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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4 16:36:27

앤퍼니 하더웨이

페니 하더웨이에서 넘어옴
앤퍼니 하더웨이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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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퍼니 하더웨이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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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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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6px -1px -11px"
1993-94 1994-95 1995-96 1996-97 1997-98
앤퍼니 하더웨이 에디 존스 데이먼 스타더마이어 앨런 아이버슨 지드루나스 일가우스카스
1998-99 1999-00 2000-01 2001-02 2002-03
(NBA 파업) 엘튼 브랜드 월리 저비악 제이슨 리차드슨 길버트 아레나스
2003-04 2004-05 2005-06 2006-07 2007-08
아마레 스타더마이어 카멜로 앤서니 안드레 이궈달라 데이비드 리 대니얼 깁슨
2008-09 2009-10 2010-11 2011-12 2012-13
케빈 듀란트 타이릭 에반스
듀완 블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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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4 2014-15 2015-16 2016-17 20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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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9 2019-20 2020-21 2021-22 2022-23
카일 쿠즈마 마일스 브리지스 (코로나로 미개최) 케이드 커닝햄 호세 알바라도
2023-24 2024-25 2025-26 2026-27 2027-28
베네딕트 매써린 - - - - }}}}}}}}}}}}

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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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st : 1994-95 · 1995-96
3rd : 1996-97
파일:NBA 로고.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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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퍼니 하더웨이의 역대 등번호
{{{#!folding ▼
올랜도 매직 등번호 1번
창단 앤퍼니 하더웨이
(1993~1999)
키와네 개리스
(1999~2000)
피닉스 선즈 등번호 1번
세드릭 세발로스
(1997~1998)
앤퍼니 하더웨이
(1999~2004)
타부세 유타
(2004)
뉴욕 닉스 등번호 1번
크리스 차일즈
(1996~2001)
앤퍼니 하더웨이
(2004~2006)
스티브 프랜시스
(2006~2007)
마이애미 히트 등번호 7번
웨슬리 퍼슨
(2004~2005)
앤퍼니 하더웨이
(2007)
숀 매리언
(2008~2009)
}}} ||
}}} ||
파일:샤킬 오닐의 영구결번식에 참석한 페니 하더웨이.jpg
앤퍼니 디온 "페니" 하더웨이
Anfernee Deon "Penny" Hardaway
출생 1971년 7월 18일 ([age(1971-07-18)]세)
테네시 주 멤피스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출신학교 멤피스 대학교
신장 201cm (6' 7")[1]
체중 88kg (195 lbs)
윙스팬 208cm (6' 10")
포지션 포인트 가드 / 슈팅 가드[2]
드래프트 1993 NBA 드래프트 1라운드 3순위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지명
[3]
소속 팀 올랜도 매직 (1993~1999)
피닉스 선즈 (1999~2004)
뉴욕 닉스 (2004~2006)
마이애미 히트 (2007)
지도자 이스트 고등학교 코치 (2015~2017)
이스트 고등학교 (2017~2018)
멤피스 대학교 (2018~)
등번호 1번 - 올랜도 / 피닉스 / 뉴욕
7번 - 마이애미
SNS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일생
2.1. 성장기2.2. 학창 시절2.3. 선수 시절
2.3.1. 올랜도 매직
2.3.1.1. 1993-94시즌2.3.1.2. 1994-95시즌2.3.1.3. 1995-96시즌2.3.1.4. 1996-97시즌2.3.1.5. 1997-98시즌2.3.1.6. 1998-99시즌
2.3.2. 피닉스 선즈2.3.3. 뉴욕 닉스2.3.4. 마이애미 히트
2.4. 은퇴 후
3. 플레이 스타일
3.1. 과대평가?
4. 여담

[clearfix]

1. 개요

Ballin is What I was born to do.
농구를 하는 것은 내가 태어난 이유다.
ㅡ 그의 시그니처 모델에 새겨져 있는 말.

미국의 농구인. NBA에선 한때 그랜트 힐과 더불어 NBA의 차세대 아이콘으로 큰 인기를 누렸던 선수였다. 그러나 각종 부상을 극복하지 못하고 쓸쓸히 퇴장한 비운의 선수. 지금도 올드팬들은 그의 이름을 거론할 때마다 안구가 촉촉하게 젖어든다. 별명은 Penny.

2. 일생

2.1. 성장기

하더웨이는 테네시 멤피스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에는 버밍햄튼의 빈민주택 '샷건 하우스'[4]에서 살면서 자랐다. 태어날 때부터 워낙 귀여웠던 모양인지 외할머니 루이스(1916~2011) 여사는 손자를 Pretty Baby 라고 부르며 매우 예뻐했다. 그런데 루이스 여사는 남부 출신이었는지 저 프리티 발음에 남부 억양이 섞인 'pweddy'란 발음 탓에 사람들에게는 Penny라는 단어로 와전되어 어쩌다가 별명이 저렇게 굳어졌다.

할머니의 사랑은 받았지만, 페니는 부모에게서 버림받았다. 아버지 에디 고든은 가출했고, 어머니 페이 하더웨이[5]도 다른 사람과 눈이 맞아 캘리포니아 주 오클랜드로 가서 새 살림을 차렸다. 결국 루이스 여사는 어린 페니를 먹여살리기 위해서 온갖 일을 다했다. 그런데 페니가 어느 정도 자랐을 때 페니의 어머니가 페니를 데려가겠다고 했다. 루이스 여사는 이에 대해 "모유 한 번 먹여준 적도 없으면서 뻔뻔하게 어딜 기어들어와?" 라며 내쫓아버렸다. 페니는 이때 세상에서 버림받았다는 느낌이 들었을 정도였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할머니의 사랑과 헌신 덕분에 극복할 수 있었다고. 페니 역시 할머니를 매우 사랑했기 때문에 절대 나쁜길로 빠지지 않았다. 페니가 어렸을때 살던 버밍햄튼은 엄청난 우범지대였다. 하지만 페니는 나쁜 길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저 농구와 미식축구를 하면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페니가 할머니의 말을 얼마나 잘 들었는지 대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페니는 어릴적 미식축구를 엄청나게 좋아했다. 친구들과 미식축구를 하다가 크게 다치고 돌아와 할머니를 놀라게 한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페니가 미식축구 선수가 되겠다고 하자 루이스 여사는 다음과 같은 말로 손자를 설득했다.
"저런 덩치들에게 깔리면 넌 죽고 말거야. 차라리 농구를 하렴. 농구도 미식축구 못지 않게 정말 재미있단다."

할머니를 너무 사랑했던 페니는 할머니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결국 미식축구 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접었다. 그래도 미식축구를 좋아하는 건 성인이 되어서도 변하지 않았다.[6]

2.2. 학창 시절

파일:external/ballislife.com/penny-hardaway-memphis-tigers-game-shots.jpg

청소년기 때는 고향에 있는 트레드웰 고등학교에 다니며 가머 큐리(1947~2005) 감독의 가르침을 받아 에이스로 맹활약했다. 이때 평균 36.6점, 10.1 리바운드, 6.2 어시스트, 3.9 스틸, 2.8 블록슛 이라는 가히 비범한 기록을 찍어내며[7] 전미에 손꼽히는 고교선수로 각광받게 된다. 많은 대학들이 페니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페니와 할머니 루이스는 고향팀인 멤피스 주립대학교에 가기를 원했고, 멤피스 주립대 역시 페니를 강력하게 원했다.[8]

하지만 이 때 페니는 공부를 거의 안 해서 학교성적이 대학에 갈만한 수준이 되지 못했다. SAT점수도 멤피스 주립대가 원하는 기준에 미달이었다. 이러다 보니 주니어 칼리지에서도 몇 군데 왔다갔었다고. 하지만 루이스 여사는 완강히 멤피스 주립대를 고집했다. 결국 최후의 수단으로 학과장의 추천입학이 남았다. 다행히 학과장은 페니의 입학을 허락해주었다. 물론 이게 불공평하다고 엄청난 항의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이후 페니의 마지막 학점을 보면 A- 였다고 한다. 즉, 공부를 못 했던게 아니고 안 했던 것.'

그 후 페니는 공부의 중요성을 깨닫고 공부에도 열성적으로 임했다. 하지만 1학년 때 페니는 거의 농구를 하지 못했는데, 어떤 미친 개쌍놈의 쌔끼 괴한이 페니의 다리에 총을 발사했기 때문이었다.[9] 2학년 때는 래리 핀치(1951~2011)[10] 감독의 지도를 받으며 부상을 딛고 투혼을 발휘해냈다. 1992년 NCAA 전국대회 때 후배 데이빗 본과 함께 16강에서 존 배리[11], 맷 가이거 등이 포진한 강호 조지아 공대를 83-79로 꺾는 파란을 일으켰지만 8강전에선 닉 반 엑셀이 이끄는 신시내티 대학교에 57-88로 졌다.

이 공로로 그는 그레이트 미드웨스트 컨퍼런스[12] 올해의 선수상을 받았고, 드림팀1의 연습상대인 USA Basketball Developmental Team 에 선발되었다. 이때 선발된 멤버들은 크리스 웨버, 바비 헐리, 자말 매쉬번, 앨런 휴스턴, 로드니 로저스, 에릭 몬트로스, 그랜트 힐 등 전미 최고의 대학선수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연습경기에서 드림팀을 이겼다. 물론 다음 연습경기에서 무자비하게 깨졌다.[13]

3학년 때 평균 22.8점, 8.5 리바운드, 6.4 어시스트를 기록해서 NCAA 토너먼트로 연속 진출시켰지만 웨스턴 켄터키 대학교에게 52-55로 아깝게 스윕당했다. 대신 이 실력을 바탕으로 네이스미스상과 존 우든 어워드의 강력한 후보로 올랐다. 그리고 그는 NBA로 가기로 결심한다. 이는 프로에서 자신의 기량을 보여주고 싶었고, 할머니를 더 고생시키고 싶지 않다는 이유였다.

1993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3순위로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 지명되었다. 하지만 1순위로 올랜도 매직에 지명된 크리스 웨버[14][15]와 트레이드되어 페니는 올랜도 매직의 유니폼을 입게된다.

2.3. 선수 시절

파일:external/cdn.slamonline.com/penny_4.jpg


NBA 공식 채널에서 2021년에 업로드한 Top 50 플레이 영상[16]

2.3.1. 올랜도 매직

2.3.1.1. 1993-94시즌
루키시즌에는 팀에 주전 포인트 가드로 스캇 스카일스[17]가 있었던 관계로 슈팅 가드로 시작했다. 그러다가 후에 팀은 페니의 패싱능력과 창의적 플레이를 높게 사게 되고 스카일스를 밀어내고 페니를 주전 포인트가드로 기용한다. 신인임에도 82경기 전 경기를 선발출전해 평균 16.0득점 5.4리바운드 6.6어시스트 2.3스틸이라는 훌륭한 기록으로 올 루키 퍼스트팀에 뽑혔으며, 그 해 올스타 이벤트부터 신설된 루키 올스타전의 초대 MVP에 오르기도 했다.
2.3.1.2. 1994-95시즌
샤킬 오닐과 콤비를 이루어 본인도 전년도보다 일취월장한 기량을 선보여 올 NBA 퍼스트팀에 선정된다. 페니가 슈퍼스타로 불리기 시작한 것도 이 시점. 팀도 마이클 조던[18]이 이끄는 시카고 불스를 꺾고 파이널 무대를 경험. 상대는 6번시드로 간신히 파이널에 올라온 휴스턴 로키츠. 당시 많은 전문가들은 젊은 패기의 올랜도가 우세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올랜도는 하킴 올라주원의 맹활약에 4전 전패했다. 페니는 파이널동안 맹활약했지만 팀의 패배를 막지 못했다. 하킴 뿐만 아니라 클라이드 드렉슬러를 막지 못했는데 드렉슬러와의 매치업에서 파워의 중요성을 느꼈는지 플레이에 무리가 되지않는 선에서 벌크업을 하여 95-96시즌을 맞이 한다.

https://youtu.be/_ai60RFEaJw
파이널 3차전. 19득점, 15어시스트.

https://youtu.be/3ePq1_5COSI
파이널4차전. 25득점, 6리바운드, 5어시스트.
2.3.1.3. 1995-96시즌
95-96시즌에는 샤킬 오닐이 엄지손가락 부상 탓에 개막전부터 결장했다. 그래서 샤크가 복귀한 12월 15일까지 페니가 팀의 에이스 역할을 맡았다. 페니는 그야말로 신들린 듯한 활약으로 팀을 시즌 초반 17승 5패로 이끌었다. 개막전부터 28득점을 올리며 팀을 승리로 이끌더니 개막 4번째 경기인 뉴저지 네츠전에서는 무려 42득점을, 그로부터 얼마 후에 만난 시카고 불스전마저 36득점을 쏟아부으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 시즌 불스는 당시 최다승 기록인 72승 10패를 거둔 리그 최강팀이었는데 이 시즌에 당한 첫 패가 바로 페니가 이끌던 매직에게 당한 것이었다. 오닐이 결장하여 에이스 역할을 하던 22경기동안 페니가 올렸던 평균 득점은 무려 27점대였다. 현 시점에선 평균 27점이 그렇게 놀랄만한 수치인가 의문을 품을 수 있는데, 당시는 지금보다 경기의 페이스가 현저히 느렸고 그만큼 팀당 평균득점 또한 리그 역사상 최저 수준이었다. 다시 말해 페니가 이 기간동안 기록했던 평균 27득점은 당시 기준으로 리그 Top 3급의 득점력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며, 그것도 포인트가드 포지션으로 기록한 것이기에 더욱 임팩트가 컸다.[19] 이런 페니의 신들린 활약 덕에 올랜도는 샤크의 공백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고, 팬들은 마이클 조던의 뒤를 이을 슈퍼스타가 탄생했다며 열광했다.[20][21]

올랜도 매직은 이 시즌 프랜차이즈 최다승인 60승을 기록하면서 플레이오프에 안착했다. 1라운드에서 디트로이트 피스톤즈를 3전전승, 애틀란타 호크스를 4승1패로 가볍게 이기고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까지 올랐다. 하지만 지난 시즌 플레이오프에서 자신들이 굴욕을 안겨줬던 시카고 불스[22]에게 4전 전패로 개발살나며 허무하게 탈락했다. 다만 시리즈 전적이 4전 전패이지 1차전을 제외한 경기들은 접전 끝에 패했다. [23]

https://youtu.be/7QVNn0jVXcg
정규시즌 vs CHI. 36득점.

https://youtu.be/zANqQUlyv3A
정규시즌 vs LAL.

https://youtu.be/IJe3WVK8N34
정규시즌 vs SAS. 35득점.

https://youtu.be/DzdxeQTeNf8
동부 세미파이널 vs ATL 4차전. 29득점, 11어시스트

https://youtu.be/gsEwfI2-QlM
동부 파이널 vs CHI 1차전. 38득점.

이 시즌이 종료되고 샤킬 오닐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로 이적하면서 페니는 자연스럽게 팀의 리더가 되었다. 애틀란타 올림픽에서 드림팀3 멤버로 뽑혔고 금메달도 획득했다. 페니는 결승전에서 유고슬라비아를 상대로 17득점을 올렸다.[24]

https://youtu.be/NwNdsjlYJFk
96 애틀란타 올림픽 결승전 vs 유고슬라비아. 17득점 4어시스트
2.3.1.4. 1996-97시즌
96-97시즌 개막 후 2, 3번째 경기를 일본 도쿄에서 치렀다. 당시 상대팀은 뉴저지 네츠. 페니는 두 경기에서 각각 23점, 29점을 올렸고 모두 승리했다. 도쿄돔에 농구코트를 제작하여 어마어마한 인파들이 몰렸는데 대부분 페니를 보러왔다고 보면된다. 이 시즌 네츠는 그야말로 리그 최약체였고 스타선수 자체가 없는 팀이었으니 NBA 사무국에서 오직 페니의 스타성만 믿고 일본 투어를 개최한 셈이다.
https://youtu.be/1Dl7BSubtl4
29득점.

하지만 리그 개막 후 얼마 못가서 부상으로 들락날락한 시즌이었다. 결장한 경기가 많아서 총 59경기만 뛰었고 평균 20.5점, 4.5 리바운드, 5.6어시스트를 기록했으며 ALL NBA 서드팀에 존 스탁턴과 함께 이름을 올렸다.

https://youtu.be/rHJjmJTNFTA
정규시즌 vs HOU. 31득점.

https://youtu.be/rPteBshWgm0
정규시즌 vs CHI. 23득점.

https://youtu.be/ywA4JY3BL9o
정규시즌 vs 76ers. 30득점, 6어시스트.

플레이오프에는 올랐지만 성적은 45승 37패(동부 7위)로 작년에 비해 곤두박질 쳤고, 시즌 도중에 감독이었던 브라이언 힐이 경질되기도 했다. 마이애미 히트와[25]의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2패로 끌려가던 올랜도는 페니가 3, 4차전에 연속으로 40득점을 기록하는 미친 활약상으로 시리즈를 타이까지 끌고 갔다.[26] 당시 마이애미 히트 감독이었던 팻 라일리는 페니의 활약에 대해 "모자라도 벗어서 그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라고 하며 극찬했다. 루키 시즌 부터 이 시즌 플레이오프 까지가 사실상 페니 전성기라고 보면 된다. 불과 4시즌 경력(21세~25세)으로 퍼스트팀 2회, 서드팀 1회, 올림픽 금메달, 준우승의 성과 및 나이키 시그니처 모델까지 굉장한 임팩트를 주었고 수많은 국내외 팬을 생성한 보기 드문 선수였다.

PO(2승 3패) 1라운드 탈락 올랜도 매직(동부 7위 45-37) vs 마이애미 히트(동부 2위 61-21)

1차전 (패) 39분. 37.5% - 33.3%(1/3) - 0%(0/3) 4리바운드, 3어시스트, 4스틸, 4블락, 4턴오버, 13점
2차전 (패) 39분. 50.0% - 20.0%(1/5) - 62.5(5/8) 1리바운드, 2어시스트, 1스틸, 1블락, 1턴오버, 26점
3차전 (승) 47분. 53.3%(16/30) - 25.0%(1/4) - 90.0%(9/10) 8리바운드, 2어시스트, 2스틸, 1턴오버, 42점
https://youtu.be/Z8rpFE1CUiQ
4차전 (승) 48분(!). 52.2%(12/23) - 50.0%(4/8) - 81.3%(13/16) 7리바운드, 4어시스트, 4스틸, 3블락, 1턴오버. 41점
https://youtu.be/WyxcjbJP1z0
5차전 (패) 47분. 36.4%(8/22) - 40.0%(4/10) - 76.5%(13/17) 10리바운드, 6어시스트, 1스틸, 2블락, 2턴오버, 33점
https://youtu.be/YookrcA1jfI

아무리 지금과 달리 페이스가 느린 시대였어도 47, 48, 47분 출장은 당시 정규시즌 59경기 출전에 그칠 정도로 부상결장이 많았던 페니에게 너무 가혹했다.

이 플레이오프 시리즈에서 페니는 평상시와 다른 전략으로 승부를 걸었다. 미들점퍼 비율과 3점시도 비율을 2배 이상 높였고 돌 파역시 상당히 과감하게 해서 자유투 시도도 상당히 증가했다. 평소 큰 신장을 이용한 포스트업 공격, 오픈 3점 등 효율성 있는 플레이에서 80년대 마이클 조던, 매직 시절 트레이시 맥그레이디, 00년대 중반 코비 브라이언트같이 원탑 에이스 GO 플레이를 펼쳤다. 3점을 책임져 주던 닉 앤더슨, 데니스 스캇의 상대적 부진, 호래이스 그랜트가 부상으로 아예 빠지는 등 득점, 리바운드 등 전 부분에서 누수가 생겼기에 페니의 부담이 증가했으며 리딩은 대럴 암스트롱에게 부분적으로 일임했다. 이 플레이오프 이후 차기 시즌 예상에서 한 단계 스텝업된 페니를 조던과 함께 득점왕 라이벌로 지목하는 프리뷰 기사 등도 상당히 많았을 정도 였으나... 이 모든 것이 정말 거짓말 처럼 사라졌다.

아무리 95/96시즌 샤킬 오닐이 초반 22경기 결장을 하고도 매직이 동부 2위의 좋은 성적을 올렸어도 결국 그 이후 시즌에 대비하여 보강이 필수적이였다. 지금과 달리 당시 매직은 그야말로 불스와 함께 최고인기팀 중 하나였을 정도로 매력적인 프랜차이즈였기에 좋은 선수들 영입이 비교적 쉬운편이였지만 팀은 페니 한 명만 보고가는 어이없는 오판을 했다. 즉 오닐의 공백을 전혀 보완할 생각이 없었는데 결국 이런 결정이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중반의 운명을 바꾸고 말았다. 오닐이 빠진 센터 자리의 공백은 이미 30대 중반을 넘어선 로니 세이커리가 담당했지만 이는 일시적인 보강에 불과했으며, 결국 세이커리는 딱 1시즌(96/97시즌)만 좋은 활약을 보였고 노쇠화의 길에 들어섰다.
2.3.1.5. 1997-98시즌
97-98 시즌 왼쪽 무릎부상을 당해 19경기 정도만 출장하는 데 그쳤다. 개막 후 두 경기에서 30득점 이상 올리는 등 좋은 페이스를 이어갔으나 부상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코트에 복귀 하는 등 이런 루트를 1월까지 이어갔다. 즉 컨디션 자체가 엉망이었다. 이 때 부터 슬슬 부상의 악령이 씌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코비 브라이언트, 앨런 아이버슨, 케빈 가넷, 팀 던컨에게 NBA중심 자리를 넘겨주는 본격적인 시즌[27][28]이 되었다. 물론 페니 인기는 여전해서 부상으로 19경기 출전하고도 조던과 함께 동부 올스타 선발로 뽑혔으니 아직 많은 팬들은 일시적 부상으로 기대했으나.. 바램으로 끝났다. 당시 히트 소속이였던 팀 하더웨이가 페니는 부상으로 제 컨디션도 아닌데 주전으로 출전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다.

https://youtu.be/RXAMJqgudjU
정규시즌 vs CHI. 20득점, 6리바운드, 3어시스트. 현재 유일하게 남아있는 97/98시즌 하이라이트로 추정된다. 이 경기를 보면 알겠지만 포지션을 SG로 옮겨서 주요 매치업 상대가 마이클 조던이다.
2.3.1.6. 1998-99시즌
98-99 시즌에는 단축시즌(50경기)[29][30]이긴 했지만 결장 없이 전경기를 출전했다. 확실히 이전의 폭발력은 많이 사라졌고 전성기 시절에 비해서 상당히 느려졌으며 공격시 적극적으로 플레이하지 못하는 모습이 부분적으로 생겼다. 아무래도 전년도에 시즌 아웃급 부상을 당했기에 어쩔 수 없는 노릇. 본래 클래스가 있는 선수였기에 팀을 전시즌 플레이오프 탈락팀에서 무려 동부 3위로 플레이오프에 올렸고 여전히 센스있는 플레이와 에이스 본능은 살아있어서 접전경기에서는 강한 모습을 여전히 보여주었다. 페니는 평균 15.8득점에 5.7리바운드 5.3어시스트로 1차 스탯은 크게 하락했음에도 적어도 이 시즌 까지는 스타성을 유지했으며, 무엇보다 팀 성적의 수직상승에 페니의 공이 컸음은 당연했다.

https://youtu.be/VkHnoX_YWcE
정규시즌 vs DET. 30득점, 3어시스트, 5스틸.

https://youtu.be/8ND5SsBzxeg
정규시즌 vs NY. 30득점, 8어시스트.

https://youtu.be/8y2nB2WXRQQ
정규시즌 vs LAL. 22득점, 13어시스트. 샤크가 매직을 떠난 후 코비 브라이언트와 함께 처음으로 페니와 맞대결한 경기.

하지만 앨런 아이버슨이 한단계 성장한 식서스와의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업셋(1-3)을 당해 허무하게 탈락했다.

https://youtu.be/3rQ32xftPQE
플레이오프 vs PHI 1차전. 19득점, 5리바운드, 6어시스트
/ 아이버슨 30득점.

https://youtu.be/AiMFabbaHPw
플레이오프 vs PHI 2차전. 22득점, 7리바운드, 4어시스트
/아이버슨 13득점.

2.3.2. 피닉스 선즈

결국 올랜도 매직은 리빌딩을 위해 페니를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그를 피닉스 선즈로 트레이드 시켰다. 비록 이전의 폭발력은 사라졌지만 팬들은 당시 피닉스 선즈의 포인트가드였던 제이슨 키드와의 백코트를 이루는 것에 기대를 드러내며 백코트2000이라 부르기도. 이적 후 첫 시즌, 정규시즌 평균 17득점 올렸고 플레이오프에서도 팀 에서 가장 좋은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이미 페니는 예전의 페니가 아니었다. 더욱이 00-01시즌 다시 무릎수술을 받으며 운동능력을 완전히 상실했고, 03-04시즌 들어서는 주전자리를 조 존슨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루키 시즌 ~ 96-97 플레이오프 까지가 최전성기이고, 98-99시즌 ~ 99-00 레이커스와의 서부준결승까지가 사실상 페니가 경쟁력있던 시절이였다.

2.3.3. 뉴욕 닉스

파일:external/s3.amazonaws.com/0705_oag_hardaway.jpg

2003-2004 시즌 트레이드 데드라인에 페니는 스테판 마버리와 함께 뉴욕 닉스으로 트레이드 되었다. 하지만 대접은 피닉스 때보다도 더 나빴다. 그도 그럴것이 두 번째 무릎 수술 이후 페니는 더 이상 주전으로서 경쟁력이 없을만큼 기량이 하락했고, 설상가상으로 무려 1,500만 달러라는 리그 탑급 연봉을 받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페니는 닉스 입장에서 마버리를 영입하기 위한 댓가로 피닉스가 샐러리 절감을 위해 억지로 떠넘긴 짐에 가까웠다. 2004년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준수한 활약을 하긴 했지만, 다음 2004-2005 시즌도 그의 위치는 벤치 멤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당시 팀의 단장이었던 아이제아 토마스조차 페니를 거의 전력 외 취급하고 그의 락커룸도 없애버려 그를 분노하게 했다. 2005-2006 시즌은 고작 네 경기만 출전했을 정도로 완전히 전력 외로 분류되었고, 뉴욕 닉스에서 스티브 프랜시스를 영입하기 위한 카드로 페니는 당시 뉴욕 닉스의 유망주였던 트레버 아리자와 함께 친정팀인 올랜도 매직으로 돌아갔다.

페니는 이때 과거 자신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매직의 1번 유니폼을 다시 입을 생각에 기뻐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올랜도 구단은 그런 페니의 기대를 철저히 저버리며 1번 유니폼을 트레버 아리자에게 줘버렸고, 페니는 방출시켰다. 차세대 리그의 아이콘이었던 페니 하더웨이는 그렇게 사람들의 관심속에 사라져갔다. 2007년 올스타전때 타미카 캐칭과 함께 쓸쓸하게 올스타전 경기를 관람하는 모습에 많은 팬들이 눈시울을 붉혔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잊혀져 가던 페니였으나...

2.3.4. 마이애미 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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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마이애미 히트와 계약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많은 팬들을 놀라게 했다. 과거 매직 시절 팀 동료였던 샤킬 오닐과 다시 한 팀에서 재회하게 되었으며, 비록 비보장 계약이긴 했지만 팬들은 그가 다시 코트에서 뛸수 있게 되었단 사실에 기뻐했다. 페니 본인도 복귀를 위해 훈련을 해왔고 덩크슛을 성공시킬 수 있을정도로 몸상태를 회복했다고. 시범경기에서 준수한 모습을 보여주며 기대감은 더욱 높아졌다. 하지만 팬들의 기대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정규시즌이 개막한 후 8경기의 주전 출전을 포함한 총 16경기 출전에 평균 20.3분이라는 적지 않은 출전시간을 받았지만, 고작 경기당 평균 3.8득점 2.2리바운드 2.2어시스트, 야투율 .367에 그치는 저조한 활약에 그쳤다. 결국 페니는 또 다시 방출되었고, 사실상의 완전 은퇴를 하게 되었다.

2.4. 은퇴 후

선수 은퇴 뒤 NBA에서 주관하는 여러 가지 행사와 월드이벤트에 간간히 모습을 비추며 팬들과 소통하고 있다.

아쉽게 부상으로 명예의 전당 후보에도 못오르고 커리어를 마감했지만 워낙 인기가 좋았던 선수라 꾸준히 쉽게 근황을 알 수 있다. 다른 일부 레전드 선수들이나 더 좋은 커리어를 보낸 웬만한 선수들 보다 기사거리가 더 자주나오고 이 나무위키 문서도 꽤나 자세하게 작성된 커리어와 그 이후 생활까지 기술되어있다. 또한 90년대 조던, 바클리와 함께 나이키 대표 모델 인지라 은퇴 후 7~8년이 지난 이후에도 페니 5, 6 가 새롭게 나오는등 여전히 이목을 끄는 선수임을 알 수 있다.[31]

한국 시간 2018년 3월 20일, 모교 멤피스 대학교의 감독으로 부임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멤피스는 최근 성적이 좋지 못해 NCAA 토너먼트에도 참가하지 못하던 와중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그를 감독으로 선임했다고 한다. 그런데 2년차 시즌 내쉬빌 출신 고교 최대어였던 센터 제임스 와이즈맨을 리크루트 성공하는 대어를 낚아 놓고, 막상 개막 3경기 만에 와이즈맨을 멤피스로 데려오기 위해 이사비용을 페니가 준 것이 드러나 NCAA 규정위반으로 와이즈맨이 출장정지를 먹고 와이즈맨은 학교 복귀를 거부하고 2020년 NBA 드래프트 준비에 집중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와이즈맨 없이 팀은 연승행진을 이어가고 있지만 원래 계획상 핵심이었던 와이즈맨을 잃었기에 2년차 시즌 학교가 원하는 성적을 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2021년에는 아버지뻘인 명장 래리 브라운이 코치로 선임되어 페니에게 여러모로 지도능력 면에서 스승이 될 듯했으나 브라운은 건강 문제로 코치를 그만두었다. 그래도 2020-21 시즌엔 NIT 우승, 2021-22 시즌 NCAA 전국대회서 32강에 오르는 등 준수한 모습을 유지 중.

3. 플레이 스타일

플레이스타일은 가히 만능으로, 전성기때는 매직 존슨 이후 최고의 장신 포인트 가드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선수. 득점력과 다재다능함을 갖추었으며 무엇보다 자신의 플레이 뿐 아니라 동료들까지 살려주는 이타성과 창의성이 있어 전문가들도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우선 게리 페이튼, 마크 잭슨과 함께 90년대 포인트 가드들 중에서도 유별나게 포스트업의 빈도가 높은 편이었는데, 페니는 앞의 둘보다 체격이 훨씬 커서 포스트업으로 어지간한 포워드도 능히 공략할 수 있었다. 매직 존슨과 더불어 NBA 역대 포인트 가드 중 최고수준의 포스트업 완성도를 가진 선수였고, 마이클 조던이나 스카티 피펜 등 역대급 스윙맨 디펜더들을 상대로도 자신있게 이를 시도할 정도라 어지간한 가드들은 단독 매치업으로 페니의 포스트업을 막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페이스업과 포스트업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득점을 올리는 한편, 그 와중에도 팀원들의 기회를 봐줄 수 있는 시야와 패싱 스킬을 가졌기에 커리어 초반에는 SG나 SF가 아닌 포인트 가드로 활약했다. 2m의 신장임에도 경기 운영 능력과 볼 핸들링은 포인트 가드 급이었기에 가능했던 일.

슈팅의 경우 숏미드 부근에서 던지는 점퍼가 준수하여 포스트업의 마무리 스킬로 곧잘 활용했으나, 그 이상의 중장거리에서는 그리 안정적인 선수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득점을 인사이드에서 해결하던 선수. 올랜도는 뛰어난 3점 슈터인 닉 앤더슨과 데니스 스캇을 갖추었고, 페니 본인이 뛰어난 클러치 플레이어였던 만큼 평상시 떨어지는 외곽슛은 딱히 약점이랄게 되지 못했다.

수비에서는 자신의 사이즈를 잘 살릴 줄 알았고, 손질이 좋아 스틸도 곧잘 해냈다. 상대팀 백코트 중 실력이 좋은 쪽을 뛰어난 수비수인 앤더슨이 막고, 페니는 다른 한쪽을 막고는 했다. 수비가 특별히 좋은 편은 아니지만 약점이라고 할 수준은 확실히 아니었고, 대충 평균에서 그보다 조금 좋은 정도의 수비수로 평가받았다. 키에 비해 체중이 적고 프레임이 얇아 조던이나 드렉슬러 등 피지컬 좋은 스윙맨들을 막을때 힘에서 부치는 모습을 보였고, 이를 타파하기 위해 웨이트를 확 늘리기도 했지만 이는 내구성이 떨어지는 페니에게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3.1. 과대평가?

사실 슈퍼스타치곤 비율스탯이 평범한 편이라 스탯만 보고 평가하는 이들에게 과소평가 받기도 한다. 스탯상 최전성기였던 95-96시즌의 스탯은 21.7점 7.1어시스트 4.3리바운드로 올스타급 스탯이긴 하나, 30점을 밥먹듯 찍던 마이클 조던이나 한때 13~14개에 달하는 괴물같은 어시스트를 찍던 존 스탁턴에는 한참 못 미치고, 90년대 초반까지 조던과 라이벌 관계 였던 클라이드 드렉슬러와 비교해도 초라해보인다. 그렇지만 이는 전형적으로 스탯만 보고 평가하는 오류인데, 당시 페니의 득점력은 스카티 피펜이나 마이클 조던이 이끄는 불스도 위협적으로 느낄 정도였으며 실제로 매직과 불스가 플레이오프에서 붙었을 때도 팀은 털렸지만 조던과 피펜을 상대로 시즌평균보다 높은 25.5득점을 기록했다. 90년대는 지금보다 경기의 페이스가 확연히 느려 경기당 팀 평균득점이 지금보다 현저히 적은 시기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페니의 득점력은 결코 평가절하될 수준이 아니다. 또한 전술했다시피 95-96시즌 샤킬 오닐이 개막전부터 22경기를 연속으로 결장해 자연히 이 기간동안 페니가 팀의 에이스 역할을 하게 됐는데, 포인트가드임에도 불구하고 이 기간동안 무려 평균 27득점을 기록하며 팀을 17승 5패의 호성적으로 이끌었다. 전년도의 활약이 샤킬 오닐과 함께 뛴 혜택을 본 게 아닌가 하는 일말의 의심마저 일축해 버렸음은 물론, 이 기간동안 해당 시즌 72승에 빛나는 불스까지 36득점을 퍼부어 털어버리면서[32] 에이스 본능을 과시했다. 이 기간동안 페니가 보여준 엄청난 퍼포먼스 때문에 팬들과 미디어는 드디어 조던의 뒤를 이을 슈퍼스타가 나타났다며 열광의 도가니였다.
게다가 그 다음 시즌엔 막강한 수비를 자랑하는 히트를 상대로 플레이오프에서 연속 40점을 올렸는데, 팻 라일리의 팀을 상대로 연속 40점을 올리는 업적은, 라일리의 팀을 매년 털었던 마이클 조던도 달성한 적이 없었다. 특히 무리하게 선수를 다루는 감독을 만나면서 문제의 부상이 시작되었다는것. 이미 부상이 있었지만 부상에도 뛰게하는 등의 무리한 경기를 펼치는 경우가 많았고 실제 소심하고 착한 성격의 페니는 어쩔수 없이 받아들였다는게 문제. 좀더 자기를 생각하고 쉬었어야 할 시즌까지 몽땅 뛰었다는게 문제로 결국 부상이 심해지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럼에도 왜 비율스탯이 초라하냐면 전성기 당시 페니의 경기당 기록을 보면 대량득점을 할 때도 있지만(주 옵션인 샤킬 오닐등이 없을때나 공격옵션들이 모두 죽쑤고있을때만 다득점)필요할때만 득점하거나 득점이 유독 적을 때는 어시스트 수치가 높은데, 득점이나 어시스트 중 하나에만 집중하기 보다는 워낙 다재다능해 많은 분야에 공헌했다는 점. 한창 기량이 올라올 때 경기당 평득이 30에 가까운 샤킬 오닐과 뛰었다는 점. 오닐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명실상부한 에이스로 자리잡을 때쯤 부상에 발목잡혔다는 점. 스탯을 그닥 중시않을정도로 이타적인 플레이 등을 들 수 있다.

90년대 초반까지 흐름은 공격농구와 빠른 페이스였으나 조던 1차 복귀 시점 부터 느린 페이스에 수비농구로 흐름이 바뀌었기에 다시 한번 공격농구의 흐름이 도래한 현재 시점에서 1차스탯 볼륨은 페니뿐만 아니라 대다수 PG, SG 선수들의 스탯은 지금과 달리 적은 수치이다.( 마이클 조던은 제외..)[33] 반면 센터, 파워포워드 진은 워낙 압도적인 선수들이 즐비했기에 평균 20득점-10리바운드 선수들이 상당히 많다.사실 이 부분들은 객관적인 수치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동시대를 경험하지 않은 팬들이 이해하기 힘들고, "그래봤자 평득 21득점이 커리어하이인 선수 아니냐, 추억보정으로 과대평가된 것"이라고 하기 쉽다. 그러나 페니는 저 초라한 스탯을 기록하고도 95-96시즌 MVP투표 3위에 올랐다. 그가 제친 대상 중에는 27-11에 가까운 스탯을 기록한 하킴 올라주원과 팀동료인 샤킬 오닐도 있었다. 게다가 최전성기였던 게리 페이튼, 전성기에 비해 한참 꺾였지만 그래도 위력적이었던 존 스탁턴을 제치고 무려 퍼스트팀에 오르기도 했다. 이는 스탯이 어쨌든 간에 당대 전문가들은 그를 리그 최고의 선수 중 하나라고 인정한 것이다.

다만 공격에 비해 수비는 그리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구멍수준까지는 아니지만 탑 클래스 선수로써는 좀 평범한 스탯을 찍었다. 하지만 그가 커리어 내내 포인트가드 포지션이었고 자신보다 작고 빠른 선수들을 막아야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이 때문에 매번 무릎을 굽히고 자세를 낮춰야 했기 때문에 무릎이 성할리 없었겠지만. 거꾸로 작은 선수들이 페니의 큰키에 불편을 호소할정도로 전성기 시절에 대부분의 포인트가드들이 그를 싫어했다. 특히 코트비전에 의한 가로채기가 일품이었는데 처음 데뷔 당시부터 이미 스틸은 수준급으로 경기당 평균 2.3을 찍은 상태였다. 당시 96/97시즌까지 웬만한 스탯에서 상위권에 페니의 이름을 보게되었으나 브라이언 힐 감독의 경질 이후부터 서서히 내려가던 스탯이 어느 감독이후로 곤두박질 치는걸 보게되는데 거기서 부터 페니의 문제가 시작되었음을 알수 있다.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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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클 조던과 매치업하는 이 사진의 경기(1995년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조던은 에어 조던을 신은 이후 선수 생활 역사상 유일하게 에어조던이 아닌 다른 선수의 시그니처 농구화를 착용하였다. 바로 앤퍼니 하더웨이의 첫 시그니처 농구화인 나이키 플라이트 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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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키 에어 페니 시리즈. 최근 줌페니로 바뀌어 계속 출시되고있고 지속적으로 리트로도 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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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지어 나이키에서는 1995년에 페니의 인형 버전인 '릴 페니(Lil Penny)'를 등장시킨 광고를 선보이기도 하였고, 그 둘이 함께한 광고는 98년도 까지 꾸준히 방영되었다. 나이키 초창기 대표모델인 조지 거빈도 같이 찍은 광고도 있을 정도였다.


[1] 맨발 신장 198cm (6' 6") [2] 페니 하면 매직의 뒤를 잇는 장신 포인트 가드의 대명사 같이 인식되지만 막상 1번으로 뛴건 커리어 초창기 3~4년에 불과하다. 문제는 페니의 커리어 초기 4년이 너무나 강렬하다는거... [3] 드래프트 당일 1순위로 올랜도 매직에게 지명된 크리스 웨버와 트레이드 되어 샤킬 오닐이 이끌던 올랜도 매직에서 커리어를 시작한다 [4] 남북전쟁 말기부터 1920년대까지 많이 지어진 미국 남부의 주택 양식으로, 방이 일렬로 돼 있으며 저소득층이 많이 살았다. [5] 외조모 루이스의 차녀로, 1951년생이며 1965~1978년까지 멤피스 지역 초등학교에서 영양사로 근무했다.( 1991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기사) [6] 사실 미국의 소위 말하는 4대스포츠 중에서 부상이 가장 잦은 스포츠는 미식축구와 아이스하키, 그 다음이 농구와 야구다. 페니가 성인이 돼서도 호리호리한 체격을 가졌다는 점, 부상이 엄청나게 잦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미식축구를 했으면 부상으로 인해 선수생활이 NBA에서보다 더 짧아졌을 가능성도 높다. [7] 여담이지만 미국에서는 진짜 프로진출을 진지하게 노리는 운동부들과 동아리 정도로만 운동을 하는 학생선수들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에 NBA급 선수들은 다른 선수들과 수준 차이가 엄청 나서 고등학교 때 진짜 말도 안되는 스탯을 찍는 경우가 많다. 한 마디로 양학. 고졸로 NBA에 직행한 코비 브라이언트, 케빈 가넷은 각각 30.8점 12리바운드 6.5어시스트 4스틸 3.8블럭, 25.2점 17.9리바운드 6.7어시스트 6.5블럭을 기록했으며 마이클 조던은 4학년 때 29.2점 11.6리바운드 10.1어시스트로 트리플 더블을 찍었는데도 원하던 대학인 노스캐롤라이나 스테이트에 진학하지 못했다. [8] 당시 페니를 스카웃하려고 했던 농구팀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페니는 너무 착해서 주변사람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을까 걱정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루이스 여사가 "당신, 누구 말을 믿는 거야? 나야? 아니면 기자들이야?" 라는 말을 듣고 페니를 데려올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고. [9] 페니의 왼쪽 발목 위에 있는 불독 문신이 이 총상자국을 덮은 문신이다. [10] 테네시 주 멤피스 태생. 멜로즈 고등학교 졸업 후 1970년 멤피스 주립대학교에 진학하여 진 바토우(1930~2012) 감독의 지도를 받아 3학년 때인 1972-73 시즌에 후배 래리 키넌 등과 함께 농구부를 NCAA 전국대회 결승까지 올리는 데 주력했고, 1973년 NBA 드래프트에서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에 68번으로 뽑혔으나 ABA 팀 멤피스 탐스(사운즈)로 가 2년 간 프로 선수로 뛰었다. 은퇴 후 1978년부터 새로 창단된 앨라배마 대학교 버밍햄 캠퍼스(UAB) 농구부 코치로 합류하여 은사 바토우 감독 옆에서 일하다가 1979년부터 모교인 멤피스 주립대 코치로 돌아가 다나 커크 감독을 보좌하며 1985년 전국대회 4강 진출에 기여했다. 1986년부터 감독으로 승진 후 임기 11년간 페니와 데이빗 본 외에 엘리엇 페리, 로렌젠 라이트, 세드릭 헨더슨 등을 길러냈다. 퇴임 후 1998년에 셸비 카운티의 등기관 후보로 나서려다 가이 베이츠(1919~2000)에게 패했고, 2002년부터 뇌졸중으로 투병하다 2011년에 숨을 거뒀다. 2000년 멤피스대 캠퍼스 안에 그의 이름을 딴 농구 훈련장이 세워지기도 했으며(2017년부터 배구부가 사용중), 2021년 10월에는 '래리 핀치 광장(Larry Finch Plaza)'을 조성하며 그의 선수 시절 모습을 본뜬 동상을 세웠다. [11] 릭 배리의 차남. [12] 1991~1995년까지 존속한 NCAA 디비전 1 컨퍼런스로, 멤피스대 외에 루이빌대, 앨라배마대 버밍햄 캠퍼스(UAB), 드폴대, 신시내티대, 튤레인대 등이 소속돼 있었다. 해체 후 소속 학교들은 새로 생긴 '컨퍼런스 USA' 등지로 흩어짐. [13] 당시의 선수들이 훗날의 토크쇼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경기에서 드림팀 선수들은 나름 핸디캡을 적용한다고 초반에 일부러 쉬엄쉬엄 뛰다가 어느 정도 점수 차이가 벌어지면 그때 제대로 뛰어서 따라잡을 생각이었다고 한다. 문제는 연습 경기라 풀타임이 아니어서 점수 차이가 벌어지고 드림팀이 이제 막 제대로 해보려고 했는데 경기가 끝나버렸다고 한다. [14] 웨버 또한 커리어 내내 부상과 싸운 선수였다. 신인상 이후 돈 넬슨과 역할차이로 루키 시즌 이후 워싱턴으로 이적하게되었고 결과적으로 웨버와 GSW에게 모두 악영향을 미쳤다. 파워포워드이면서도 매직 존슨이 우상이였던 웨버는 주로 외곽에서 공을 잡고 자유롭게 플레이 하고 싶어했지만 골밑에서 센터로 쓰고 싶어했던 넬슨과 마찰이 생겼음은 당연했다. 그러나 워싱턴 이적 후 부상으로 제대로 된 활약을 펼치지 못했으며 비로소 96/97시즌이 되어서야 다시 한 번 그 명성을 되찾았다. [15] 워리어스 역시 웨버, 라트렐 스프리웰, 팀 하더웨이를 중심으로 어느덧 베테랑이 된 멀린이 보조자 역할을 담당하여 상당히 화려한 선수 구성과 공격적인 농구로 현재 워리어스 못지 않은 인기를 얻을 수 있었으나, 웨버가 떠난 후 팀의 구심점을 잃고 팀원간의 불화로 현재 스테판 커리 시대가 오기까지 긴 암흑기에 들어갔다. 물론 06-07시즌 배런 데이비스 중심 시즌과 몬타 엘리스가 이끈 기간도 있지만 철저히 워리어스는 지금과 달리 비주류 중의 비주류 팀이였다. [16] NBA 공식 채널에서 은퇴한지 한참 지난 선수의 Top 플레이 영상을 별도로 올려주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다. 대개 은퇴선수들은 명예의 전당 헌액때나 짤막하게 현역시절 Top 플레이 영상을 올려주는 경우가 보통인데, 페니의 경우 명전 멤버도 아니면서 지난 2017년에도 Top 40 플레이 영상을 올려줬고, 2021년에도 이처럼 또 영상을 올려줬다. 후술된 과대평가 논란과 별개로 페니가 NBA에서 활약할 당시 스탯 이상의 임팩트와 영향력, 스타성을 뽐냈던 선수임은 분명하기에 이런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다. 해당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단순히 플레이를 잘한다는 영역을 넘어 특유의 센스가 번뜩이는 장면들이 많다. [17] 통산 11점 6.5어시스트를 기록한 평범 그 자체였던 포인트 가드였으며 오히려 이후 감독으로 더 성공한 케이스. 통산기록이 저 정도이면 평범이 아니라 준수한 기록이다. 그러나 90-91 시즌에는 NBA역사에 남을 대기록을 세웠는데, 한 경기에서 무려 30어시스트를 기록한 것. 역대 최고의 어시스트 기계였던 존 스탁턴조차 한 경기 최대 기록은 28개에 불과(?)하다. 참고로 이때 스카일스는 17.2점 8.4어시스트를 생애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아이러니한 건 스카일스와 페니의 전성기 실력이나 위상은 비교도 안됐음에도 (스카일스는 올스타에도 한번 뽑혀 본적이 없지만 페니는 한 때 강력한 MVP후보였다) 페니가 말년에 워낙 많이 깎아먹어서인지 페니의 통산 스탯은 15.2점 5어시스트로 스카일스와 별로 차이도 안 난다. [18] 복귀한 시즌이라 폼이 예전같지 못했다. 특히 돌파를 하다가 공을 뺏기고 넘어지는 등의 플레이가 상당히 많았다. 물론 다음 시즌부터 처절하게 복수하지만... [19] 단적인 예로 2022-23시즌에 평균득점 20득점 이상을 기록한 선수가 총 43명인데 1995-96시즌은 20명으로 절반에도 못미친다. 평균 24득점 이상으로 기준을 향상시키면 2022-23시즌은 20명, 1995-96시즌은 5명밖에 되지 않는다. 지금으로 치면 페니가 이 기간동안 기록한 평균 27득점은 현재 기준으론 최소 30득점 내지 그 이상의 가치 혹은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고 봐도 과장이 아니다. [20] 오히려 이런 페니의 맹활약이 사후적으로 매직 보드진이 오닐을 과소평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로지 음반, 영화 등 농구 외적인 활동때문에 레이커스로 갔다는 의견은 터무니 없는 것이다. 아무리 오닐이 엔터테이너 기질이 다분했어도 가장 중요하게 여긴것은 농구이다. 이미 많은 인터뷰에서도 나왔듯이 본인이 최고 선수 중 1명이라는 자부심 볼 수 있는데 부가적인 활동 때문에 LA로 이적한 것은 결코 아니다. [21] 다만 매직이 오퍼한 액수가 지나치게 적었기 때문에 오닐이 레이커스로 이적했다는 오해가 있는데, 당시 매직은 오닐에게 1억 달러 이상을 오퍼했다. 오프시즌이 열리자 레이커스는 블라디 디박을 보내고 캡룸을 확보해 7년 / 9,500만 달러를 오닐에게 오퍼했으나, 이후 매직이 같은 기간동안 1억 1,500만 달러를 오퍼했다. 당시 오닐의 데뷔 동기인 알론조 모닝이 7년/총액 1억 5백만달러로 계약했으니 금액 상으로 오닐의 자존심을 세워주긴 충분했다. 문제는 이 때 보인 올랜도의 태도. 당시 구단주 리치 드보스는 이 액수가 최종오퍼라고 밝히면서 언론에 "만약 (오닐과 에이전트가) 1~2백만 달러 더 쥐어짜내려고 한다면 레이커스보고 내라고 하세요."라고 했으며, 지역언론인 올랜도 센티널은 "오닐이 저 액수를 지불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란 독자 설문을 했는데 이에 91%가 "그만한 가치가 없다"는 답을 했는데, 오닐은 이에 대해 불쾌감을 표했다. 반면 레이커스는 추가 트래이드를 통해 7년 / 1억 2천만 달러를 오퍼했고, 주전 센터까지 버려가며 자신을 잡기 위해 올인하는 레이커스의 태도가 오닐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22] 참고로 불스는 이시즌 NBA 역대 최다승 2위 기록인 72승 시즌 [23] 당시 하더웨이는 불스 시리즈에 4경기 전부 출장해 43.8분을 뛰며 건강하게 뛰었고(오닐은 42.8분), 97년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도 시리즈는 패배했지만 모든 경기를 뛰며 44.4분을 뛰었다. 또한 데뷔 루키시즌 전경기, 2년차이던 94-95시즌엔 77경기, 96시즌엔 전경기를 뛰며 이때까지는 내구성에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96-97 정규시즌 부상 때문에 58경기에 그치면서 내구성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한 가지 더 추가하면 페니는 연간 1천 만 달러 이상 받는 선수로 당시 하킴 올라주원, 패트릭 유잉, 알론조 모닝 등등의 엘리트 선수와 같은 수준이였고 리그 탑 10에 드는 연봉이였다. [24] 당시 드림팀에서 가장 좋은 활약을 보여준 선수들은 페니, 밀러, 피펜, 데이비드 로빈슨 이였다. 당시 레니 윌킨스 감독은 베테랑 중심의 보수적인 로스터를 운영했고 막내 선수들이였던 힐, 페니, 오닐은 특히 더 적은 플레잉타임을 할당 받았다. [25] 당시 히트는 팀 하더웨이, 알론조 모닝, 댄 말리, 자말 매쉬번 등 화려한 선수층과 평균 94.8득점, 89.3실점으로 마진 +5.56으로 동부 2위, 전체마진 4위등 매우 강력한 전력을 자랑했다. 이 당시 NBA는 골밑 중심의 느린 페이스 시대였기에 평균 100득점 넘는 팀은 8개팀에 불과했다. [26] 이 기록은 팻 라일리가 지도하는 팀을 상대로 사상 처음 달성한 기록이다. [27] 그랜트 힐도 MVP급 활약을 보이지는 못했다. 물론 개인성적과 기량은 96-97과 비슷한 슈퍼스타급을 유지했지만 플레이오프 자체를 나가지 못했으며 무엇보다 어린 선수들이 확치고 오는데 힐은 리그 슈퍼스타 다운 임팩트를 주기에는 어딘가 부족했다. [28] 이 시즌을 기점으로 베테랑 선수들의 기량하락과 은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시즌 종료 이후 직장페쇄까지 겹쳐서 컨디션 조절에 실패한 선수들이 넘쳤다. 이 시즌 종료 후 조던, 드렉슬러가 은퇴했고 하킴, 유잉, 바클리, 로드맨, 케빈 존슨, 미치 리치몬드등 80년대 중후반드래프트 선수들의 노쇠화가 본격적으로 시작 되었으며 데이비드 로빈슨은 98/99시즌 부터 에이스 자리를 팀 던컨에게 양보했다. 숀 켐프와 빈 베이커는 체중관리 실패로 빠르게 정상에서 내려왔다. [29] 직장폐쇄, 즉 주완 하워드, 글렌 로빈슨, 케빈 가넷 등 당시 젊은 선수들의 폭발적인 연봉 상승으로 각 팀 들의 급여체계 근본적으로 흔들려서 선수들이 파업을 한 것이 아닌 팀들이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시즌을 연기한 시즌으로 선수들 프리시즌이 엉망이 되었고 당시 팀당 득점 대다수가 80점대 수준에 머무르는 고구마 경기가 진행되었다. 단축기간 동안 선수들이 모여 훈련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니 선수 개인이나 팀 전력 모두 이전 시즌에 비해 눈에 띄게 효율성이 떨어졌고 저득점 경기가 연일 발생했다. [30] 단축시즌 및 마이클 조던의 은퇴와 불스왕조 해체로 큰 위기가 왔으나 빈스 카터 제이슨 윌리엄스라는 정말 역대급으로 화려한 플레이를 펼친 신인들이 출몰하여 NBA를 위기에서 구했다고 해도 거짓말이 아니었다. [31] 조던은 그 자체가 브랜드가 된 선수이니 예외로 하고 코비, 르브론 등 역대급 선수들만이 시그니처 모델이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는데 짧은 전성기를 보낸 페니의 케이스 유례를 찾기힘든 나이키 영업정책으로 볼 수 있다. [32] 이 시즌 불스가 당한 10패 중 첫 패가 바로 페니가 이끌던 매직에게 당한 것이었다. [33] 사실 마이클 조던도 워낙 실력이 넘사벽이어서 스탯이 꽤 높은 편이었지, 그의 진짜 실력 및 당시 리그 내 위상에 비해서 스탯이 상당히 낮게 나왔다. 당시 조던은 독보적인 리그 최고의 선수이자 최강의 득점원이었으나, 리그 전체적인 페이스가 워낙에 느려서 평균득점은 97시즌에 29점, 98시즌엔 28점 언저리에 불과했다. 이런 흐름은 99년에 평균 26.8득점인 아이버슨이 득점왕에 오르며 정점을 찍는다. [34] 18-19시즌 기준으로 본다면 조엘 엠비드 벤 시몬스 콤비가 원투 펀치로 동부를 제패하고 결승에 올랐다고 보면 된다. [35] 하지만 이 배우의 데뷔는 99년에 방영된 미드다... [36] http://nbamania.com/g2/bbs/board.php?bo_table=maniazine&wr_id=123489&sca=&sfl=wr_subject&stx=%ED%95%98%EB%8D%94%EC%9B%A8%EC%9D%B4&sop=and&scrap_mode= [37] https://nbamania.com/g2/bbs/board.php?bo_table=maniazine&wr_id=1722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