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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5 20:24:50

요한 크루이프 vs 프란츠 베켄바워

파일:요한 크루이프 & 프란츠 베켄바워.jpg
파일:말년의 요한 크루이프와 프란츠 베켄바워.jpg

1. 개요2. 상세3. 두 인물의 선수 시절 비교
3.1. 대회 기록
3.1.1. 요한 크루이프3.1.2. 프란츠 베켄바워
3.2. 개인 수상
3.2.1. 요한 크루이프3.2.2. 프란츠 베켄바워
4. 두 인물의 감독 시절 비교
4.1. 대회 기록
4.1.1. 요한 크루이프4.1.2. 프란츠 베켄바워
4.2. 개인 성적
4.2.1. 요한 크루이프4.2.2. 프란츠 베켄바워
5. 평가6. 기타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축구 역사상 최고의 라이벌 중 하나로, 요한 크루이프 프란츠 베켄바워 두 선수 모두 축구 역대 TOP 10 반열에 꼽히는 전설들이다. 둘의 경쟁 관계(rivalry)는 흔히 메호대전보다도 앞에 놓이는 경우가 많았다. 선수 뿐 아니라 감독까지 지내며[1] 국제 대회에서 미친 영향력이 더 뛰어났기 때문. 하지만 두 전설을 잘 모를 수 밖에 없는 젊은 축구팬들이 많이 생김에 따라 근래에는 다른 추세를 보이기도 한다.

세계적 라이벌은 어느 분야에서 마찬가지지만 축구계에서도 드물다. 20세기 축구의 아이콘이었던 펠레는 동시대에 가린샤, 에우제비우, 찰튼이 있었지만 독보적인 1인자 취급을 받았고 마라도나 역시 플라티니, 마테우스, 반 바스텐, 루메니게, 지쿠, 굴리트 등과 라이벌로 꼽혔지만 전부 역대급 고점을 지닌 마라도나와 비교하면 한 수 아래라는 평가를 받았다. 유명한 사례로 한정해 역대 최고를 다툰 펠레 vs 디에고 마라도나를 꼽지만 활동 시기가 다르기에 상술된 바와 그 항목이 다르다. 그 외에도 지네딘 지단 vs 호나우두 정도만이 추가적으로 언급될 만한 수준이긴 하다. 다른 라이벌들은 아무래도 무게감이 떨어진다. 2010년대 이후부터는 메호대전이 전세계적으로 축구계의 이슈가 되어 요한 크루이프 vs 프란츠 베켄바워에 이어 동시기 축구 라이벌 계보를 이었다.

크루이프와 베켄바워는 나이 차이도 2살에 불과하고, 시대를 대표하는 선수들이었던데다 특히 기량이 만개했던 20대 중후반에 1974 서독 월드컵 결승전에서 직접 각 대표팀에서 최고의 기량을 자랑하던 시기에 대결했다라는 상징성이 더해졌기 때문에 앞으로도 이 둘의 라이벌리를 뛰어넘을 만한 것이 나오기는 쉽지 않을 듯 하다. 메호대전의 경우 월드컵 결승전[2]은커녕 챔스 결승전에서 만난 것도 2008-09 시즌 한 번인데, 이 때는 호날두 맨유 시절이었고 메시는 이제 막 전성기를 시작하는 수준이었다. 다만 메호대전은 둘이 9년이나 같은 리그에 있었기 때문에 대결횟수 자체는 리그가 달랐던 크베대전보다 훨씬 많았고 포지션도 둘 다 공격수라 직관적으로 비교하기 쉬웠다.

크루이프는 2016년 3월 24일, 베켄바워는 2024년 1월 7일에 각각 세상을 떠나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두 레전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 상세

펠레라는 불세출의 전설이 지나간 1970 멕시코 월드컵 이후의 1970년대 축구계는 두 말할 필요없이 요한 크루이프 vs 프란츠 베켄바워의 시대였다. 수비수 공격수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해 보이는 포지션의 두 선수가 당시는 물론 현대에 이르기까지 축구계 전대미문의 라이벌이라 불리는 까닭은, 둘의 커리어와 그 업적이 다른 듯하면서도 너무나 비슷한 측면이 있었고 결정적인 원인은 베켄바워가 사실 전문 수비수가 아니라 거의 프리롤에 가까운 이른바 리베로라는 포지션이었기 때문이다. 크루이프 역시 단순 공격수가 아니라 남아 있는 경기 영상을 찾아보면 미드필더로 착각할 정도로 자유롭게 경기장을 누볐다. 명목상으로는 공격수 vs 수비수지만 실제 경기는 둘 다 자유롭게 필드를 누비며 팀을 진두지휘하는 사령관끼리의 대결이었고, 차이점이 있다면 지휘본부를 후방에 차린 베켄바워와 전방에 차린 크루이프 이게 차이점이었다.

기선을 먼저 제압한 쪽은 요한 크루이프였다. 아약스 소속으로 유러피언컵 3연패(1971, 72, 73)를 진두지휘했고, 베켄바워는 이에 바통 터치를 하듯 바이에른 뮌헨 소속으로 유러피언컵 3연패(1974, 75, 76)를 똑같이 일구어냈다. 그리고 개인 수상으로 보면 크루이프는 발롱도르 3회, 베켄바워는 2회를 수상했다.

‘토탈 풋볼의 구현자’ 요한 크루이프와 '리베로의 창시자' 프란츠 베켄바워라는 굴지의 축구선수 둘의 라이벌 구도가 정점을 찍은 것이 바로 1974 서독 월드컵이다. 이 때 이미 둘은 각자 아약스와 뮌헨의 챔스 3연패를 일궈내며 세계 축구를 양분하는 두 축으로 평가받고 있었는데, 1971, 1973년 발롱도르는 크루이프가, 1972년 발롱도르는 베켄바워가 받은 상태에서 월드컵 결승전이라는 궁극의 무대에서 과연 누가 세계 축구계의 1인자인지 결판을 내게 된다.

토탈 풋볼이라는 유례없는, 축구판의 혁명이라고까지 불린 전술과 그를 구현해 내는 전력으로 결승전까지 전승으로 달려온 크루이프의 네덜란드를 외나무다리에서 제압한 것은 바로 프란츠 베켄바워의 서독이었다. 그러나 대회 최고의 선수로는 대부분이 크루이프를 뽑았다. 우승은 베켄바워가 가져갔으나 선수로서의 평가는 크루이프가 좀 더 높은 측면이 있었기에 1974년 발롱도르는 크루이프가 가져간다. 결승전 이후에도 선수 평가 측면에서 한쪽의 승리로 종결 나긴 커녕 우승은 베켄바워, MVP는 크루이프라는 다소 애매한 결과가 나오자 둘의 대결은 결승 이후에 결판이 나긴 커녕 오히려 더욱 흥했고 베켄바워는 크루이프의 발롱도르 수상에 이와 같은 인터뷰를 남긴다.
“크루이프가 나보다 나은 선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월드컵을 제패했다.”

실제로 프란츠 베켄바워는 1974년 바이에른 뮌헨 주장으로 분데스리가 우승, 유러피언컵(챔스) 우승 그리고 독일 대표팀 주장으로 월드컵 우승이라는 역사상 유일한 전대미문의 업적을 달성했지만 물을 먹은 것이었다.[3] 프란츠 베켄바워의 탄식에도 불구하고 요한 크루이프가 발롱도르를 차지했던 것은, 프란츠 베켄바워는 그 당시 기존에 있던 최고의 전술과 시스템에서 최고의 선수였던 반면, 요한 크루이프는 아예 새로운 시대를 여는 전술, 토탈 풋볼의 아이콘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크루이프 역시 월드클래스 동료가 있었지만 아무래도 게르트 뮐러와 제프 마이어를 데리고 있던 베켄바워에 비하면 동료 수준이 비교적 낮았던 탓에[4] 여기서 가산점을 얻어간 측면도 있다. 아무튼 저 토탈 풋볼의 등장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가는 당시 시대의 영상의 파편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극단적으로 끌어올린 오프사이드 라인과, 그것의 완벽한 제어. 촘촘한 공수의 간격, 그리고 공격수의 적극적인 수비가담과 수비수의 적극적인 공격가담 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절에 상대 아르헨 공격진들이 우르르 오프사이드 트랩에 걸리는 모습이 당시 선수들과 기자들. 그리고 축구 팬들에게 얼마나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을지는 두말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가히 축구 전술사의 BC/AD를 가른 대회였고 그 중심에 있던건 단연코 크루이프였다. 결국 베켄바워는 크루이프를 인정하기도 했지만 1974년 당시에는 리그, 챔스, 월드컵까지 모든 메이저 대회를 제패하고도 발롱도르를 받지 못한 것에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

또한 이 둘의 또 다른 공통점 하나가 있다면 바로 선수로서도 감독으로서도 성공한 대표적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베켄바워는 1984년부터 1990년까지 서독 대표팀 감독을 역임하면서 1986 멕시코 월드컵 준우승과 유로 1988 4강, 1990 이탈리아 월드컵 우승이라는 업적을 조국에 남겼고,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감독으로 디비지옹 1 우승과 바이에른 뮌헨 감독으로 분데스리가 UEFA컵 우승을 달성했다.[5] 그리고 크루이프는 아약스 감독으로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우승을 기록한 후, 1988년부터 1996년까지 바르셀로나 감독으로 드림팀 1기를 이끌며 라리가 4연패,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우승, 구단 최초의 유러피언컵 우승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6]을 달성하고 구단 유스 시스템까지 확립하는 업적을 구단에 남겼다. 두 사람이 서로 맡은게 각각 국가대표팀, 클럽팀이라는 차이점은 존재하지만 이후 성공적으로 감독직을 맡았고 거기에 두 사람 각각 국가대표팀과 클럽팀으로서 들어올릴 수 있는 최정상의 트로피( FIFA 월드컵 트로피, 빅 이어)를 차지했다는 것도 주목할 점.[7] 흔히 역대 순위에 꼽히는 선수들 중 아직 현역인 리오넬 메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제외하면 감독으로도 성공한 케이스는 이 둘을 제외하고는 지네딘 지단 정도밖에는 없다.

최고의 라이벌이었던 두 사람이었지만 경기장 밖에서는 상당히 친하게 지냈다. 2016년 크루이프가 사망했을때 베켄바워가 “그의 죽음에 상당히 충격 받았다. 그는 내 좋은 친구였을 뿐만 아니라 형제나 다름없었다”라고 애도했을 정도. 크루이프 역시 2015년 베켄바워의 70세 생일때 독일의 잡지 11Freunde와의 인터뷰에서 베켄바워와의 우정을 언급했는데, “베켄바워와 정확히 언제 친구가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서로 상대하면서 자연스럽게 큰 존중을 갖게 되었고 우정도 생겼다. 그가 살고 있던 오스트리아의 키츠뷜에서 나는 스키를 자주 즐기러 갔기에 그와 만날 기회가 많았고, 그래서 같이 운동도 즐기고 저녁도 함께 했다. 해가 지나면 지날수록 우리의 우정도 더욱 강해졌다”라고 언급했다. 그리고 “우리는 정상에 있는 자의 삶이 얼마나 고독한지 알고 있다”라는 말도 했다. # 크루이프가 자신의 축구관에 반(反)하는 인물에겐 엄청난 극딜세례를 퍼붓는 걸로 유명하단 점을 생각해보면 진심으로 베켄바워를 리스펙트했다는 점을 느낄수 있다.[8]

크루이프는 2016년 3월 24일, 베켄바워는 2024년 1월 7일에 각각 세상을 떠나면서 이 라이벌리는 펠레 vs 마라도나와 함께 축구사의 한 페이지로 남게 되었다.

3. 두 인물의 선수 시절 비교

3.1. 대회 기록

3.1.1. 요한 크루이프

3.1.2. 프란츠 베켄바워

3.2. 개인 수상

3.2.1. 요한 크루이프

3.2.2. 프란츠 베켄바워

4. 두 인물의 감독 시절 비교

4.1. 대회 기록

4.1.1. 요한 크루이프

4.1.2. 프란츠 베켄바워

4.2. 개인 성적

4.2.1. 요한 크루이프

4.2.2. 프란츠 베켄바워

5. 평가

위에서 베켄바워가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세간의 평가는 크루이프를 반수 정도는 위로 친다. 각종 해외 전문 매체들의 평가에서도 대개 크루이프가 베켄바워보다 조금 더 위인 경우가 많다. 이는 토탈 풋볼이라는 혁명적 전술이 당대에 준 충격, 그리고 후대에 가져온 영향력이 어마어마했고[16][17] 현대 축구가 그 유산에서 벗어나지 못한 반면 베켄바워의 리베로 전술은 현대 축구에서는 거의 사장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켄바워에게는 월드컵 결승전이라는 최고의 무대에서 크루이프에게 KO승을 거두고 우승을 차지했다는 강점이 존재한다. 베켄바워는 월드컵은 물론 유로까지 제패했지만, 크루이프는 유일하게 참가했던 월드컵에서 준우승에 그치면서 국대 커리어를 끝내 무관으로 마감했기 때문에 결국 진정한 승리자는 베켄바워라는 관점도 무시할 수 없다. 실제로 크루이프는 1974 월드컵 당시 팀을 멱살캐리 하여 결승까지 끌고 올라갔으나, 결승전에선 경기 시작 직후 페널티킥을 얻어낸 장면을 빼면 베르티 포크츠의 밀착 수비와 베켄바워의 수비 리딩에 막혀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월드컵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월드컵이 끝난 후 선수 개인의 기량과 전체적인 활약상 면에선 크루이프가 우위였다는 말들이 나오자, 베켄바워는 크루이프의 활약을 인정하면서도 그 유명한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자가 강한 것이다!”라는 불후의 명언으로 응수했다.

결국 두 선수는 순수 기량은 크루이프가 위 vs 어찌됐건 최후의 승자는 베켄바워라는, 마치 포에니 전쟁의 두 주역인 한니발 바르카 vs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라이벌리[18]를 연상 시키는 구도로 아직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선수로서의 승리’를 거둔 요한 크루이프, ‘팀으로서의 승리’를 거둔 프란츠 베켄바워. 어느 쪽이 위인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긴다.

또한 이들은 공통적으로 역대급의 선수시절을 넘어 감독으로서도 매우 큰 성공을 거둔 명선수는 명지도자가 될 수 없다의 대표적인 반례로 축구계를 넘어 모든 스포츠 종목을 통틀어 평가받는 인물들이라는 점도 이들의 위업을 제대로 느끼게 해주는 부분이다. 게다가 감독직을 내려놓은 이후에도 각각 바르셀로나와 바이에른 뮌헨의 간부로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며 대체로 무난하고 성공적인 임기를 보냈다. 현역 선수로서의 성공은 메펠마 삼대장이지만, '축구인'으로서의 성공은 지네딘 지단을 제외하면 아직도 그 누구도 크루이프와 베켄바워를 쫒아가지 못하고 있다.[19][20]

6. 기타

이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차범근과의 인연도 두드러지는 경우가 많다. 차범근한테 혈연적 후계자 및 한국축구적 후계자들의 타국 이적 시에 그 자격 요건이 미달되는 것을 대체하는 추천에 요한 크루이프 박지성, 프란츠 베켄바워 차두리 추천서를 썼다. 얼핏 닮으면서도 정반대의 지인의 후계자들의 추천서를 쓴 셈이다.

또한 이들 역시 아들들도 축구선수로 지냈는데, 차두리와 비교될만한 요소들이 많다. 거스 히딩크가 네덜란드 청소년 대표팀 감독으로서 했던 경험을 한국 대표팀 감독 재임시기에 적용시킨 것이나 영국의 축구 전문 기자가 부자 모두 세계적인 위치에 놓인 축구 선수 3개 가문 중 2개가 바켄바워와 차범근 부자라는 점이다.

2016년 3월 24일에 요한 크루이프가 향년 68세의 나이로 사망한 이후 프란츠 베켄바워도 2024년 1월 7일에 향년 78세의 나이로 사망함에 따라 두 전설들이 맞붙은 일대기는 이제 개인의 경험 뿐만이 아닌, 축구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되었다.

7. 관련 문서


[1] 베켄바워는 축구 행정가 경력도 있다. [2] 메시는 두번이나 결승에 올라가 우승까지 차지했지만 호날두는 16강-조별 리그-16강-8강의 저조한 성적만을 거뒀기 때문에 결승에서 만날 일이 없었다. [3] 공교롭게도 크루이프 또한 1972년 AFC 아약스를 이끌고 트레블 + 득점왕 트레블 동시 달성을 역사상 최초로 해냈음에도 불구하고 발롱도르 포디움조차 들지 못한 경력이 있다. 그리고 바로 이 해에 베켄바워는 유로 1972에서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끌면서 우승을 차지하게 되어 발롱도르를 수상하였다. [4] 게르트 뮐러는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스트라이커 중 한명으로 꼽히며, 제프 마이어 역시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골키퍼 10위권에 들어가있는 선수다. 반면에 크루이프의 동료 중 가장 뛰어난 네스켄스의 경우는 당대 최고급 선수이긴 했으나 역대 순위는 60~70위권 정도다. [5] 다만 UEFA컵 우승은 임시감독으로 결승전 2경기만 지휘했다. [6] 다만 1994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은 당시 얕봤던 AC 밀란에게 0:4라는 굴욕적인 스코어로 패배하고 그 외에도 미카엘 라우드루프와의 큰 갈등 등 드림팀 1기의 붕괴를 알리는 전조가 되었다. [7] 단 각 팀에서의 감독으로서 유종의 미를 거두는 부분에서는 두 사람은 차이가 좀 있었다. 베켄바워는 통일 직전 순수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의 마지막 FIFA 월드컵 우승을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안겨주고 박수칠 때 떠났지만, 크루이프는 1994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당초 얕봤던 AC 밀란에게 0:4로 패하며 준우승을 한 이후 수페르코파 우승을 빼면 실질적으로 2년에 이르는 시기를 무관으로 보내면서 결국 크루이프는 누녜스 회장 간의 감정의 골은 점차 깊어져버려 1995-96 시즌 말미에 지휘봉을 내려놓고 만다. [8] 다만 베켄바워는 크루이프의 축구관에 반하는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공통분모가 꽤 있는 선수다. 크루이프는 토탈 풋볼의 기수로서 축구사를 바꿔놓은 인물인만큼 유독 창의성, 창조성을 강조하는 축구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베켄바워 역시 '수비수는 수비를 해야한다' 라는 상식에 구애받지 않고 드리블 돌파, 키패스, 심지어 골까지 하고 싶은거 다 하는 자유로운 자, '리베로' 였기에 이런 점에서 크루이프의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9] CF 2위 [10] 돈 발롱 어워드 [11] 링크 [12] 당시의 2부 리그 [13] 링크 [14] 돈 발롱 어워드 [15] 제프 헤르베르거 어워드 [16] 또한 1974년 발롱도르는 크루이프의 차지였으며, 1974년 월드컵에서 크루이프의 기회 창출 횟수는 무려 36회로 월드컵 역대 최다 기회 창출 기록이다. 우승만 했으면 1986년 월드컵에서의 디에고 마라도나의 활약상과 필적했을거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 [17] 해설가 한준희는 크루이프에 대해 축구라는 스포츠를 영원히 바꿔놓은 선수라 표현했다. [18] 역사가들은 물론 당대 로마인들조차 순수 지휘역량 자체는 스키피오 보다 한니발을 좀 더 위로 쳐줬으나, 어찌됐건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을 격파하고 최후의 승리를 가져간 건 스키피오였다. [19] 그나마 플라티니가 선수로서는 발롱도르 3회 수상자였고 감독으로서도 월드 사커 올해의 감독상을 받으며 그럭저럭 괜찮게 보냈으며, 거기에 UEFA 회장직까지 하면서 크루이프, 베켄바워에 못지않은 성공한 축구인의 길을 착실히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FIFA 회장직에 도전하려는 바로 그 순간, 뇌물수수 혐의로 차기 FIFA 회장 선거에서 물러나고 기존의 UEFA 회장직까지 잃은 뒤, 다시 카타르 월드컵 도중에 긴급체포까지 당하는 등 '뇌물 받아먹은 부패한 인간'으로 기억되며 완전히 몰락해버렸다. [20] 다만 펠레는 현역 선수 뿐만 아니라 축구의 상징성이라는 측면을 가져감으로써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자리를 굳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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