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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4 18:46:29

프랭크 램파드/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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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램파드/커리어.jpg
프랭크 램파드의 선수시절 활약상을 서술하는 문서이다.
커리어 통산 기록: 1021경기 303골 169도움[1]

2. 클럽 경력

3.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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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햄 유스 출신으로, 아버지 프랭크 램파드 시니어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레전드 풀백 출신으로 코치를 맡고 있었으며, 이모부 역시 웨스트햄 선수 출신으로 감독까지 맡고 있는 해리 레드냅[2]이며 처조카인 제이미 레드냅은 잉글랜드 국가대표와 리버풀 FC에서 뛰었었다.

그러나 이렇게 성골에 가까운 출신이 팀이 부진하는 시절에는 빽으로 기용된다는 의구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했고, 경기에서 질 때마다 램파드는 팬들에게 혹독하게 까이고 빛을 보지 못했다. 결국 이모부와 아버지가 경질당하면서 본인도 짐을 싸게 되고, 공교롭게도 런던에서의 라이벌인 첼시가 2001년에 1,100만 파운드의 가격으로 램파드를 영입하게 된다. 당시에는 거품이 낀 가격이었다는 평이 대세로, 웨스트햄 입장에서는 아쉽지 않게 처분한 셈이었다. 그러나 이후 웨스트햄 팬들은 이 결정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레드냅과 램파드의 이모부, 아버지의 사이는 완전히 갈라지게 된다.

4. 첼시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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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8경기 211골 142도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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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시 역대 최다 득점자
첼시 역대 최다 출장 4위[4]

흔히 국내 팬들이 램반장이라 불러 착각하기 쉬운데, 어디까지나 램파드는 부주장이고 존 테리가 공식적 캡틴이다.[5]

5. 맨체스터 시티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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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부터 MLS가 시작되므로 시즌 전까지 맨체스터 시티로 임대된 줄 알았지만 맨시티로 이적하였다.[6] 홈그로운 충족과 동시에 야야 투레의 포지션을 백업해준다는 것이 맨시티에 크게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다만 맨시티의 첼시전에서는 출전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이후 9월 13일 아스날 FC와의 프리미어리그 4라운드 원정 경기에서 선발 출전으로 맨시티 데뷔전을 치렀는데 전반 45분 동안 눈에 띄는 활약은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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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시티의 유니폼을 입고 에티하드 스타디움에서 자신의 친정팀을 상대로 동점골을 넣은 램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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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가 끝난 후, 오랜 동료였던 디디에 드록바와의 포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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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팀 팬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박수[7]
9월 21일 첼시와의 프리미어리그 5라운드 홈 경기에 77분 교체 출전하여 동점골을 기록했다. 득점 후 세레머니를 하지 않으며 진정한 첼시 레전드이자 프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파블로 사발레타가 퇴장당해 램파드가 뛴 시간 동안 한 명이 부족했던 맨체스터 시티는 그의 조율 능력 앞에서 이게 한 명이 부족한 게 맞는가 할 정도로 대등한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아이러니한 건 웨스트햄에서 첼시로 이적했을때 첫 골을 넣은 날짜와 맨체스터 시티로 이적해서 첫 골을 넣은 날짜가 똑같다! 링크 여담으로, 이 골로 램파드는 EPL 모든 팀 상대로 골을 기록한 선수가 되었다.
파일:Lampard Sheffield Goal(14-15).gif
파일:Lampard Sheffield Goal(14-15)2.gif
9월 25일 캐피털 원 컵 32강전인 2부리그 6위 팀인 셰필드와의 경기에 선발 출전했다! 풀타임 또한 소화해 체력에 아무 문제가 없음을 증명했다! 맨시티의 대승에 크게 공헌하여 2골 1도움의 공격포인트를 기록했으며[8] 중원에서 공수조율 및 볼배급을 혼자서 캐리하는 저력을 보였고 MOM으로 선정되었다.

한편 첼시는 2부리그 21위인 볼턴을 상대로 홈에서 가까스로 이겨 맨시티와 큰 대비를 보였다.

9월 27일 또 골을 넣었다! 헐 시티 AFC 전에서 후반 교체 투입되어 사발레타의 크로스를 원터치로 골까지 만들어냈다! 클래스는 영원하다. 맨시티 커뮤니티에선 램파드를 맨시티의 레전드로 대우하는 등 매우 분위기가 좋았다.

토트넘 전에서는 부상으로 실려가는 중에서도 2어시스트를 하는 위엄을 보여줬다.

11월 30일 프리미어리그 13라운드 경기에서 사우스햄튼 FC를 만나서는 교체 출전해서 맹활약했다. 25분정도 뛰었는데 1:0으로 이기고 있고, 엘리아킹 망갈라가 퇴장당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지능적인 중거리슛으로 쐐기골을 넣고, 이후에도 모르간 슈네데를랭의 공백을 공략하며 맹활약, 가엘 클리시의 세번째 골에서도 빌드업을 담당했다.

그야말로 레전드 클래스가 무엇인지 보여주며 하늘색 피의 램파드로 활약중이다. 동영상 맨시티에서 활약하는 걸 아쉬워하는 첼시 팬들의 댓글이 많이 보인다.

맨시티에서 램파드에게 임대 연장 계약을 제시했다고 한다! 그리고 램파드도 EPL 잔류에 긍정적인 반응이고, 야야 투레의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출전에 따른 공백을 메울 수 있어 양쪽 모두 긍정적으로 보인다. 결국 2월까지 임대 계약을 연장한 것으로 보인다.

2014년 12월 14일, 레스터 시티와의 경기에선 무려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결승골을 터뜨렸다. 이 골로 티에리 앙리와 프리미어리그 통산 득점 동률을 이루며 이 부분 공동 4위로 올라섰다. 12월 13일까지 12경기 6골.

2015년 1월 1일, 맨체스터 시티 공식 홈페이지에 시즌 말까지 계약을 연장한다는 오피셜이 떴다.

2015년 1월 2일, 선더랜드전에서 결승골을 넣으며 시즌 7번째 골을 넣었다. 덤으로 EPL 역대 득점 단독 4위로 올라섰다(EPL 통산 176골).

첼시가 당해 시즌 엄청난 활약을 보여준 램파드와 재계약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논란이 되고 있는데, 사실 당시 상황상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당시 중원을 개편해야했던 첼시 입장에서 램파드를 데리고 있는 것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기 때문(고연령, 고액주급). 램파드도 첼시의 상황과 자신의 입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재계약에 매달리지 않고 이적을 선택한 것이다.[9][10] 그 결과 첼시는 네마냐 마티치 세스크 파브레가스로 완벽하게 중원을 개편할 수 있었고, 램파드는 빅리그+돈+출전이 보장되는 맨시티 임대를 선택하여 축구선수로서의 말년을 좋게 보내게 되었다. 양쪽 모두 윈윈한 셈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따로 있었는데... 2014년 12월 31일 부로 종료되는 임대 연장을 할 경우 임대 계약서를 다시 작성하고 EPL 사무국 측에 선수 로스터를 재등록하는 절차가 필요하기에 2015년 첫 경기인 선더랜드와의 경기에는 출전이 불가능해야 정상이지만, 램파드의 출전이 이루어지면서 수많은 뒷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온스타인과 같은 영국의 주요 스포츠 기자들의 취재 결과 진상이 밝혀지는데 램파드는 뉴욕 시티와 계약한 적이 없으며, 맨체스터 시티와의 1년 계약을 한 것이다. - 뒤통수-

전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11]
* 맨시티가 당초 언론에 발표한 내용은 램파드를 뉴욕 시티에서 임대 영입했다는 것.
* 실제 계약은 임대가 아니라 맨시티와 램파드 간에 6개월 보장, 6개월 연장 옵션 계약임. 맨시티가 12월 31일부로 계약을 파기할 수 있는 조건으로 최소 6개월, 최대 1년의 단기계약을 맺음. 맨시티가 12월 31일에 계약을 파기하기로 결정한다면 직후 1월 1일 뉴욕 시티와 사인하기로 상호 합의.
* 맨시티가 뉴욕 시티에서 임대한 것으로 발표를 한 이유는, 첫 번째로 뉴욕 시티가 주급을 지급하는 형식의 임대로 발표하여 맨시티의 페이롤을 절약해 FFP를 피해 가기 위한 것이었음.
* 맨시티가 뉴욕 시티에서 임대한 것으로 발표를 한 두번째 이유는, 당시 은퇴 수순을 밟고 있던 램파드가 맨시티의 쟁쟁한 선수진들 가운데 주전을 차지할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고, 따라서 램파드의 활약이 저조할 경우 정말로 12월 31일 부로 계약을 파기하고 뉴욕 시티와 램파드가 1월 1일에 새로운 계약서를 작성하고, "자연스레 임대 복귀"하는 것 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었음. 실제로 당시 맨시티 수뇌부는 램파드와 6개월 후 계약을 파기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판단함.
* 램파드는 첼시가 아닌 잉글랜드 팀에서 뛸 수 있는 자연스런 상황과 명분, 프리미어리그 커리어를 연장하는 실리를 챙길 수 있으며, 무엇보다 6개월 후 맨시티가 정말로 계약을 파기하여 뉴욕 시티로 넘어가게 되었을 때 체면을 구기지 않고 단지 임대 복귀라는 자연스러운 상황을 연출할 수 있었음.
* 임대 연장의 경우 계약서를 새로 쓰고 스쿼드 등록 절차를 거처야 하기에 선더랜드전에 출전할 수 없음.
* 그러나 램파드와 1년 계약에서 파기조항만 삭제하는 것이기에 절차 없이 바로 선더랜드전 출전 가능.
* 램파드는 뉴욕 시티에 입단하지 않은 상태이며 맨시티와의 계약이 파기되는 1월 1일에 사인하기로 합의만 본 상태.
* MLS는 3월에 개막하기에 램파드의 이적만 믿고 시즌권을 구입한 뉴욕 시티 팬들이 피해자. 뉴욕 시티는 상당한 상업적 이익을 챙김.

뉴욕 시티 팬들은 당연히 분노했고, 일부 첼시 팬들도 배신감을 느꼈다. EPL 사무국 측에서 컨펌을 해주면서 루머가 사실임이 드러났다. 기사 뉴욕 시티 팬들은 우리가 무슨 맨시티의 하청구단이냐 라면서 분노했고, 뉴욕 시티와 공동으로 창단 작업에 착수한 뉴욕 양키스까지 영 좋지 않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 기사 이미 티에리 앙리등을 통해 인지도를 쌓은 뉴욕 레드 불스가 터줏대감으로 있기에 뉴욕 시티는 창단 과정부터 잡음을 드러내며 인심을 잃었다. 뒤늦게 유럽 리그가 끝나는 7월 부터 뉴욕 시티에서 뛴다고 발표했지만 이미 성난 팬들의 마음을 진정시키기엔 늦은걸로 보인다. 기사 첼시 팬들 역시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다. 클럽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레전드 중 한명이자, 엄청난 사랑을 받던 선수가 이런 식으로 부메랑이 되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첼시와 뉴욕 시티 팬 모두에게 공분을 사게 된 램파드에게는 결과적으로 악수가 된 듯 하다.

이런 상황에서 스탬포드 브릿지에서 벌어지는 프리미어리그 23라운드 첼시 대 맨시티 경기가 주목받았다. 페예그리니 감독이 첼시 상대로 또 램파드를 출전시키는 첼시 팬들을 확인사살하는강수를 둘지, 램파드에 대해 배신감과 애정을 동시에 느끼고 있는 첼시 홈팬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맨시티 홈에서 램파드가 첼시를 상대로 동점골을 넣은 경기에서는 첼시 원정팬들이 기립박수를 쳐줬지만 사건이 심각해졌다. 맨시티와의 경기를 앞두고 첼시 측은 램파드를 위한 식전행사는 없을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과거에 발락이나 드록바가 타팀 소속 선수로 스탬포드 브릿지에 돌아왔을때랑은 대비되는 부분이다.[12] 첼시 팬들은 한때 구단의 레전드가 완전한 적이 된것에 대해 많이 씁쓸할 듯하다.

결국 23라운드 첼시와의 홈경기에 교체 출전했는데 야유와 박수 모두가 램파드를 맞이해줬다. 그래도 터치라인에서 몸풀때는 터치라인 바로 옆 구역의 팬들 대부분이 박수를 쳐준 것을 봤을때 비록 통수맞기는 했어도 팬들의 램파드에 대한 애정은 여전해 보였다. 물론 '램파드 배신자 꺼져라!!'같은 피켓을 들고있던 팬들도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논란과 잡음들이 있었지만 15년 리버풀과의 첼시의 홈경기를 관전하며 충격적으로 패배할 때도 근심과 걱정하는 듯한 모습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기에 첼시에 대한 애정은 여전히 깊다고 볼수 있다.
파일:Lampard Southampton Goal(14-15).gif
시즌 극후반에는 딱히 엄청난 폼을 보이지는 않았으나 투레의 폼이 결정적으로 떨어지며 상당히 자주 출전하게 되었고, 결국 38라운드 마지막 경기에는 주장 완장을 차고 결승골을 넣는 활약을 보이며 아름다운 이별을 하게 되었다.

이후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램파드는 뉴욕 시티도 아니고 맨시티도 아닌, CFG[13]과 계약을 맺은 것이라고 한다. 어찌 되었건 해당 시즌에 뉴욕 시티에서 뛸 예정이 없던 것은 변함없다. 사태가 심각해진 것을 램파드와 CFG 측도 인지했는지 허겁지겁 뉴욕 시티와 램파드의 정식 계약을 체결을 발표했다. 결과적으로는 더이상 맨시티에 뛰지 않고 2015년 7월부터 뉴욕 시티에 합류하게 되었다.

2014/15 시즌: 38경기(선발 13경기) 8골 3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32 10 22 6 1
챔피언스 리그 3 1 2 0 0
FA컵 2 1 1 0 0
EFL컵 1 1 0 2 2
합계 38 13 25 8 3

6. 뉴욕 시티 FC

파일:Frank LampardB.jpg
2015년 여름부터는 드디어 뉴욕 시티에서 정식으로 뛰게 되어 시티 풋볼과의 악연을 드디어 끊어내었다.

입단 하자마자 공식 캠프에서 종아리 부상을 당했다. 당초 계획으로는 7월 13일 토론토 FC와의 홈경기에서 MLS 데뷔전을 치르는 것이었으나 무산되었고 7월 18일 뉴 잉글랜드 레볼루션과의 경기에도 출전하지 못했다. 7월 26일 안드레아 피를로와 함께 올랜도 시티를 상대로 홈에서 MLS 데뷔를 치를 확률이 높아졌다. 그리고 MLS에서는 1경기도 뛰지 못한 주제에 2015 MLS 올스타에 선정되어 7월 29일 토트넘 홋스퍼 FC를 상대로 출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부상 회복이 늦어지며 MLS 데뷔전은 물론이고 올스타전 출전도 무산되었다. 언제쯤 회복이 가능한지도 언론 보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장기화 될 수 있다. 그러나 8월 2일 몬트리올 임팩트와의 홈 경기에서 후반전 교체 출전으로 홈 팬들의 환호를 받으며 MLS에 데뷔했다. 뉴욕 시티는 8월에 와서야 다비드 비야-안드레아 피를로-프랑크 램파드라는 화려한 라인업을 드디어 가동하게 되었지만... 몬트리올과의 경기에선 2:3으로 패배. 8월 10일 경기에 뉴욕 레드 불스와의 더비 매치에 주전으로 나왔지만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며 후반에 교체 당했고 그 뒤에 부상을 당해 8월 14일 DC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는 불참했다. 하지만 램파드의 불참덕에 오히려 팀의 경기력은 폭풍 상승하여 3:1 완승을 거두었다.

8월 30일 콜럼버스 크루와의 경기에서 약 20일만에 복귀하였으나 별 다른 활약을 보여주지도 못하고 60분 교체되었다. 37살이라는 나이와 2014/15시즌 EPL을 풀로 뛰고 바로 MLS에 합류한 점 때문인지 부쩍 체력적으로 밀리는 모습을 보여주며 MLS 선수들에게 신체적으로 밀리는 모습을 보여줬다.

후반부에 그럭저럭 활약하며 10경기 출전 3득점으로 시즌을 마무리 했다. 하지만 이미 팬들에겐 이적 파동으로 한 차례 찍힌 데다 썩 좋지 않는 모습을 보인 탓인지 골닷컴이 선정한 2015 MLS 급료 도둑 베스트 11에 메인으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2016시즌 리그 19경기 12골을 기록하며 녹슬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2015시즌 10경기, 2016시즌은 19경기 출전에 그쳐 한화로 연봉 70억을 수령하는 선수치고는 2시즌 합쳐 리그 절반 가량 나오질 못해 먹튀소리를 면치 못할 상황이다.

2016년 8월 14일, MLS 23라운드 콜럼버스 크루 SC전에서 전반 41분 선제골을 넣으면서, 통산 300골 고지를 밟았다. 기사[14]

시즌 종료 이후 뉴욕 시티와 재계약 없이 자유 계약으로 방출되었으며, 겨울 이적 시장에서 새로운 팀을 알아볼 것으로 보였으나 결국 2017년 2월 2일, 램파드는 21년 간의 화려했던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겠다는 발표와 함께 현역 은퇴를 공식 선언했다.

7. 국가대표 경력

파일:external/www3.pictures.zimbio.com/Frank+Lampard+England+v+Ireland+kcJ0LTPX_kgl.jpg
잉글랜드 국가대표만 가면 죽을 쑤기 때문에[15] 역대 잉글랜드 감독들이 매번 스티븐 제라드와 함께 효용성에 대해 골치 아파하는 선수.슈팅대비 득점수만 봐도 문제점이 나오긴한다.

이러한 현상은 첼시와 대표팀의 전술적 차이에서도 기인하는 바가 있고, 램파드 개인의 성향에도 그 원인이 있다.

램파드는 체력, 활동량, 중거리 슈팅력, 높은 곳에서의 위치선정 능력과 그에 따른 결정력, 뛰어난 피지컬, 빠른 사고력 등이 장점인 선수다. 이를 바탕으로 원터치 투터치 패스나 슈팅 등 다이나믹한 공격전개에는 출중하다. 첼시의 허리진은 전적으로 램파드의 이러한 공격적 장점을 극대화하는 데 맞춰져 있다. 에시앙, 마케렐레 등의 허리진영은 주로 수비 위주의 플레이를 하며 램파드를 지원하고, 램파드의 패스를 받아먹을 좌우 날개들은 빠르고, 드리블과 컷 인, 즉 사이드에서 중앙으로 치고 들어가는 플레이나 공간 따먹기에 능숙하다. 공격진도 드록바 등 힘과 체격을 겸비한 공격수가 일선에서 수비수들을 견제하며 램파드를 위한 공간을 지원한다. 이 때문에 첼시가 2000년대 후반 전유럽을 호령하던 바르셀로나의 대항마로 여겨졌던 것. [16]

반면 잉글랜드 대표팀에서는 이러한 전술을 활용하기가 대단히 애매하다. 제라드 램파드 논쟁에서 문제가 되듯 제라드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 사실 제라드가 멀티플레이어인 만큼 사이드나 수비형 미드필더로 배치하면 되기 때문에 최대한 활용 못하는 것까진 괜찮다.

굉장히 복합적인 문제인데 클럽에선 주로 4231이나 433을 쓰던 선수들이 대표팀에서 442로 전환하고, 최전방은 결정력이 그다지인 떡대 - 결정력이 좋지만 키 작은 친구들. 그런데 날개는 보통 크로스 셔틀 혹은 창의적이지만 느리다거나 피지컬이 안 좋다거나 해서 433에 어울리는 날개, 거기다 드리블로 활로를 뚫어줄 선수는 부상으로 맛이 가서 잘 보이지 않는다.

램파드는 첼시에서처럼 투터치 역습 등 최대한 빠르게 합리적으로 전개해야 될 때는 무섭지만 돌파구가 일목요연하게 보이지 않는 상황에선 공을 효율적으로 돌리거나 선수들 재배치를 시키거나 하는데는 좀 부족한지라 이제 중원에서 개싸움이나 하게된다. 이래서 가레스 베리 등으로 실험하고 하는 것이다.

2006 FIFA 월드컵 독일/8강전에선 페널티 킥에 그렇게 강하면서도 포르투갈과의 승부차기에서 첫 번째 키커로 나섰다가 히카르두의 선방에 막혀 버려 패배의 한 축을 담당했다.
파일:램파드노골.gif
그리고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16강에서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전반에는 그가 찬 중거리슛이 누가 봐도 명백히 골라인 안쪽에 떨어졌으나 주심은 이를 골로 인정하지 않았고 [17], 후반에는 프리킥을 찼는데 골포스트를 맞고 나갔다. 이쯤되면 그저 지못미. 그리고 팀은 앙숙이자 라이벌인 독일에 4:1로 관광당하며 16강에서 떨어졌다. 이 상황은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결승전 제프 허스트의 골논란과 놀랄만큼 유사한 상황이여서 44년만에 퉁쳤다는 드립이 흥했다.

이 오심은 다음 월드컵부터 심판들에게 골라인을 넘기면 반응하는 센서가 부착된 손목시계를 차는 원인이 되었다.

유로 2012에는 허벅지 부상으로 불참했다.

자신의 3번째 월드컵인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에서는 이탈리아전, 우루과이전은 교체 명단에 있었으나 출전하지 않았고 팀은 2패를 기록, 일찌감치 탈락이 확정되어버렸다. 마지막 코스타리카전에서는 출전했으나 결국 무승부를 기록했다. 월드컵을 마친 뒤 대표팀 은퇴를 발표했다.

[1] 소속팀+국가대표 통산 [2] 이후 포츠머스 FC 사우스햄튼 FC, 토트넘 홋스퍼 FC 등을 거쳐서 퀸즈 파크 레인저스 FC 감독을 하게 된다. [3] 첼시 역대 최다 득점자 [4] 648경기 [5] 그렇기에 램반장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물론 존 테리와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을 리더십과 카리스마가 있으나 팀의 주장인 테리와의 차이를 두기 위해 애칭인 램반장을 달아주었다. [6] 정확히는 MLS는 3월에서 11월까지 진행되므로 2014년 9월 당시 리그는 진행중이었다. 다만, 뉴욕 시티가 새롭게 리그에 참여하기 때문에 2015년 3월 새 시즌부터 경기를 하는 것이다. [7] 첼시 팬들도 그에게 기립박수로 맞이해줬다 [8] 2경기 연속골, 이번시즌 총스텟은 3경기 3골 1도움. 경기당 1골 수준이다. [9] 보내는 과정에서 잡음이 있었던것도 아니고 첼시에서도 최대한 레전드 대우를 해줬으며 램파드도 프로답게 자신의 재계약 불발을 받아들였다. [10] 프로의 세계에서 구단과 선수가 합의점을 찾지 못해서 계약을 하지 않는것은 당연한 것이다. 상호 합의하에 재계약을 하지 않은 것인데 의리없다며 첼시나 램파드를 비난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다. [11] 가디언지가 가장 먼저 기사화했다. [12] 물론 깔끔하지 못한 이적으로 첼시 팬들이 많은 배신감을 느꼈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이다. 그리고 설령 이적 스캔들이 없었다 하더라도 첼시와 맨시티는 치열한 선두 경쟁중이기 때문에 현재 라이벌팀 소속인 레전드를 환영하는 행사는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13] 시티 풋볼 그룹: 맨시티, 뉴욕 시티, 맬버른 시티 소유 그룹. [14] 국가대표, 클럽 합산 [15] 첼시에서 활약상에 비해 국대에서는 조금 떨어지는 데다 2006 독일 월드컵에서 25슈팅 무득점을 하는 바람에 이러한 고정관념이 생겼다.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33슈팅 무득점으로 타이 기록을 세웠으며, 독일과의 16강전이 남아 있기 때문에 최고 기록 경신도 넘볼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독일전에서 슛에 영혼이 실리지 않아서 득점 인정이 안되고 멋진 프리킥이 골대를 맞고 나오는 등의 불행을 겪으며 최고기록(39슈팅 무득점)을 수립하였다. [16] 그러나 이러한 전술도 에시앙이 장기 부상으로 인해 서서히 폼이 떨어지면서 수비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램파드의 포지션도 애매하지기 시작했다. [17] BBC에서 남아공 월드컵의 쇼킹한 순간 top 50을 선정했는데 이 오심을 1위로 선정하였다. 사실 그럴만한 것이 월드컵 시작전에 골라인 판독기술을 도입하자는 여론이 거셌는데 FIFA(특히 제프 블라터 회장)에서 묵살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사건으로 인해서 FIFA도 생각을 바꿨는지 골라인 판독기술이 본격적으로 실현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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