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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로이센과 독일사의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역사적 지역으로서의 프로이센은 발트해 연안의 독일 기사단국에서부터 시작되어 이후 프로이센 공국으로 이어지지만, 국가로서의 프로이센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 동북부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으로부터 출발한다. 1618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한 지기스문트가 같은 호엔촐레른 가문의 친척이자 장인인 프로이센 공작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프로이센 공국을 물려받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동군연합이 형성되었고 1701년 프로이센 왕국이 되었으며, 이 프로이센 왕국의 주도로 1871년 독일 통일을 이루어내서 독일 제국을 건국했다.
독일은 중세 때부터 여러 영지 국가로 나뉘어져 있어서 독일은 이웃나라인 프랑스나 중국, 인도, 러시아보다 국토 면적이 작은데도 독일 땅에 존재했던 나라들이 굉장히 많다.[1] 때문에 프로이센과 통일국가 뿐 아니라 지방 국가들과의 관계도 서술한다.
2. 신성 로마 제국
프로이센 왕국이 건국하기 이전 존재했던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을 구성했던 2개의 나라 중 하나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은 본래 안할트의 아스카니아 가문이 동방식민운동 과정에서 개척했던 지역이었다. 1320년 브란덴부르크계 아스카니아 가문의 대가 끊기며 무주공석이 되었다가 독일왕 루트비히 4세에 의해 바이에른계 비텔스바흐 가문에게 넘어갔다. 그래서 1356년 금인칙서 발표 당시에는 바이에른계 비텔스바흐 가문이 통치했으나 이 지역의 황제 선출권을 탐낸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보헤미아 국왕 카를 4세가 사위인 오토 7세[2]를 협박하여 빼앗아 자신의 아들인 벤첼에게 주면서 룩셈부르크 가문의 영토가 되었다. 이후 1415년 지기스문트가 황제선거에서 자신의 선출을 도왔던 뉘른베르크 성주 프리드리히 6세에 대한 보답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을 수여하면서 호엔촐레른 가문이 다스리기 시작했다.한편 프로이센 공국의 전신인 독일 기사단국은 카지미에시 4세 야기엘론치크와의 전쟁에서 패전하여 폴란드 왕국의 봉신국으로 굴러떨어졌고, 독일 기사단국을 계승한 프로이센 공국도 폴란드의 봉신국으로 출발했다.[3] 상술했듯 프로이센 공국은 1618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에게 계승되어 동군연합을 형성했으나 여전히 폴란드 국왕의 봉신이었는데 폴란드와 프로이센의 종주권은 대홍수로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선제후가 1657년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와 벨라우- 브롬베르크 조약을 맺으면서 청산되었다.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이 종주국이였고,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제후였다.
1701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을 돕는 조건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에 의해 왕국으로 승격되었다. 하지만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는 여전히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였던지라 프로이센 내에서의 왕(König in Preußen)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프로이센의 왕(König von Preußen) 칭호를 대외적으로도 인정받은 것은 7년 전쟁 이후의 이야기이며 이때에도 국호는 프로이센이 아닌 브란덴부르크로 불렸다. 이후 나폴레옹 전쟁 중인 1806년 신성 로마 제국은 해체되었다.
3. 합스부르크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독일 제국 황제 빌헬름 2세와 악수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 왼쪽에 서있는 사람들은 빌헬름 폰 프로이센 황태자, 빌헬름 황태손[4], 오른쪽에 서있는 사람들은 카를 1세, 오토 폰 합스부르크.
독일 역사에서 라이벌인 이미지와 다르게 프로이센의 호엔촐레른 가문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과는 사이가 나쁜 편은 아니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초대 독일왕 루돌프 1세의 즉위를 뉘른베르크 성주 프리드리히 3세가 도운 것도 그렇고, 싸운 기간보다는 오히려 협력한 기간이 더 길다.[5] 다만 합스부르크 가문과는 거의 통혼하지 않았다. 모계쪽 조상으로 일부 섞인 정도.[6] 2대 프로이센 공작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1553~1618)의 부인 클레베의 마리 엘레오노르(1573~1608)의 어머니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의 딸인게 그나마 가까웠으며,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3세가 뉘른베르크 성주 프리드리히 5세의 딸 베아트릭스와 결혼하여 알브레히트 4세를 얻었다. 다만 알브레히트 3세의 가계는 증손자인 오스트리아 공작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7]가 어린 나이에 죽으면서 대가 일찍 끊겼다.
1701년 신성 로마 제국 합스부르크 왕조의 황제 레오폴트 1세는 자신을 도운 보답으로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을 프로이센 왕국으로 승격 시켜줬다. 그 이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7년 전쟁으로 서로 싸우다가, 나폴레옹 전쟁 당시 같은 편이 되어 프랑스 제국과 맞서 싸웠고, 이후 독일 연방 내에서 '오스트리아 위주의 대독일주의냐, 프로이센 위주의 소독일주의냐'의 주도권 다툼에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이 발발했고, 여기서 프로이센이 승리하면서 오스트리아는 독일 연방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에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했고, 프로이센 주도로 성립된 독일 제국 이후에도 두 나라는 동맹으로 있었다.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면서 두 나라 다 해체된다.
4. 독일의 지방 국가들
프로이센은 개신교( 루터교회)가 국교인 국가로 같은 개신교 국가들과 혼맥을 맺었다. 반대로 가톨릭 국가들과는 혼맥을 맺은 적이 거의 없었다.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의 편에 선 헤센 선제후국, 나사우 공국, 하노버 왕국 등이 줄을 잘못 선 대가로 프로이센에게 합병당해서 멸망했다. 헤센 대공국과 작센 왕국도 프로이센 왕국에게 합병당해서 멸망할 뻔했지만 프랑스 제국과 러시아 제국의 개입으로 멸망은 피했다.
4.1. 바이에른 왕국
과거부터 대대로 프로이센과 바이에른은 라이벌 의식과 지역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현대 독일에도 지역감정이 남아있다.프로이센과 바이에른은 동등한 왕국이었으나, 1870년 독일 통일 과정에서 철저히 프로이센이 중심이 되고, 바이에른은 완전히 소외되었다. 통일 이전 바이에른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등과 함께 독일에서 가장 큰 연방국 중 하나였으며, 이후 독일 제국에서 프로이센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왕국이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가 이끈 프로이센 주도 하에 독일 통일이 이루어지면서 새 독일 제국에서의 주도권은 프로이센, 함부르크와 브레멘 등 구 북독일 연방 세력, 거기서도 특히 인구, 면적과 경제 규모가 우월한 프로이센이 잡게 되었다. 새 독일 제국의 황제, 수상, 국기 등을 비롯한 여러 국가 제도들이 프로이센의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그런데 참 오묘하게도 제국 내에서 두 번째로 큰 왕국이었던 바이에른은 독일 통일 과정에서 프로이센과 대립각을 세웠지만[8] 그리 홀대를 받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상술했듯이 독일 지역권 내에서 프로이센 왕국을 제외하고는 가장 큰 국가였기 때문에 프로이센 측도 적대시하는 쪽보다는 포섭하는 쪽을 택했기 때문. 당장 오스트리아 편을 든 북독일 연방국 중 하노버 왕국, 나사우 공국, 헤센 선제후국은 아예 망했고, 헤센 대공국과 작센 왕국도 멸망 직전까지 몰렸다.[9] 이렇게 줄 잘못 섰다가 풍비박산난 다른 왕/공국들과는 반대로 프로이센 측에서는 하노버를 멸망시키고 털어먹은 금고의 금괴를 전부 바이에른 왕국에 뇌물로 넘기면서 통합을 제안했고, 1871년 바이에른 왕국도 독일 제국에 제후국으로 가맹하게 된다. 그리고 이 뇌물로 받은 금은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2세가 건축 덕질로 탕진한다.
역사적으로 바이에른 사람들은 바이에른의 비텔스바흐 가문을 프로이센의 호엔촐레른 가문보다 유서깊다고 여겨서[10] 바이에른 사람들은 이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프로이센과 한자동맹 자유시가 개신교인 반면 바이에른은 가톨릭 국가였고, 독일 제국에서 호엔촐레른 가문이 전국을 개신교 지역으로 만들려는 작업에 착수하며 가톨릭 지역을 압박한 것도 그 반감에 더 불을 지피기는 했지만.[11]
심지어 제1차 세계 대전에 대해서도 "프로이센이 멋대로 일으킨 전쟁에 바이에른이 이끌려갔다."라고 여길 정도였으며, 이는 프로이센의 중심지 베를린에서 유지되는 중앙 정부에 대한 반발심으로 이어졌다.
이후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중도 좌파 성향의 바이마르 공화국이 세워지자, 바이에른은 강경 우익을 지원하여 나치의 발상지가 되었다.
5. 독일국
역대 독일국의 주요 지도자 |
5.1. 독일 제국
프로이센 역사상 최전성기로, 프로이센은 독일 제국이 수립된 이후에도 제국 면적의 66%, 인구의 60% 정도를 차지하여 실질적으로 제국을 지배했다. 그리고 프로이센 국왕이 독일 황제를 겸했다.
5.2. 바이마르 공화국
프로이센은 독일 제국이 멸망한 후 세워진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프로이센 자유주로 존속했다. 바이마르 공화국 내에서 프로이센 자유주의 면적은 바이마르 공화국 면적의 62%, 인구의 60% 정도를 자치하여 여전히 독일 내에서의 위상은 그대로였다. 다만 프로이센 국왕이 제국 황제를 겸임한 것과 달리 프로이센주의 총리가 공화국의 대통령을 겸하지는 않았다.
5.3. 나치 독일
요컨대 나치가 내세우는 프로이센은 전설적인 과거의 파편 중에 번쩍이는 것들을 모아놓은 물신 숭배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가공된 기억이고 정권의 가식에 대한 부적 기능을 하는 장식품 같은 것이었다.
《강철의 왕국 프로이센》881p, 크리스토퍼 클라크
겉으로 보기에는 프로이센의 유산, 특히
군국주의가
나치즘의 원동력 역할을 한 것처럼 보이며, 또 그렇게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프로이센의 해체에는 미국과 영국의 프로이센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크게 한몫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프로이센은 나치즘에 영향을 준 적이 없다. 오히려 나치가 프로이센을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우려먹은 것에 가깝다.《강철의 왕국 프로이센》881p, 크리스토퍼 클라크
일단 아돌프 히틀러와 파울 요제프 괴벨스를 포함한 나치당이 프리드리히 대왕을 숭배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각종 나치 프로파간다와 세뇌교육에 프리드리히 대왕과 나치가 말하는 '프로이센 정신'이 단골로 등장한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나치는 프로이센의 계승자를 자칭했지만 정작 진짜 프로이센의 가치와 역사에는 관심이 없었다. 나치의 프로이센 과거 읽기는 기회주의적이고 왜곡되었으며 선별적이었다.[《강철의] 예를 들어 나치는 프로이센의 군국주의적인 전통만 찬양했지, 반대로 프로이센 왕조의 주축을 담당한 기독교적인 경건주의나 계몽주의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무시했다. 나치의 아이돌인 프리드리히 대왕마저 나치들의 입맛에 맞게 심하게 뒤틀린 채로 비추어졌고, 프랑스어를 선호하며 독일 문화를 경멸했던 태도나 동성애적인 경향은 깡그리 무시했다. 다시 말하자면 나치는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개조된 '프로이센 정신'과 군국주의 전통만을 목이 터져라 외쳤지, 정작 프로이센이 군국주의 못지않게 전통적으로 중시하던 윤리, 관용, 계몽주의, 경건주의 같은 가치들은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깔아뭉갰다.
물론 프로이센 귀족들로 대변되는 독일 국방군이 처음에 나치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전쟁범죄를 저지른 것은 사실이다. 일단 전자에 대해 설명하자면 1933년 나치가 막 정권을 잡았을 때는 아직 나치가 홀로코스트 같은 추악한 본 모습을 드러내기 전이었고, 재무장이나 단치히 회랑 회복같이 (나치즘과 무관하게) 프로이센이 열광할 만한 공약을 내걸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예를 들어 전쟁 내내 나치의 전쟁범죄에 저항했던 국방군 장군인 요하네스 블라스코비츠는 1935년까지만 해도 히틀러를 독일의 위대한 지도자로 극찬한 바 있었다. 그리고 후자에 대해 설명하자면 프로이센인 및 독일 국방군이 나치의 만행에 깊게 관여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프로이센인이라고 해서 반드시 나치즘에 물들었던 건 아니었다. 나치당은 바이에른에서 발흥했으며, 나치즘에 대한 지지는 프로이센 외 독일 지역에서도 매우 깊게 뿌리 박혀 있었다. 특히 나치당이 행한 학살 범죄에 연루된 최고위급 인사들은 오스트리아와 바이에른 같은 프로이센과 대척점에 서 있어서 프로이센의 영향을 거의 안 받거나(바이에른) 아예 안 받은(오스트리아) 남독일 출신들이 많았다. 아돌프 히틀러, 하인리히 힘러, 에른스트 룀, 에른스트 칼텐브루너, 하인리히 뮐러, 헤르만 괴링,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는 모두 바이에른 및 오스트리아 출신이었고, 파울 요제프 괴벨스(라인란트)와 한스 프랑크( 바덴), 카를 브란트(알자스-로렌), 요제프 멩겔레( 울름), 알프레드 로젠베르크(러시아), 루돌프 회스(바덴) 또한 정통 프로이센 출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가장 악명 높은 나치들 중에서 프로이센 출신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마르틴 보어만, 아돌프 아이히만 등이 있긴 했지만 독일(오스트리아 포함)의 절반이나 차지하는 프로이센의 규모를 생각해보면 오히려 나치당 지도부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적었다. 즉, 프로이센이 나치에 부역한 것은 맞지만 프로이센의 군국주의나 프로이센 정신이 그 자체로 특별히 나치에 열광적인 부역을 하게 만든 건 아니었다. 오히려 프로이센은 독일 보수파의 저항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물론 프로이센이 주축이었던 독일 국방군이 나치에 열광했던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발키리 작전에 참가한 사람 중에 3분의 2 정도가 프로이센 출신, 그것도 유서 깊은 군사 귀족 출신이 대부분이었고, 상술했듯이 프로이센인이라고 딱히 나치에 더 충성했던 건 아니었다.
이토록 많은 프로이센인들이 목숨을 걸고 반나치 운동을 벌인 동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었지만[14] 그중에서도 자유와 윤리를 중시하는 프로이센 정신과 전통에 기반한 이상주의적인 동기 또한 많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 필요가 있다. 즉 군국주의로 대표되는 프로이센의 부정적인 유산들을 나치들이 악용한 건 사실이지만, 반대로 반나치 저항 인사들의 사상적인 기반도 프로이센 정신을 바탕으로 했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 당시 영국과 미국의 편견, 그리고 적잖은 숫자의 현대인들의 편견과는 달리 독일에 대한 프로이센의 영향은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이 공존했던 양면의 동전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전후 처리에서 유독 프로이센만 매우 부당한 취급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연합국 중에 프로이센에 그나마 우호적인 국가가 의외로 소련이었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소련(러시아)은 영•미와 달리 오랫동안 프로이센과 호의적인 교류를 이어왔기 때문에 프로이센 융커들로 대표되는 독일 군부와 나치당 사이의 갈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영•미 측 인사들이 1944년에 벌어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을 조롱하고 있었을 때, 오로지 소련만이 가담자들을 높게 평가했고, 프로이센의 완전 해체를 끝까지 반대했던 승전국 또한 소련이었다. 물론 이는 정치적 계산이 크게 들어갔지만[15], 나치한테 가장 끔찍하게 유린당한 나라 중 하나가 소련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매우 의미심장하다.
6. 서독, 동독
나치 독일의 패망 이후 독일은 서독과 동독으로 분단되었다. 동•서독 모두 프로이센에 대해 청산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고, 군국주의 프로이센의 영향은 상당히 사라졌다.7. 현대 독일
독일 재통일 이후 현대 독일에서 프로이센에 대한 인식은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다. 종종 네오나치 등의 정치 단체에서 법적으로 하켄크로이츠를 못 들게 하니까 독일 제국의 국기와 함께 프로이센 왕국의 국기도 들고 나오는 네오나치가 있다.[16]
[1]
작위 요구자/유럽/독일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작위 요구자도 인도 다음으로 많다.
[2]
바이에른 공작으로는 오토 5세.
[3]
초대 프로이센 공작
알브레히트는
지그문트 1세의 외조카였는데, 알브레히트의 어머니 조피아가 지그문트 1세의 누나였다.
[4]
당시에는
황태손이였으나 후에
귀천상혼을 하면서 계승권을 박탈당했고, 동생인
루이 페르디난트에게 계승권이 넘어갔다.
[5]
더 정확히는 호엔촐레른 가문이 북독일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충견(...)을 자처했다.
[6]
합스부르크 가문은 종교적 이유로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
보르본 왕조 및 그 분가,
사보이아 왕조 등 가톨릭 국가의 왕가와 주로 통혼하였고, 개신교 국가와의 통혼은 거의 없었다. 다만, 호엔촐레른 가문과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혼은
종교 개혁 이전에도 없었다. 두 왕가 간의 혼담이 논의된 사례는 있긴 한데,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손녀인 프로이센의 마리아 안나 공주와
프란츠 요제프 1세의 결혼이 추진되었다가, 마리아 안나가 이미 약혼한 상태라 혼담이 무산된 일이 있었다.
[7]
독일왕
알브레히트 2세의 아들로 보헤미아와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도 겸했다.
[8]
오스트리아를 지지했으며, 보오전쟁에서도 오스트리아 측 연합군으로 참전했다.
[9]
사실 이 두 나라도 프로이센이 완전히 병합하려 했으나 러시아와 프랑스의 개입으로 북독일 연방에 가입하는 선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특히 헤센은 강제로 북독일 연방에 가입당한 북부 오버헤센을 사실상 프로이센한테 뺏겼다.
[10]
실제로
루트비히 4세가
독일왕으로 선출될 무렵, 호엔촐레른 가문은
뉘른베르크에서 황제 거성이나 관리하고 있었던 소규모 귀족 가문이었다. 비텔스바흐 가문은 호엔촐레른 가문 이전에
브란덴부르크를 통치하기도 했고, 프로이센의 실질적인 본체였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이 호엔촐레른 가문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 것은 1415년 이후의 일이다.
[11]
다만 이 사안은 호엔촐레른 가문이 딱히 바이에른만 압박한 것은 아니어서, 프로이센 내부에서도 가톨릭이 무시못할 지분을 차지하던
라인란트,
베스트팔렌, 오버슐레지엔,
베스트프로이센,
포젠 등의 가톨릭 세력도 처지가 별다를 바 없기는 했다.
[12]
아돌프 히틀러가 병사로 칭해진 것은 그의 집권 과정 중 지지 요인으로 작용했던 '
제1차 세계 대전의 전쟁 영웅'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강철의]
왕국 프로이센》880p, 크리스토퍼 클라크.
[14]
아르투어 네베 같은 학살자•기회주의자들도 일부 가담했다.
[15]
프로이센을 이용해서 통일 독일에 대한 주도권을 잡으려는 속셈이었다.
[16]
그래서인지
2022년 독일 쿠데타 모의도 이런 생각의 기조로 시도했다는 의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