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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테오도로스 1세 팔레올로고스 (영어: Theodore I Palaiologos, 그리스어: Θεόδωρος Α΄ Παλαιολόγος) |
출생 | 1355년경 |
사망 | 1407년 6월 24일 |
직위 | 모레아 전제군주국의 데스포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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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레아 전제군주국 팔레올로고스 왕조 초대 데스포티스.2. 생애
1355년경 요안니스 5세와 엘레니 칸타쿠지니의 막내아들로 출생했다. 형제로 안드로니코스 4세, 이리니 팔레올로기나, 마누일 2세, 미하일 팔레올로고스, 마리아 팔레올로기나가 있었다. 1376년 부친에 의해 테살로니키의 데스포티스로 임명되었지만, 그 도시에 채 부임하기 전에 안드로니코스 4세가 내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부친과 함께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 1379년 요안니스 5세가 복위한 직후 형 마누일이 테살로니키의 데스포티스가 되었다.1382년 요안니스 5세는 테오도로스를 모레아 전제군주국의 데스포티스로 임명하기로 결정했다. 마테오스는 자신을 모레아의 데스포티스로 인정해달라고 청원했지만, 아들에게 영지를 넘겨주고 싶었던 황제는 묵살했다. 그해 12월 테오도로스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도착하자, 마테오스는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직위를 넘겨줬다. 그러나 마테오스의 아들 디미트리오스 칸타쿠지노스는 이에 불복하여 지역 귀족들과 투르크 해적들의 지원을 토대로 데스포티스를 자칭했다. 이리하여 내전이 벌어지는 듯했지만, 디미트리오스가 1383년 말에 돌연사하면서, 테오도로스가 모레아의 데스포티스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는 영토 확장을 꾀했다. 먼저 알바니아인들이 모레아에 정착하도록 하였고, 그들을 군대에 배속시켜서 전력을 충원했다. 1388년 아르고스를 공략했지만 베네치아가 개입하여 아르고스를 빼앗았다. 이후 양국간 갈등이 깊어졌지만, 오스만 술탄국의 무서운 성장세를 두려워한 양국이 합의하면서 1394년 군사 동맹이 체결되었다. 그 후 테오도로스는 오스만군을 격퇴했으며, 코린토스와 아테네를 성공적으로 공략했다.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할 준비에 착수하던 오스만 술탄 바예지트 1세는 그를 경계하여 별동대를 파견해 모레아를 치게 했다. 테오도로스는 이에 맞섰고, 미스트라스와 코린토스를 지킬 수 없게 되자 로도스 기사단에게 제공했다. 1400년 바예지트 1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을 때, 마누일 2세는 가족들과 함께 수도를 떠나 서유럽에 원군을 요청했다. 이때 그의 가족은 테오도로스의 보호를 받았다.
1402년 바예지트 1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를 풀고 티무르를 상대로 앙카라 전투를 치렀다가 참패하고 포로로 잡힌 뒤, 그는 반격에 나서 과거 오스만군에게 빼앗겼던 모레아 일대를 모조리 탈환했다. 또한 1404년 로도스 기사단으로부터 미스트라스와 코린토스를 돌려받았다. 1407년 6월 24일 사망하였고, 마누일 2세의 아들 테오도로스 2세 팔레올로고스가 모레아의 새 데스포티스로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