는 가난했기 때문에 매우 검소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겨울에는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가진 옷을 전부 걸치곤 했으며, 식사는 빵과 버터뿐이었습니다. 가브리엘 리프만의 연구실에서 일하던 마리는 1894년에 피에르를 만났고, 1895년에 그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부부는 결혼 생활 초기에 라듐 및 폴로늄을 발견한 것을 포함해, 물리학계에서 매우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마리 퀴리는 1903년 박사 학위를 받고, 곧이어 남편과 함께 왕실학회로부터 데이비 메달을 수여받았습니다. 또한, 같은 해 부부는 공동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피에르와 마리는 2명의 딸, 이렌과 에브를 낳았습니다. 그너나 아이들은 부부가 물리학에서 혁신적인 진보를 이루는 데 방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1906년, 피에르 퀴리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 비극적인 사건 이후로, 마리는 물리학에 전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마리는 남편의 뒤를 이어 소르본의 교수로 취임했으며, 1911년 순수한 라듐을 분리해 낸 업적으로 이번에는 노벨 화학상을 수여받았습니다. 당시 다른 두 과학 분야에서 노벨상을 수상한 인물은 퀴리가 유일했습니다. 마리와 그녀의 딸 이렌은 X선 방사선촬영의 개발에 전념했고, 그후 마리는 의학에서 방사성 물질을 활용하는 법을 연구했습니다.
1934년 7월, 마리 퀴리는 방사선 노출로 인한 재생불량성 빈혈로 사망했습니다. 마리는 질병 치료뿐만 아니라 연구와 핵물리학의 발전을 위해서도 방사선을 방출하는 물질을 비축해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마리 퀴리는 생애 동안 물리학에 크나큰 발전을 불러왔고, 미래의 물리학자들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제임스 채드윅 경은 퀴리의 연구를 토대로 중성자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마리 퀴리는 사후 화장되었습니다. 그리고 1995년에는 과학계에서 이룬 노고와 업적에 대한 공로로 파리 팡테온에 안장되며 역사상 그 영예를 받은 첫 여성이 되었습니다.
1891년, 마리는 파리에 있는 파리 대학교(소르본)로 유학을 떠났으며, 이때부터 '퀴리'라는 성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마리는 파리에서 가브리엘 리프만, 폴 아펠, 에드몽 부티 등 저명한 물리학자들을 만났습니다. 대학 시절 마리는 가난했기 때문에 매우 검소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겨울에는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가진 옷을 전부 걸치곤 했으며, 식사는 빵과 버터뿐이었습니다. 가브리엘 리프만의 연구실에서 일하던 마리는 1894년에 피에르를 만났고, 1895년에 그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부부는 결혼 생활 초기에 라듐 및 폴로늄을 발견한 것을 포함해, 물리학계에서 매우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마리 퀴리는 1903년 박사 학위를 받고, 곧이어 남편과 함께 왕실학회로부터 데이비 메달을 수여받았습니다. 또한, 같은 해 부부는 공동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피에르와 마리는 2명의 딸, 이렌과 에브를 낳았습니다. 그너나 아이들은 부부가 물리학에서 혁신적인 진보를 이루는 데 방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1906년, 피에르 퀴리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 비극적인 사건 이후로, 마리는 물리학에 전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마리는 남편의 뒤를 이어 소르본의 교수로 취임했으며, 1911년 순수한 라듐을 분리해 낸 업적으로 이번에는 노벨 화학상을 수여받았습니다. 당시 다른 두 과학 분야에서 노벨상을 수상한 인물은 퀴리가 유일했습니다. 마리와 그녀의 딸 이렌은 X선 방사선촬영의 개발에 전념했고, 그후 마리는 의학에서 방사성 물질을 활용하는 법을 연구했습니다.
1934년 7월, 마리 퀴리는 방사선 노출로 인한 재생불량성 빈혈로 사망했습니다. 마리는 질병 치료뿐만 아니라 연구와 핵물리학의 발전을 위해서도 방사선을 방출하는 물질을 비축해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마리 퀴리는 생애 동안 물리학에 크나큰 발전을 불러왔고, 미래의 물리학자들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제임스 채드윅 경은 퀴리의 연구를 토대로 중성자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마리 퀴리는 사후 화장되었습니다. 그리고 1995년에는 과학계에서 이룬 노고와 업적에 대한 공로로 파리 팡테온에 안장되며 역사상 그 영예를 받은 첫 여성이 되었습니다.
Marie Salomea Sklodowska-Curie overcame poverty and countless hardships to ultimately change the world of science. In childhood, Marie excelled in academic studies. At age of 16, she received a gold medal upon completing her secondary education in Russia. However, her father lost the family’s savings through a series of bad investments, which compelled Marie to begin working as a teacher. At 18, she worked as a governess to fund her sister’s aspiration to study medicine, with the agreement that her sister would do the same for her when the time was right.
Marie traveled to Paris in 1891 to attend school at the University of Paris and began using “Curie” as her surname. It was in Paris that she met well known physicists Gabriel Lippmann, Paul Appell and Edmond Bouty. Marie was poor during University, and had to scrape by with what she had. During winters, she would keep warm by wearing all the clothes she owned while her diet consisted of bread and butter. She worked in Gabriel Lippmann’s laboratory and in the Spring of 1894, she met Pierre, whom she would marry in 1895. The couple achieved remarkable success in the world of physics, including their discovery of radium and polonium early in their marriage. Marie Curie received her doctorate of science in June of 1903 and was soon awarded the Davy Medal of the Royal Society alongside her husband; they also shared a Nobel Prize for Physics in that same year.
Pierre and Marie had 2 daughters, Irene and Eve, though the children did not interfere with the couple’s groundbreaking progress in physics. In 1906 Pierre Curie died suddenly. After this tragedy, Marie decided to dedicate all of her energy to physics. She took her husband’s place as a professor at Sorbonne and in 1911 she was awarded a second Nobel Prize,this time in Chemistry, for the isolation of pure radium. In that moment, Curie became the only person in history to have won a Nobel Prize in two different scientific fields. Marie and her daughter Irene devoted themselves to the development of X-radiography and she went on to research the use of radioactive substances in medicine.
Marie Curie died in July of 1934 as a result of aplastic anemia, which was caused by exposure to radiation. She had understood that there was a need to gather radioactive sources in order to both treat sickness but also to stockpile for use in research and the betterment of nuclear physics. Marie Curie made staggering progress in physics during her lifetime, but she also set a foundation for future physicists to build upon. For example, Sir James Chadwick discovered the neutron with the help of Curie’s work. Marie Curie’s ashes were enshrined in the Pantheon in Paris in 1995, and became the first woman to receive this honor for her hard-earned achievements in the field of science.
Marie traveled to Paris in 1891 to attend school at the University of Paris and began using “Curie” as her surname. It was in Paris that she met well known physicists Gabriel Lippmann, Paul Appell and Edmond Bouty. Marie was poor during University, and had to scrape by with what she had. During winters, she would keep warm by wearing all the clothes she owned while her diet consisted of bread and butter. She worked in Gabriel Lippmann’s laboratory and in the Spring of 1894, she met Pierre, whom she would marry in 1895. The couple achieved remarkable success in the world of physics, including their discovery of radium and polonium early in their marriage. Marie Curie received her doctorate of science in June of 1903 and was soon awarded the Davy Medal of the Royal Society alongside her husband; they also shared a Nobel Prize for Physics in that same year.
Pierre and Marie had 2 daughters, Irene and Eve, though the children did not interfere with the couple’s groundbreaking progress in physics. In 1906 Pierre Curie died suddenly. After this tragedy, Marie decided to dedicate all of her energy to physics. She took her husband’s place as a professor at Sorbonne and in 1911 she was awarded a second Nobel Prize,this time in Chemistry, for the isolation of pure radium. In that moment, Curie became the only person in history to have won a Nobel Prize in two different scientific fields. Marie and her daughter Irene devoted themselves to the development of X-radiography and she went on to research the use of radioactive substances in medicine.
Marie Curie died in July of 1934 as a result of aplastic anemia, which was caused by exposure to radiation. She had understood that there was a need to gather radioactive sources in order to both treat sickness but also to stockpile for use in research and the betterment of nuclear physics. Marie Curie made staggering progress in physics during her lifetime, but she also set a foundation for future physicists to build upon. For example, Sir James Chadwick discovered the neutron with the help of Curie’s work. Marie Curie’s ashes were enshrined in the Pantheon in Paris in 1995, and became the first woman to receive this honor for her hard-earned achievements in the field of sci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