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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02:20:43

프란시스코 오르마사발

프란시스코 오르마사발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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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파일:칠레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23대, 27대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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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Francisco Hormazábal.jpg
이름 프란시스코 오르마사발 카스티요
(Francisco Hormazábal Castillo)
생년월일[1] 1919년 7월 4일
사망년월일 1990년 1월 13일 (향년 70세)
국적 파일:칠레 국기.svg 칠레
출신지 안토파가스타
포지션 라이트 윙 하프
신체조건 174cm
소속팀 콜로-콜로 (1940-1949)
CD 우니베르시다드 카톨리카 (1940 / 임대)
국가대표 4경기 1골 (1945)
감독 피아프 (1950)
CD 팔레스티노 (1953)
오히긴스 FC (1953-1954)
오히긴스 FC (1955-1956)
CD 콜차과 (1957-1958)
우니온 에스파뇰라 (1959-1960)
파로바드민톤 (1962)
칠레 대표팀 (1963-1965)
산티아고 모닝 (1963)
클루브 데 데포르티보 그린 크로스 (1964)
인데펜디엔테 메데인 (1966-1967)
안토파가스타 포르톼리오 (1968-1969)
콜로-콜로 (1970-1971)
칠레 대표팀 (1970)
산티아고 원더러스 (1972)
인데펜디엔테 메데인 (1972-1973)
데포르티보 페레이라 (1974)
인데펜디엔테 산타페 (1975-1976)
우니온 마그달레나 (1977-1981)
데포르티보 페레이라 (1982)
CD 우아치파토 (1983-1984)
아우닥스 이탈리아노 (1985)



1. 개요2. 생애
2.1. 선수 생활2.2. 감독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4. 수상
4.1. 선수
4.1.1. 클럽
4.2. 감독

[clearfix]

1. 개요

칠레의 전 축구 감독

2. 생애[2]

2.1. 선수 생활

2.1.1. 클럽

오르마사발은 산에우헤니오(San Eugenio)에서 축구를 하다 1936년부터 콜로-콜로의 유스 선수가 되었다. 1940년, 오르마사발은 친선 경기를 통해 1군 무대 데뷔전을 치렀지만 잠시 카톨리카에 임대를 떠나 1경기를 뛰었다.

1941년부터 오르마사발은 콜로-콜로의 주전급 선수로 발돋움했고 포지션도 포워드에서 오른쪽 하프백으로 변경했다. 그러나 1942년, 아우닥스 이탈리아노와의 경기에서 오르마사발은 무릎 부상을 입어 6개월간 경기를 뛰지 못했다.

1945년 6월, 다시 부상을 입은 오르마사발은 수술을 위해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갔고 로스터를 4개월간 비웠다. 오르마사발은 1949년에 입은 발목 부상으로 선수 생활을 마치게 되었다.

2.1.2. 국가대표

오르마사발은 콜로-콜로에서의 활약으로 1942년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출전이 유력했지만 무릎 부상으로 인해 출전이 좌절되었다.

오르마사발은 3년 후에 열린 자국 대회에 처음으로 칠레 대표팀 경기를 치렀다. 그는 데뷔전이자 대회 개막전인 에콰도르전에서 득점을 기록, 순조롭게 대표팀 경력을 이어갈 것으로 기대됐으나 맹장염으로 2경기를 빠졌다.

오르마사발은 1949년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 한번 더 참가했지만 출전한 경기는 없었다.

2.2. 감독

오르마사발은 1950년, 피아프 데토메(Fiap de Tomé)의 감독을 맡으며 제2의 축구 인생을 시작했다.

1953년에 오르마사발은 CD 팔레스티노의 감독으로 2부 리그 우승 타이틀을 따냈고 오히긴스(O'Higgins de Rancagua), CD 콜차과(CD Colchagua), 우니온 에스파뇰라, 페로바드민톤(Ferrobadminton)을 거쳐 1963년에는 칠레 대표팀 감독에 취임했다. 오르마사발은 칠레 대표팀을 맡을 때 1963년에는 산티아고 모닝, 1964년에는 클루브 데 데포르티보 그린 크로스의 감독을 겸직했고 1966년 월드컵도 대비했다. 그러나 오르마사발이 1965년, 대표팀 감독직을 그만두면서 그의 월드컵 참가는 무산되었다.

1966년부터 1967년까지 인데펜디엔테 메데인 감독을 맡았던 오르마사발은 1968년에 다시 칠레로 돌아와 안토파가스타 포르톼리오를 2부 리그에서 우승시키면서 1부 리그로 승격시켰다.

1970년, 선수 시절 친정팀인 콜로-콜로에 돌아온 오르마사발은 칠레 대표팀 감독을 다시 겸직하며 콜로-콜로의 1부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그러나 이 겸임 감독직은 금방 끝났고 오르마사발은 1972년에 잠시 산티아고 원더러스 감독직을 맡다가 다시 콜롬비아로 건너갔다. 이때 오르마사발은 콜롬비아에서 10년을 머물렀고 1975년 인데펜디엔테 산타페 감독으로 카테고리아 프리메라 A 우승도 경험했다.

1983년에 CD 우아치파토 감독으로 돌아온 오르마사발은 1985년, 아우닥스 이탈리아노의 감독 재직 시기에 건강 이상으로 감독직에서도 은퇴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상대팀 공격수들의 활동을 제한하고 동료들에게 패스를 뿌려주던 전형적인 하프백이었다.

4. 수상

4.1. 선수

4.1.1. 클럽[3]

4.2. 감독



[1] 출처. 영어 위키피디아를 포함한 일부 기록에서는 1920년생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2] 출처: 위키피디아, 11v11 [3] 오르마사발은 콜로-콜로 원 클럽 플레이어이므로 팀 이름 기입은 생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