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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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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학부 | 캠퍼스 | 출신 인물 | 킬러 웨일즈 |
1. 개요
한신대학교의 역사를 소개하는 문서이다.2. 연혁
2.1. 1939 ~ 1980 : 설립 및 사회참여 전통수립
한신대의 초기 역사는 장로회 교단의 역사, 교단의 분열과정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으므로, 장로회 및 장로회 계열 주요 신학교 항목의 내용을 참고하면 좋다. 이 학교는 애초에 갈라선 이유부터가 성서비평학 수용 여부였을 정도로, 보수주의 성향이 강한 한국의 개신교 풍토에서 진보주의 성향을 맨 처음 표방한 신학대학이었고, 1940년 대학 출발부터 진보적 학풍에서 시작되었다. 즉 한국 개신교 중에서 가장 자유주의적이다.1980년 종합화 이후에도 그 성향을 계승하여, 신학과 외에도 모든 일반 학과가 전반적으로 진보적인 성향을 띠게 되었다. 전반적으로란, 학생 및 총학생회 뿐 아니라 교수진부터 재단까지도 포괄하는 의미. TV나 라디오를 보면 아시겠지만, 모 교수는 진보측 패널로 거의 고정되어서 나온다. 대표적인 개신교계 진보 인사인 문익환 목사도 동문이자 교수로 재직하였다. 참고로, 배우 문성근의 아버지가 맞다. 문익환 목사 또한 신정통주의 경향을 가진 프린스턴 신학교 석사 출신이다.
- 1939년 : 서울 승동장로교회의 김대현 장로에 의해 "조선신학교 설립기성회" 발족
- 설립 당시 학교 인가를 위해 50만원이 필요했는데, 이를 김대현이 전부 자비를 털어서 냈다. 현재 시가로는 족히 수백억은 될 것이라고. 당시 이는 이전 평양신학교 등과 달리 조선인이 스스로의 힘으로 세운 신학교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출범당시 조선신학교의 초대 이사장 겸 원장은 설립에 많은 힘을 쓴 김대현 장로였다.
- 처음에 설립된 이유는 기존 장로교회의 평양신학교가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에 반대하여 1939년 3월 졸업생을 끝으로 폐쇄되었기 때문이다. 신사참배에 불복하자 일제는 1938년에 평양신학교에 대해 무기한 휴학을 선언했고, 결국 1941년 3월에 이사회는 자진 폐교를 결의한다. 그에 따라 장로교의 신학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서울 승동교회 장로인 노석 김대현이 1939년 3월 조선신학교 설립 기성회를 발족하고, 그 해 가을 승동교회에서 개강하였다. 그리하여 1939년 9월에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열린 제 28회 장로교 총회에서 서울 종로구 효자동의 승동교회를 임시교사로 하여 '조선신학원'을 정식 인준, 개설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현재 승동교회는 한신대가 속해 있는 한국기독교장로회와는 상당히 (정서적으로) 거리감이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소속이다
- 1940년 (4월19일) : 승동교회에서 조선신학교(朝鮮神學校) 이름으로 출범
- 해방 이후 서울에서 대표적인 장로회 신학교로 알려졌다.
- 개교 제1대 학장 겸 재단 이사장으로 김대현 장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김대현 장로는 노환으로 학교를 설립한 지 얼마 안 된 1940년 9월에 사망하였다. 그러면서 자연히 조선신학교는 설립 초기에 참여하였던 교수진들의 신학적 경향에 크게 영향받게 되었다. 게다가 김대현은 신학을 전문으로 하는 목회자가 아니므로, 조선신학교의 학풍에 영향을 끼치기는 어려웠다. 특히 당시 재직 중이었던 장공 김재준 목사가 조선신학교의 교수로 오게된 것이 이후 조선신학교의 성향과 발전 방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사실 당시 김재준은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새로이 세워진 (후)평양신학교에 재직하려 했다. 그러나 그가 자유주의 신학을 받아들였다 하여 (후)평양신학교에서는 그를 받아주지 않았고, 때문에 그는 조선신학교에서 가르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성경 비평을 학문적으로 도입한 신정통주의 신학의 김재준과 몇몇 비교적 진보적인 신학을 하던 목사들이 이 학교의 교수가 되면서 이 학교의 신학교육은 (신학적으로) 진보적이게 되었다. 위의 교수들을 굳이 언급하자면 경북 김천시 황금동교회의 송창근 목사, 부산 출신의 윤인구 목사 등이었다. 자유주의 신학으로 매도되긴 했지만, 사실 김재준의 신학 노선은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안티테제로 등장한 신정통주의 신학이다.
- 이에 대해 기존 교단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반발했다. 그래도 이러한 내분은 어차피 일제가 아예 내선일체의 일환으로 조선 장로교를 다른 종파들과 모두 합쳐 일본 기독교에 흡수시켜버리려는 의도 때문에 이때까지는 딱히 표면화되지 않았다. 이후 일제가 패망하자 미군정하에서 적산건물이었던 서울 용산구 남영동 일본 천리교 경서욕구 본부 건물을 인수하여 조선신학원이 사용하였다. 이것은 참조한 기록의 한계로 어느 시점의 일인지 잘 알 수 없다. 어쨌든 40년대 후반기~50년대 전반기의 일이다.
- 1945년 : 광복 이후로 장로교 내 각 파벌 간 갈등이 심화되자 분열이 표면화
- 특히 조선신학과 신학적인면과 파벌적인 면 모두에서 반대되던 (후)평양신학교가 이북에 위치하여 남북분단의 와중에 사라지고 장로교 총회에서 정식으로 인가받은 유일한 신학교육기관이라고는 조선신학교가 유일하게 존재하게 되었다. 1946년 6월 12일 남한지역 장로교회 노회들이 승동교회에 모여 남부총회로 모여 제 27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하고 조선신학교를 직영하기로 하였다. 이때부터 얼마간 장로교의 인정을 받은 정식 목회자 양성기관은 조선신학교 뿐이었다. 이로 인해 목회자 교육내용을 둘러싸고 신학적(교리적)/헤게모니적 갈등이 심화된 것이다. 심지어 신사참배 문제로 갈등을 겪고있던 고신파는 이미 고려신학교 설립으로 인해[1] 광복한지 몇 해 되지도 않아 사실상 분리된 상태였다. 장로교 내부 교파 간 갈등은 더욱 커져 결국 1947년 (후)평양신학교 출신 학생 51명이 대구에서 열린 제 33회 총회에 서울에 새로이 완전한 장로교 정통신학교를 세워줄 것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내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그들은 "김재준으로 대표되는 조선신학교가 고등비평에 입각하여 성서절대무오설을 비판하고 성서의 권위를 파괴했다"고 주장했다.
- 이에 대해 김재준은 그해 7월에 총회에서 자신의 신학관을 명확히 밝혔지만 1948년에 총회의 요청을 받은 박형룡 목사가 이를 검토한 결과에 대해 장로교의 교리에 어긋난다며 매우 부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심지어 박형룡은 보고서에서 김재준의 주장이 교회를 능욕하는 내용이라고 까댔는데, 이게 장로교 총회가 조선신학교에 부정적인 입장을 갖게 만들었다. 박형룡의 의견을 받아들인 총회에서는 조선신학교 개조를 위해 김재준을 1년간 해외로 유학보내고 조선신학교에 보수주의(근본주의) 교수들을 대거 수혈하는 방안을 내놓지만 이 방안에 대해 조선신학교에서 거세게 반발함으로써 사실상 이 개조안은 무효화된다.
- 때문에 결국 총회 산하 신학대책위원회에서는 조선신학교 개조를 포기하는 대신 그해(1948년) 5월에 보수주의 신학을 가르치는 신학교를 새로이 설립하기로 결정한다. 그 결정에 따라 결국 그해 6월, 박형룡를 임시교장으로하여 서울 남산에 새로이 장로회신학교가 개교했고[2], 이것이 1949년 35회 총회에서 인가 받게 되면서 장로교 내부 분열이 가시화된다. 그런 가운데 조선신학대학은 부산으로 피난하여 교육을 계속한다.[3]
- 1947년 : 문교부로부터 신학대학 국내 최초로 정규대학인 조선신학대학으로 인가
- 일제강점기엔 정식 일제 규정에 따른 '대학'만 존재하였다. 일제강점기 내 한반도에 존재한 대학은 경성제국대학 하나 뿐이었다. 서울대학, 경북대학 등 주요 거점 국립대는 일제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고 개교년을 광복 이후 1946년으로 잡는다. 일제강점기의 대부분의 대학 개념의 학교는 전문학교( 숭실전문학교, 연희전문학교, 이화여자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 등으로 이들 학교도 1945년이 지나서야 대학으로 인정받고 명칭을 바꾼다. 현재 대한민국 대부분의 대학들은 소위 Since를 최대한 높게 잡으려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다보니 대학으로 인정 받기도 휠씬 전 원시적, 초기 형태의 전수학교나 초급학교 또는 거의 연결고리가 없는 역사를 무리하게 연결지어 대학의 역사를 부풀리려 애쓰고 있다. 많은 대학들이 80년대 초 심지어 90년대 초중반까지 대학이 아니라 농업학교, 공업전문학교, 개방학교 또는 신학교, 또는 신학원(대부분의 기독사학) 개념의 교육기관들이었다. 한신대학교는 장로교이기 때문에 1901년 세워진 평양신학교와 맥을 같이 할수 있으나 대학 역사에 집착하지 않고 1901년을 역사의 시작점이라 보지 않는다.(정서가 달라 헤어진 총신대 등은 1901년으로 잡는다.) 조선신학대학으로 대학명에서도 조선이 들어갈 만큼 민족성, 주체성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신대의 시작점은 1940년으로 잡는다. 정규대학으로서 시작은 1947년으로, 당시로 돌아가 보면 광복 후에 대학이란 명칭으로 나라에서 인가를 한 대학교가 전국에서 몇 개 없었다. 따라서 신학공부를 하려던 전국의 수재들이 몰렸다고 한다. 초기 동문을 보면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출신이 신학 공부를 하기 위해 한신대 학부로 다시 입학하는 경우가 허다했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 도올 김용옥 교수의 경우가 그러하다. 도올은 한겨레 신문 2011년 2월 9일 인터뷰에서 당시의 한신대의 교수가 대한민국 최고였다 구술한 바 있다. 인터뷰 내용을 보면 신학대에 갈 때 집에선 목사가 되려면 가지 말라고 했는데, 나는 목사가 되려 신학대에 간다고 했다. 60년대까지만 해도 서울대건 고려대건 문과계열에선 서양 대학에서 박사학위 받은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하지만 한신대는 거의 모든 교수가 프린스턴대를 비롯한 유명한 서양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분들이었다. “한신대에 가보니 다른 세상이더라. 일반 대학보다 수준이 높았다. 1년 동안 접한 새로운 지식의 양과 자극이 내가 도저히 목사를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왜 목사를 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에 이른 것인가? “당시 한신대에선 철학개론을 소흥렬 교수가, 국사는 연대 홍이섭 교수가, 동양사는 김재준 목사가, 구약학개론은 문익환 목사가, 신약학개론은 이우정 교수가 가르쳤다. 이런 기라성 같은 교수들의 말씀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그 가운데서도 소홍렬 선생 강의에서 가장 큰 자극을 받았다. 그는 ‘젊어서는 무전제의 사고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신학은 전제가 너무 확실해서 네가 놀기엔 부적절한 것 같다’고 했다. 그 말 한 마디에 목사와는 다른 학문의 길을 걷게 됐다.’’
- 1951년 : 옛 이름이자 본말인 한국신학대학교(韓國神學大學校)로 교명 변경
- 1951년에 36회 총회에서 서로 교육하는 신학의 내용이 판이하게 다른 두 신학교의 양립에 의한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두 신학교의 직영을 전부 취소하고 대신 총회직영의 새로운 신학교를 대구에 세우자며, 사실상 두 학교를 합친 새로운 학교를 만들자는 방안을 내놓고 그 해 9월에 총회신학교를 설립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 명칭과 교수진이 남산에 있던 장로회 신학교나 다름이 없는 상황이었고, 총회에서 내놓은 두 학교 결합을 위한 소위 '합동 7원칙'에서 요구한 "신학 교육을 순복음부의에 기초해서"한다던가 중요과목을 7인의 선교사 교수에게 맡긴다던가, 신학교 현직원의 총사퇴 등의 안은 조선신학대학이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으므로, 조선신학대학 측에서는 당연히 불복했다. 명분은 총회 진행방식 및 새로운 신학교 설립의 불법성이였다.
- 이 때 학교 이름도 현재 한신대학교라는 명칭의 기원이 되는 한국신학대학교라는 이름으로 갈아버린다. 글에 따라 이미 총회신학교가 세워진 후인 1952년에 교명을 바꿨다고 설명하는 곳도 있으나 한신대학교에서 제공하는 연혁에는 1951년의 일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에 대해 1952년 4월 대구서문교회당에서 열린 37차 총회에서 한국신학대학교 측을 굴복시키기 위해 경기노회에 명하여 김재준을 면직하도록 하고[4] 한국에 들어와있던 외국 선교회 중 유일하게 한국신학대학교 편을 들어주던 캐나다 선교회의 윌리엄 스코트 선교사는 본국에 소환을 요청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또한 조선신학교 출신자의 교역자 채용 금지 및 목회자격 박탈을 선언했다. 결국 1953년 6월 10일 한국신학대학교 강당에서 9개 노회의 대표 47인이 기독교장로교[5]의 창단 이념과 강령 등의 선언서를 채택하여 공표함으로써 대한예수교장로회와 완전히 결별하게 된다. 1954년 6월 10일 제39회 총회[6] 에서 '대한기독교장로회'로 개칭했고 목포, 전남 경남 노회가 참가했다. 또한 이 해에 캐나다 연합교회가 예장과 결별을 선언하고 기장과 함께하기로 결정하며 선교사 21명을 파견해줌으로써 교단이 활기를 띄게된다. 참고로 이후 대한예수교장로회 교단은 '통합'과 '합동'으로 재차 분열되었다. 그리고 각 교단마다 이런저런 이유로 지속적으로 분리되어 오늘날 장로회 계열 교단만 대충 170여개가 넘어간다. 장로회에서 분리한 교단들이 대부분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명칭을 그대로 유지하고 괄호 안에 나름대로의 명칭을 적어 구분하는 반면 한국기독교장로회 측은 쫓겨난 것으로 되었기 때문인지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명칭 자체를 사용하지 못하/않고 아예 별도의 교단을 따로 설립한 모양새가 되었다.
- 학교를 소유하고 있는 교단인 한국기독교장로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이하 예장)와 아빙돈 성서 주석 사건으로 불리는 성서비평학 수용 문제로 갈라서게 되었다. 기존의 보수주의(근본주의)신학은 개혁주의로써 성서무오설[7]을 주장하는 반면, 한국기독교장로회(이하 기장)쪽은 고등비평[8]을 주장했다.
- 이는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신학을 가르치는 신학교인 장로회신학대학교와 총신대학교가 설립되는 배경이 된다. 이러한 보수주의 신학자들에게 한신대학교에서 가르치는 신학이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까였지만, 사실 한신대학교는 자유주의와 개혁주의의 변증법적 대안으로서 칼 바르트에 의해 제시된 신정통주의 신학을 추구하는 곳이다. 신정통주의란, 간단히 말하자면 개혁주의를 바탕으로 하되, 자유주의에서 제시된 비판을 수용하는 신학적 경향이다.[9] 하지만 근본주의와 개혁주의를 신봉하는 보수 신학자들 입장에는 성서비평학 등을 받아들이고 있는 신정통주의가 곱게 보일 리 만무하였고, 결국은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누명을 쓰고 퇴출당한 것이다. 일단 실제로 장로회신학대학교(예장 통합) 김명용 교수는, 한국기독교장로회 창시자 김재준 목사를 신정통주의 신학자로 이해했다. 물론, 김명용 교수 혼자서 예수교장로회 전체의 입장을 대표한다고 볼 순 없지만.
- 1954년 : 대학원 개설
- 1958년 : 수유리 서울 캠퍼스(현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이전
- 수유리 캠퍼스의 현 위치는 당시 부통령이었던 함태영이 헬기를 타고 하늘에서 직접 터를 보고 결정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교내에서 전해져 내려온다. 함태영 당시 부통령(제6대 농림부 장관이자 훗날 강원대학교가 되는 춘천농업대학교 학장 함인섭의 조부, 제9대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함병춘의 부친이다. 또한 최순실 게이트사건 때 정유라에게 유일하게 F학점을 준 함정혜 교수가 함태영의 증손녀)은 법관으로 대학에서 법학을 배웠지만 신앙인으로써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기도 했다. 교단 분리 이후 1951년 '한국신학대학교'가 설립하였을 때 학장을 역임하기도 했고, 부통령 임기 중에도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에 선출된 적도 있다. 부통령 퇴임 이후엔 한신대학교 이사장을 지낸 적도 있다. 이하 자세한 설명은 위키백과를 참고할 것. # 이후 한신대학교의 이사장까지 역임했던 당시 기독교장로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던 인사라는 것을 감안하면 사실이라고 보아야할 것이다.
- 1969년 : 한국신학대학 병설 국민학교 개교
- 한신초등학교로 개명, 성북 최고의 사립 국민학교로 명성을 날렸다. (당시엔 행정구역이 성북구), 등록금이 비싸 소위 있는 집 자식들이 다니던 특별한 학교였다. 우이동, 수유동에 문인들과 지식인들이 많이 살았고 그들의 자식들이 다녔다. 한신대학교의 학부를 수원으로 이전하는 것과 동시에 한신초등학교를 삼산학원에 매각한다. 원래 함태영기념관(현 송암교회)에서 화계사 입구의 현 한신대 신학, 사회경영대학원까지가 한신대 교정이었다. 어마어마한 부지를 매각하고 수원(현 오산)으로 이전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목사들이 행정처리를 하니 재리에 밝을 수가 없었고, 결국엔 사기도 당하고, 소송도 당하고 부동산에 대한 혜안도 없었고. 지금의 한신대 법인당국의 안목도 그 옛 서울 수유리 행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기장 소유의 아카데미 하우스를 보면 이 좋은 위치에 있는 역사적인 호텔을 폐허에 가깝게 방치해 놓는 것을 보면 정말로 답이 없다.
- 1973년 : 유신독재가 선포된 직후 삭발투쟁으로 유신독재에 항거
-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1973년에 학생과 교수가 삭발투쟁을 감행하며 전 학교, 전 교단 차원에서 민주화운동에 적극 참여한다. 처음 교수단이 삭발을 강행하자 뒤늦게 이를 알게 된 문동환 목사(당시 한신대 교수)는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서 화계사로 단체 출가라도 하냐며 물었다고 한다. 이는 교단의 정신적 지주인 장공 김재준 목사를 비롯해 교단 원로들이 유신에 반대하고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는 입장이었던 영향이 크다. 이 때문에 다음해인 1975년에 문교부로부터 휴교령의 철퇴를 맞는다.
- 1975년 : 문교부(현재의 대한민국 교육부)의 휴교령
2.2. 1980 ~ 1996 : 진보적 종합대학발전 시기
초기에 그려진 밑그림은 이른바 문사철( 문학, 사학, 철학)을 중심으로 한 사범대학 중심의 학교를 세우려고 하였다. 현재의 한신대가 인문대 학과 위주로 구성(한신 인문학 강세의 이유) 되어 있으며 일부 학과들의 교직이수 과정이 남아 있는 이유도 이 때의 영향이다. ( 각 과들이 과자체든 과명이든 많은 변화 및 변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신은 인문학의 힘을 믿고 중시하는 풍토때문에 인문대학은 변동없이 계속 함으로 문사철 강세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사실 한신대학교에서 인문대 외의 학과들, 특히 아예 문과가 아닌 공대나 체대 등의 학과들은 대부분 한참 뒤에야 생긴 것이다. 1980년에 종합대학으로써 '한신대학'으로 교명을 바꾸고 1981년에 현재의 경기 캠퍼스가 개교한다. (인문학 전통은 있으나 실질적으론 공대 및 미디어광고홍보학과만 팍팍 밀어준다.)- 1980년 : 종합대학으로 개편
- 그 이듬해 현재의 경기캠퍼스로 대부분의 학부과정을 옮겼다.
- 참고로 원래 캠퍼스를 세우려고 했던 자리는 현재 중부지방국세청이 자리하고 있는 구 국립세무대학 자리였다는 얘기가 있다.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에 해당한다. 참고로 세무대학은 세무공무원을 양성하던 2년제 국공립 전문대학으로 1997년 외환 위기 때 공무원조직 축소의 일환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당시 오산의 그것도 외진 땅 한구석에 거처를 옮긴 이유가 이 학교의 전통대로 또 다른 전통(全統)에 격렬하게 항거하다 그 분의 눈밖에 난 바람에 1980년대 초반에 한번 신입생 모집 금지(사실상의 폐교)를 당하고 현재의 오산시 땅으로 쫓겨난거라는 설이 있다. 기장교단 내부에서는 강원용 목사 등을 주축으로 한 교단의 정치적 실력자들이 신군부와 정치적 타협 하에 얻어낸 결과물로 널리 회자되고 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새로 대학을 개교할 수 있게 허가해주는 대신 수원 북부의 부지를 전두환의 장인이 갖고 있던 오산의 부지와 맞바꾸는 것이었다고. 실제로 현재 전두환의 처남 명의[10]로 되어 있는 오산 일대의 땅이 바로 한신대학교 경기캠퍼스 뒷쪽에 있으며 검찰은 이 일대 땅(500억원대)을 추징 대상으로 보고 압류했다. 관련기사 # # 어딘가 모르게 설득력이 있지만 아직까지는 공식적인 근거가 확인된 바는 없다. 그렇지만 교단 바깥에 있는 이들에겐 '도시전설'이나 '음모론'으로 보일지 몰라도, 당시 한신대가 민주화운동 및 학생운동의 보루 같은 곳이었던 탓에 '폐교'를 밥먹듯이 당하던 학교였음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설명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고 보여진다.
- 1991년 : 이공계 학과 개설
- 1992년 : 한신대학교 교명 변경
- 본격적인 종합대학 시대를 열면서 종교적인 색채가 강하다는 것을 이유로 교명이 지금의 한신대학교로 변경되었다.
- 1999년 : 성공회대학교, 상지대학교와 함께 민주대학컨소시엄 구성
2.3. 1997 ~ 2002 : 교육개혁 우수대학으로 도약
- 1997년 : 교육부 대학종합평가 우수대학으로 선정
- 2001년 : 교육인적 자원부 교육개혁추진 우수대학 2년 연속 선정(~2002)
- 정보통신부 주관 IT 지원사업 선정(*이공계 계열이 성장한 주요 기점이 된다.)(~2003)
2.4. 2003 ~ 현재 : 산학협력 활성화 및 지역거점 특성화
교육부 주관 '2018년 대학 기본역량진단' 평가에서 "자율개선대학"으로 선정
[1]
그리고 이것이 장로교 총회에서 인정받지 못해 신학교가 정식으로 인가받지 못함에 따라 장로교 주류와 고신파 사이의 갈등은 더욱 심각해졌다.
[2]
이것이
총신대학교이다
[3]
한신대 입장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정의해서 그것을 누명이라 할 수도 있지만, 보수 신학자들의 정의는 다를 수 있고 따라서 여기에 서술된 자체를 자유주의 신학이라 칭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4]
그러나 경기노회가 김재준을 면직시키지 않았기에 결국 다음해(1953) 4월에 열린 38차 대구총회에서 총회장이 직접 면직을 선언했다.
[5]
대한예수교였다고 설명하는 글도 있다.
[6]
물론 기장 그들만의 총회다. 단지 자신들이 정통이라고 생각하여 총회 회기를 잇는 것 뿐
[7]
성’경'은 신적 권능에 의해 전승된 유일무이한 권위를 가진 '경전'으로서, 문자적 의미 그대로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봄
[8]
성'서'는 하나님을 체험한 인간들이 생산한 역사적 전승이므로, 역사적 컨텍스트를 기반하여 그 한계를 인정하고 해석, 연구된다고 본다. 최근엔 고등비평보단 역사비평이라는 이름이 더 적합하고, 요즘은 보수교단소속 성서학자들도 상당수가 역사비평을 사용함
[9]
그래서 일부에서는 개혁주의를 다시 바로 세우기 위해 나타난 경향이라고도 한다. 그 외 신학자이자
실존주의에 속하는 철학자인
쇠렌 키르케고르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10]
부친으로부터 상속받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