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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튀르키예 인구 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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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그리스인과 튀르크인 구분의 난점4. 과정5. 결과6. 예외 지역7. 비슷한 경우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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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19년에서 1922년 사이에 벌어진 튀르키예 독립 전쟁에서 그리스가 패배한 뒤 1923년 그리스 왕국 튀르키예 공화국 간에 인구를 교환하는 협약을 맺어서 총 200만 명 가량이 상호 이주한 사건. 이 협약은 로잔 조약 제6장으로 공식화되었다.

이 합의에 의해서 튀르키예 지역에 살던 130만 명 정도의 그리스 정교도가 그리스로 이주하고 그리스 지역에 거주하던 50만 명 정도의 무슬림이 튀르키예로 옮겨갔다.

2. 배경

본래 튀르크인들은 시베리아에서 중앙아시아까지 널리 분포하던 유목민이었으나 범튀르크 민족에 속하는 여러 민족들(오스만, 베일리크, 셀주크 등등)이 중세부터 계속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원래 이들은 샤머니즘 불교를 믿고 있었으나 서쪽으로 가면서 일부는 기독교화되고 대부분은 이슬람화되었다. 이들 중 이슬람을 신봉하던 오스만 제국 동로마 제국을 정복하고 서아시아-북아프리카-남동유럽( 발칸반도)에 걸치는 대제국을 세웠었다.

오스만 제국은 기독교( 정교회)를 믿고 있던 여러 민족들에게 개종을 그다지 강요하지 않은 데다[1] 기본적으로 민족 단위의 자치를 허용했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 내의 그리스인이나 슬라브인들은 종교, 언어, 풍습 등 자신들의 정체성을 보존하면서 존속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오스만 제국 내에는 상당히 많은 정교회 인구가 포함되어 있었다.[2] 뿐만 아니라 제국의 영역 안에 여러 민족의 공동체가 섞여 살고 이들이 제국의 각 영역으로 이주하다 보니 그리스인 무슬림과 튀르키예인 기독교도 혹은 튀르키예어만 할 줄 아는 그리스인과 그리스어만 할 수 있는 튀르키예인과 같은 존재도 나온 것이다.[3]

1832년 그리스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그리스는 발칸반도 아나톨리아 전역의 모든 그리스 민족의 통일과 고대 그리스 동로마 제국 영토의 회복을 주창하는 이념인 메갈리 이데아(Μεγάλη Ιδέα)를 국시로 삼고 그리스인 거주 지역을 중심으로 확장해 나가는 정책을 펼쳤다. 이후 80여 년에 걸쳐서 테살리아, 마케도니아, 크레타, 동부 에게해 제도 등을 야금야금 빼앗아 오던 그리스에게 드디어 메갈리 이데아를 현실화할 둘도 없는 기회가 생겼는데 바로 숙적 오스만 제국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동맹국으로 참전했다가 패전해 패전국이 되고 그리스는 협상국의 일원으로서 승전국이 된 것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종결 이후 세브르 조약이 체결되면서 그리스는 콘스탄디누폴리를 제외한 유럽 튀르키예 전역과 스미르나 일대를 할양받아 아나톨리아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조약 결과 오스만 제국은 빈사 상태가 되었고 세르비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슬라브족 다수 지역을 차지했으니 관심이 없을 것이고 알바니아는 아나톨리아를 수복한 뒤 곧 잡아먹을 약소국일 뿐이며 불가리아는 패전국이라 할 말이 없으니 자신들을 막을 나라는 없을 것으로 생각한 그리스는 내친 김에 최종 목표인 옛 수도 콘스탄디누폴리 아나톨리아를 수복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 지금이야 국력으로는 그리스가 튀르키예에게 상대가 안 되지만 당시 세브르 조약으로 아나톨리아만 남게 된 1919년의 오스만 제국의 인구는 고작 1,463만 명이었고 그리스 인구가 480만 명이었으며 오스만 영토 일대에 거주하던 그리스인 인구가 200만 명에서 250만 명 사이였다.

처음 그리스군은 아나톨리아를 갈라먹으려는 협상국과 함께 오합지졸 튀르키예군을 박살내고 튀르키예 대국민회의 소재지인 앙카라 근교까지 진격하는 등 승기를 잡았으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규합한 튀르키예군에 의해 패배하고 말았다. 결국 그리스는 스미르나를 비롯한 아나톨리아의 거점과 동부 트라키아를 모두 잃고 에게해에 있는 대부분의 섬을 보전하는 선에서 물러나야 했다.

파일:external/mediaevalmusings.files.wordpress.com/800px-asiaminor1910.jpg
1910년 당시 아나톨리아와 그 주변부의 민족 분포.

발칸 전쟁부터 시작해서 제1차 세계 대전, 그리스-튀르키예 전쟁에 이르기까지 근 10년 간 이어진 두 나라의 적대 관계는 서로 증오밖에 남지 않게 만들었다. 발칸 전쟁에서 지고 대부분의 유럽 영토를 빼앗긴 튀르키예는 분풀이로 자국 영토 내 그리스인들을 박해했고 1차 대전부터는 그리스인을 아나톨리아에서 아예 지워 버리기 위해 그리스인 수십만 명을 학살하였고 1차 대전 승전국이 된 그리스 역시 이를 앙갚음하는 차원에서 자국군 점령 지역에서 튀르키예인들을 학살하였다. 그리고 그리스-튀르키예 전쟁에서 그리스의 패배가 확실해지자 다시 튀르키예인들이 그리스인에게 보복하기 시작했으며 유명한 스미르나 대화재는 그 정점이었다. 수십만 명의 그리스인들이 튀르키예인들의 보복을 피해 그리스 본토로 도망쳤고 남은 그리스인들 역시 언제 보복을 당하지 않을까 공포에 떨어야 했다.

이러한 상태에서 복귀한 그리스 총리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는 메갈리 이데아가 실패로 돌아간 상태에서 튀르크인의 보복으로부터 아나톨리아의 그리스인이라도 최대한 구해내기 위해 국제연맹을 중재인[4]으로 하여 서로 상대방 국가에 살던 그리스인과 튀르키예인을 교환하자는 인구 교환을 제안했다. 그리고 자국에서 그리스인들을 완전히 축출하여 새롭게 튀르크인의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싶어했던 튀르키예 정부가 여기에 동의하면서 두 나라 사이에 대규모 인구 교환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3. 그리스인과 튀르크인 구분의 난점

아나톨리아는 리디아 왕국 등 관련 기록을 보듯 청동기 시대까지는 그리스 문화권과 별개의 문화를 지닌 지역이었으나[5] 기원전 8세기 이후 그리스 폴리스들이 에게해 연안을 따라 식민도시[6]들을 세우면서 오히려 그리스 본토보다 그리스 문화가 더 번영을 누렸을 정도로 융성을 거듭하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페르시아 정복 이후인 헬레니즘 시대 이후부터는 셀레우코스 제국, 폰토스 왕국 등등이 내륙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확고한 그리스 문화권 지역이 되었다. 로마 제국 시절에도 이 지역은 그리스어가 공용어로 통용되었고 그리스반도가 경제적으로 몰락한 서기 3~4세기 이후에도 여전히 번영을 유지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동로마 제국 치세를 지나면서 아나톨리아 내륙에서 지방어가 사멸되고 내륙 농촌의 주민들까지 모어로 그리스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즉 이곳은 모두 그리스 문화권이 된 것이다.

하지만 중세 만지케르트 전투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튀르크인이 들어와 그리스인들이 살던 아나톨리아에 자리잡게 되었다. 뒤늦게 들어온 튀르크인들은 원래 살고 있던 그리스인들을 학살하거나 추방한 것이 아니라 신민으로 지배했고 결과적으로 11세기부터 동거하게 된 이 두 민족은 서로 엄청난 영향을 주고받았다. 동로마 제국 시절 튀르크인이 동로마 제국군 용병으로 복무하는 경우도 있었고( 투르코폴레스) 반대로 오스만 제국 시절 그리스인이 정부 고위직을 차지하여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경우( 파나리오테스)도 있었다. 서로 결혼하는 일도 흔했고 튀르크인들이 동로마 제국 지배 아래서 기독교로 개종하거나 그리스인들이 오스만 제국 아래서 이슬람교로 개종하는 일도 잦았다. 오스만 제국 시절만 쳐도 500년 넘게 같이 부대껴 산 것인데 실제로는 만지케르트 이전부터 튀르크인은 아나톨리아에 들어와서 그리스인과 살았으니 그러니 실제로는 1,000년 가까이 좋든 싫든 그리스인과 튀르키예인은 나란히 살았던 것이다. 이렇게 오랜 기간 두 민족이 비슷한 영토에 살았는데 통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리스인들이 살고 있었던 아나톨리아뿐만 아니라 그리스 민족의 근거지인 발칸반도 남부조차도 튀르크인들이 적지 않았다. 오늘날 그리스 도시 각지에 오스만 시대 모스크 유적들이 정교회 성당으로 개조된 것만 보아도[7] 그 규모를 쉽게 가늠해 볼 수 있다. 더욱이 가가우즈인의 사례에서 보다시피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기 2세기 전 서기 13세기 무렵부터 튀르크인 용병들이 발칸반도 각지에 용병으로 정착했고 이는 그리스인과 튀르크인 사이의 구분을 더욱 모호하게 만들었다. 그리스가 약 4백여 년간 오스만의 지배를 받는 동안 튀르크족들은 여러 이유로 제국의 전역에 퍼졌는데 그리스 영토에도 상당수의 튀르크인들이 이주해 왔다. 오스만 술탄은 군인들에게 이크타(اقطاع)라는 토지 수조권[8]을 하사했고 튀르크 전사들은 그리스 농민들을 소작농으로 두게 되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인들은 오스만의 지배를 받을 때부터 그리스인 이슬람교 개종자를 튀르크인으로 간주해 경멸해 왔고 결국 이런 정서는 훗날 종교로 민족을 분류하는 근거가 되었다.

실제로 여기서 끝나지 않고 그리스인들과 튀르키예인들은 요리나 복식, 국민성이 유사한 경우가 많고, 외모로 튀르키예인과 그리스인을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민족주의가 강하게 자리잡은 오늘날 그리스와 튀르키예에서 두 국가의 문화가 비슷하다고 하면 좋은 소리를 듣지는 못할 것이다.[9] 서로의 언어도 뿌리는 다르지만, 워낙 오랫동안 엉켜 살다 보니 그리스어-튀르키예어가 짬뽕된 피진어를 사용하는 지역이 많았다.[10]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수단은 소속 종교밖에 남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정교도라면 그리스인으로, 무슬림이면 튀르키예인으로 판명하기로 했다.

하지만 종교를 통한 구분 역시 현실의 사회상과 일치하지 않았다. 1,0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그리스인과 튀르키예인들 간의 문화적 교류는 굉장히 깊었고 따라서 이오아니나, 테살로니키 같은 그리스 영토에 살며 그리스어를 쓰면서도 종교는 이슬람을 믿는 무슬림이고, 반대로 사는 곳은 아나톨리아이며 언어도 튀르키예어를 쓰지만 종교는 정교회인 경우도 엄청나게 많았다. 이에 대해 종교 하나만으로 튀르키예인, 그리스인으로 선을 그어 그 동네에서 수백 년간 뿌리 내려 살던 사람들을 '외국인'으로 규정하고 추방했다.[11]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40px-Sille_Agia_Eleni_Inscription.jpg
327: tarihinde bu serrif ekklesemizi
Ayia Eleni Mihail Arhangelos ismine kurtu temeli
hale ekklissiamızın uçuntu tamiri
Sefketlu Sultan Mahmut efentimiz ihsan eyletti emri
Epitropos Sarraf XA İlia oldu Tekmil nazın Mihael Arhangelosun sefaati ilan Hak ta ale
imtat etenlere ve zahmet çekenlere vere eciri
sine: 1833: Feb 12

327년에 이 신성한 우리의 교회는 성녀 엘레니와 미카엘 대천사의 이름으로 세워졌다. 현재 모습은 우리 교회의 세번째 수리로, 위대한 술탄 마흐무트 폐하의 명으로 이루어졌다. 명령은 감독관, 금세공인 하즈 일리아스가 받들었다. 미카엘 대천사의 중보를 기원한다. 기도하고, 노력한 일꾼들에게.
1833년 2월 12일

당시 그리스 민족과 튀르키예 민족이 얼마나 섞여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위 사진에 나타나 있는 콘야의 실레(Sille) 마을에 위치한 아야 엘레니(Aya Eleni) 성당의 입구에 그리스 문자로 쓰여진 명문이 있다. 이 명문은 아나톨리아 내륙 지역인 카파도키아 지방의 카라만인들이 작성하였으며, 튀르키예어를 그리스 문자로 작성한 게 특징이다. 카라만인들은 튀르키예어를 사용하는 정교도였는데 이들이 어째서 그리스 문자로 튀르키예어를 쓰면서 신앙은 정교회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원래 그리스계였으나 튀르크어와 문화를 받아들이되 종교만 남은 경우일 수도 있고 동로마 시절에 그리스 정교로 개종한 후 오스만 제국까지도 정교도로 남아 있는 경우일 수도 있고 본래 무슬림이었지만 그리스 민족에 동화된 경우일 수도 있다.[12] 분명한 건 카라만인들의 묘비나 기록들에 남은 이름들을 보면 미카일, 니콜라오스, 마리아 같은 전형적인 그리스도인 이름을 쓰고 있다는 점과 성씨를 붙이지 않고 ~의 아들, ~의 딸로 표기하는 옛 튀르크인들의 전통도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다.[13] 이들이 살던 지역에 있는 교회에 가면 전례문을 그리스 문자로 썼는데 그리스어가 아닌 것들이 있다.[14] 이것은 비록 근대 이전에도 그리스어 모어 화자는 정교회를 믿고 튀르키예어 모어 화자는 이슬람교를 믿는 게 일반적이긴 했지만 꼭 반드시 그렇게 깔끔하게 나누어지지 않았다는 점으로 설명된다. 이즈미르, 트라브존 같은 그리스 영향이 깊었던 지방은 구어로는 튀르키예어를 쓰면서도 문자는 그리스 문자를 쓰는 경우도 흔했고 코렐리의 만돌린을 쓴 저자인 루이 드 버니어의 소설, 날개 없는 새에서 이런 사회상이 잘 묘사되어 있다. 동시대를 살아간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여러 소설에도 20세기 초반 그리스인들과 튀르크인들이 서로 증오하면서도 떨어지기 힘든 관계들이 잘 묘사되어 있다.[15]

결과적으로 20세기 시점에서 튀르키예인과 그리스인을 분명히 결정하는 절대조건은 찾을 수 없었고 결국 남은 것은 종교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혈통이나 언어가 아무리 주류민족에 해당한다고 해도 (즉, 튀르키예에서는 튀르크어를 쓰는 튀르키예 혈통인, 그리스에서는 그리스어를 쓰는 그리스 혈통인) 종교만을 기준으로 양국은 소수 종교인(즉 그리스 입장에서는 이슬람교도, 튀르키예 입장에서는 기독교도)들을 타민족으로 간주해 추방하기로 결정했다.

4. 과정

1923년부터 양국의 합의에 따라서 튀르키예 정부는 "그리스인", 그리스 정부는 "튀르크인"에게 자국을 떠날 것을 명령했는데 그 결과 많은 "그리스인"들이 튀르키예를 떠났고 마찬가지로 "튀르크인"들은 그리스를 떠났다. 도시에서는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가 서로 섞여 살고 있었지만 농촌에서는 각 종교 신자들이 마을 단위로 모여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많은 마을들이 버려져 폐허가 되었다. 사실 발칸 전쟁에서 패한 직후부터 오스만 영내의 기독교 신자들에 대한 많은 탄압과 학살이 있었기 때문에 이미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오스만 영토를 떠나 다른 나라로 이주하고 있던 상태였다. 각 난민들이 남겨두고 떠난 재산은 모두 몰수되어 각 정부의 재산이 되었고 이 점에 있어서는 부유한 그리스계 인구가 남겨둔 재산을 거저 얻은 튀르키예 정부가 훨씬 더 이익을 얻었다. 이스탄불 등의 도시지역의 일부 그리스인들은 추방명령에서 면제되어[16] 원하면 튀르키예에 계속 남을 수 있었으나 이들 역시 튀르키예 당국의 지속적인 박해와 1955년 이스탄불 포그롬(박해) 이후에는 거의 그리스로 이주했다.[17]

이런 인구교환 후에 갈등요소가 해소된 탓인지 인구 교환 직후부터 적어도 정부 차원의 그리스-튀르키예 관계는 일정 부분 해소되었다. 튀르키예 공화국은 자국내 그리스인들에게 여러 차별정책을 폈지만[18] 정작 그리스와는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그리스-튀르키예 전쟁의 주역이자, 이 교환을 주도한 케말 아타튀르크는 아나톨리아에서 그리스군을 몰아내는데 일등공신이었지만, 전쟁 후에는 항상 그리스-튀르키예 관계의 중요성 및 양 민족의 우애를 강조했다.

5. 결과

결과적으로 튀르키예에서 150만 명 가량의 "그리스인"이, 그리스에서 50만 명 가량의 "튀르키예인"이 추방되었다. 이 인구교환 결과 튀르키예와 그리스는 단일 민족 국가[19]가 되었고 민족적-종교적 갈등이 일어날 여지가 사라져 버렸다. 많은 인권적인 문제가 있지만, 민족국가 수립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 인구 교환은 양국에 긍정적 영향을 끼쳤다. 현재도 튀르키예인의 97%는 무슬림이며 그리스인의 95%가 그리스 정교회 교도이다. 그리고 기독교-이슬람교 갈등으로 혼란이 계속되던 여러 중동-아프리카 국가들과는 달리 이들 국가에서는 적어도 이런 갈등은 없었다.[20]
파일:1928 그리스 난민 비율.png
1928년 그리스 인구조사에 따른 각 행정구역별 인구 대비 그리스인 난민 비율. 색이 진할수록 인구 교환으로 인해 새로 정착한 그리스인 난민의 비율이 높은데 주로 북부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 그리고 아테네 근교 위주로 정착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인구 교환 이후 처음으로 실시된 1928년의 그리스 인구조사에 따르면 구 튀르키예 영토 출신 그리스인은 총 1,221,849명으로 집계되었다.[21] 이들은 발칸 전쟁 때 그리스가 새로 차지한 마케도니아 트라키아 또는 수도 아테네를 위시로 한 아티카 지방에 주로 정착하였는데 마케도니아에 절반이 넘는 638,253명이 정착했으며 제2의 도시 테살로니키 한 곳에만 약 27만 명이 정착했다. 아티카와 중부 그리스에는 306,193명이 정착했으며 트라키아에 107,607명이 정착했다.

물론 그리스 입장에서는 인구 교환으로 나름대로 이득도 있었다. 새로 정착한 농민들이 열심히 경작지를 일군 덕분에 인구 교환 이전에 비해 경지 면적은 55%, 농업 생산량은 400%나 증가했다. 또 산업화에 필요한 노동 인력이 크게 늘었으며 이들 중에는 콘스탄디누폴리와 에게해 연안 출신으로 상공업에 종사하는 부유한 그리스인들 역시 많았기 때문에 그리스의 산업화에도 도움이 되었으며, 덕분에 조세 수입도 1923년에는 3억 1900만 드라크마였던 것이 4년 후인 1927년에는 11억 3700만 드라크마로 4배 가까이 증가했다. 아나톨리아 출신 그리스인들이 대거 정착한 아테네와 테살로니키는 그리스를 대표하는 대도시가 되었으며 코스모폴리탄적인 콘스탄디누폴리와 스미르니 출신 그리스인들이 가져온 자유주의적 사상은 그리스 문화계와 사상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슬라브인과 튀르키예인들이 많이 살아서 그리스인 다수 지역이라고 부르기 애매하던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 지역을 확고한 그리스인 다수 지역으로 만들어서 영유권을 확고히 하는데에도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 인구 교환으로 갑작스레 국내로 몰려온 수백만 명의 난민들은 무려 기존의 그리스 인구의 3분의 1에 달했는데, 이는 그리스가 도저히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수였다. 이들 대부분이 튀르키예 당국에 의해 고향에 있었던 재산 대부분을 몰수당한 채 몸만 털레털레 그리스로 왔고, 이들을 막 받아줄 만큼 부유하지 않았던 그리스는 국제연맹의 지원을 받아 이들을 정착시키느라 경제적, 사회적으로 엄청난 고생을 했다. 또 그리스 사회에 갑작스럽게 떨어져도 먹고 살만한 재력이나 능력이 부족한 이들 아나톨리아 출신 '그리스인'들의 상당수는 그리스 사회에 잘 융화되지 못하고 도리어 '튀르키예인'이라는 차별을 받으면서 겉돌아야 했다. 때문에 많은 수가 30년대~40년대를 걸쳐 공산주의 활동에 투신했다. 이런 갈등 및 그리스 사회의 모순은 마침내 1946년부터 3년간 벌어진 그리스 내전으로 폭발했다. 미국과 영국의 지원을 받은 정부군과 유고슬라비아의 지원을 받은 그리스 공산당의 전쟁은 수만 명의 사망자를 냈을 만큼 잔혹했다. 1927년에 설립되어 1944년 해산된 파시즘 조직인 그리스민족연합 역시 튀르키예에서 건너온 그리스 상인들이 만든 단체였다.

또 튀르키예에서 추방된 '그리스인'들 중 40만 명 가량은 튀르키예어만 구사할 수 있어서 그리스어를 새로 배워야 했다.[22] 그래서 튀르키예어 사용자들끼리 산골에 모여 튀르키예어 마을을 형성하기도 했다. 튀르키예어가 모국어인 튀르크계 정교도 그리스인의 인터뷰 인터뷰의 할머니는 카이세리 출신 추방자 1세대로, 그리스로의 추방 이후의 정착 과정에 대해 이야기했다. 상당히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카이세리 사투리를 쓰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만큼 튀르크계 정교도 마을이 외부와 교류가 없었음을 증명한다. 6살 때 추방되었으며 그리스어는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학교에서 배웠다고 증언했다.

그리스에서는 비교적 적은 50만 명이 추방되었다. 그리스를 비롯한 오스만 지배에서 독립한 발칸반도 국가들은 19세기 말부터 강경하게 무슬림들을 추방하고 공민권을 박탈하고 오스만 통치의 흔적을 지우려고 했음에도 막판에 찾아보니 50만이나 더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인데 그리스 내 무슬림들이 주로 살던 마케도니아 지방을 그리스 왕국이 손에 넣은 게 1913년으로 채 10년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그렇다. 추방된 "튀르키예인"들은 튀르키예 공화국 첫 인구조사 결과(1927년)와 인구교환 당시의 통계를 통해 거의 절대 다수가 그리스와 가까운 서부지방(마르마라 주 및 에게 주)에 정착한 것을 볼 수 있다. 에디르네 도에 가장 많은 수인 49,441명이 정착했으며 그 다음 발르케시르 도에 37,174명, 이스탄불 도에 36,487명, 테키르다으 도에 33,728명, 이즈미르 도에 31,502명 순으로 정착했다. 상위 5개 도 정착민의 수를 합치면 거의 반에 육박한다. 동부지방에서 가장 많은 수가 정착한 도는 비틀리스 도로 3,360명이 정착했으며 나머지 동부 지역에 정착한 인구는 각 도마다 1,000명이 채 안 된다. 출처

6. 예외 지역

파일:오스만 종교.png
1907년 오스만 제국 무슬림 비율. 보스포루스 양안 일대의 무슬림 비율은 여전히 절반 이하였다.

양측 합쳐 200만 명의 인구가 이동하는 상황 속에서 예외적으로 이스탄불 마르마라해의 프렌스 군도, 튀르키예로 편입된 에게해의 두 섬, 임브로스와 테네도스에 거주하던 30만 명 가까이 되는 그리스인들은 협약에 따라 인구 교환 대상에서 제외되어 당장 추방당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후로도 튀르키예 당국이 그리스인들에게 여러 가지 불이익[23]을 주는 형식으로[24] 자발적으로 튀르키예를 떠나도록 유도한 데다 결정적으로 1950년대 튀르키예 민관의 조직적인 박해(이스탄불 포그롬)으로 인해 급격히 그리스인이 줄어들었고 현재는 튀르키예 내 그리스인이 5000명 가량밖에 되지 않는다.[25] 키프로스를 두고 키프로스의 그리스계 주민들이 튀르키예계 주민들과 충돌하고 이들을 학살하는 사례가 일어나자 튀르키예에서는 항의 차원으로 이스탄불의 그리스계 주민들 가운데 튀르키예 국적이 없는 이들을 추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이 돌아가자 튀르키예의 극단주의자들이 보복을 외치며 이들을 괴롭혔고 결국 이스탄불의 그리스계 주민은 다수가 이스탄불을 떠나 그리스로 이주했다.[26]

한편 콘스탄디누폴리와 에게해의 두 섬의 그리스인을 추방하지 않았던 것처럼 서트라키아 지방에 거주하는 약 9만 명의 튀르키예인들은 추방되지 않았다. 이들은 그리스 정부에서 '튀르키예인'으로 분류되지 않으며, 대신 로잔 조약의 규정에 따라 트라키아의 '튀르키예인'들은 포마크인[27], 무슬림 집시들과 같이 하나로 묶어 '무슬림 그리스인'으로 분류 및 관리되고 있다. 그리스 대법원에서는 튀르키예인은 튀르키예 국적의 사람을 의미한다며 트라키아의 튀르키예인 소수민족 단체에 대해 '튀르키예인'이라는 이름을 못 쓰게 하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일단 그리스 정부에서는 형식적으로는 이들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고 트라키아 지방의 튀르키예인들을 비공식적으로 추방하는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튀르키예에서 추방된 정교회 '그리스인'들을 이 곳에 정착시키거나 트라키아 지방의 토지를 사는 그리스인들에게 저리 융자를 제공해 주는 등 트라키아 지방의 튀르키예 색채를 지우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행해왔으며, 아울러 실질적으로 이 지방의 튀르키예인들은 포마크인[28], 아나톨리아에서 이주해 온 롬인들과 한 데 묶여 박해당하고 거의 비국민 취급을 받았다. 또 이들이 거주하던 지역은 그리스 내전 당시 주된 격전지였기 때문에 내전에서 희생된 이들도 많았다. 당시를 기억하는 노인들에게 당시에 대한 증언을 들어 보면 그야말로 꿈도 희망도 없는 상황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1970년대 그리스의 민주화 이후에도 키프로스 문제 때문에 그리스 내 튀르키예인들은 이런저런 차별을 받았다. 예를 들면 민족적 의미에서 그리스인이 아니라고 규정된 사람들은 귀국을 보증하지 않으면 출국과 동시에 그리스 국적을 박탈하는 법이 1990년대까지 있었는데 주로 튀르키예인 등의 그리스 무슬림들이 대상이었다. 링크 많이 나아진 21세기에도 그리스 정부와 그리스의 튀르키예인들은 앞서 언급한 '튀르키예인' 칭호 사용 금지 등 여러 갈등이 남아 있다. 현재도 그리스 인구의 1.3%[29]는 무슬림이며 이 중 절반 가량이 바로 서부 트라키아 지방에 거주하는 튀르키예인이다.

위의 예외 사례와 별개로 제3국의 지배로 인해 인구 교환을 피해간 지역이 있었는데 바로 로도스 섬을 비롯한 도데카니사 제도 키프로스다. 각각 이탈리아 영국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도데카니사 제도는 그리스로 편입되었으나 그리스 정부가 현지의 튀르키예인을 추방하지 않았기에 도데카니사 제도는 그리스 내에서 아직도 튀르키예어가 제법 통하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으며[30] 키프로스는 다수 그리스계의 주도로 그리스와의 통합 운동이 일었으나 영국이 별개 국가로 독립시킨 후 그리스 튀르키예의 대리전의 전장으로 고통받았다. 이 지역에 사는 그리스계와 튀르키예계는 구분하기 힘드며 그저 종교와 모어로 정체성을 찾는 듯하다. 즉 이는 튀르키예계와 그리스계가 오랜 세월의 상호교류로 두 민족간의 경계가 거의 없어졌음을 말한다.

7. 비슷한 경우

영국령 인도 제국이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나뉘어 독립하자 인도 제국 영내에 잡거해서 살던 힌두교도 인도로, 무슬림 파키스탄으로 많이 이주했다. 다만 이는 조직적인 인구교환· 추방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자발적인 대량이주에 가까웠다. 그 결과 파키스탄에 남은 힌두교도는 극히 적다. 애당초 이 지역은 수많은 힌두교도들이 개종하여 이미 무굴 제국 당시부터 이슬람 우세 지역이 되었다. 반대로 인도에는 수많은 무슬림이 남았는데 인도 자체가 엄청난 인구를 자랑하는 나라인만큼 무슬림 인구도 끝내줬던 데다 파키스탄의 신드 펀자브 지역에서 인도로 이동하는 것은 쉬워도 하이데라바드 같은 지역에서 파키스탄으로 이동하는 것은 일반인 입장에서 불가능에 가까웠던 시절이니. 이러한 연유로 오늘날 인도 인구 중 2여 명이 무슬림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계와 튀르키예계가 섞여 살던 키프로스에서도 키프로스 전쟁 이후 인구교환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남·북키프로스로 분단된 이후로도 1974년 이전의 키프로스 국적을 보유한 당사자나 후손들은 상호간 자유로운 왕래가 가능하며 서로 상대방 지역에서 노동· 쇼핑· 여행도 자유롭다.[31] 또한 북키프로스 국적이지만 위의 범주에 해당되는 키프로스인들은 남키프로스 국적자로도 간주되기 때문에 남키프로스 여권도 신청할 수 있다. 또 북키프로스 국적자이면서 민족이 튀르크인 주민들은 튀르키예 국적으로도 간주되기 때문에 튀르키예 여권도 신청할 수 있고 세 나라 모두 이중국적을 인정하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 여권만 세 개를 가질 수 있는 특이한 나라가 되었다.

그밖에 불가리아도 자국 내 튀르크계 소수민족들에게 동화 또는 추방 정책을 펼쳤다. 1980년대 불가리아 인민공화국은 자국의 튀르크계 국민에게 "불가리아식으로 이름을 바꾸든지, 아니면 불가리아를 떠나라"고 요구했고 이때 30만명의 튀르크계 불가리아인들이 튀르키예나 기타 국가로 떠났다. 그러나 1989년 동유럽 혁명으로 불가리아가 공산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화가 되면서 이후에 집권한 민주 정부는 자국 내 튀르크계 민족들을 겨냥한 강제적인 불가리아인 동화 정책을 폐지했다. 이들 중 유명인으로 이후 튀르키예 대표로 1988 서울 올림픽에 출전한 역도 금메달리스트인 나임 쉴레이마놀루(1967~2017)가 있다.

8. 관련 문서



[1] 종교적 관용이라기보다는 당시 오스만 제국은 지즈야라는 제도를 통해서 이교도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징수하였기 때문에 세금을 꼬박꼬박 내는 한 세금만큼의 자유를 보장해 주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지즈야를 내지 않는 무슬림은 대신 병역의 의무를 짊어졌지만, 대신 무슬림들이 지배하는 제국의 각 행정기관에서 출세하기도 쉬웠으므로(물론 권력은 쉴레이만 1세 이후 기독교도 출신인 데브시르메 집단이 잡았지만) 자발적인 개종은 있었다. [2] 오스만 술탄의 여러 칭호 중의 하나가 "기독교의 수호자"였다. 그래서 아야 소피아를 포함한 몇몇 성당을 모스크로 개조한 초기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성당을 보호, 보존하는데 힘썼을 뿐만 아니라 보수도 해주었다. [3] 쿠르드족도 이러한 역사의 영향을 받았다. 오늘날 발칸반도(튀르키예령인 동트라키아 제외)에 거주하는 쿠르드족은 쿠르드족 탄압을 피해 중동 국가(특히 튀르키예)에서 망명해 온 경우도 있지만 오스만 제국 시절부터 대대로 발칸반도(동트라키아 제외)에서 살아온 경우도 있다. [4] 이 과정을 주도한 인물이 바로 노르웨이의 프리드쇼프 난센인데 이 공로로 난센은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5] 헤로도토스는 아나톨리아의 리디아 왕국에 대해 언급하면서 아시아인들은 당시 그리스인이나 이집트인 및 그리스 서쪽이나 북쪽의 다른 민족들과 다르게 나체 노출을 매우 부끄럽게 여겼다는 기록을 남겼다. [6] 에페소스, 밀레토스, 페르가몬이 대표적이다. [7] 아테네 시내 한복판에 있는 성당 외벽에 아랍어 쿠란 글귀가 그대로 남아 있다던지 [8] 고려시대 전시과 제도와 유사한 형태이다. 원칙적으로는 토지를 하사받은 사람이 죽으면 토지는 다시 술탄에게 되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9] 예를 들어 튀르키예의 되네르 케밥은 그리스에서 거의 똑같은 이로스(Γύρος, Gyros)라는 음식이 있는데 서로 자기네들이 원조라고 우겨댄다. [10] 현대 튀르키예어와 그리스어는 만 개 이상의 단어를 공유하며 그나마도 양국의 언어 순화 운동으로 적어진 것이다. 심지어는 한국어처럼 조사가 단어의 뒤에 붙는 교착어의 특징을 가졌던 중세 튀르키예어는 그리스어 (그리고 페르시아어)의 영향을 받아 명사의 격변화가 생겨나기도 했다. 그리스인의 튀르크화와 튀르키예인의 그리스화가 정점에 달했을 오스만 제국 중후기에는 튀르키예어와 그리스어가 현대보다 훨씬 많은 단어를 공유했을 것으로 보인다. [11] 사실 이는 그리스인과 튀르키예인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오스만 제국 자체가 다민족 국가였으니 말이다. 보슈냐크인이나 포마크인 같은 슬라브계 무슬림 주민들도 많았으며 민족 전체가 독실한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신자인 걸로 유명한 아르메니아인 중에도 엄연히 무슬림이 존재했다. [12] 정치적 숙청 등으로 인해 몰락한 무슬림 튀르크인 지배층이 신분 세탁을 위해 지즈야를 감수하면서까지 기독교로 개종한 경우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전성기의 오스만 제국은 여러 종교들 중 이슬람교의 지위가 가장 높긴 했지만 죄수를 처벌할 때는 딱히 그 죄수의 종교를 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13] 튀르키예인들은 전통적으로 성(姓)씨가 없었으며 아타튀르크 시대에 서방식 근대국가를 지향하면서 성씨 사용법을 제정해 모든 국민이 이름뿐만 아니라 성씨를 갖게 되었다. 아타튀르크라는 성도 "튀르크의 아버지"라는 뜻. 많은 경우 귀찮아서 그냥 아버지의 이름을 가지고 ~oğlu를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중앙아시아의 튀르크계 민족들은 마찬가지로 러시아 제국에 편입되면서 성씨를 가지게 되었는데 ~오을루 대신 러시아인처럼 ~프(남성)/바(여성)가 붙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앙아시아인들은 슬라브인이 아님에도 이름의 끝에 v가 많이 붙는다. 예를 들어 우즈베키스탄의 축구선수인 제파로프 아흐메도프 등등. [14] 그리스 총리와 대통령을 여러 번 지낸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가 이쪽 출신이다. 튀르키예어로 "카라만인"을 의미하는 Karamanlı를 그리스어 남성명사형으로 바꾸면 대놓고 카라만 출신인 것을 알 수 있다. 또 그리스인들 중에는 성에 ~스가 안 붙고 튀르키예어 접미사인 ~oğlu가 붙으면(예를 들어 축구선수 코스타스 미트로글루, 호주의 그리스계 축구선수인 안게 포스테크글루) 그 사람은 거의 이때 그리스로 넘어온 사람의 후손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예외도 있다. [15] 카잔차키스의 미할리스 대장의 배경은 19세기 말 오스만 치하의 크레타 섬인데 등장인물들은 튀르크인이나 그리스인 모두 그리스어의 방언인 크레타어를 쓴다. [16] 이스탄불은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함락된 이후에도 상당기간동안 정교회 인구가 무슬림 인구보다 많았다. 1차대전 직전인 20세기 초만해도 이스탄불의 정교회 인구(즉 그리스인)는 30만명에 달했는데, 이는 이스탄불 전체 인구의 1/3이나 되었다. [17] 역대 튀르키예 정부는 그리스인 박해에 대해 나몰라라 했으나 의외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이 2006년 총리 재임 당시에 이에 대해 사과했다. [18] 그리스인들은 튀르키예에서 공무원직이나 의사나 변호사같은 전문직은 가질 수 없었다. [19] 튀르키예는 자신들이 단일민족이라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쿠르드인 같은 소수민족이 존재했고 이들은 1990년대까지 동화를 강요받았다. [20] 현대 대한민국은 세속주의가 대세이기 때문에 종교갈등이 심하지 않지만, 많은 나라에서 이는 학살극이나 국가분열의 원인이 되었다. [21] 인구 교환 이후 사망한 숫자나 외국으로 이민한 숫자를 제외한 집계이니 실제 그리스로 온 그리스인은 당연히 이보다 더 많을 것이다. [22] 상술한 그리스민족연합의 당수 요르요스 코스미디스도 그리스어를 몰라 튀르키예어를 사용했다. [23] 그리스인이 취업 가능한 직업의 제한, 그리스인에게만 부과되는 부유세, 1934년 통과된 성씨법에 따라 창씨를 할 때 외국계 성씨는 배제하고 오로지 튀르키예식 성씨로만 창씨할 것, 그리스인 학교에서 그리스어 수업을 제외한 모든 수업을 튀르키예어로만 진행할 것을 강요하는 등. [24] 로잔 조약에서 양국은 각국에 남은 이들의 신앙 및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명시해 놓았지만 아타튀르크 정부나 이뇌뉘 정부나 멘데레스 정부나 하나도 안 지켰다. [25] 다만 이는 종교 기준으로 분류한 데 따른 수치라 실제 숫자로는 더 많을 가능성이 높다. [26] 당시 추방된 이스탄불 내 그리스인들은 기본적으로 튀르키예 공화국 국적을 가진 사람들은 추방되지 않았고(자국민을 자국에서 추방하는 것은 국제법 위반이라 웬만큼 막장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하다.) 구 오스만 제국 국적을 가지고 있으나 말소되어 사실상 무국적자와 그리스 국적만을 가지고 거주비자로 살아가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다. 또 추방 당시 부동산 등의 권리는 대부분 처분하고 추방길에 오른 경우가 많았으나 시간 부족 등의 이유로 추방 당시까지도 부동산을 처분하지 못한 경우가 있었는데 이들의 부동산은 몰수되지 않고 그대로 방치되다가 그리스-튀르키예 관계가 개선된 1990-2000년대 이후에 수리해서 임대를 주거나 다시 돌아와 거주하기도 했다. 또한 그리스 경제위기 당시 다시 튀르키예로 돌아온 그리스계 주민들도 있다. [27] Πομάκοι. 오스만 제국 시절 이슬람으로 개종한 불가리아인에 기원을 둔 슬라브계 무슬림 민족이다. 불가리아인이 이들의 기원인 고로 이들의 언어는 이들이 주로 거주하는 불가리아 남부 루프 방언과 동일하다. [28] 이쪽은 불가리아 본토에서도 차별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29] 그리스 내 무슬림 중에서는 이러한 통계를 그리스의 반튀르키예, 반이슬람 정서에 의해 축소된 통계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어쩌면 겉으로만 정교회로 개종한 척 연기하면서 이슬람 신앙을 비밀리에 계속 유지하다가 훗날 무슬림으로 커밍아웃하는 경우도 있을 듯 싶다. [30] 물론 그리스-튀르키예 간 갈등으로 인해 민족간의 싸움이 일어나서 많은 이들이 떠나기는 했지만 강압적인 추방은 아니었기 때문에 한계는 있었으며, 튀르키예 정부는 도데카니사 제도에 최대 15,000명 가량의 튀르키예인이 거주한다고 보고 있다. [31] 거주도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서로 꺼리는 분위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