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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한성부 남서 회동 85통 4호 | ||
창간 | 1907년 7월 18일 | ||
종간 | 1910년 9월 1일 | ||
설립 | 이인직 | ||
사장 | 이인직 | ||
총무 겸 발행인 겸 편집인 |
신광희 | ||
주필 | 최영수 | ||
종류 | 일간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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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07년(광무 11년) 7월 18일에 창간한 신문.2. 상세
천도교에서 만든 신문 《 만세보》가 경영난에 빠져 종간하자, 이인직이 자본금 2만 원을 들여 인수한 뒤 이완용 내각의 기관지인 《대한신문》으로 개편했다. 당연히 논조는 친일적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당시 친일파들이 장악한 탁지부에게서 매월 500원 씩 보조금을 받았다고 한다.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후에는 《국민신보》, 《 한성신보》 등과 같이 이토 히로부미 추도회를 열기도 했다. 1910년(융희 4년) 8월 29일에 국권을 빼앗긴 후 '대한(大韓)'이라는 이름을 쓸 수 없어지자, 다음 날인 8월 30일부터 《한양신문(漢陽新聞)》으로 신문 명칭을 바꾸었다. 그러나 불과 그 이틀 뒤인 9월 1일에 조선총독부가 자신들의 기관지 《 매일신보》에 병합하여 폐간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