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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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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신 | 경성일보 | ||
창간 | 1895년 2월 17일 | ||
종간 | 1906년 8월 | ||
설립 주체 | 일본 외무성 | ||
사장 | 아다치 겐조 | ||
필진 |
구니토모 시게아키 고바야카와 히데오 사사키 타다시 윤돈구 |
||
종류 | 기관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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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95년 2월 17일 일본 외무성의 지원을 받아 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의 주도로 조선에서 발행한 일본계 신문. 청일전쟁 끝무렵 일본을 선전하고 조선 민중들의 여론을 호도할 목적으로 발행되었으며 사장은 아다치 겐조[1]로 구마모토 출신의 낭인들이 기자가 되어 활동하였다. 을미사변에 참여하여 일본공사관과 함께 명성황후 살해 계획을 꾸민 본거지였으며, 석방 이후 1906년 통감부 관할의 경성일보에 합병될 때까지 고종과 명성황후에 대해 왜곡하고 비난, 러일전쟁 전후로는 일본을 선전하고 한국의 식민지화를 동조하는 기사를 실었다.2. 창간 배경
조선에서 근대적 신문은 통리아문 박문국에서 발간한 한성순보와 한성주보가 있었지만 1888년(고종 25년) 7월에 폐간된 이후 일반인들에게 큰 영향력이 미치는 신문이 없던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1895년 청일전쟁이 승리로 끝날 무렵에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한국인을 대상으로 일본 우호 여론을 조성할 필요성을 느꼈다. 일본공사 가오루는 이를 준비 중 아다치 겐조와 만나 신문발행을 결정하였고 일본 외무성에 신문발행을 건의하여 자금이 조달되었다.아다치는 구니토모 시게아키를 주필로, 고바야카와 히데오를 편집장으로 사사키 타다시, 윤돈구 등을 기자로 구성하였다. 이 한성신보 기자들은 대부분이 구마모토의 낭인 출신들이었기에 언론인이라기보다는 일본의 한국침략을 성공시키기 위한 전위대 집단에 가까웠다.
이중 한글로 실은 윤돈구는 탁지부 대신 윤용선(尹容善)의 조카이자, 궁내부 협판 윤정구(尹定求)의 동생이었다.
3. 왜곡 선동 보도
일본에 대해서는 한국의 문명화를 이끈 선구자라는 홍보를 지속적으로 한 반면 한국 정부에 대해서는 일본의 정책에 따라 기조가 달라졌는데 고종에 대해서는 일본이 원하는 방향대로 정책을 추진한 시기에는 '전례 없는 개화 군주'라고 칭찬했으나 을미사변 이후에는 '간신배에 둘러싸인 무능한 군주'라는 편견을 심었다. #한성신보는 한글과 일본어판을 다르게 구성하여 편향된 기사로 내보냈는데 한글판에서는 을미사변, 김홍집 살해사건, 아관파천, 의병활동 등에서 사실왜곡, 한국정부의 무능함이나 한국사회의 미개함을 선전하는 한편 일본판에서는 한국 내 일본인들이 사회정치적 불안감으로 동요해서 일본으로 떠나지 않도록 수위를 조절하는 보도행태를 보였다.[2]
삼국간섭, 아관파천 등으로 러시아와 한국이 연대하는 모습을 보이자 반러 논조, 대한제국의 외교 무용론, 중립국화 무용론 등을 유포하였고 한러 간 용암포 조차협정에 대해서도 비난하는 등 반러와 친일 여론을 확산시켰다.
명성황후는 부정부패했으며 고종을 방해하고 관리들이 매관매작을 벌이게 된 원인이 곧 황후라는 소문을 유포시켰다. 또한 무격인 진령군의 소식을 보도하면서는 무속에 빠진 타락한 황후라고 보도하였다.[3]
을미사변 이전인 10월 7일에는 사전모의에 따라 훈련대가 순검들에게 고의로 충돌사태를 일으켰고 이를 한성신보는 지속적으로 보도함으로써 훈련대의 불만을 가중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을미사변 당일에는 동원된 낭인과 순사에 대해서는 어떤 서술도 하지 않는 등 사건을 은폐 및 왜곡 보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명성황후 살해 이후에는 대원군은 공명정대한 개혁가의 이미지, 고종은 부정부패와 무능력한 이미지, 명성황후는 부덕한 이미지로 만들어 당연히 죽었어야 할 원흉으로 조작 보도하였다.[4]
김홍집 살해사건에 대해서도 왜곡 보도를 하였는데 김홍집은 경무청 경무관들이 죽을 때까지 어깨와 머리를 여러 차례 박살 냈고, 시신이 공개된 뒤 성난 군중들이 돌을 던져 시신을 훼손시켰지만 한성신보는 시신을 훼손시킨 이들 보부상이었고, 시신을 먹었다고 보도하였다.[5]
청일전쟁 중에 발행된 한성신보는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친일내각이 집권하던 동안에는 이같은 왜곡보도에 대해 조선 정부에서 별다른 조치를 하지 못했으나 아관파천 이후 새롭게 구성된 내각은 한성신보의 보도행태에 대해 시정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한성신보는 이에 따르지 않았고 동요(童謠)를 통해 아관파천 정부를 비판하였다. 그러자 일반 독자들이 한성신보의 행태를 비난하고 불매운동을 벌여 구독자들이 크게 격감하였다. 이에 아관파천 정부에서도 한성신보의 우편배송을 거부하였고, 1896년 4월 7일에 독립신문 1898년 9월 5일 황성신문 등 여러 국내자본의 신문들이 창간되자 그 정도는 심해졌다.
구독자가 줄어 재정난을 겪게되자 아다치 겐조는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일본 외무성에 자금을 요청하여 지원받았고 이후 신문에 소설을 연재하였는데, 대부분 소설의 집필자는 무명으로 냈으나 이 역시 한성신보 기자들이 쓴 것으로 친일선동 행태를 소설로 우회한 것이었다. <일가일곡>, <노상청문(路上聽聞)>, <낙심만천(落心萬千) 등 소설들은 역시 친일, 반러, 대한제국 정부 비난과 필연적으로 망할 것이라는 선동의식을 심었는데 러일전쟁을 앞두고는 그 경향이 노골적으로 심해졌다.[6]
러일전쟁이 곧 다가온다는 기사도 썼으며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지원하고, 동양평화를 위해 솔선수범하는 국가라고 홍보하기도 하였다.[7]
당시 신문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 대표 한 사람이 신문을 크게 읽는 식으로 청취하였고 한성신보의 보도는 당대 지식인들은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전파되어 독립신문, 황현의 매천야록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반면 이같은 한성신보의 보도에 대항하는 대척점에 있던 신문이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