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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북대학교 IT대학 전자공학부 소속 학생들이 중심이 된 컴퓨터 프로그래밍 관련 동아리다.1988년에서 1990년대 초, PC통신 시절에 일개 대학 동아리로는 특이하게 전국적 인지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야기, 굵은체, 하늘 등의 프로그램을 만들어 배포한 동아리이다.
이 동아리에서 창업한 IT계열 중소업체도 여럿 있으며, 동아리 자체도 여러 프로젝트나 대회, 출품 등지에서 여러 번 높은 성적을 거두었다.
하늘소-현재는 Connect Failed(연결 실패)라는 말이 뜨면서 접속이 안 된다.
출신자들은 주로 IT계열 기업체, 정부출연 연구소 등에 근무하고, 대기업 임원으로 재직중인 자도 있고, 다수의 기업인과 대학교수를 배출하였으며, 심지어 의사도 있다.
2. 연혁
1987년, 황태욱, 이종우, 정재흠, 성기배, 장병탁 등 경북대학교 공과대학 전자공학과에 입학한 동기들이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주제로 모이기 시작하면서 태동하였다. 최초의 이름은 촌스럽게도 '해커노바'라는 이름이었다. '해커계의 신성'쯤 되는 의미를 가지는 척 하면서 실제는 해커+카사노바의 합성으로 해커이면서도 카사노바를 포기하지 않는 것을 지향하였다. 이들은 모두 IBM PC 이전, 애플컴퓨터 시절 부터 프로그래밍을 접했던 이들이었고, 대학에 진학한 후 당시 중앙전자계산소[1]에서 흔히 출몰하였다.1988년, 새로 입학한 이영상, 허재철 등이 가입하면서, 이름을 '하늘소'로 바꾸게 되었다. 이들은 학교에 등교한 시간대에는 수업 시간 외에는 주로 중앙전자계산소에서 별다른 약속이 없어도 자연스럽게 모였고, 이들 중 정재흠의 노력으로 당시 라인에디터[2]만 제공되던 중앙전자계산소의 CDC[3] 컴퓨터에 풀스크린 에디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풀스크린에디터를 사용하면 중앙컴퓨터의 부하가 극심해졌기 때문에 전자계산소에서는 풀스크린에디터 사용을 좋아하지 않았고, 절대로 공식화되지 않았다. 당시 RS-232C를 이용한 1200bps 급의 단말기[4]를 사용하던 상황에서 풀스크린에디터는 여러가지로 시스템에 큰 부하를 주는 작업이었다.
경북대학교 후문 근처에 자취방이 있던 황태욱의 집이 주로 아지트가 되었고, 이곳에서 당시 막 꽃피기 시작하던 PC통신을 위해 ' 이야기'를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한글처리[5] 부분을 비롯하여 초기버젼(2.x)까지는 주로 황태욱이 작업하였고, 3.x버젼부터 이종우가 주로 개발하였으며, 정재흠과 이영상이 부분부분 참여하였다. 이 프로그램이 개발될 당시에는 이미 '따르릉[6]'이나 외산 프로그램에 외부 한글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PC통신용 프로그램이 있긴 있었으나, 이야기가 개발되면서 이들 프로그램들은 조용히 사라졌다.
1989년, 이상호, 최경록, 이동준, 홍정우, 우창진 등이 3기로 가입하였고, '하늘'과 같은 그림 편집프로그램을 발표하였다. 당시에는 Dr.HALO 류의 외산 프로그램들이 주류였던 시기다.
1992년 6월 1일, 한국정보문화센터로부터 제5회 정보문화 대상을 수상하였다. 국내PC(개인용 컴퓨터)통신인구의 90%이상이 사용중인 것으로 추산되는 소프트웨어프로그램인「이야기」를 개발, 무상공급 함으로써 PC통신과 사설전자게시판(BBS)활성화에 크게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서울에서 열린 수상식에 참석한 것은 당시 회장인 김광렬이었고, 당시 기술상 수상자가 안철수였다[7]. 수상을 계기로 과에서 동아리방을 제공받았다.
3. 활동
3.1. 정기 세미나
80-90년대 정기 모임은 토요일 오후에 개최되었는데, 세미나 형식이고, 끝나면 정문 앞 중국집에서 주로 자장면을 먹는 것으로 끝냈다고 한다. 특이하게도, 정기모임에서는 음주문화가 없었다.3.2. MT
80-90년대 초에는 이런 문화도 없었다.3.3. 작품 전시회
80-90년대 초에는 이런걸 하지도 않았다.경북대학교 90학번의 기억에 따르면 1992년 ~ 1993년 경에는 분명히 프로그램 작품 전시회를 했다.
그 당시만 해도 개인용 컴퓨터를 끙끙대고 들고 와서 세팅해서 제작한 프로그램을 보여줬다.
이미 이때만 해도 유명인에 유명동아리여서 많은 사람들이 전시회를 보러 갔었다.
4. 주요 작품
5. 수상 내역
- 1992년 6월 1일, 정보문화 대상, 한국정보문화센터
6. 관련 회사
- 주식회사 큰사람 : 이야기를 바탕으로 창업된 '큰사람'에는 이야기 개발 멤버 가운데 황태욱, 이종우, 이영상만 참여하였고 정재흠은 참여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창립 초기 회사는 경북대 북문 근처 쪽방에 있었는데 가본 사람의 느낌은 회사라기 보다 빈민 소굴에 가까웠다 한다. 1994년 3월 회사가 커지며 서울로 옮겨[8] 번듯한 회사가 되긴 되었다. 큰사람은 큰사람 정보통신과 큰사람 컴퓨터, 도서출판 하늘소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도서출판 하늘소에서 이야기를 바탕으로 책을 출판한 매출이 큰사람의 주요 수입이었다 한다. 1990년대 말 삼성 사내벤쳐에서 분사한 SFA에 인수합병되었고 이후 큰사람 정보통신 시절에 개발한 VoIP사업과 '이야기'라는 알뜰폰 사업을 영위하고 있다. 창업 멤버 가운데 황태욱, 이영상은 회사를 떠나고 이종우는 연구소에 남아있다.
- LEE KIM 컨설팅: 이야기 개발자의 한 사람이고, 큰사람정보통신의 창업 멤버였던 이영상이 대표이사로 있고, 2008년에 싱가폴에서 설립되었다. 회사 이름으로 보아 LEE가 이영상 대표이사이나, KIM은 누구인지 홈페이지 만으로는 명확하지 않다. 이김 컨설팅은 싱가포르 외, 주변 10여개 국가와의 연결재무회계, 세무, 법률 등을 연계하여 기업의 합법적 절세 및 재무, 투자, 회계 컨설팅과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회사 설립부터 계좌 개설, 비자 및 라이센스, 영주권, 시민권, 회계, 회사 정리 및 청산, 법률서비스 등의 Total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고 하는데, 하는 일로 봐서는 IT쪽 회사는 아닌 것 같다[9].
- 엔포마
- 이트러스트텍
7. 출신 인물
나무위키에 등재될 정도의 저명성 있는 인물만 기록 가능합니다. |
8. 여담
- 이야기를 개발하던 초창기, 당시에 쓰이던 '화면캡처(Capture)' 등의 용어를 비롯하여 거의 대부분의 영어 용어를 '갈무리' 등의 고유어로 순화했을 뿐 아니라, 심심치 않게 활동하던 천리안, KETEL 등에서 황태욱이 쓰던 계정이 '다물[10]'이었고, 그의 여러 발언들로 인해 동아리가 대종교, 대순진리회, 증산도 등과 관련이 있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사실이 아니다.
- 1994년도까지 여자 회원을 뽑지 않았다. 초기에는 지원자가 없어서 그랬는데, 안오니까 안뽑는다는 묵시적인 계율이 한동안 있었다.
- 이야기를 개발할 당시, 황태욱이 어느날 오랜만에 등교하니, 강의실에 학생들이 대열을 정비하여 앉아 있었다고 한다. 오늘이 무슨 날이냐 하니, 시험을 본다고 하였다고 한다.
9. 관련 문서
[1]
1988년경에는 PC실이란 것이 아직 없었고, 중앙전자계산소에 가야만 중앙컴퓨터에 RS-232C로 연결된
단말기로 컴퓨터를 쓸 수 있었다. 대학에서의 전산교육도 전부 중앙전자계산소의 컴퓨터를 통해서만 이루어졌고, 사람이 많을 때는 단말기 뒤에 사람들이 줄을 서곤 했다. 경북대학교 전자공학과에 PC실이 만들어진 것은 1989년 경이다.
[2]
당시 주컴퓨터에서 쓸 수 있는 공식 에디터는 한 줄씩 편집하는 XEDIT 이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지만, 당시의 대학 주전산기도 주기억용량이 1MB가 안되던 시절이어서 문서를 화면에 전부 띄워두고 편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3]
Control Data Corporation. 1957년에 만들어진 대형 컴퓨터 제조사. Cray사가 여기서 분리된 회사다.
[4]
이런 단말기 한 대당 가격이 수백만원이던 시절이었다.
[5]
MS-DOS를 사용하던 시절에는 운영체제에서 한글지원이 거의 안됐고, 자체 프로그램에서 이를 처리해야 했고, 그 처리 속도가 매우 중요했다. 이야기가 성공한 배경에는 한글처리 부분이 당대의 모든 프로그램들보다 우수했다는 점이 있다.
[6]
NC소프트의 창업자 김택진이 서울대 시절 개발하였다.
[7]
정보문화상 대상「하늘소팀」, 중앙일보
[8]
통신 프로그램 '이야기' 제작자 큰사람, 디라이브러리
[9]
이김 컨설팅 홈페이지
[10]
김부식의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
동명성왕편에 多勿(다물)이
고구려 말로 '옛땅을 되찾는다.(復舊土)'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