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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학교/서울캠퍼스/총학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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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 구성1.2. 기구1.3. 활동
2. 사건·사고3. 역대 총학생회
3.1. 2002~2006년: 제30~34대 총학생회 <소리없는 99%의 명예혁명(소명)>3.2. 2007~2008년: 제35~36대 총학생회 <체인지 포유>
3.2.1. 2008년: 제36대 총학 중도사퇴 & 비상대책위원회 및 정상화운영위원회
3.3. 2009~2010년: 제37~38대 총학생회 <Same As You(SAY)>3.4. 2011년: 제39대 총학생회 <터미네이터>3.5. 2012년: 제40대 총학생회 <Real Plan H>3.6. 2013년: 제41대 총학생회 <Togather>3.7. 2014년: 제42대 총학생회 <클래스업>3.8. 2015~2016년: 제43~44대 총학생회 <솔루션>3.9. 2017년: 제45대 총학생회 <한마디>3.10. 2018~2021년: 제46~49대 총학생회 (무산)3.11. 2022년: 제50대 총학생회 <HY:phen>3.12. 2023년: 제51대 총학생회 <HY-N> (중도사퇴)3.13. 2024년: 제52대 총학생회 (낙선)

1. 개요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의 학부 재학생들을 대표하는 학생단체이다. 대학원생은 대학원총학생회 소속이며, 휴학생은 그 회원자격이 정지된다.
총학생회 사무실은 서울캠퍼스 학생회관(107) 4층에 위치한다. 02-2220-0101
총학생회 홈페이지 총학생회 페이스북

1.1. 구성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 총학생회
전체 단위
총학생회 정·부학생회장 총여학생회[1] 동아리연합회 애국한양문학예술학생연합
단과대학 단위
공과대학 (구)건축대학[2] 의과대학 인문과학대학
사회과학대학 자연과학대학 정책과학대학 경제금융대학
경영대학 사범대학 생활과학대학 음악대학
예술·체육대학 국제학부 간호대학 산업융합학부

1.2. 기구

의결 기구
집행 기구
기타

1.3. 활동

2. 사건·사고

2008년 총학생회 횡령 사건 - 아래 2008년 비대위 항목 참고

3. 역대 총학생회

요즘은 '한양대= 운동권'이라는 도식이 낯설지만, 2001년까지만 하더라도 한양대는 과거 선배들의 훌륭한 전적(?) 덕분에 한국 학생운동사의 네임드 대학[3][4]으로 자리하고 있었다.[5] 따라서 한양대의 총학생회 선거는 각 정파들에게 포기할 수 없는 고지 쟁탈전의 성격을 띠었고 선거 시즌, 전국적으로 굉장히 관심을 많이 받았다.

한양대가 학생운동으로 주목받게 된 계기는 1986년 건국대 사태와 1989년 전대협 3기 출범이 핵심적인 계기가 되었는데, 그 때까지 학생운동사에서 볼수 없었던 1525명 연행, 1288명 구속이라는 초유의 구속사태로 인해 그 동안 학생운동을 이끌어 오던 서울대 등 타 대학의 운동권 선배들이 몽땅 잡혀가게 되면서 그 주도권을 한양대가 가져가게 되었고, 1987년부터 NL계열[6]이 총학 및 단과대 학생회를 연속으로 주도하고 1989년에 임종석 총학생회장이 전대협 3기 의장으로, 93년 김재용 총학생회장이 한총련 1기 의장으로 당선된 이후 한대 총학은 90년대 내내 NL계열 학생운동의 중심에 있었다.[7][8] 1989년부터 전대협-한총련 사무실도 본교 학생회관에 차려졌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에는 비/반운동 세력의 성장이 두드러지며 2000년대 중반, 다른 대학들과 마찬가지로 선거에서의 패배, 학생운동 조직의 대중력 상실, 96년 연세대 사태, 이석 치사 사건[9] 및 98년 한총련 이적단체판결 등의 사건의 여파, 게다가 내부 분열[10]까지 일어나면서 운동권 학생회는 학내에서 지분을 점점 상실해 가며 쇠락의 길을 걷는… 듯 했다. 2007년에 총학생회를 당선시켰지만 이는 뒤에 말하듯이 전년도 총학의 내분과 팀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었고.[11] 하지만 2011년 당선된 반운동 성향의 총학생회가 새누리당 청년학생위원회에 들어가버리면서 해당 학생회도 몰락했고, 2012년에 다시 출마했지만 선거관리위원회가 불공정하다며 투표 직전에 사퇴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2년 뒤, 2014년도 선거에 출마했지만 재투표 끝에 패배. 그렇게 한동안 한양대에 있었던 반운동 계열은 사라졌다. 그리하여 2014년부터 다시 운동권 총학생회가 집권하고 있다. 하지만 과거처럼 무리수를 두지는 않고, NL계열이라고 해도 학내에서는 성향을 대놓고 드러내고 있지는 않다.[12]

2000년대 이후 한양대 총학생회 내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13]
선본명 임기 총학생회장 부총학생회장
1 - 1973 - -
15 - 1987 김병식(사회학 84) -
16 - 1988 임종석(무기재료공학 86) -
17 - 1989 -
19 - 1991 김종식(사회학) -
21 - 1993 김재용(정치외교학 88) -
22 - 1994 이종욱 -
25 - 1997 정영훈 신선호
30 소리없는 99%의 명예혁명
(소명)
2002 정해송(화학공학 96) 허진(법학 00)
31 2003 신진수(법학 94) 홍성택(도시공학 96)
32 2004 이상현(경영학 97) 이기석(도시공학 98)
33 2005 허진(법학 00) 윤태현(기계공학 00)
34 2006 신재웅(정치외교학 02) 강소영(화학공학 03)
35 체인지 포유 2007 심현수(독어독문학 01) 권중도(전자전기컴퓨터공학 03)
36 2008 권중도(전자전기컴퓨터공학 03) 송영석(신문방송학 04)
37 Same As You
(SAY)
2009 이동훈(정치외교학 03) 백정연(기계공학 04)
38 2010 최정인(법학 06) 오로라(스포츠산업학 08)
39 터미네이터 2011 정현호(경영학 07) 백승홍(전자·통신공학 09)
40 Real Plan H 2012 강경루(국어국문학 09) 이선주(신소재공학 04)
41 Togather 2013 손주형(컴퓨터공학 06) 김웅(수학 08)
42 클래스업 2014 김창식(기계공학 08) 신하섭(국어국문학 10)
43 솔루션 2015 박종진(정책학 10) 박창근(기계공학 10)
44 2016 오규민(사학 12) 장세훈(화학공학 14)
45 한마디 2017 이경은(국어국문학 13) 최경상(신소재공학 14)
46~49 무산
50 HY:phen 2022 정지호(산업융합학 19) 김태현(사학 17)
51 HY-N 2023 이소리(건축학 21) 방소원(응용미술교육 20)
52 무산

3.1. 2002~2006년: 제30~34대 총학생회 <소리없는 99%의 명예혁명(소명)>


'소리없는 99%의 명예혁명(소명)'은 한양대 비운동권 선거운동본부의 단체명이자, 30대(2002년)부터 34대(2006년)까지 5년간 당선된 한양대 총학생회의 이름이다. 고려대의 '최초를 꿈꾸는 사람들'(최꿈사) 총학생회와 달리, 일회성이 아닌 체계성을 띠고 당선된 비운동권 총학생회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2001년 가을, 29대 총학생회가 1997년 이석 치사 사건 이후 철수한 한총련 사무실을 다시 한양대에 개소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이에 학내에서는 반대여론이 들끓기 시작하고, 당시 법대 94학번이던 신진수가 『명예혁명제안서』를 작성해 대자보 등에 게시하였는데 이 글로 인한 파장이 대단하였다. 학생들은 이를 "한양대 명예혁명" 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때 신진수를 중심으로 모인 학생들은 자신들이 설립한 단체에 '소리없는 99%의 명예혁명(소명)'이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이들은 학내 민주주의, 학술-문화-복지 등 학내 문제 중심의 총학생회, 한총련 탈퇴 등을 공약으로 내걸어 한양대 최초의 비운동권 총학생회로 당선됐다. 2003년 10월 27일에는 한총련까지 탈퇴했다. 처음 2년간은 학생들에게 매우 높은 지지를 받았고, 학생들과의 소통에 굉장히 힘을 많이 썼던 총학생회였지만, 다음 단락에서 설명할 모종의 이유들로 점차 지지도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5년 동안이나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그들이 전국 어느 비운동권보다도 실력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총련에 대한 무시무시한 반감 때문이기도 하다.[15]

운동권은 2003년과 2005년도에 세력을 통합하는 시도를 했지만. 그럼에도 2006년도까지 '소리없는 99%의 명예혁명(소명)'에 패배했다. 그러나 운동권은 우여곡절 끝에 2007년도에 체인지 포유[16]라는 선본명으로 단독 출마해 단선으로 치러진 선거에서 과반수를 득표하고 35대(2007년) 총학생회로 당선된다.

이후 '소리없는 99%의 명예혁명(소명)'은, 33대 소명 총학생회 집행부 출신들이 주축이 된 37대(2009년)~38대(2010년) 총학생회 Same As You(SAY), 41대(2013년) 총학생회 Togather 등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후대에서는 더 이상 '소리없는 99%의 명예혁명(소명)'라는 단체명은 사용하지 않았다. 더 이상 명예혁명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5년간 집권으로 운동권도 변화했고, 운동권도 자신들이 추구했던 학내 민주주의, 학술-문화-복지 등 학내 문제에 신경을 쓰고 있다고 판단했으며, 자신들이 추구했던 명예혁명이 이루어진 것이라 보았다.

3.2. 2007~2008년: 제35~36대 총학생회 <체인지 포유>


소명의 후퇴

1. 등록금 투쟁 노력 부족
- 2000년대 초반 학생사회의 화두는 등록금 투쟁이었다.[17] 하지만 소명의 지지층에는 투쟁 자체에 반감을 가지는 사람도 있었기에 확실한 노선을 정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학교 측에서 과도하게 등록금을 높이고 소명이 협상에서 소폭 깎아서 협상을 마무리 짓는 식으로 일종의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 당시 소명은 투쟁에 대한 부담으로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학자추)[18] 위원장 자리를 운동권에 넘겼다. 운동권은 본관점거 및 학생총회 등 투쟁 과정을 학생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19] 그리고 등록금 투쟁에서 소명이 명확한 해법을 제시하지 못해야 전문성을 가진 운동권 세력이 소명의 무능함을 강조하며 집권할 수 있었기에 적극적이지 않다는 말이 있었다.[20]

2. 총학 예산으로 선거 부채 청산을 했다는 의혹과 그로인한 분열
- 2006년도가 끝날 무렵 소명은 두 집 살림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2007년도 총학생회 선거에서 2개 선본으로 독자 출마를 하게 되었으며, 여기에다가 2006년도 소명이 총학생회 예산으로 2006년도 선거에서 생긴 부채를 청산했다는 제보까지 들어오면서 분열->팀킬->동반 폭사의 과정(…)으로 이어졌다. 사실 체인지 포유의 당선은 이러한 병림픽 속에서 이루어졌던 것이고 자력 당선까지는 7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21] 그런데 어렵게 당선된 체인지 포유도 2008년도에 회계 부실로 중도 사퇴를 하게 되었다. 또한 이 여파로 학내의 셀 수 없는 운동 성향 학생회[22]들이 무너지게 되었다.

3.2.1. 2008년: 제36대 총학 중도사퇴 & 비상대책위원회 및 정상화운영위원회

2008년 서울캠퍼스 총학생회인 체인지 포유(Change4U)가 회계관리 부실을 원인으로 사퇴하였다. 당시 교내 언론은 물론, 지상파 방송 및 일간지도 떠들썩하게 했다. 체인지 포유는 한총련 계열의 총학으로, 2007년에 한총련 관련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공약으로 35대 총학생회로 당선되었고[23], 2008년에 제 36대 총학생회 연임에 성공하였다. 선거 당시 체인지포유 측에서는 학생들이 원치 않으면 한총련에 관한 활동은 하지 않겠다는 공약[24]을 내세웠는데 #, 2008년 3월에 한총련 의장선거를 한양대에서 개최하였다. 이에 학생들은 총학 측에 항의를 하였고, 5명의 일반 학생들은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총학생회에 공식적인 공청회를 요청했다. 총학생회가 해당 일에 대해 사과하면서 일단락되는 듯 싶었으나… 대위는 이후 회계 관련 의혹이 있다고 주장하며, 이에 대한 답변을 듣기위해 총학생회에 청문회를 제의했다. 한대신문과 한대방송국의 주관으로 한마당에서 청문회가 열렸으나 총학생회는 일방적인 통보였다는 이유로 청문회를 거부 및 불참했다. 청문회가 무산되자 비대위는 일반 학생들과 함께 총학생회실을 항의 방문했다. 결국 총학생회는 허위장부기재 의혹을 인정했으며 간이 영수증 사용 등 회계 관리를 소홀히 했던 점도 사과했다. 이후 비대위는 이에 대한 책임소재 및 정확한 감사를 위해 외부 회계감사를 요구했다. 하지만 총학생회의 답변이 없었고, 이에 비대위 측 학생 10명들은 2차 항의방문을 했다. 그런데 총학생회는 학생자치기구가 무슨 회계감사를 받냐고 감사요구를 거부하려 하였으나, 비대위 측은 수용하지 않았고, 결국 2008년 5월 21일에 체인지 포유 총학은 사퇴를 선언하게 되었다.[25] #

3.3. 2009~2010년: 제37~38대 총학생회 <Same As You(SAY)>


체인지 포유의 사퇴로 비상대책위원회가 꾸려졌다. 비대위는 회계사 자격을 가진 학생을 섭외하여 감사를 하는 등의 활동을 했지만 당시 비대위를 이끌었던 경금대 모 학생도 소명의 모 회장처럼 야심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학생들은 그렇다고 비대위가 쭉 하라고 놔두지도 않았다. 그렇게 2009년도에 당선된 SAY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고 그렇기에 거의 모든 학생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심지어 교지[26]조차도 SAY를 호평했고 몇 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그럭저럭 재선까지 해냈다.[27] 인사법과의 사이도 그리 나쁘지 않아서 교육대책위원회의 위원장 직을 전문성[28]을 믿고 넘겨줬을 만큼.

3.4. 2011년: 제39대 총학생회 <터미네이터>


왜 한양대 인사법(인천연합계)의 운동 성향 학생회까지 한대련과 등 돌리게 되었나

먼저 2010년에 살곶이 공원에서 있었던 8.15 대회부터 말해야 될 것 같다. 8.15 대회는 전국의 NL계열 단체들이 모여서 진행하는 행사인데 2010년도에는 한양대 옆 살곶이 공원에서 열기로 되었다. 그러나 이 조치는 인사법 쪽에서도 반대를 하였는데, 바로 지난 2009년에 홍익대에서 열었다가 후속 조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29] 학생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고 곧바로 그 다음 해 선거에서 박살났기 때문이다. [30]그런데 당시 공대 학생회장이 살곶이 8.15를 밀어붙이면서 한양대에서 Again 2009(…)가 일어났고 말할 것도 없이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 동안 있어왔던 공대 학생회에 대한 호평도 하루아침에 지워졌고.[31] 시간이 흘러 2011년도 선거. 선거는 무려 4파전으로 진행되었는데 3선을 노리는 SAY, 편입생의 도전기로 회자되었던 터미네이터, 인사법의 탄탄함과 교대위에서 쌓은 이름값을 믿고 나온 하이라이트, 그리고 그 해 공대 회장이 막무가내로 출마한 샤우팅 한양이었다. (…) 당연히 하이라이트와 샤우팅의 사이가 좋았을 리가 없었고 정파를 잘 모르는 학생들은 (교지의 제보에 따르면) NL- PD의 극한 대립으로 오해하기도 했다.[32]

4파전 끝에 선거는 SAY와 터미네이터의 결선으로 가게 되었는데 여기서 터미네이터가 당선되었고, 선거가 끝나고 나서 샤우팅의 트롤이 없었다면 결과는 알 수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 나오면서 하이라이트 쪽은 새로운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덧붙이자면, 터미네이터로 당선된 총학생회장은 이후 새누리당 청년학생위원회에 가입하면서 출마 당시의 비정치성 표방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으나, 이는 임기 종료 후의 일로 비난할 수는 없지만 임기 내내 보여준 정치권에 대한 모습을 퇴임한지 얼마나 됐다고 태세 전환을 해버려서 도의적인 비판은 제기되었다. 물론 타 대학의 경우 임기 종료후 정치활동을 선언하는 경우도 있으며 이를 비난하는 경우는 없다. 다만, 이 후 학내 언론사들의 기자들의 취재에 따르면 토사구팽당했다고.[33]

3.5. 2012년: 제40대 총학생회 <Real Plan H>


2012년도 선거는 재선거 끝에 마무리가 되었는데 두 번 다 터미네이터[34]와 하이라이트의 뒤를 이어 나온 Real Plan H의 경선이었다. 11월 선거에서도 논란 끝에 무산이 되었다. 공대는 특성 상 투표소가 여러 군데 있어서 중복 투표를 막기 위해 구글 docs를 활용하였다. 문제는 구글 docs는 '참고용' 으로만 사용하고 (다른 투표소에서 투표를 했는지 안했는지), 투표자가 선거인명부에 직접 서명을 해야하는데, 투표자가 아닌 선관위원이 선거인명부에 동그라미나 체크표시로 확인 체크를 한 것이다. 이는 선거 원칙에 위배되는 일이다. 이에 대한 논의를 중선관위에서 하던 중, 사범대도 동일하게 진행된 것이 밝혀졌다. 이에 공대, 사범대 중선관위원은 사퇴를 하고, 공대와 사범대 학생들에게 다시 직접 다시 서명을 받게 되었다. 투표 종료 시점까지 재서명 받는 것을 완료하지 못해 하루 더 재서명을 받았으나, 투표율 50%를 넘지 못했다. (공대와 사범대의 선관위가 직접 체크한 것으로 투표율을 집계하면 50%가 넘는 상황, 재서명 받은 것들만 인정하면 50%를 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선관위원이 날치기 서명 하는 것을 목격했다' 등의 논란이 계속되자 재서명 받은 것들만 인정하기로 해 투표율이 50%가 넘지 못하였고, 이로 인해 11월 선거는 무산되었다. [35]

3월 선거에서는 양 쪽의 네거티브가 그칠 새가 없었다. 이를테면 (터미네이터에서 이름을 바꾼) HY-er는 Real Plan H의 정후보가 민주노동당원이며 한대련 간부라고 하는데 사실을 밝히라든가[36] 이를 선거관리위원회에서 선거 규칙 위반으로 판정하여 경고를 부여하고, 투표 당일 '징계 여부를 확인하고 투표할 것'이라는 안내를 하자[37] 불공정 선거라며 사퇴하였다. (3월 보궐선거의 중선관위원들 대다수는 11월 선거를 통해 당선된 단과대 학생회장이었고, 상당수가 운동권 성향이었다. 중선관위원도 운동권 성향의 사회대 학생회장.)
HY-er는 성소수자인권 준비위원회 (이하 LGBT 준비위원회)의 공격을 받았다. LGBT 준비위원회는 성소수자인권 단체를 중앙기구 [38]로 승격 시키기 위한 단체인데, 평소에는 소극적으로 활동을 하다 선거 때 활발하게 활동을 하였다. 11월 선거 때에도 비권 후보에 대한 비판을 지속적으로 하였는데, 보궐 선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LGBT 준비위원회 대표가 법대에서 'Real Plan H' 선본명으로 당선이 되었는데, 이 때문에 'LGBT 준비위원회는 운동권 선본에서 상대 후보를 비방하기 위해 만든 단체가 아닌가?'란 논란이 있었다. 선거 운동 당시 Real Plan H의 정후보는 학생의 질문에 'LGBT 준비위원회는 Real Plan H와 연관이 있다'라고 답변하기도 하였다.

선관위는 투표 기간에 한 선본이 사퇴하여 경선에서 단선이 되어 버린 초유의 사태를 맞이하여, 로스쿨 교수의 자문[39]끝에 투표를 속개, Real Plan H가 재선거 끝에 당선되었다.

3.6. 2013년: 제41대 총학생회 <Togather>


회장의 8.15 대회 단독 감행으로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진 공대 학생회는 2011년도에 들어서 2010년도 회장을 비롯한 경기동부-한대련 계를 쫓아냈지만 내쫓고 보니 남은 사람들로는 제대로 된 업무를 수행할 수가 없었다. 결국 2012년, GG를 치고 다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는데 그러자 다시금 공대 학생회의 이름으로 인사법에서도 하지 않는 무리수를 거듭하면서[40] 학생들의 비난… 을 총학생회(…)가 얻어 걸리게 만들었다. (!!!) 총학생회에서는 해당 행사 등은 공대 혼자서 치르는 것이라고 거듭 내보냈지만 학생들의 생각은 그 놈이 그 놈이지. 게다가 인사이드로 재선을 노리던 Real Plan H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13년도 총학 부후보가 중앙 동아리에서 활동할 때 횡령 문제가 있었다는 제보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물론 이 문제는 진작에 처리되었고, 해당 후보는 과오를 시인하고 동아리연합회 부회장까지 지내면서 이미 전과를 확실하게 청산했지만 워낙 여론이 좋지 않았던 때라[41] 결국 석패. 총학실을 비운동 성향의 Togather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다만 반운동성을 지닌 것은 아니라서 교육정책위원회(교육대책위원회에서 이름이 바뀜)는 인사이드 쪽 인물들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Togather 총학은 소통에 굉장히 힘을 썼던 총학이었다. 매주 수요일 T.O.P라는 행사를 캠퍼스 곳곳에서 진행(주로 한마당)하며 '찾아가는 총학'을 표방했다. 학기중은 물론 방학에도 진행하였으며 심지어는 설날과 추석에도 진행되었다. 또한 회계는 구글독스를 이용하여 실시간으로 공개하였고, 당시 학사관련 최대 현안이었던 수업일수 16주 환원을 이끌어 내었다.

한편 공대에서는 나름대로 파란이 일어났으니, 기존 공대 학생회가 마침내 물러나게 되었고 새로운 학생회 인사이드가 자리잡았다. Real Plan H 출신의 인물들로. 인사이드가 당선되면서 물갈이가 드디어 이루어졌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렇게 경기동부와 한대련은 학내에서 사라지는 줄 알았으나…

3.7. 2014년: 제42대 총학생회 <클래스업>


터미네이터/HY-er로 알려진, 보이콧으로 자폭한 반운동 진영은 다시금 크레센도라는 이름으로 나오게 되었다. 공대가 합류한 인사이드 학생회는 클래스업으로 이름을 바꿔서 나왔으며 Togather는 선거 운동 참여를 위한 사퇴나 출마 없이 임기를 마쳤으므로 선거는 크레센도와 클래스업의 경선으로 이어졌다. 공대/사범대/사회대/인문대(78%! 다만 부후보가 인문대생) 등은 클래스업을, 경금대(77%!)/경영대/생활대(선본장이 생활대생)/의대(과거 HY-er 부후보가 의대생) 등은 크레센도를 지지했으며 나머지 단위는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았다. 개표 결과 표차가 오차범위 이내로 나왔기에 바로 재선거를 실시했다. 재선거 결과 클래스업의 신승[43][44]. 이를 계기로 반운동 진영은 더는 선거에 나오지 않게 되었다. 묻지마 몰빵 투표를 빼면 뚜렷한 지지세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 드러났고 계보를 이을 후속이 더는 없었기 때문에.

3.8. 2015~2016년: 제43~44대 총학생회 <솔루션>


2015년도 선거는 오랜만에(!) 사건사고 없이 빠르게 끝났다. 투표 이틀만에 유효 투표율을 찍었고, 높은 찬성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사실 2015년에는 선거보다 상대평가 강행 문제가 더 큰 문제였다. 이 문제는 아직도 현재진행형. 과거와 달리 묻지마 투표를 하던 경금대, 경영대 등에서도 높은 찬성표를 얻은 것도 특기할 만한 사항.

2016년도 2015년에 이어 무난했다. 단선, 찬성 고득표. 그런데 임기 시작하자마자 대학 측의 국가 장학금 축소 문제가 터졌고, 천막농성 끝에 축소 철회를 받아냈다.[45][46]

3.9. 2017년: 제45대 총학생회 <한마디>


이번에도 단선. 솔루션의 정치 참여 성향이 논란이 일었는지 이번에는 이름을 바꾼 것 아니냐는 이전 서술이 있었으나 오히려 솔루션이 이례적으로 학생회 명칭을 2년 연속 사용한 것이다. 경영대 학생회는 적어도 9년 넘게 학생회 명칭소통도 못하면서 공감을 느낀다는이나 기조의 변화 (다시 말해서 연간 노선의 변화) 없이 이어지고 있어서 학내외에서 학생회 이해도가 높은 학생들에게 비판을 받고 있지만 단선세습을 믿고 못 들은 척하고 있는 만큼 같은 계열 학생회일지라도 바꾸는 것이 관례적으로 맞다. 오히려 한마디는 조기 대선을 앞두고 대선 후보 초청을 비롯한 정치 참여를 공개적으로 독려하고 있다. 그러나 심상정을 빼고는 아무도 찾아오려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47]

2017년 봄축제을 앞두고 몇가지 문제가 터졌다. 2017년 5월 현재 운동권 총학생회가 4년만에 부딪힌 최대의 악재로 꼽힌다. 일반적으로 대학행사는 그 규모가 커서 학생회비나 등록금만으로 감당하기가 어렵다. 때문에 과거 한양대 총학을 비롯한 타대학들도 사기업에게 홍보부스를 제공하고 후원금을 받는다. 보통 이 후원금으로 축제를 진행하는데, 운동권 특유의 반기업 정서때문인지 축제기획단 OT때 부터 기업 스폰에 부정적인 견해가 담긴 문서를 배포하였고 실제로 기업 스폰이 없었다. 이 때문에 축제 예산은 부족하게 되고, 각종 행사에 참여인원이 줄어든다던가 섭외 연예인의 수 감소나 인지도가 낮은 연예인을 섭외하는 등 축제의 질 하락으로 이어졌고 학우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사실 기업스폰을 받지 않으면 사실상 학교에서 나오는 교비로 연예인을 섭외하게 되는데, 이게 등록금이다보니 연예인 섭외에 너무 공을 들이면 누구 말대로 등록금이 펑펑 터지는 셈이 된다. 총학은 연예인 중심 축제보다는 참여형 축제를 항상 기획하나 그게 미덥지 못한 탓에 연예인 수준에 대해 이야기로 이어지고, 여기서 비용 문제가 지적되자 기업 스폰이야기로 옮겨졌다.
총학에서는 모두가 함께 즐기는 축제를 만든다고 하였으나, 구호를 제외하고는 소수자 배려는 찾아볼 수 없었다. 실제로 그동안의 축제에서 소수자를 차별한 적이 없었기에, 도대체 차별없는 축제가 무엇이냐는 논란이 있었다. 오히려 휠체어 리프트에 연등을 설치한다던가 하는 모순적인 행동을 보여 논란을 가중시켰다.
총학생회는 '사회적 약자'인 혼밥러들을 배려하겠다는 취지로 천하제일혼밥대회을 개최하였다. 그러나 그저 혼자가 편해서 혼밥했던 혼밥러는 졸지에 사회적 약자가 되어버리는 문제, 정작 실제 혼밥러는 참여하지 않는 문제, 혼밥러를 놀리는 행위라는 문제 등이 터져나왔다. 참신한 시도였지만 실제 혼밥러들을 생각하지 않은 행사로 많은 논란만 생긴 실패한 기획이 되었다.
2000년대 부터 몇년 전까지 한양대 봄축제는 '라치오스'라는 명칭이었다. 그러나 운동권 총학생회 이후로 '대동제'라는 이름을 계속 써왔고 '아카라카' '입실렌티' 같은 브랜드화 된 타 대학의 축제와 비교되어 논란이 되었다. 사실 이 문제는 한양대 축제 구성이 타 대학과 달라서 발생한 측면이 없지않아 있다. 연세대나 고려대의 축제는 각각 '무악대동제', '석탑대동제'라는 이름으로 진행되지만 축제의 여러 행사 중 응원제인 '아카라카'와 '입실렌티'가 주요 행사로서 자리잡고 이들이 해당 대학 축제의 대명사처럼 쓰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한양대 축제의 경우 응원제와 가요제가 둘 다 메인 행사이고, 둘 중 어느것이 더 큰 행사라고 따지기 힘든 구조이다. 이 때문에 응원제인 '라치오스'가 대명사로 자리잡지 못하게 된 것이다.선택과 집중의 중요성 또한 타 대학의 경우 응원제는 응원단이 단독으로 진행하고, 연예인 섭외 또한 응원단이 자체적으로 하는데 반해 한양대는 총학생회가 연예인 섭외등을 담당하는 점도 있다.
학우 모두가 즐겨야할 축제에 총학생회의 사상이 반영되어 축제의 총학생회 사유화 논란도 나왔다. 사실 위에서 언급한 논란들은 운동권 총학생회의 집권이후 꾸준히 제기되었던 문제로 학우들의 의견 반영없이 총학생회 단독으로 축제 컨셉과 방향을 정한 것이 논란되었다.

사실 과거 4년간 계속 같은 방향이었으나, 이번에 유독 그 정도가 심했고 학우들의 누적된 불만이 터진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축제 관련하여 토론회가 열리기로 하였다. 이후 가을에 열리는 애한제는 그럭저럭 큰 말이 안 나오고 잘 치렀다.

2017년 11월말, 그간 학우들에게 쌓여온 운동권 총학생회에 대한 피로감과 세력을 키운 PD(정파)들이 가세한 총여학생회 논란 그리고 중선관위의 불공정한 선거관리, 독선적 선거운영에 따른 불만이 폭발하여 투표거부운동으로 번지게 되었다.

3.10. 2018~2021년: 제46~49대 총학생회 (무산)

공석. 단선으로 치러졌으나, 한양대학교 제46대 총학생회 투표 거부 운동로 인하여 무산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해당 문서 참고.

2018년 3월에 치러진 재선거도 입후보자가 없어 학도호국단을 폐지하고 총학생회를 재건한 1985년 이래 최초로 재선거에서조차 총학생회 구성이 무산되었다. 심지어 총학과 총여학은 그동안 박근혜 퇴진운동과 등록금, 절대평가 투쟁에서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정의당계 PD들에게도 연대의 손을 내밀었지만 이마저도 철저히 무너졌다.

2018년 5월 23~25일 기간 동안 비운동권 성향 비대위에 의해 개최된 2018년도 축제는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위 문단에서 언급되었듯 많은 논란을 일으킨 전년도 축제와 비교되면서 운동권 학생회에 대한 반감이 더 확산되었다.
개표를 위한 최소투표율 미달로 인해 무산되었다. 이후 해당 최소투표율 조항은 삭제되었다.

3.11. 2022년: 제50대 총학생회 <HY:phen>


단선으로 출마하여, 선거 무산의 역사로 점철된 4년 동안의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를 끝내고 총학생회를 출범시키게 되었다.
본 투표 마지막날에 몇 백표 차이로 50%를 넘지 않아 연장투표에서 약 52% 투표율과 96.7%의 찬성률로 당선되었다.
개표 과정에서 선거인 명부 대비 기표가 1장 더 확인되어 오차 관련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긴급회의가 있었고, 선거시행세칙 내 일부 규정을 준용하여 처리하였다.

회장과 부회장 모두 2021년 소속 단과대학 학생회장 출신이며, 회장은 49대 비상대책위원회 중앙집행위원장직을 역임했다.

외국인 유학생 등록금 인상과 관련하여 49대 비상대책위원회와 같이 입장문 및 규탄서를 게재했다. 다만, 등록금심의위원회 내 의결 구조 상 반대표를 던졌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학생위원들도 찬성표를 던져 결국 인상이 확정되었다.

코로나19로 인해 사실상 제한되었던 대면 행사를 새내기 맞이 사업이라는 형식으로 서울권 대학 최초로 추진하였고 성공적으로 개최하였다.

선거운동본부 시절부터 소통과 혁신을 매우 강조하고 있고, 과거 총학생회에서 추진했던 '찾아가는 총학생회' 행사를 '찾아오는 총학생회'라는 형식으로 개편하여 학생들과의 소통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주소지 이전 캠페인을 전개하여 지역 사회 내 투표권 확보에 힘쓰는 모양새로 보인다.

3.12. 2023년: 제51대 총학생회 <HY-N> (중도사퇴)


이소리에게 제기된 사생활 의혹으로 인해 7월 17일부로 이소리는 총학생회장직을 사퇴했고, 방소원 역시 총학생회장 직무 승계 불가를 사유로 부총학생회장직을 사퇴했다. 이로써 향후 총학생회는 중앙비상대책위원회로 전환될 예정이다. #

3.13. 2024년: 제52대 총학생회 (낙선)

선거 실시 금지 가처분 인용으로 인해 무산되었고, 이후 재선거를 하였으나 찬성표가 유권자수 33.3%에 미달하여 낙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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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석 [2] 건축대학에서 공과대학으로 흡수합병되면서 생긴 조직. 2011년 공대, 정보통신, 건축 세 학생회장이 통합공대학생회 출범을 논의하던 중 건축계열은 통합반대 여론이 컸고, 이에 따라 나머지 두곳만 통합하기로 합의한다. 참고로 이때 통합을 주도했던 정통계열학생회장이 2013년 Togather의 총학생회장이된다. [3] 심지어 김일성종합대학 자매결연 대학이 서울대가 아닌 한양대였으니… 2000년대 초반까지 김일성 종합대학에서 축전이 오기도 했다고 한다. [4] 여담으로 2000년대 말까지 캠퍼스에 보도블럭 없이 죄다 아스팔트 바닥이었다. 학생운동이 격렬하던 시기 보도블럭을 깔면 그걸 깨서 던지고, 학내 고립 시 나무 소재는 전부 땔감으로 썼기 때문이다. 강의실에 의자와 책생이 붙어있는 그 희한한 책상을 쓰는 이유가 나무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루머도 있었다. [5] 한 때는 천하통일(총학생회부터 과 학생회까지 모든 단위가 운동 계보)을 이룬 적도 있었으니… [6] 한양대 NL 운동권의 주류는 인/사/법을 중심으로 한 NL단결( 인천연합) 계열이다. 하지만 뒤에 말하게 될 일이 있고 나서는 한대련으로 일컬어지는 NL혁신( 경기동부연합)계와의 사이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되었다. 경기동부에 진절머리가 난 일부는 선배 그룹과 함께 정의당으로 넘어가기도 했지만, 정의당에 합류하지 않은 대다수 학생그룹은 2010년대 후반부터 '진보대학생넷'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한양대는 다른 대학들과는 달리 PD계라고 볼 수 있는 정의당과 노동당 그리고 정파를 떠나서 다른 전국단위 연합 조직들의 세가 극소수에 불과하다. 한 마디로 총학 혼자 멱살잡고 끌고가는 학생사회이다. 이러한 구도를 보고 총학 혼자 다 해먹냐고 볼 수도 있지만, 바꿔 생각하면, 총학마저 없다면… 망했어요 [7] 5.18을 정면으로 다룬 상업영화 1호인 부활의 노래(1990, 이정국 감독)에 학생운동 배경장면으로 노천이 등장한다. 90년대 초반 노천극장을 감상가능. [8] 여담으로 1986년에 이전한 성동경찰서의 위치로 당시 한양대의 위상을 고려해 볼 수 있다. 성동경찰서 앞의 왕십리오거리를 막으면 서울동부지역에서 광화문, 시청, 서울역 등의 중심지로 가는 진입로가 막히게 된다. 사실 군사정권시기 만들어진 경찰 건물은 운동권의 서울시내 집결을 막는 위치에 들어서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9] 한양대가 이후 10~15년간 반한총련 컴플렉스로 색깔론적 선거를 치르게 된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10] 공대/자연대/사범대/생활대/애문연 등이 들어가 있는 NL혁신( 경기동부연합)과 인문대/사회대/법대/상경대(이후 경금/경영대로 나뉘면서 비운동화)/음대 등이 들어가 있는 NL단결( 인천연합)계로의 분화는 진작부터 있어왔지만 2001년도까지만 하더라도 통합되어 있었으나 한총련의 분열과 더불어 학내에서도 분열이 있게 되었다. 그리고 뒤에 말하게 될 과정을 거치면서 학내에서 경기동부 쪽은 쫓겨났고, 현재는 인문대, 사회대, 사범대, 정책대(법대의 후신이라 하지만 뚜렷하지는 않다), 공대 등이 총학과 동일 성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여기서 공대는 2013년도에 들어서야 인천연합계가 당선이 되었기에 학내의 인천연합계를 흔히 '인사법'이라고 부른다. [11] 그나마도 2008년에 재선했더니 회계 부실로 "중도"사퇴했다. [12] 하지만 2017년 결국 논란을 남기는 행태를 보인다 [13] 공대 학생회가 중간에 들어가는데, 이는 한양대 특징상 공대가 전체 학생들의 1/3을 차지하기 때문에 빼놓을 수 없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14] 당시까지는 학내에 반운동권적인 성향은 주류가 아니었으며, 어느 정도 지성인으로서의 대학생의 모습은 보이되 한총련 행태에 비판하는 것에 초점이 있었다. 대학사회가 반운동권을 나타나게 된 것은 천안함 사건을 겪은 군필자가 복학한 이후부터가 본격적이라 보면 된다 [15] 운동권 세력의 분열 때문이라지만 그렇다면 통합 첫 선거에서 패배한 이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당시 학내는 '소리없는 99%의 명예혁명(소명)' 총학생회를 주축으로 하는 세력, 혁신계 운동권, 단결계 운동권, 반한총련 성향으로 혁신/단결 세력에 속하지 않지만 '소리없는 99%의 명예혁명(소명)'에 대한 신뢰도 주지 않는 군소 세력들로 볼 수 있다. 혁신/단결 통합 첫 해 운동권이 패배했던 이유가 마지막에 언급한 비소명의 반한총련 세력의 지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16] 여담으로 2006년도에도 같은 선본 명으로 나왔다. 낙선했지만. [17] 당시는 10% 이상 인상이 기본이었다. [18] 교육대책위원회와 교육정책위원회로 후에 이름이 바뀐다. [19] "운동권"이 "운동"을 안 하면 존재할 이유가 없다. [20] 혁신계와 단결계 사이에서도 투쟁 노선에 대한 견해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1] 2012년도 선거는 3월 재선거+상대 선본의 사퇴 속에서 이루어졌으므로 자력이라고 보기 어렵다. [22] 자연대, 생활대 등은 이 때 계보가 단절되었고 사범대는 간당간당했다가 인사법으로 합류. 다만 공대처럼 명확한 교체나 전환이 있는 건 아니라서 현재까지도 선본-학생회 명칭은 따로 쓴다. [23] 당시 부정선거 의혹이 있었으나 조용히 묻혔다. 그러나 해당 기사는 체인지 포유가 아닌 2006년도 소명 총학생회의 문제점을 다룬 것이다. [24] 사실 이 때 쯤 되면 경기동부연합을 비롯한 거의 대부분이 한대련으로 넘어간지 오래였다. [25] 이는 체인지 포유의 잘못이지만, 체인지 포유에서 볼 때에는 얻어 걸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성향을 막론하고 회계 부실 및 영수증 문제(가라 영수증으로 알려진)는 그 때 어디서나 있었던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 이를 거름삼아서 2012년도부터는 학생회비 사용 내역을 단과대까지 달마다 공개 게시하고 있다. [26] 자치독립언론이므로 다른 언론사와 달리 학생회로 대표되는 학생자치에의 참여는 가능하지만, 어쨌거나 언론기관이므로 노골적 편파는 불가능하다. 아무리 비슷한 성향의 학생회라고 하더라도 일단 모두까기를 하고 봐야 한다. 그런데 그 교지조차도 SAY에게 비판한 것이 없었고, 호평일색이었다. [27] 09년에 치러진 10학년도 총학 선거는 투표율 미달로 10년 3월에 재선거 실시 [28] 학생운동 조직은 해마다 교육투쟁을 펼치기 때문에 대학의 교육정책에 있어서는 전문성이 높을 수 밖에 없다. [29] 참가자들이 무단으로 대학 내 건물에서 잤다든가… [30] 그리고 홍익대는 그 다음부터 총학생회에서 운동 진영이 당선된 적이 전혀 없었다. [31] 뒷말에 따르면 이는 회장 본인의 의지보다는 동부대련의 지시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32] 다시 말하지만 한양대에서 PD는 전멸한지 오래다. 2008년도 한총련 대회를 한양대에서 열 수도 있다는 고려 사항을 유출한 쪽이 PD쪽이라는 뒷말도 있었고… 아무튼 한양대에 다른 세력이 있더라도, 이를테면 정의당 당원들이 있더라도, 2012년도 분당 때 경기동부에 진절머리가 나서 아예 갈아타버렸거나 아니면 신입이지, 정통 PD는 없다고 봐도 좋다. 2015년 현재 한양대에도 노동당 등의 당원은 있지만, 이들은 선배들과 연계가 없는 자발적으로 발생하여 당연히 계보상으로는 단절되어 있다. 이후 정의당 계열 PD(정파)들이 대거 들어와서 학생위원회, 인문, 사회 단과대 회장, 여성주의 단체들과 총여학생회들을 아우르면서 평등파도 최소한의 세를 벌려놓았다. 그 덕에 2018년 총여사태와 비대위 사태가 벌어졌다... [33] 2016년 뉴스타파의 청년, 안녕들 하십니까?의 영상에 위원장의 신분으로 출연하였지만 그것 뿐이다. 어떠한 실권도 없다고. [34] 재선거에서는 HY-er로 이름을 바꾸지만 정후보는 동일 인물 [35] 이 때 그 다음 해 3월 재선거에 부후보로 나가는 학생이 상대 선본에 폭행 위협을 가했다. 본인도 시인하였다. [36] 선거 내용과 무관한데다, 앞서 말했듯이 하이라이트-Real Plan H로 이어지는 인사법은 한대련과 사이가 좋을 리가 없다. (…) 당원 사실 여부는 규칙에 후보자의 당적 명시 내지는 제한 사항이 없으므로 빼도박도 못하는 흑색선전. [37] 총선 등에서는 공보물에 전과 사항이 기록되고 이것이 안내와 같다고 볼 수 있는데, 총학 선거 도중에 받은 경고이므로 공보물에 넣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남은 선택지는 투표소에서의 징계 여부 안내 뿐. [38] 학생회비와 학교 내 공간을 지원받으며, 전체 학생 대표자 회의 때 의결권이 있다. [39] 해당 교수는 제3대 대선(이승만 vs 신익희)의 사례를 들면서 중도 사퇴가 있더라도 투표를 속개할 수 있다고 자문하였다. [40] 뒤에 나오는 김용민 초청, 그 다음해에 학생회 날려먹고 하려다가 취소된 이정희 강연 등 [41] 이 무렵에 다카키 마사오 발언이 나왔다. [42] 공대가 합류하고 나서는 인사법이라는 이름을 딱히 쓰지 않게 되었다. [43] 214표 차이로 당선 [44] 개표방송 영상 마지막 개표함에서 역전한다 [45] 여담으로 직원들은 천막이 강풍에 날아갔어도 강 건너 불 구경하듯, 제풀에 지치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농성장에서 밤에 공동체 놀이를 한 것을 시끄러운 술게임을 한다고 지적한 것도 학생 제보가 아닌 자작극이라고 카더라. 애초에 천막농성을 사전에 학교와 협의 후 진행했다는 제보도 있다. 실제 총학이 원했던 것은 국장2유형의 5억3천만원 이상 증액이었으나, 학교는 그 대신 총학이 관여하는 생활비장학금(미생장학금) 1억을 확충하는 안을 제시했다. 그 결과로 학교는 약 4억3천만원의 예산을 아꼈고 총학은 장학금 확충이라는 명분과 총학이 주도하는 장학금사업을 늘리는 실리를 모두 챙기긴 하였다. [46] PD(정파)들도 이때쯤부터 세력을 키워 NL계인 총학을 도와 농성지원을 했다. [47] 상당히 세력을 불린 정의당계 PD들이 노회찬 심상정의원 강연회를 개최했으나 공대와 학생회의 미온적인 태도로 백여명이 참가했는데도 불구하고 공식초청은 없었다... 비공식으로 열렸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