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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군 한반도설 식민사관 주장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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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세력의 역사왜곡
왜인 한반도 남부 지배 주장 '김현구 임나일본부설 주장' 날조 정조실록 기록 왜곡 해설
삼국사기 초기기록 수정
식민사관 주장
한사군 한반도설
식민사관 주장
'동북아역사재단이 독도 누락' 주장
두음법칙·한글 맞춤법 통일안
식민국어학 주장

1. 개요2. 주장3. 진실
3.1. 이 연구가 본격으로 이루어진 진짜 시기
3.1.1. 한백겸과 정약용의 연구3.1.2. 한사군을 요동, 요서로 비정한 조선시대 학자들
3.2. 낙랑군은 식민지가 아니다
3.2.1. 일본의 낙랑군 중국인 지배층설은 고고학으로 깨졌다3.2.2. 한사군이 식민지라는 주장이 식민사학이다
3.3. 최초 낙랑군 시대 유적 발견은 식민사관과 무관했다.3.4. 이병도의 가설은 학계에서 이어받지 않았다3.5. 역사연구상에선 위치연구에 고고학보다 1차 문헌사료를 더 중시한다?3.6. 식민사관을 배격한다면서 도리어 식민사관에 함몰된 자가당착적 모순3.7. 정통 민족주의 사학계의 통렬한 비판
4. 영향력5. 여담6. 같이보기

1. 개요

윤내현이 대고조선론을 주장할 때 고조선의 계승 국가로 추정하는 고대 예맥족의 국가들과 삼한의 활동 영역을 확장시키는 한편, 한나라가 설치한 한사군을 요서 지방으로 비정하였는데 이는 한사군 요서설이라고 한다. 한사군 요서설은 지리 고증을 철저하게 무시하지만 많은 유사역사학자들과 환빠들에게 지지를 받았다.[1] 이덕일은 이러한 윤내현의 이론을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한사군이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는 것은 문헌과 고고학적 성과로 이미 증명된 주류학계의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이 정설을 일컬어 식민사관이라며 매도해서 주장했다. 윤내현의 이론이 한사군 한반도설 입장의 주류 역사학계에서 수용할 수 없는 주장임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에 영향을 미쳐 동북아역사지도 사업을 좌초시켰으며, 이와 관련 적업 중이던 해외의 한국학자들에 대한 자금 지원이 중단되어 갈등이 초래되었다.

2. 주장

요약하자면, ‘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학계의 정설은 식민사관이다.’가 이들의 주장이다.
사건 1
2014년 4월 22일, ‘식민사학 해체 국민운동본부’가 동북아역사재단에 대해 감사원에 공익감사를 청구했다. 그들은 “재단은 설립 취지와 달리 동북공정에 부응하는 주장을 홈페이지에 지속적으로 게시했고 최근에는 한강 이북이 중국 식민지였다는 주제의 영문 책자를 국고를 들여 발간해 세계 각국에 배포했다”며 감사 청구 취지를 밝혔다.(관련기사 《연합뉴스》 2014년 4월 22일,
〈재야사학계, 동북아재단 상대 공익감사 청구〉)
사건 2
2015년 10월 4일 새누리당 이상일 의원은 동북아역사재단이 외교부의 의뢰를 받아 미 의회조사국(CRS)에 제출한 자료에 중국의 동북공정을 인정하는 내용을 담은 자료와 지도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지적했다. 이 의원에 따르면 동북아역사재단은 고조선의 영토를 현재의 요령성 일부로 경계를 한정하고 기원전 108년 중국 한무제가 설치했다는 한사군이 과거 한반도 일부 지역을 통치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듯한 지도를 미국에 보냈다. 인하대 복기대 교수는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이야기는 일제 강점기 때 식민사학자들이 ‘한국은 다른 나라의 속국’이라고 날조한 사실”이라고 지적했다.(관련기사
《중앙일보》 2015년 10월 5일, 〈“한반도에 한사군” 왜곡된 고대사 자료 미 의회에 보냈다〉)
사건 3
2015년 3월 24일 새정치민주연합 도종환 의원은 동북아역사재단이 2019년 발간을 목표로 준비 중인 동북아 역사지도에서 서기 120~300년 시기 고구려 국경선 위치 비정이 중국이 동북공정 일환으로 만든 중국역사지도집의 위치 비정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중국 요하 지역부터 한반도 서북부 지역을 중국 한나라 땅으로 편입시켜 놓고 있다는 것이다. 요하 양쪽 지역을 한나라 땅으로 편입시킨 것에 대해 도 의원은 한사군을 한반도에 위치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관련기사 《경향신문》 2015년 3월 25일, 〈동북아역사재단 추진 역사지도, 중 ‘동북공정’ 지도 베끼기 의혹〉)[2]위에서 문제가 되는 동북아역사재단 관련 사태는 박근혜 정부의 국사교과서 및 한국사 왜곡과 관련하여 뉴라이트 계열의 정치학자가 이사장이 되어 추진한 역사왜곡의 사태로 이들과 이 재단은 박근혜 정부의 종말과 함께 해체되었다.

한사군이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는 것은 공인된 정설이다. 그러나 유사역사학자들은 이를 '한사군 한반도설'이라고 이름붙여 폄훼하며, 사실 이건 조선총독부가 한민족을 폄훼하기 위해 날조한 역사라고 주장한다. 또한 해방 후 70년이 지나서 나온 『동북아역사지도』도 조선총독부의 관점을 그대로 추종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이덕일의 『매국의 역사학, 어디까지 왔나』에서 이들의 주장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동북아역사지도는 기존의 정설을 따라 만들어 졌는데, 한사군 한반도설 식민사관설에 오염된 국회의원들에게 비판을 받게 된다. 특위 위원장 대리인 새누리당 김세연 의원은 '과거 학설을 무비판적으로 이어가면서 시각의 근본적인 재정립이 되지 않아 지도 편찬사업에 문제가 불거졌다.'면서 '고대사 관련 내용은 반드시 수정돼야 한다.'고 말했다. #

이덕일은 『매국의 역사학, 어디까지 왔나』는 국회 동북아특위 속기록을 공개하며 동북아역사지도가 '중국 동북공정을 추종하고, 일본 극우파의 침략사관을 그대로 따르는 지도', '한반도 북부가 중국사의 강역이었다고 주장하고, 심지어 위나라 조조가 경기도 일대까지 점령했다고 그려놓았으며, 일제 식민사학이 발명한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에 따라 4세기까지도 한반도 남부에는 백제도 신라도 없었다고 주장하는 지도'라고 비난하였고, 결국 동북아역사지도 사업은 좌초되었다.

또한 일부 유사역사학자들은 아래와 같이 황당한 주장을 하기도 한다.
역사연구상에서 1차 사료는 문헌자료다. 낙랑군의 위치 문제를 파악하는 데도 고고 유물․유적보다 문헌사료를 더 중시해야 한다. #

3. 진실

3.1. 이 연구가 본격으로 이루어진 진짜 시기

사실은 조선시대부터 나오던 학설이다. 일본 제국은 조선 학자들의 성과를 가로채었을 뿐. 아래 표에 나오듯 조선시대 중기부터 낙랑군과 관련된 지명을 추론하였다.
한백겸
1552 ∼ 1615
홍여하
1620 ∼ 1674
한진서
1777 ∼ ?
정약용
1762 ∼ 1836
증보문헌비고
1908
이병도
1896 ∼ 1989
패수[3] 청천강 청천강 대동강 대동강 청천강 북지류
열수 한강 한강 한강 한강 한강 대동강
대수 대동강 임진강 임진강 임진강 재령강
낙랑군
(조선현)
평양 평양 평양 평양 평양 평양
▲ 오영찬(2012)[4]에서 인용
약용이 살펴보건대, 당시의 다섯 군은 모두 평주에 딸렸고, 평주는 요동 양평을 치소로 삼았으니, 어찌 다섯군의 지역이 모두 요동의 경계 안에 있었겠는가. 이런 이치는 없는 것이다. 압록강 서쪽에서는 낙랑 대방의 자취를 찾을 수 없다.
정약용, 아방강역고 #
이 학설은 조선 전기에 편찬된 세종실록에도 적혀있다.[5]
본래 삼조선(三朝鮮)의 구도(舊都)이다. 당요(唐堯) 무진년에 신인(神人)이 박달나무 아래에 내려오니, 나라 사람들이 〈그를〉 세워 임금을 삼아 평양에 도읍하고, 이름을 단군(檀君)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전조선(前朝鮮)이요,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이기고 기자(箕子)를 이 땅에 봉하였으니, 이것이 후조선(後朝鮮)이며, 그의 41대 손(孫) 준(準) 때에 이르러,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망명(亡命)하여 무리 천여 명을 모아 가지고 와서 준(準)의 땅을 빼앗아 왕검성(王儉城)【곧 평양부(平壤府)이다.】에 도읍하니, 이것이 위만 조선(衛滿朝鮮)이었다. 그 손자 우거(右渠)가 〈한나라의〉 조명(詔命)을 잘 받들지 아니하매, 한나라 무제(武帝) 원봉(元封) 2년에 장수를 보내어 이를 쳐서, 진번(眞蕃)· 임둔(臨屯)· 낙랑(樂浪)· 현도(玄菟)의 4군(郡)으로 정하여 유주(幽州)에 예속시켰다. 반고(班固)의 《전한서(前漢書)》에 이르기를, “현토와 낙랑은 본래 기자(箕子)를 봉한 곳인데, 소제(昭帝) 시원(始元) 원년에 임둔·낙랑으로써 동부 도호(東府都護)를 설치하였다.” 하였고, 《당서(唐書)》에 이르기를, “변한(卞韓)은 낙랑 땅에 있다.” 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 평안도 평양부(平壤府)
본래 예(濊)의 고국(古國)인데,【철국(鐵國)이라고도 하고, 예국(橤國)이라고도 한다. 】한나라 무제(武帝) 원봉(元封) 2년에 장수를 보내어 우거(右渠)를 치고 사군(四郡)을 정할 때에, 임둔(臨芚)이라 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 강원도 강릉 대도호부(江陵 大都護府)

3.1.1. 한백겸과 정약용의 연구

조선 후기로 들어서 '사실 추구 성향을 띤 역사지리학'이 나타났다. 시작은 한백겸 선생이 쓴 『동국지리지』[6]다. 이 책 뒤로 역사 지리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연구서들이 나왔는데, '근대역사학과 지리학의 학문적 기초를 마련한 것'이기도 하였다.[가]
한백겸은 주자성리학의 도덕적 편사 규범에 구애받지 않고 우리나라 고대의 강역을 문헌 고증을 하는 방법으로 연구했다. 한백겸 선생은, 삼국 이전시대에는 한반도가 한강을 중심으로 남과 북으로 나뉘어 역사를 전개한 것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고조선에 대해서도 연구하였는데 한 나라와 있는 경계인 패수는 청천강, 왕검성이 있는 열수는 한강으로 비정했다. 한백겸은 패수가 조선의 북계이며 대동강은 아닐 것이고, 또 마자수가 있는데 이 강은 서개마를 나와 서안평으로 들어간 것, 압록강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청천강은 압록강과 대동강 사이에 있으니 패수는 청천강으로 비정할 수 있다고 하였다. 송호정 박사는 이런 입론을 '패수와 관련하여 중요한 자료들을 정확하게 짚어낸 것으로 현재 학계의 수준에서 봐도 설득력이 높다.'고 평가했다. 한백겸 선생은 낙랑군의 위치는 이렇게 판단했다. 낙랑군은 평양으로, 현도군은 함흥지방, 임둔군은 강릉 일대, 진번의 경우만 불명하여 조선, 임둔, 진국 사이에 비정하고 있다. 송호정 박사가 평하길 '이러한 연구 내용은 이후 한사군 위치에 대한 대체적인 틀을 세웠다.' 하였다. [가]

또한 정약용 선생도 고대사 연구를 했는데 그걸 책으로 낸게 아방강역고이며 이런 연구는 '조선 후기에 상고시기의 역사 · 지리 연구는 정약용에 의해 한 단계 진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책의 목적 중 하나는 기존 역사책의 오류를 바로 잡으려는 것이었다. 정약용은 선생은 『삼국사기』와 『동국여지승람』의 잘못을 지적한 바 있다. 『아방강역고』-『조선고』 에서 정약용은 고조선의 중심지가 한반도이며 한사군도 진번을 빼면 모두 압록강 남쪽에 있던 것으로 봤다. 또한 이 『조선고』에서 말하길 "지금 사람들이 혹 의심하기를 최초에 조선이 요동에 있지 않았는가 하기도 하나, 원래 『사기』 소진열전, 화식열전 및 기타에서 다 조선, 요동, 진번 등을 처음부터 갈라서 써놓은즉 이것들을 혼동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였다. 실제로 학계에서도 『사기』소진열전에서는 기원전 4세기에 요동 지역이 조선과 병렬되었고, 요동이 연나라에 속하지 않고 조선과도 구분되어 나오는데, 이때 '조선요동'은 정약용이 본 것처럼과 '조선'과 '요동'을 병렬된 것으로 본다. [나]

정약용은 조선과 요동군은 처음부터 다른 것이며 조선의 중심은 평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조선왕 만의 국도였던 왕검이 요동군 험독현에 있었다고 한 후안인 응소의 견해를 반박하기도 했다. 또한 고조선을 처음부터 광대한 '영토'를 가진 대국이라 생각한 일부 사람들의 생각을 배제하고 고조선도 처음에는 일정한 좁은 지역(정약용 선생은 그것을 현재 우리나라 서북부라고 생각)에서 출발하여 점점 광대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나]

다산은 조선이라는 명칭은 원래 기자가 도읍한 바 있는 평양에서 기인했을 것이라고 말했고 『위략』에는 연나라의 진개가 조선의 서방 2천리를 빼앗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북경에서부터 의주까지는 2천리 1백리가 되니 진개의 조선 침략 후 서한 초에 국경으로 정해진 패수는 압록강일 것이라고 했다. '한나라가 일어나 다시 요동의 고새를 수리했으니, 이미 요하를 건넜는데 어찌 다시 요수로 경계를 삼는단 말인가? 요하와 압록강 사이에 다시 큰 강이 없다면 패수가 곧 압록강이다.'고 봤다. [다]

다산은 역사에서 패수로 인식된 강이 4개(대동강, 압록강, 요동의 헌우락, 평산 저탄수)가 있다고 하며 하나하나 상세한 고증을 통해 설명했다. 또한 패수를 뜻매김하길 『수경』에서는 패수를 평양의 대동강으로 인식했는데 역도원이 『수경주』를 쓰면서 스승의 말을 근거 없이 바궈서 후세 사람들에게 혼란을 줬다고 비판했으며 『사기』『조선열전』 내용에서 패수는 압록강을 잘못 인식한 것으라 주장했다. 그리고 『한서』『지리지』에서는 압록강을 마자수로, 대동강을 패수로 구분지어 혼동되지 않게 되었다고 봤다. [다]

정약용은 한사군이 진번을 제외하고 모두 압록강 남쪽에 있던 것으로 봤다. 낙랑이 평양이며, 현토는 함경도, 임둔은 평양 서남부 임진강 일대로 해석했다. 대방군도 요동이 아니라 임진강 하류 지방으로 비정했다. [라]

한사군에서 진번군은 만주의 동가강 이북지역까지 영역을 넓힌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이유는 진번 관련 단편적인 기사가 한군현 설치 이전시기 자료에도 나오고, 일부 기록이 압록강 이북에 위치한 것으로 봤기에 그렇다. [라]

낙랑군의 영역은 평안도와 황해도로 봤고 낙랑군의 이러한 위치 비정은 낙랑이 요동에도 있었다고 하는 당시 조선의 유자들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였다. 다산은 낙랑은 압록강 이서 지역에는 없었다고 하며, 조선 유자들이 낙랑이 요동에 있다고한 주장을 비판했다. 현토군의 경우는 다산은 함경남도 남부 지역으로 봤다. 그러면서 현토를 단일한 것으로 보지 않고 사료에 나오는 것을 면밀히 검토하며 두번이나 이동하였다고 보았다. 송호정 박사는 다산이 '제2현도군과 제3현도군의 존재를 파악'해냈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다산은 임둔은 강원도 지역으로 봤다. [라]
정약용의 연구는 현대한국의 한국사학자들한테도 영향을 끼쳐서 이어지는 것으로 패수 압록강설은 쓰다 소치키기가 아닌 정약용이 완성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덕일은 조선 시대부터 거론되어 오던 낙랑군 평양설에 대해서 식민사학이라 하고 있다.
식민사학자들에게 '한사군'은 일종의 메시아다. 요즘은 한사군 대신에 한군현 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마치 자신들이 식민지배 찬양 논리를 극복한 것 처럼 말 장난을 한다. (……)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한사군은 한반도 북부에 있어야 한다.
실제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는 평양 지역이 아니라 하북성 노룡현 일대이다. 그래서 나머지 모든 논리는 헛소리가 되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영원히 우리의 역사관을 지배하신다'는 교리와 '식민사학은 우리의 영원한 신앙'이라는 도그마에 따라 낙랑군 조선현을 평양이라는 둥 대동강 남쪽의 대동면 토성리라는 둥 우기는 것이다.
이나바 이와키치는 대동강이라고 주장하고, 이병도는 청천강이라고 주장한 패수가 왜 압록강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단지 쓰다 소키치의 설을 추종한 노태돈의 설을 따른 것 뿐이다. 이유가 무엇인가? 쓰다 소치키가 이병도의 와사다대 스승이기 때문이다. 한국 식민학계는 이병도와 쓰다 소키치의 설이 다를 때는 쓰다 소키치의 설을 따른다.
이덕일, 『매국의 역사학, 어디까지 왔나』, 2015, 128~129, 151~152쪽

여기서 이덕일은 '아무런 설명이 없다.'면서 '쓰다 소키치의 설을 추종한 노태돈의 설을 따른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을 하고, 이를 전제하여 '한국 식민학계는 이병도와 쓰다 소치키의 설이 다를 때는 쓰다 소키치의 설을 따른다.'고 원천봉쇄를 하고자 하였다. 물론 패수가 압록강이라는 주장에 대해 학계에서 아무 설명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거짓이다. 패수 압록강설에 대한 설명은 이미 조선시대부터 여러 번 다루어졌다. 그리고 한국 학계가 쓰다 소키치와 이병도의 설 중 하나를 골라서 따른다는 말도 이덕일의 헛소리일 뿐이다.

3.1.2. 한사군을 요동, 요서로 비정한 조선시대 학자들

정약용, 한백겸 외에 한사군이 요동, 요서에 있었다고 주장한 학자들이 있으니 나름대로 근거가 있지 않냐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로 이익, 박지원 등이 나름대로 사료적 유물적 근거 등을 통해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박은 당대에 이미 이루어졌다. 주요 포인트는 한나라가 설치한 낙랑군의 위치와 미천왕의 축출로 인해 밀려난 낙랑군의 위치를 동일시하는 바람에 생긴 오류, 즉 낙랑군 교치를 이해하지 못해 일어난 오해라는 것이다.
『“외(廆)가 낙랑군을 두어 통(統)으로 태수(太守)를 삼았다.”하였으니, 이것은 별도로 요계(遼界)에 두어, 옛이름을 그대로 칭하기를 마치 후세의 요령(遙領)하는 예와 같이 한 것이지 한 나라 때의 옛 군은 아니다.』 안정복, 『동사강목』, 「사군고」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낙랑은 진나라 건흥(建興) 초기에 이미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모용씨(慕容氏)가 이를 인하여 내지(內地)에 낙랑군을 두고는 옛 칭호를 모칭(冒稱)하였다. 호삼성(胡三省)이, “모용씨의 낙랑군 및 조선현은 모두 요서군(遼西郡) 유성현(柳城縣) 경내에 있어야 한다.” 한 것은 맞는 말이다. 척발씨(탁발씨, 拓跋氏 후위(後魏))에 이르러서는 또 요서나 북평(北平) 등지에 낙랑과 대방을 설치하였는데, 이는 모두 한나라 때의 군현과는 서로 관계가 없는 것으로, 단지 그 이름만을 취한 것일 뿐이다. 중국의 서책에서 혹 요동의 여러 현을 한나라 때의 낙랑 지역이라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한진서, 『해동역사』, 「지리고4」

여기에 나타난 조선시대의 논박 역시 한사군 한반도설 식민사관설을 반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내는데, 낙랑군의 위치가 일제에 의해 창작되었다는 논리를 반박하는 또 다른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위 사료에서 밝히듯이 당대 시기에 이미 조선시대 학자들은 요동, 요서에 나타나는 낙랑의 흔적은 미천왕의 낙랑군 축출 이후에 낙랑군 교치로 인해 나타난 흔적이라는 반박을 제시했다. 즉 낙랑군의 교치 위치가 식민사학자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주장이 거짓이며, 이미 조선시대 때 한반도에서 요서로 이동했다는 관점이 존재했음을 나타내는 사료인 셈이다.

이 조선시대의 낙랑군에 관한 논박은 낙랑군을 한반도로 가두는 프레임이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주장이 거짓이며 오히려 소위 강단사학자를 공격하는 해당 논리가 현대에 창작된 프레임 씌우기라는 것을 밝혀주는 사료인 셈이다.

3.2. 낙랑군은 식민지가 아니다

3.2.1. 일본의 낙랑군 중국인 지배층설은 고고학으로 깨졌다

한국의 광복 이후 일본학자들은 더 이상 직접 유적에 참여할 수 없으니 기존 고고자료 보고서로 연구를 하였다. 그 양반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렇다.
지배층 중국인(한족)
피지배층 고조선계(토착민)
이런 주장을 집대성한 양반이 미카미 쓰기오다. 마키마 쓰기오는 낙랑군의 지배계층은 중국인(한족)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고인돌이 고조선계 토착 유력자들의 무덤이라고 주장했다. 토착민들이 후진스런 문화양상이였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미카미 쓰기오의 주장은 식민사관에 영향 받은 것이다.
중국 사료에서 앙굉 왕조에 대한 기록과 낙랑구역 귀틀무덤 목간 출토 고고학을 통해 살펴보면 당시 낙랑군엔 고조선계 토착호족 왕씨와 중국계 호족 왕씨가 병립했는데, 신제국 말기에 토호 왕조가 반란했다가 중국계 호족 왕굉에게 진압당해 지배계급이 바뀐다.
삼국지 동이전에서 변한 구야한국이 낙랑군에 철덩어리들을 갖다바쳤단 기록으로 봐도 알 수 있듯 낙랑군은 조선 지역에 설치되어 조선은 물론 삼한으로부터 경제적 이익을 얻는 식민지 역할을 충분히 했다.

식민사관 학자들이 '낙랑군 내 고조선계 토착민 무덤'이라 주장했던 고인돌에 대해 이후 고고학 연구가 이뤄졌다. 지속해서 한 발굴조사에 따르면 이것들은 기원전 3세기 이전까지만 만든 것으로 드러났다. 낙랑군이 기원전 2세기 말(기원전 108년)에 설치된 걸 보면 이건 낙랑군 시기 무덤일 수 없다. 또한 해방 후 북한 지역에서는 고고자료를 꾸준히 발굴해서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을 중심으로 낙랑 고분들이 약 3천여 기 발굴됐다. 그러다 낙랑군의 지배층이 조영했을 무덤들에는, 식민사관과 완전 다른 유물들이 나왔다. 세형동검(한국식동검)이 발견됐다. 세형동검은 고조선계 토착민의 문화다. 토착민 전유물이 낙랑군 지배층의 무덤에서 다수 출토된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지역에 오래 산 토착민이 낙랑군의 유력자였던 것이다. 이것에 따라 이 무덤들에 함께 묻힌 중국제 수입 물품들의 정체도 밝혀졌는데 외국 수입품이었던 것이다. 지배층이 중국 사람이라 묻힌 게 아니라 외국 수입품을 같이 묻어둔 것이다.

거기다 고조선계 토착민이 낙랑군의 주요 관리를 했다는 것도 밝혀졌다. 초원 4년 호구부(낙랑군의 호구조사 공문서)가 한 무덤(정백동 364호)에서 발견된 적이 있는데 이 무덤에서 세형동검 계통 유물이 발견됐다. 고조선 계통의 토착민이었다. 거기다 낙랑군의 25현 가운데 하나인 부조현의 현장((夫租長)을 지냈던 고상현 무덤에서도 세형동검이 발견됐다. 이렇게 무덤에서 나타난 토착 문화에 연구에 따라 낙랑군 지배층의 상당수가 고조선계 토착민인 것으로 밝혀졌다.[16]

거기다 낙랑군이 있을 때 고조선 사회가 그대로 유지됐다는 게 밝혀졌다.
또한 중국 한대(漢代)의 군현들은 각 현들이 대략 1만호 정도의 호구수를 기준으로 고르게 나타나는 반면에, 낙랑군의 경우 25현의 각 현별 호구수가 극심한 격차를 보이고 있다[조선현: 9678호, 점제현:1039호, 제해현: 173호(초원 4년 호구부 기준)]. 이 역시 연구자들에 의해 그 원인이 밝혀졌다. 낙랑군의 25현은 중국 왕조의 다른 군현들처럼 호구수(1만호 기준)에 따라 획일적으로 구획된 것이 아니라, 종래 토착세력들의 영역과 경계를 따라서 구획된 것이다. 즉 한나라는 고조선 시기 이래의 토착세력들이 원래 거주했던 지역과 사회 구성 형태를 깨지 않고 대부분 그대로 인정해주었고, 그 과정에서 현의 규모가 아래와 같이 불규칙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곧 낙랑군의 설치 당시에도 엄연히 유지되었던 고조선계 토착민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요컨대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 그 지역의 토착세력들은 흩어지거나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중국왕조는 다수의 토착민 사회가 온존한 옛고조선 지역에서 이들의 협력과 도움 없이는 군현의 장기적인 운영이 불가능하였다. 이로 인해 낙랑군의 주요 지배층 가운데 상당수는 토착민으로 구성되었으며, 낙랑군의 지배층 유적은 고조선계 세형동검 문화의 기반 위에 중국 문물이 결합된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고고자료를 기반으로 한 한국학계의 연구로 인해 낙랑군이 중국인에 의해 운영된 중국인 사회라는 오랜 통념은 깨졌다. 이와 더불어 지배층은 중국인이요, 피지배층은 토착민이라는 일본학계의 이원적 종족지배론도 함께 붕괴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중국 군현이라는 외형과 그 지역에 파견된 일부 중국인 관리들의 존재만으로, 낙랑군을 (근대 제국주의적 수탈)식민지 개념으로 이해하고, 심지어 근대 이후의 민족적 자긍심이나 영토 관념(귀속 여부 등)을 투영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안정준, 오늘날의 낙랑군(樂浪郡) 연구 2 #

3.2.2. 한사군이 식민지라는 주장이 식민사학이다

2010년대 이후 한국 역사학계에선 한 사군이 아니라 한 군현 이라는 이름을 쓴다. 그리고 그 개념은 식민지와 다른 것으로 본다. 당연하지만 일제 식민 세력 이전에 한 군현을 식민지로 보는 해석 따윈 없으나 식민사관부터 식민지로 보는 해석이 나타난 것이다. 한 군현을 식민지라 볼 근거는 없으며 오히려 유사역사학의 논리는 식민사학과 유사하다.
일본인들의 한사군 연구는 문헌 비판을 통한 실증을 통해 위치를 비정하고 고적조사를 통해 확인된 고고자료가 실증의 물적 근거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학문적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다. 오늘날의 한군현 연구에서도 중요한 선행 연구로서 비판과 극복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연구는 한사군의 성격을 식민지로 규정한 채 그 위치를 확인하는데 그쳤다는 데에서 한계를 지적할 수 있다. 한사군 그 중에서도 400여년간 지속된 낙랑군의 군현통치가 존속 기간 내내 동일한 상태로 유지되었는지, 심지어는 군현통치가 실질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충분히 제기될 수 있었음에도, 그들의 노력은 오직 식민지의 공간을 확인하는 데에만 집중되었던 것이다.

그들이 한사군의 성격을 식민지로 규정한 것은 한국이 일찍부터 외국의 식민지였다는 이해를 확산시켜 결과적으로 제국일본의 식민지배 정당화에 이용되었다. 훗날 일본인의 한국사 연구를 비판한 일본인인 하타다 다카시(旗田巍)에 따르면 그들의 연구 자세를 제약한 것은 일본의 한국지배라는 현실이었고, 그 결과 도출된 역사상은 한국사의 진실을 놓친 그릇된 한국사상이었다.(하타다 다카시, 1983, 󰡔일본인의 한국관󰡕, 일조각, 154쪽) 일본인들의 한사군 연구가 식민사학이라는 비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흥미로운 것은 한사군의 성격을 식민지로 규정한 채 그 통치의 실상 및 지배구조에 대한 일체의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위치 비정에만 집착하는 모습을 사이비 역사학에서도 쉽게 확인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들이 한사군이 한반도 밖에 있었다(또는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의 이면에는 중국의 식민지였던 한사군이 현재 우리의 영토 안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강박이 자리하고 있다. 이 때문에 그들은 한반도 북부에서 발견되는 고고학 자료를 모두 일제 식민사학의 조작으로 치부한다. 이처럼 자신의 위치 비정을 고수하기 위해 발견된 고고자료의 해석을 거부하는 모습은 도쿄제국대학 동양사학과 조선사 담당 교수였던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를 연상시킨다. 그는 대방군의 중심지가 한강 유역에 있었다는 자신의 주장에 매몰되어 황해도 봉산군에서 발견된 대방군 유물을 인정하지 않았다.

사이비 역사학은 식민사학을 거부하고 또 그에 대해 가장 격렬한 비판을 가하고 있지만, 그 근간을 이루는 논리와 연구방법은 식민사학과 다를 바 없다. 우리는 어쩌면 지금 식민사학의 목소리로 식민사학을 비판하는 식민사학의 슬픈 변종과 마주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위가야(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박사수료), ‘한사군 한반도설’은 식민사학의 산물인가 1 }#

3.3. 최초 낙랑군 시대 유적 발견은 식민사관과 무관했다.

도쿄제국대학 공과대학 조교수였던 세키노 다다시(關野貞)는 식민지 시기 한국에서의 고적조사를 주도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02년과 1909년에 한국에 방문하여 고적을 조사했는데, 1909년의 조사에서 대동강 유역의 석암동 고분을 발굴·조사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이 고분을 고구려 고분으로 보았다가 훗날 견해를 수정하여 낙랑군 시대의 유적으로 보았다. 이 때문에 일제가 고구려 유적을 낙랑군 유적으로 조작하여 ‘한사군 한반도설’을 고고학적으로 뒷받침하려 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이덕일, 2014, 우리 안의 식민사관, 만권당, 69~73쪽) 하지만 이것은 당시 세키노의 사전 지식 부재 때문에 생긴 일이며 오히려 최초의 낙랑고분 발굴조사가 식민사관 창출을 위해 사전 기획 하에 이루어 진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게 하는 사례일 뿐이다.(정인성, 2006, 「關野貞의 낙랑유적 조사·연구 재검토」, 호남고고학보 24)
위가야(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박사수료), ‘한사군 한반도설’은 식민사학의 산물인가 1 #
다시 말해 세키노 다다시에게 낙랑군 시대 유적이 발견된 건 우연이었다.[17] 내용을 좀 더 추가하자면 세키노 타다시는 석암동 고분군의 전실묘(벽돌무덤)을 조사한 후 고구려 무덤이라고 주장하였다가 이에 반대하는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와 논쟁을 벌인 바 있다. 이후 황해도에서 장무이묘를 발굴함에 따라 견해를 수정한 것이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고구려 무덤, 한사군의 무덤에 대한 개념 자체가 확립되어있지 않은 시기였으며[18] 평양 및 그 일대에서 확인되는 유적은 '당연히' 고구려일 것이라 생각했다. 한사군은 아오안이었던 셈.

3.4. 이병도의 가설은 학계에서 이어받지 않았다

한국 사학계가 이병도를 추종한다는 헛소문이 돈다만[19] 실제로는 이병도 주장은 통설이 아니고 그다지 비중도 없다.
현재 학계의 낙랑군 연구를 일제 식민사관-이병도-학계로 이어지는 가공의 ‘식민사관 프레임’에 가두어 불신의 늪에 빠트리기 위한 선동만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학계의 연구서들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는 분들에게 이러한 ‘식민사관 프레임’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간략히 말씀드리고자 한다. 앞서 설명한대로 낙랑군의 중심지가 평양이고, 군치가 대동강 남안의 낙랑토성이라는 사실은 1920년대 중반에 이미 해외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확정된 상태였으며, 이병도가 이러한 학설을 집대성한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나온 한사군 관련 연구 논문은 1,000편이 넘는데, 이 가운데 이병도가 쓴 논문은 채 10여 편이 되지 않는다. 이병도는 고고자료만을 근거로 한사군 25현의 구체적인 위치를 일일이 비정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주로 문헌을 통한 최대한의 연구를 시도해보았던 것이지, 연구사적으로 낙랑군의 한반도 비정을 결정지은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이병도가 기존에 주장했던 현도군과 임둔군의 위치는 이제 학계의 통설이라고 할 수도 없다. 많은 후학들이 이를 비판하여 다른 위치로 비정하는 논문을 내고 있는 상황이다. 사이비 역사가들 논리대로라면 필자를 포함해 현도군과 임둔군의 위치에 대해 이병도와 다른 주장을 한 이들은 ‘사문난적(斯文亂賊)’ 심판하듯이 죄다 파면됐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상황이 이런데도 ‘사이비’ 역사가들은 계속해서 이병도가 낙랑군=평양설을 정통으로 계승한 학자라는 설을 유포하고 있는 실정이니, 그의 연구사적 위치가 대중들에게 실제 이상으로 부풀려진 것은 우리 학계가 아닌 사이비 역사가들의 ‘공로’이다. 그 자체가 사실왜곡이요, 이를 근거로 학계를 식민사학이라 매도하는 것 자체가 ‘선동’이 아니고 무엇인가.
안정준(연세대), 오늘날의 낙랑군(樂浪郡) 연구 2

3.5. 역사연구상에선 위치연구에 고고학보다 1차 문헌사료를 더 중시한다?

역사 연구 방법은 그렇지 않다.[20]
인류 역사를 연구하는데 두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문헌 사료를 통하여 연구하는 문헌사적 방법이며 다른 하나는 실물 자료를 통하여 연구하는 고고학적 방법이다. 고대사 연구에 있어서 고고학적 연구 방법이 막대한 의의를 가진다는 것은 새삼스럽게 맑스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력사학도들의 초보적 기초 지식으로 되고 있는 사실이다. 우리 나라 고대사 연구의 경우 문헌 사료가 특히 제한되어 있고 그것도 절대 다수가 인접 중국인들의 편견적이고도 전후 모순적인 부분이 적지 않은 기록인 조건 하에서는 고고학적 자료가 극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지난 시기 학자들은 이러저러한 식으로 력사 지리 고증에서나 력사적 사실을 확정함에 있어서 고고학적 자료들을 리용하여왔다. 고조선과 관계되는 것으로서는 다음 동지들의 견해가 발표되었던바 우선 이에 대하여 살펴보기도 한다.
​ 동주신(佟柱臣)동지는 그의 론문 《고고학 상으로 본 한대 및 한대 이전의 동북 강역》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문헌상으로 비정한다면 전한 시기의 우북평 료서군의 북방계선은 오늘의 조양(朝陽)부근 즉 북위 42도 선이며 료동군은 개원(開原) 부근 즉 북위 42도 8분이 경계선으로 된다. 그러나 고고학적 자료에 의거한다면 고 장성지가 적봉(赤峰)부근에 있으니 그 곳의 토룡(土龍)전설로 보아 필시 고장성은 장가구 혹은 덕화(德化)근처의 장성으로부터 시작하여 위장(圍場)을 거쳐 적봉에 이르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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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론자들 가운데에는 고고학 자료는 문헌 사료에 복종해야 한다고 말하는 경우조차도 없지 않다. 고대 희랍 로마사 연구에서와 같이 방대한 문헌 사료를 가진 곳에서조차 고고학적 발굴은 문헌 사료의 부정확성 부족점 등을 적지 않게 시정해 주고 있다. 그러나 고고학도들이 왕왕 그 자료를 구체적인 력사적 사실과 결부시킴에 있어서 부정확한 론리를 전개할 수 있으며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부당한 론단을 내릴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고고학도들을 지적하면 모르지만 고대사연구에서 실물 사료의 제1차성을 부정한다는 것은 부당한 견해이다.
** 考古學上漢代及漢代以前的東北疆域//考古學報 1956년 제1기 29-42페지
정찬영, 1963, 「고조선에 관한 몇가지 문제들에 대하여」, 『고조선에 관한 토론 론문집』
일부 사이비 역사가들은 역사 연구상에서 1차 사료는 문헌자료로 두는 것이 원칙이며, 낙랑군의 위치 문제를 파악하는데도 고고 유물․유적보다 문헌사료를 우선시해야한다는 논리를 펴기도 한다. 하지만 역사연구상에 그런 공식은 없다. 복잡한 인간사를 그러한 단순불변의 공식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발상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단적인 예로 우리가 중국 길림성 집안(集安) 지역을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로 비정하는 논거들만 보아도 이러한 발상의 허위가 너무나 분명해진다. 현재까지 집안시 일대에서 발견되는 고구려 계통 적석총들, 그리고 결정적으로 광개토대왕릉비가 지난 1600여 년간 왕릉 주변에 우뚝 서있는 것이 수도를 입증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러한 고고 유적․유물들을 1차적인 판단 근거로 삼는 가운데, 고구려 국내성에 관한 여러 문헌사료들을 이와 더불어 해석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인 것이다.

낙랑군의 위치 문제도 마찬가지다. 현재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에서 발견되는 수천기의 중국계통 고분들, 그리고 그 고분 내에서 발견된 중국계 인명(人名)과 군현 관리의 명칭 등이 새겨진 수많은 벽돌과 칠기(漆器) 유물들, 그 외에도 점제현 신사비, 봉니(封泥) 등 중국군현 관련 출토품들을 1차적인 기준으로 삼고 낙랑군의 위치를 비정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다. 이러한 자료들을 근거 없는 ‘공식’ 하나로 일거에 부정하고, 자기 논리만을 뒷받침하는 문헌자료만을 제시하는 방식은 의도된 역사왜곡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안정준(연세대), 오늘날의 낙랑군(樂浪郡) 연구 1 #

3.6. 식민사관을 배격한다면서 도리어 식민사관에 함몰된 자가당착적 모순

한군현은 무엇보다도 옛 조선의 영토에서 한나라에 대항하는 조선 부흥 세력이 준동하지 않도록 기존 조선인 사회를 통제할 목적으로 배치한 것이다. 이는 한나라의 조선 합병이 군사적 침공을 통해 폭압적으로 이루어진 만큼, 반한 저항 세력이 결집할 경우 점령 상태를 유지하기 어려울 수 있었다는 판단하에 시행된 정책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고조선이 한나라에게 멸망당하여 정복된 것이 분명한 역사적 사실인 이상, 만약 한군현이 한반도 내에 배치되지 않은 것이라면, 정작 고조선의 핵심부인 한반도의 한민족은 중국에서 군현을 설치해 강제하지 않아도 알아서 정복자 중국에 잘 굴종했다는 말이 되며, 결과적으로 오히려 우리 민족의 역사적 자주성을 부정하는 일제의 식민사관에 부합하는 주장이 되는 것이다. 식민사관을 배격해야 한다면서 오히려 실제로는 식민사관에 부화뇌동하는 주장은 이념사관 vs 중립사관, 민족사관 vs 식민사관의 문제를 떠나서 기본적인 논리적 일관성을 갖춘 학술적 주장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3.7. 정통 민족주의 사학계의 통렬한 비판

김철준 박사는 이런 주장을 이렇게 비판했다.
다음으로 한사군이 우리 나라 안에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한사군이 없었다면 좋을 것 같지만 한사군이 없었으면 고구려사와 백제사의 역사적 과제가 무엇인지를 설명할 수 없다. 우리 나라에 들어와 있던 식민지를 내몰고 고대국가를 성립하는 것이 고구려 역사의 사명이고 백제 역사의 사명이었다. 한사군이 없었다면 한사군과 싸우는 과정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모름지기 주체의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오늘날 현대문화를 건설해 나가는 데 험로와 한계를 느끼지 않는가. 이것을 정확히 인식하고 부단히 극복해 나가는 것이 주체성 확보의 전제이다. 자기 한계성을 극복해 가면서 생활능력을 증대하는 활동을 할 때 역사의 주체성과 정통성이 있는 것이지, 단군만 이야기하고 연대만 올린다고 해서 누가 주체성과 정통성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다.
- 윤종영의 『국사교과서 파동』에서 3

4. 영향력

한사군 한반도설은 식민사관이라는 이 주장은 정계에서도 영향력이 심각하다. 국회는 물론 박근혜 청와대까지 영향력이 끼쳤다. 동북아역사재단 측에 따르면 2015년 청와대는 교육부 고위관계자로부터 역사지도 편찬 사업 문제점에 관한 보고를 받은 뒤 “지도 전체에 대해 문제가 있는지 검토해 다시 보고를 하라.”는 지시를 했다고 한다. #

참고로 박근혜 대통령은 환단고기를 연설에서 인용한 바 있다. # 여기서 맨 마지막에 인용된 '고려 말의 대학자 이암 선생'은 실존인물이지만, 그가 단군세기를 썼다는 내용은 환단고기에서만 주장하는 내용이다. 축사에서 인용된 문구가 바로 단군세기의 문장이다.

5. 여담

6. 같이보기



[1] 아예 한사군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환빠들도 흔하다. [2]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부설, 한사군 한반도설’은 식민사학의 산물인가 1 # [3] 여기서의 패수는 고조선의 경계라고 알려진 패수와는 다르다. 패수는 시대에 따라 위치가 변화했는데 고조선에 흘렀던 패수와 낙랑군에 흘렀던 패수는 다른 강이라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물론 두 패수가 같은 강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존재한다. [4] 오영찬, 2012, 「조선 후기 고대사 연구와 漢四郡」, 『역사와 담론』제64집, 대전;호서사학회 30쪽에서 일부 편집, http://cafe.naver.com/booheong/111610에서 재 인용 [5] 다만 아래 내용의 후조선(後朝鮮), 즉 기자조선은 현대 사학계에서는 실존하지 않다고 보고있다. 정확한 내용은 기자조선 항목 참조 [6] 『동국지리지』는 한백겸(1552~1615)이 광해군 연간(1614~1615)에 저술한 책으로, 각 국가의 종족, 국가별 강역 변동 등을 문헌을 통해 고증하는 방법으로 기술했다. [가] 송호정, 『실학자들의 역사지리관과 고조선 한사군 연구』,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 『실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인식』, 경인문화사, 2012, 23~24쪽 [가] [나] 송호정, 『실학자들의 역사지리관과 고조선 한사군 연구』,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 『실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인식』, 경인문화사, 2012, 30~36쪽 [나] 송호정, 『실학자들의 역사지리관과 고조선 한사군 연구』,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 『실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인식』, 경인문화사, 2012, 36쪽 [다] 송호정, 『실학자들의 역사지리관과 고조선 한사군 연구』,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 『실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인식』, 경인문화사, 2012, 37~38 [다] [라] 송호정, 『실학자들의 역사지리관과 고조선 한사군 연구』,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 『실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인식』, 경인문화사, 2012, 39~40쪽 [라] [라] [16] 안정준, 오늘날의 낙랑군(樂浪郡) 연구 2 # [17] 애초에 역사에 우연의 개입이나 영향력이 크다는 건 포스트 모더니즘계열에 옛날부터 지적된 바이다. 조지형, 랑케 & 카 (역사의 진실을 찾아서), 2006; 한국사학사학회, 21세기 역사학 길잡이, 2008 에서 포스트 모더니즘 에 대해 확인해보자. [18] 어찌보면 당연한 이야기인 것이 당시는 한반도에서의 근대적 의미로의 고고학이 이제 막 나타나던 시기인 만큼 고구려 뿐 아니라 백제, 신라의 유적과 유물에 대한 개념도 잡혀있지 않던 시기이다. [19] 유사역사학에서 한국 사학계가 식민사학을 이어받았다는 주장과 함께 가장 많이 들고 나오는 주장이다. 이병도의 주장을 절대적으로 추종하고 따르며 그것에 반하면 퇴출된다는 것이 주된 골자. 그러나 한국 사학계의 논문과 책을 조금만 읽어보더라도 해당 주장이 얼마나 황당하고 무식한 발언인지 알 수 있다. 이병도의 학설이나 주장은 그의 제자들에게도 비판을 많이 받았고 문헌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새로운 고고학자료의 발견으로 이미 오래 전에 깨졌다. [20] 문헌과 고고학자료가 서로 상충될 경우 대부분 고고학자료가 우선시된다. 문헌자료는 편찬자의 주관에 따라 추가되거나 빠지는 내용이 있기 마련이고 악의적 왜곡, 잘못된 정보의 기록 등 우려가 있으며 후대 사람들이 왜곡, 조작할 가능성 또한 높다. 이 때문에 엄격한 '사료 비판'이 필요하다. 그러나 고고학 자료는 당시 사람들이 남긴 물질자료이므로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실체이다. 아울러 층서학에 의거한 층위학적 발굴이 이루어지며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과 같은 과학적 방법이 동원되어 신빙성을 더한다. 물론 유물 조작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또한 과학적 방법을 통해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