袍形 甲옷
1. 개요
상하일체로 된 원피스형으로 두루마기와 비슷하나 마고자나 쾌자처럼 좌우대칭에 명치 부근에 단추가 나 있어 중앙에서 벌어지고 또 잠글 수 있게 된, 동아시아에서 나타나는 갑옷 양식 중에 하나. 정확히는 한국에서 많이 쓰이던 상하일체형을 포형 갑옷이라 부르지만 한족이나 북방민족의 양식처럼 상하분리형인 것들도 포형갑옷이라 부르는 등 확실히 정해져있진 않다.2. 역사
2.1. 한국
한국에서 갑옷이라고 하면 흔히 생각하는 것이 이것일 정도로 한국에선 특히 많이 쓰였다.가야를 포함한 삼국시대 때부터 이미 중앙에서 여미게 된 갑옷은 이미 있었으며, 이 당시의 갑옷은 명백한 상하분리형이므로 포형 갑옷이라 부르기엔 애매하다.
진짜 포형 갑옷이라 부를 만한 갑옷은 고려 시대부터 존재했다 봐야 하며, 이는 삼국시대의 전통이 이어진 것이라 볼 수도 있고, 당시와 그 이전의 중국도 비슷한 양식의 갑옷이 존재했던 것을 보면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시기인 몽고습래회사에 그려진 고려군(중앙)이 입고 있는 갑옷을 보면 조선시대의 갑옷과 비슷한 상하일체형의 두정갑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일본에서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고려군의 갑옷이 포형(袍形)이란 얘기를 구전으로 듣고 말 그대로 두루마기로 착각했는지 고려군은 그냥 못머리 장식이 박힌 가죽 두루마기를, 몽골군은 역시 못이 박힌 가죽 호복을 입고 있다. 다만 몽고습래회사는 여러가지 판본이 존재하며, 찰갑의 형태로 그려진 판본도 존재한다.
한국에선 거의 대부분이다 해도 좋을 정도로 상하일체형인 것이 특징이고, 이미 조선 초중기 기록부터 상하분리형이 보이긴 하지만 대부분 실전용이 아닌 의장용으로 사실상 전장에선 상하일체형만 쓰였다 보는 것이 맞다. 한국에서 왜 상하일체형 갑옷이 사실상 한국 갑옷을 독점하게 되었는지는 확실친 않으나, 고려 시대에 들어서는 북방 민족들처럼 기병 위주가 아닌 보병 위주로 운영되었으면서도 역시 주무기가 활이었으며 궁수가 절대적 주력이었던 시대적 배경을 감안해 보면 다리를 양옆으로 벌리기 편안하게 되어 있는 상하분리형보다 양쪽 다리를 앞뒤로 벌리는 자세가 더 편리한 상하일체형이 무릎쏴 자세에 더 편리하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청나라의 영향도 받고 해서, 보병은 여전히 상하일체형을 고수했지만 기병은 말타기에 편리한 상하분리형을 지급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 무관이나 갑사들은 일부 옆여밈 방식의 특이한 찰갑[1]을 제외하고는 거의 100%라 해도 좋을 정도로 대부분 포형 갑옷을 입었지만 정병(병사)들은 포형 갑옷을 전부 갖추진 못했다. 멀리서 원거리 공격을 해서 활이나 승자총통을 쏘는데 불편한 포형갑 대신 팔을 움직이기 편하고 가벼운 갑옷을 입어야 하는 사수와 총통수는 흉갑을 입었고, 노를 젓던 수군인 격군은 아예 갑옷을 일절 갖추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비교적 대접이 좋고 일선에서 백병전으로 싸워야 하는 살수와 팽배수에겐 쇄자갑이나 경번갑 또는 지갑이나 피갑 등의 재료로 된 수준 높은 방호력의 포형 갑옷을 지급한 것으로 보인다.
2.2. 중국
한국에서 더럽게 많이 써먹은 양식이라 한국에서만 쓰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중국에도 포형 갑옷은 존재했다.한나라 시절의 유물 중에선 엄밀히 말하면 포형 갑옷은 아니지만 비슷한 양식인, 상박갑이 반팔티 소매처럼 되어 있고, 중앙에서 여미는 형식의 갑옷도 발견된다. 이 갑옷은 포갑(布甲)이라 불렀었다.
몽골군의 갑옷. | 청나라의 포형 갑옷을 입은 건륭제. |
[1]
대표적으로 부산 동래부성 해자에서 발굴된 찰갑 같은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