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프랑스어: Pari de Pascal영어: Pascal's Wager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이 제시한 철학/ 기독교 변증법.
신이 존재하지 않지만 신을 믿을 경우[1] 잃을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신이 존재하고 신을 믿으면, 다시 말해 옳은 선택을 했다면 영원한 행복을 얻을 것이다.
반면 신이 존재하지 않고 신을 믿지 않는다면[2] 얻는 것이 하나도 없으나 신이 존재하는데 신을 믿지 않으면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다.
반면 신이 존재하지 않고 신을 믿지 않는다면[2] 얻는 것이 하나도 없으나 신이 존재하는데 신을 믿지 않으면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다.
신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와 신이 존재할 경우, 두 가지 중 후자의 확률이 아무리 희박하더라도, 신이 실제로 존재할 경우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큰 손실을 가져다준다는 것이 요지.
종교뿐만 아니라 확률론, 실존주의 등에도 골고루 영향을 끼친 논제다.
2. 비판
2.1. 비종교적 비판
번역 출처[3] 그림의 신은 힌두교의 신 가네샤. |
단순히 수지타산만 따지면 꽤나 합리적인 이론인 것 같아 보이긴 하지만 파스칼의 내기의 치명적인 오류는 기독교적 세계관만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기독교 외의 다른 종교들의 신을 고려하지 않았다.
현실에는 기독교 외에도 이슬람교, 불교, 힌두교 외에도 여러 고대 종교와 신화들, 여러 이단, 사이비 종교 등의 수많은 종교와 다양한 종파, 신이 있다. 또 내기에서 가정하는 기독교 내에서도 가톨릭 · 정교회 · 다양한 개신교 교파같은 식으로 종파가 나뉘어 있으며, 일부 종파는 서로를 이단으로 여기는 경우도 있기에 제대로 따지려면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한 "신"의 경우도 따져야 한다.
즉 "기독교를 믿은 경우의 수" 하나와 "신을 믿지 않은 경우의 수" 2개의 경우뿐만 아니라 아니라 "A라고 하는 신을 믿은 경우의 수", "B라고 하는 신을 믿은 경우의 수" 등등이 존재하며, 기독교를 믿은 경우의 수는 1/2의 경우가 아니라 무한에 가까운 경우의 수 중 단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 하느님을 믿으면 잃을 게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해 이승에서 열심히 하느님을 믿었는데, 정작 죽어 보니 자기가 이승에서 열심히 믿었던 하느님이 아니라 자신을 믿지 않는 자는 지옥에 보내는 다른 신이 다스리고 있다면?[4] 혹은 악마가 결국 패권을 잡은 상태라서 거꾸로 하느님을 믿는 사람만 지옥에 보낸다면?[5] 그리고 기독교에서 파생된 사이비 종교나 신흥종교들과 기독교 내 교파까지 고려하면 경우의 수는 더 늘어난다.
또한 이 주장은 주장 자체가 17세기 유럽에서 시작된 만큼 아예 그리스도교적 가르침을 기본적인 전제로 깔고 시작한다. 애초에 하느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것을 누가 정했는가? 상단의 예시 문장에서 '하느님' 부분만 아무 것으로나 바꿔서 생각해 보면 된다. 논리적 오류 중 하나로, 이름을 하나 제시하자면 바로 이런 걸 "가정 망각의 오류"라고 부른다.
이 내기에는 중요한 부분이 빠져 있다. 내기의 내용의 손익계산은 '유신/무신' x '신앙/무신앙'인데, 정작 현실의 경우에는 '유신/무신' x '신앙/무신앙' x '믿음의 대가 유/무'로서, 믿는다고 해서 손해볼 게 없다고 하는데 이는 틀렸다. 가볍게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시간이나 심력, 재산 등을 투자해야 하고 종교 규율을 따르려는 노력이나 제약이 따른다. 무겁게는 종교로 인한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점들을 감수해야 하는 대가도 치러야 한다. 만약 당신이 사이비 종교를 믿는다면 대가는 더욱 커질 것이다. 또한 위에 언급된 것처럼 전능한 하느님이 기독교인을 혐오하는 하느님이라는 가정 등이 언급되고는 한다. 이 경우에는 같은 논리로 안 믿는 것이 이득이다! 이 경우 파스칼이 애당초 하느님의 존재 가능성 그 자체에 대해서 논하지 않았음을 지적하는 식의 반론과 엮어서 언급된다. 또한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하느님이 내려주는 보상이 제아무리 크더라도, 지금 당장 주머니 속의 10원짜리 한 닢보다 낫다고 말할 수 없다. 다만 하느님을 믿음으로서 얻는 보상 중에는 심리적인 위안 같이 확실하게 현실에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존재하나 이것은 내기와는 별 관계없는 종교의 순수한 긍정적인 측면이다.
2.1.1. 반론
파스칼의 내기의 핵심은 종교적 신념보다 불확실한 상황에서의 논리적 선택 원칙을 다룬다. 신앙심이 별로 없었던 존 폰 노이만이 이 논리적인 이유에서 신을 믿었다.[6] 파스칼의 논증은 "정확한 확률을 모르고 혹여 확률이 작더라도 그게 손실이 적고 무한한 보상이 가능하다면 기댓값이 큰 것이니, 이를 추구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실용적 논리로 본다. 파스칼의 내기는 실용적인 추론에 기반한 것이고 무한한 보상은 단순한 개념적 도구일 뿐이다. 무한한 보상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지만, 파스칼은 극도로 큰 보상을 상정해도 여전히 그 보상에 대한 확률적 기대값이 크다. 만약 보상이 크고 손실이 적다면, 확률이 적더라도 이를 추구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신앙 생활에 대한 부분도 파스칼의 내기는 비용과 이익을 모두 고려한 것이다. 신을 믿지 않을 때의 손실에 비하면, 신앙 생활에 들어가는 비용은 상대적으로 미미하다. 외부적인 신앙 생활을 반드시 해야하는 것은 아니며 그냥 신을 믿는 것에 10원 한장 들지 않기 때문이다.
2.2. 종교적 비판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온갖 신비를 환히 꿰뚫어 보고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3장 2절 (공동번역)
고린도전서 13장 2절 (공동번역)
우선 종교적 신념이 손익 계산의 대상이 될 수 있느냐는 질문과 함께[7], 설령 이런 계산 끝에 종교를 가진다고 한들, 모든 것을 볼 수 있다는 그 전능하신 하느님이 이것을 '진정한 신앙'으로 여길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남는다. 왜냐, 저 말대로라면 하느님을 믿는 것이 진실된 믿음이 아니라 자기가 혹시라도 지옥 안 가고 하느님이 진짜 있으면 이익이니 하느님을 믿자는 건데, 그게 하느님을 제대로 믿는 거냐는 반론이 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파스칼이 이 말을 한 것이 하느님의 존재증명과는 큰 관계가 없다고도 한다.
게다가 분명히 믿음의 대가가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문제는 전형적인 give and take의 경우에 해당하는지라 사후세계의 보상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여 이러한 대가들과 비교해 보아야 하게 된다는 것도 문제가 된다. 즉, 논의 자체가 상당히 계산적으로 변하는 바람에, 정작 종교에서 말하는 신실함과는 십만 광년쯤 떨어진 이야기가 된다는 것. 그리고 애초에 이러한 이유 때문에 종교를 믿는다는 사실은 종교의 본질과 좀 거리가 있는 선택이다. 당장 기독교만 봐도 그렇게 진심이 없고 단순히 합리적인 생각으로 그런다면 진심으로 믿기는 어렵기 때문.
한 종교인은 파스칼의 내기를 부정하진 않았지만 "신앙은 평생에 걸쳐 쌓아 올리는 것인데, 평생 믿지 않았던 것을 죽을 때가 됐으니 믿자고 자신의 마음을 가볍게 바꿀 수 있겠느냐?"며 돌려서 깠다. 실제로 존 폰 노이만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큰 고통으로 말년에 어떻게든 가톨릭에 귀의해보려 했으나, 그리 큰 위안을 받지 못하고 사망했기 때문이다.
3. 여담
여러 가지 논박이 있지만 죽음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는 설득력 있게 느껴지기도 하는 모양이다. 머리 좋기로는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존 폰 노이만도 죽기 직전에 가톨릭으로 귀의하면서 파스칼의 내기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할 정도였으니. 다만 이 역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만큼 젊었을 때부터 믿는 것에 비해 종교를 믿기 위한 누적 비용이 적어 비용 대비 효용이 커진 부분도 있을 수 밖에 없다.파스칼은 어디까지나 인간 사고방식의 예시를 든 것뿐이며, 본인 또한 이미 믿는 사람에게만 주로 먹히는 논리이며 그렇게 좋은 기독교 논증법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했다. 파스칼은 10대에 이미 계산기를 발명하고 그 데카르트와 학문적으로 맞다이를 깼던 사람이다.
파스칼이 도박의 해악을 경계하여 한 말로 알려진 "도박하는 모든 사람은 불확실한 것을 얻기 위해서 확실한 것에 돈을 건다."도 사실은 파스칼의 내기와 관련이 있는데, "어차피 모든 도박은 불확실하므로..."라는 의미.
지구 온난화 같은 문제 또한 파스칼의 내기에 비교하기도 한다. 환경 보호에 투자해서 얻는 이익이 긍극적으로는 지구가 황폐화되는 것보다 낫다는 논리.
웹툰 작가 이말년이 이 문제를 주제로 삼아 2012년 10월 둘째 주 분량부터 연재를 했다.
약 400년 후 로코의 바실리스크라는 이름으로 이 논증이 뜬금없이 부활한 적 있다.
[1]
신 없이는 죽음이 끝이라는 가정 하에.
[2]
마찬가지로 죽음이 끝이라는 가정 하에.
[3]
원작은 '
Rusell's Teapot'이라는 웹코믹.
원본 링크
[4]
힌두교에 전래되는 어떤 이야기는 무신론자가 "신은 없다!"라고 죽을 때까지 되뇌이다가 죽어서 신이 되었다는 흠좀무한 이야기도 있다. 이유는 그가 신이 없다고 되뇌임으로써 신의 존재를 계속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 다만 이건 악마도 신에게 기도하고 수련하면 그 결과가 나올 정도로 유니크한 힌두 신화의 특성 때문이니, 다른 종교에서도 이런 로또를 바라진 말자. 무엇보다 힌두교의 신들은 수억 수천만이라고 할 정도로 신의 수가 많아서, 이게 별 의미 없을 수도 있다.
신사에 모셔진 것을 신이라고 본다면,
일본
신토 정도가 힌두교와 신 머릿수로 붙어볼 만할 것이란 말이 나올 정도. 그마저 인도는 신이 3억인데 일본은 관용어적으로나마 8백만이라 칭해지는 게 고작이다.
[5]
이 내기의 주요 포인트는 매우 큰 보상을 얻고 싶어서 존재확률을 무시하는 것인데, 하느님을 안 믿는다고 지옥에 보내는 하느님이나, 하느님을 믿는다고 지옥에 보내는 악마나 과학적인 존재확률은 차이가 없다.
[6]
이와 관련된 부분이 밑의 종교적 비판 항목에 있는데 '신앙이 적음에도 다른 이유로 믿는 것은 진정한 믿음이라 볼 수 없다'는 의견이다.
[7]
더글러스 애덤스는 '당신을 위해 믿는 일을 대신하는'
수도자 로봇으로 이 논리를 조롱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