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센구미 |
||||
{{{#!wiki style="margin:0 -10px -5px;min-height:1.8em;"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word-break:keep-all;" |
국장 · 국장 보조 | |||
<colbgcolor=#068fb0><colcolor=#fff> 국장 | 곤도 이사미 | |||
총장 | 야마나미 케이스케 | <colbgcolor=#068fb0><colcolor=#fff> 참모 | 이토 카시타로 | |
부장 | 히지카타 토시조 | 군사 | 타케다 간류사이 | |
조장 | ||||
1번대 | 오키타 소지 | 6번대 | 이노우에 겐자부로 | |
2번대 | 나가쿠라 신파치 | 7번대 | 타니 산쥬로 | |
3번대 | 사이토 하지메 | 8번대 | 토도 헤이스케 | |
4번대 | 마츠바라 츄지 | 9번대 | 스즈키 미키사부로 | |
5번대 | 타케다 간류사이 | 10번대 | 하라다 사노스케 | |
감찰 · 회계 | ||||
감찰 | 야마자키 스스무 · 핫토리 타케오 · 요시무라 칸이치로 · 시노하라 타이노신 | |||
제사취조역 및 감찰 | 시마다 카이 · 오이시 쿠와지로 | |||
회계 | 카와이 키사부로 | |||
미부 로시구미 시절 인물 | ||||
국장 | 세리자와 카모 · 니이미 니시키 | }}}}}}}}} |
신센구미 국장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68fb0, #068fb0 20%, #068fb0 80%, #068fb0); color: #fffff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ffffff> 초대 | 제2대 | 제3대 |
키요가와 하치로 | 세리자와 카모 | 니이미 니시키 | |
<rowcolor=#ffffff> 제4대 | 제5대 | 제6대 | |
토노치 요시오 | 곤도 이사미 | 사이토 하지메 | |
<rowcolor=#ffffff> 제7대 | 제8대 | ||
히지카타 토시조 | 소마 가즈에 | }}}}}}}}} |
신센구미 국장 곤도 이사미 [ruby(近, ruby=こん)][ruby(藤, ruby=どう)][ruby(勇, ruby=いさみ)] |
|||
|
|||
<colbgcolor=#068fb0> 출생 | 1834년 11월 9일 | ||
무사시국
타마군 가미이시와라촌 (現 도쿄도 쵸후시 노미즈) |
|||
사망 | 1868년 5월 17일 (향년 34세) | ||
무사시국 도시마군 이타바시 처형장 (現 도쿄도 이타바시구 이타바시) |
|||
재임기간 | 신센구미 국장 | ||
1863년 ~ 1868년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68fb0> 휘 | 마사요시(昌宜) | |
아명 | 카츠고로(勝五郎) | ||
통칭 | 카츠타(勝太) → 이사미(勇) | ||
가명 |
오쿠보 츠요시(大久保剛) 오쿠보 야마토(大久保大和) |
||
신체 | 약 164cm | 약 60kg | ||
유파 | 천연이심류(天然理心流) | ||
부모 |
양부 곤도 슈스케(近藤周助) 양모 곤도 후데(近藤ふで) 친부 미야카와 히사지로(宮川久次郎) 친모 미야카와 미요(宮川みよ) |
||
형제 |
친형 미야카와 오토고로(宮川音五郎) 친형 미야카와 쿠메지로(宮川粂次郎) 친매 미야카와 리에(宮川リエ) |
||
아내 | 곤도 츠네(近藤つね) | ||
자녀 | 딸 곤도 타마(近藤たま) |
[clearfix]
1. 개요
일본 에도 시대 말기 인물. 천연이심류의 네 번째 후계자이자, 신센구미 2대 국장이다.2. 생애
원래 이름은 미야카와 카츠고로(宮川勝五郞).무사시노쿠니(武藏國) 타마군(多摩郡), 오늘날의 도쿄도(東京都) 쵸후시(調布市)에서 부농 미야카와 히사지로(宮川久次郎)의 3남으로 태어났다. 큰누나 리에(リエ)는 어린 나이에 요절했고, 두 형 오토고로(音五郞), 쿠메지로(粂次郎)와 함께 장성했다. 타마는 쇼군이 직접 다스리는 직할지로 세금이 낮고, 부농이 많았다. 그래서 쇼군에 대한 충성도가 높았고, 농민의 자식들도 도둑들로부터 재산을 지키기 위해, 신변안전을 위한 호신술로 검술을 배우는 경우가 많았다. 히사지로 역시 농민이지만 자기 집에다 검술 도장을 만들어 검술수련을 하고, 테라코야(일본식 서당)에 다니면서 기초학문을 배웠으며, 삼국지연의 같은 군담소설의 열렬한 팬을 자처하기도 했다.
5세 때 어머니 미요(みよ)가 세상을 떠난 후 아버지 히사지로는 막내아들 카츠고로의 싹수를 알아보고 이 아이에게 무사 교육을 시켰다. 에도 시대엔 적장자 이외의 아들들은 상속권에서 배제되었고, 노력하여 능력을 쌓아서 자기 앞날을 개척하지 않으면 평생 맏형 집안의 더부살이 신세가 되거나 그만도 못한 삶을 살아야 했으므로, 이는 단순히 아버지로서의 욕심이라기보단 카츠고로가 어른이 된 후 자립할 길을 열어주려는 배려이기도 했을 것이다.
카츠고로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후원하에 책을 읽고 검술 훈련을 받았으며, 저녁에는 옛날 이야기 대신 아버지가 들려주는 영웅들의 무용담을 들었다. 그 중 카츠고로가 가장 좋아했던 인물은 삼국지연의의 관우로, 관우가 참수당하는 이야기를 듣고 대성통곡을 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 다음으로 좋아했던 인물은 아래에도 적혀 있는 카토 키요마사이니, 어린 시절의 곤도는 무예와 용기가 뛰어난 호걸 타입의 인물을 애호했던 모양이다.
16세 때, 에도에 도장을 열고 있던 곤도 슈스케(近藤周助)의 강한 요청에 따라 곤도 가의 양자로 들어가 천연이심류의 후계자가 된다. 카츠고로는 기골이 탄탄하고 다른 사람들을 압도하는 박력이 있어 마을에선 모두가 한 수 접어주는 존재로 통했고, 다른 사람은 보통 3년을 들여 취득하는 천연이심류 목록도 고작 입문 8개월만에 따냈었다.
여기에는 한 가지 일화가 있는데, 집에 도적이 침입하자 치고 나가려고 하던 형을 붙들고 '지금은 막 침입한 참이라 경계심이 강할 텐데, 다 털고 물건을 짊어지고 나갈 때는 경계가 풀어질 테니 그때 기습해야 한다'고 하며 막은 뒤에, 그 말대로 턴 물건을 짊어지고 나갈 때 기습해 도적을 격퇴한 후에는 쫓아가려는 가족들을 말리면서 '궁지에 몰린 쥐는 쫓지 않는다고 했는데, 지금 쫓아가면 크게 다칠 수 있다. 물건은 어차피 찾았으니 됐다'고 했다고 한다. 이 일화가 근방에 퍼지자 이를 듣고 곤도 슈스케가 양자로 달라는 요청을 해 왔다는 것.
양자로 맞아들여진 건 1849년 10월 19일이었다. 농민의 아들인 카츠고로는 검술가 슈스케의 양아들 시마자키 카츠타(嶋崎勝太)[1]가 됨으로써 낭인이긴 하지만 무사의 적을 얻어 무사 신분으로 진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일평생 무사 계급을 동경했지만 결국 딜레탕트에 그쳤던 친아버지와는 달리, 카츠고로는 자질을 인정받아 타마(多摩) 일대에 강한 영향력을 지니며 에도 진출까지 시도하고 있던 천연이심류 종가의 후계자가 됨으로써, 훗날의 곤도 이사미가 되기 위한 첫걸음을 뗄 수 있었던 것이다.
정식 양자결연식이 체결된 이후론 한동안 시마자키 이사미(嶋崎勇)란 이름을 썼다가, 천연이심류 종가의 가독을 상속한 1861년 8월부터 곤도 이사미(近藤勇)라 불리게 된다. 그 전년엔 시미즈 도쿠가와 가문의 가신인 마츠이 야소고로(松井八十五郎)의 맏딸 츠네(つね)와 결혼하여, 1862년 딸 타마(たま)가 태어났다.
|
곤도 이사미의 또 다른 사진[2] |
그 시기엔 타마 일대, 그리고 양아버지 슈스케가 에도 우시고메에 차렸던 검술도장 시에이칸을 왕복하며 검술지도에 힘썼는데, 당시엔 참신한 이미지에 목도시합에 강한 한편으로 단증 따기의 용이함을 넌지시 어필했던 속칭 막말 에도 3대 도장( 북진일도류, 신도무념류, 경심명지류)이 문전성시를 이루어 막부 말기에 수많은 유신지사들을 배출했고, 에도의 유서 깊은 도장들도 여전히 건재했지만. 천연이심류는 둔탁하고 거친 시골검법을 고수했던데다 도장주인 곤도가 목도시합엔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기도 해서 시에이칸 쪽은 사실상 에도 일각에 간판만 걸어놓았다고 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없었다.
하지만 이때 시에이칸에 출입하던 다른 유파 인물들과 쌓은 인맥들 중 나가쿠라 신파치(신도무념류)ㆍ 하라다 사노스케(타네다류 창술)ㆍ 야마나미 케이스케(북진일도류)ㆍ 토도 헤이스케(북진일도류) 같은 자들은 시에이칸의 식객食客이라 불릴 정도로 곤도와 곧잘 어울렸고, 이들은 낭사대를 거쳐 신센구미 창설에 함께 하게 된다.
천연이심류의 텃밭인 타마 일대에선 곤도는 주로 문하생들과 시골 사람들을 가르치는 한편, 각 마을의 유력자들과 인맥을 만드는 데 힘써왔다. 그런 가운데 친해진 후원자 중 하나가 히노 역참(日野宿)의 촌장이었던 사토 히코고로(佐藤彦五郎)로, 그는 자기 돈을 내서 히노에 천연이심류 도장을 만들고 마을 사람들에게 곤도에게 수련을 받을 것을 장려하고 다녔다. 히코고로와 오노지 마을(小野路村) 촌장인 코지마 시카노스케(小島鹿之助), 그리고 곤도 이사미 세 사람은 의형제의 결의를 맺은 사이였다고 한다.
그 히코고로는 곤도에게 자기 처남을 소개시켜 주었다. 무사가 되겠다고 하면서 고용살이를 나가면 사건을 치고 돌아오고, 데릴사위 양자가 되라는 혼담을 퇴짜놓았으며, 안정된 직업을 갖는 일 없이 무사적 취미, 약제 판매의 명목을 단 방랑, 그리고 여자 꼬시기에 몰두하던 이시다 마을(石田村) 부농 집안의 막내아들, 바로 히지카타 토시조였다. 토시조는 1세 연상인 곤도와의 만남을 계기로 카에이 4년(1851)에 천연이심류에 입문하였고, 얼마 안 가 곤도의 둘도 없는 절친이 된다.
천연이심류에서 곤도를 보조하는 사범대리로 타마와 에도를 오가며 활동한 오키타 소지는 무사였던 아버지가 일찍 사망한 후 큰누나 미츠(みつ)의 남편 린타로(林太郎)가 데릴사위 양자로 가문을 상속했고, 이후 어머니까지 세상을 떠나자 카에이 3년(1850), 타마 출신인 어머니와 매부의 연줄을 따라 어린 나이로 에도 시에이칸의 곤도 슈스케에게 맡겨져 입문한 경우다. 무츠 시라카와 번(陸奥白河藩)의 아시가루 소대장(足軽組頭)이었던 아버지 덕에 유파 안에서는 무사의 혈통으로서 존중을 받았으며, 타고난 재능 덕에 이미 15세 나이에 천연이심류 문하생들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고작 19세 나이에 개전에 도달했다. 한번 칼을 잡으면 인정사정없이 혹독하게 지도하는 스타일로, 농민들이 소지에게 배우기를 꺼렸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노우에 겐자부로도 타마 일대의 인물이며, 히노 센닌도신(日野千人同心) 간부 집안의 3남으로 당주인 둘째형 마츠고로(松五郎) 밑에서 더부살이를 하고 있었다. 사람은 좋지만 존재감이 없는 성실한 고참 이미지로 통하는 인물이지만, 사실 겐자부로도 천연이심류 개전자 중 하나이긴 했다.
위의 인물들이 신센구미 창단 당시의 곤도 파벌을 구성한 주된 사람들로, 이후 이들 모두가 신센구미의 간부가 되었다.
1863년, 28세 때 시위관 생활 도중에 섬길 영주를 잃은 낭인 무사대 모집에 응모하여 막부파의 아이즈 번의 자금으로 신센구미를 결성, 귀신 잡는 혹은 사람 잡는 곤도란 명칭으로서 존왕양이 세력들에게 경악과 공포의 대상이 될 정도로 철저히 반 막부파 박해에 앞장섰다.
그 와중에 히지카타 토시조, 오키타 소우지와 함께 최초의 국장이었던 세리자와 카모를 참살한 후 내부에서 숙청을 감행했다. 그로 인해 이토 카시타로 등 여러 간부의 도전을 받았으나 그때마다 무자비한 보복을 가하였다.[3]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전투 전에 아부라노코지 사건에서 숙청당한 전(前) 신센구미 참모 이토 카시타로의 잔당(어능위사)들에게 습격당하고 그들의 총탄에 맞아 어께에 중상을 입었다.
에도로 돌아와 상처를 회복한 이사미는 고요친부타이(甲陽鎭撫隊)를 결성하고 오쿠보 다케시라는 이름으로 개명했으며 와카도시요리 격으로 승진하고 10만석 다이묘로서 대우를 받게 되었다.[4] 에도로 진군하는 관군을 저지하기 위해 고후성(甲府城)에서 농성전을 벌이고자 에도를 출발하지만 고후성은 이미 관군에게 투항한 상태였고, 입성 후 농성전만 생각하였던 고요친부타이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한채 관군과 격돌하게 된다. 압도적인 병력차가 났던 데다가 고요친부타이는 말만 군대일 뿐이지 신센구미 잔당과 무뢰배들을 모아 급조한 집단이었던 관계로 제대로 된 전투도 하지 못하고 대원들이 이탈하는 등 스스로 무너지며 대패하고 만다.[5] 이 전투 이후 신센구미 초기 멤버였던 나가쿠라 신파치, 하라다 사노스케 등이 이탈하고 오키타 소우지는 병이 깊어져 신센구미를 떠나는 등, 사실상 신센구미는 소멸되고 만다.
처음에 관군은 그의 정체를 몰랐으며 곤도가 막부의 중신 오쿠보 야마토를 자처하자 막부의 중신을 대하는 태도로 체포 후 정중하게 호위가마에 태워져 이타바시(板橋)로 옮겨졌다. 하지만 이후 관군 중 신센구미 출신들[6]에게 정체가 들통나게 되는데 곤도의 얼굴을 아는 자가 "곤도 씨 오랜만입니다" 라고 하자 곤도는 당혹스러워하며 "무슨 소리요 나는 오쿠보요." 라고 부인하였으나 바로 뒤이어 "에이 곤도 씨 왜 그러세요. 농담하지 마세요" 라고 대꾸당했고 이에 곤도는 극도로 당황하여 결국 그 정체를 들키고 말았다고 한다(...). 정체를 숨겼다는 비난과 함께 동정론마저도 사라져서 그 후, 카츠 카이슈가 선처를 바라는 탄원을 낸 것도 무색하게 사카모토 료마를 죽인 범인이 신센구미라고 알고 있었던 도사 세력들의 주도로 아무런 예로 갖추지 않은 채 일반 죄인 취급을 받으며 참수형에 처해진다. 목은 교토의 산조(三條) 강변 모래 밭에 효시(梟示)되었다.
당시 곤도 이사미가 참수당한 후의 상황을 그린 그림이 1868년 신문에 실렸는데, 이 그림을 통해 곤도 이사미가 촌마게를 할 때 머리카락 대부분을 미는 사키야키를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곤도 이사미의 참수된 목이 올려진 상황을 묘사한 그림으로 혐짤 일 수 있으니 클릭 조심. 현재 도쿄의 에도 박물관에 전시되어있다.
지세이는 다음과 같은 칠언절구. 지세이로 보아 단순한 무사로 보기엔 상당한 한학 지식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孤軍援絶作囚俘 顧念君恩涙更流
一片丹衷能殉節 雎陽千古是吾儔
외로운 군대, 원군도 끊겨 포로가 되었으니, 돌이켜 임금의 은혜를 생각하면 그저 눈물만 흐르는구나.
한 조각 단심으로 능히 절의에 순사하니, 천고에 전해지는 휴양[7]이 바로 내 동지일지니.
一片丹衷能殉節 雎陽千古是吾儔
외로운 군대, 원군도 끊겨 포로가 되었으니, 돌이켜 임금의 은혜를 생각하면 그저 눈물만 흐르는구나.
한 조각 단심으로 능히 절의에 순사하니, 천고에 전해지는 휴양[7]이 바로 내 동지일지니.
靡他今日復何言 取義捨生吾所尊
快受電光三尺劔 只將一死報君恩
적에게 항복하여 지금 새삼 무얼 말하리. 의를 취하고 목숨을 버림이 내가 귀하게 여기는 바이니,
쾌히 전광석화와 같은 세 척의 검을 받아, 그저 장렬하게 죽음으로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려 한다.
快受電光三尺劔 只將一死報君恩
적에게 항복하여 지금 새삼 무얼 말하리. 의를 취하고 목숨을 버림이 내가 귀하게 여기는 바이니,
쾌히 전광석화와 같은 세 척의 검을 받아, 그저 장렬하게 죽음으로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려 한다.
여담으로 1913년 야마다 오토네라는 여인이 나가쿠라 신파치를 찾아와 자신이 곤도 이사미의 딸이라고 주장하였다. # 다만 친딸인지는 진위여부 판단이 불가하며, 손녀라는 이야기도 있다.
곤도 이사미는 슬하에 아들이 없어 대는 끊겼지만, 타마라는 이름의 딸이 있어 그녀를 통해 자손이 이어졌다. 손녀들 중에는 한국인과 결혼해 자식을 낳고 가정을 이룬 사람도 있다.
3. 곤도 이사미와 코테츠
오늘밤 코테츠는 피에 굶주려 있다(今宵の虎徹は血に餓えている)라는 대사로도 유명하지만 본인이 말한 것은 아니고 후세의 창작이다.[8]그의 애검은 나가소네 코테츠 오키사토(長曽禰虎徹興里)[9]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것이 진품인지는 알 수 없다.
우선 코테츠 자체가 매우 유명하고 또 인기있었기 때문에 사기목적, 혹은 생계를 위하여 코테츠의 위조품을 거래하는 경우가 몹시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우선 코테츠를 보면 가짜라고 생각하라는 말도 있으며 코테츠의 위조품만을 연구한 서적도 존재한다.
코테츠의 위조는 대략 3가지 형태가 있었는데 우선 첫째가 소모되거나 부러져 쓸 수 없는 일본도를 재생한 것, 그리고 둘째가 비슷한 일본도의 이름을 지우고 코테츠의 이름을 넣은 것, 그리고 세 번째가 도공이 처음부터 코테츠의 위조품을 만든 경우이며 곤도 이사미의 코테츠는 그중에서 2번에 해당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동시대의 명도공인 미나모토 키요마로의 명품을 누군가가 값을 올리기 위하여 코테츠로 이름을 바꾸어 넣었고 그것을 곤도 이사미가 입수했다는 것.
그러나 본인은 굳게 진품이라고 믿었으며 이케다야 사건의 후에 자신의 양아버지에 보낸 서신에서도 자신의 검은 코테츠이기 때문에 무사했다고 쓴 것이 아직도 남아있다.[10] 곤도 이사미의 코테츠가 진품이라는 설은 우선 장군가, 즉 도쿠가와가에서 하사받았다는 것인데 그렇게 근거가 있는 설은 아니다. 우선 곤도 이사미의 코테츠는 어떠한 경위를 거쳐서 입수했는지가 불분명하며 만약 장군에게서 하사받았다면 그것은 대단한 명예임에도 공식기록을 남기지 않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두 번째는 코테츠는 코테츠라도 코테츠의 양자인 2대 코테츠가 만든 것이라는 것으로 이건 그나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세 번째는 사이토 하지메가 어디선가 가져왔다는 것이지만 신뢰성은 없다.
이렇게 곤도 이사미의 코테츠는 사연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시바 료타로의 소설 신센구미 혈풍록 및 타올라라 검에서 이 일화를 소재로 사용한 적도 있다. 시바 료타로의 소설 신선조 혈풍록에서는 곤도 이사미가 전부 3자루의 코테츠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중에서 2자루는 진품이지만 정작 (가장 잘 베이던) 가짜를 애용한 것으로 나온다. 시바 료타로의 또 다른 소설 타올라라 검에서는 교토로 가기 전에 도장문을 닫으며 가산을 털어서 일대의 칼 상인들에게 코테츠를 찾게 해서 입수한 것으로 묘사된다.
이 검을 판매한 상인의 수상한 행적을 보고 사이토 하지메가 히지카타 토시조에게 가짜일 것 같다는 보고를 하자 토시조는 '콘도씨의 검력이라면 평범한 칼도 코테츠가 될테니 문제 없지 않은가'라며 평소와 달리 유한 모습을 보인 걸로 나온다.
4. 여담
입이 얼마나 큰지 입 안에 주먹이 다 들어갔다고 한다. 본인도 남들에게 은근히 자랑한 듯. 이건 원래 가토 기요마사의 특기였으나, 그를 평소에 존경하였다는 곤도가 무던한 연습을 통해 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대하드라마 신센구미에서 콘도 이사미 역을 맡은 카토리 싱고가 그걸 자주한다.[11]시부사와 에이이치는 곤도 이사미는 만나보면 따뜻한 사람이었지만, 사쓰마를 매우 싫어해 사쓰마나 사쓰마 사람들에게 과격한 면모가 있어 악명이 있다고 평했다.
그가 착용했던 갑주가 도야마현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다만 그는 갑주 입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살면서 한 번 입었다고 한다.
5. 대중매체에서
바람의 검심 -메이지 검객 낭만기- 추억 편에서도 등장. 성우는 타카하시 히로시/ 장광. 검심재필 표지에 그린 설정에 보면 신입 대원들과 가까워지고 싶은데 그들이 국장인 자신을 어려워하고 긴장하는 것에 고민 중이었다고 나온다. 홋카이도 편에서도 나가쿠라 신파치가 지어낸 이케다야 사건 회고에서 짤막하게 나온다. 나가쿠라 왈 켄신이 오키타 소지와 사이토 하지메와 대결한 뒤 곤도와 한판 대결을 벌이는 전개가 재미있을 거라며 회고록을 지어내려 하다가 켄신과 하지메가 태클을 걸었다. 역사대로 근육질의 거한으로 묘사되는데, 공식적으로 신선조 최강인 소지나 하지메 다음 상대로 언급된 걸 보면 곤도도 꽤나 강했던 모양. 바람의 검심에서 히지카타 토시조가 "검술은 보통이었지만 실전에 능했다."라고 회상되는 걸 보면 곤도 역시 그러한 타입의 인물이었을 걸로 보인다.[12] 나가쿠라 말로는 곤도나 히지카타, 타카스기 신사쿠나 사이고 다카모리 등은 혼자서 천명을 베는 일기당천이 아니라 아군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천명의 적을 물리치는 일기당천의 강자였다고. 애당초 천연이심류는 실전에 치중한 검리를 가르쳤기에 잔기술로 점수를 따는 도장끼리의 대련에서는 약해 시골 검문으로 취급받았지만 난세가 닥치자 굴강한 강자들을 여럿 배출할 수 있었다고 평가받는다.슈퍼닥터 K에서는 뇌에 문제가 생겨 성격이 포악해진 악역 배우가 등장하는데, 거칠어진 성격 덕분에 이전에는 잘 해내지 못했던[13] 악역 연기를 화끈하게 해내자 뇌수술마저 거부하고 악역 연기에 매달리게 되고[14] 인기가 절정에 올랐을 때 맡은 배역이 료마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의 곤도 이사미 역이었다.
그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로는 은혼의 곤도 이사오가 있다. 원본인 이사미도 고릴라처럼 느낄 정도로 남자다운 호걸인 터라(말하자면 마초) 싱크로율이 다소 높다.[15] 다만 이사오는 한 여자에게만 스토커적인 집착을 보이는 반면, 이사미는 많은 여자에게 인기가 있었다는 게 차이지만.
건담 센티넬의 등장인물인 브레이브 코드도 이 인물에게서 모티브를 따온 것이다. 이름도 곤도 이사미를 영어식으로 적당히 바꾼 것이다. 애초에 작중에서 브레이브가 속한 조직인 뉴 디사이즈 자체가 신센구미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이다.
5.1. 곤도 이사미가 등장하는 미디어 목록
5.1.1. 만화
5.1.2. 드라마
5.1.3. 영화
5.1.4. 게임 및 애니메이션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
새롭게 발표된 리메이크판 용과 같이 유신! 극 에서는 용과 같이 7의 아다치 코이치로 페이스가 변경 되었다.* 재배소년(일본판) - 신센구미 씨앗에서 국장 이사미로 등장한다.* 학원☆신센구미 - 모에선 맞은 것만 빼고 원 이름 그대로 등장한다.* 크래시 피버 - 다행히 모에선을 피하고 원 이름 그대로 등장했다.* 사무라이의 길 4 - 신센구미 DLC 시루베의 서브 퀘스트를 수행하면 첫번째 암살대상으로 등장한다. 사용 유파는 Goshi swordfighting이며 당연히 마스터급. 강베기로 시작하는 연속 공격 Garyu taito가 흉악하게 데미지가 높고[18], 들고 있는 검 코테츠는 기본으로 위력이 250을 넘는 데다가 활력이 0이 되기 전까지는 철벽이라면서 생명력이 줄지도 않는 괴물. 문서 최상단의 사진에서 바로 튀어나온 듯한 비주얼을 하고 있으며, 쓰러뜨리면 코테츠를 드랍하고 그의 얼굴, 복장, 헤어 스타일을 언락할 수 있게 된다. 일단 활력만 다 깎으면 생명력은 쉽게 깎여서 연속공격만 주의하면 쉽게 쓰러뜨릴 수 있는 편이다.
[1]
양아버지 슈스케가 천연이심류 곤도 가문을 물려받기 전의 본래 성이 시마자키였기 때문.
[2]
표정이나 몸짓이 꽤나 안좋아보이는데, 이건 이 사진 찍을 때 정말로 그랬다고 한다. 당시
사진 기술이 열악하여 얼굴이 제대로 나오려면 얼굴에 허옇게 분칠을 하는 등의 준비를 해야했고 1장을 찍으려면 15분이나 걸릴 정도로 과정이 굉장히 거창하고 번거로웠다. 그 때문에 짜증이 머리 끝까지 난 상태에서 찍은 터라 표정이 저 모양이었다고 한다.
[3]
이런 와중에 곤도가 조직 내의 정보를 관리하고 불순분자를 색출하는 간첩으로 활약시킨 이가 바로
사이토 하지메였다.
[4]
히지카타 토시조는 5만 석, 오키타 소지와 나가쿠라 신파치, 하라다 사노스케 등은 각각 3만 석으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타마 지역의 토착 무사와 농민이라는 보잘것없는 출신들이 막부 말의 동란으로 인해 잠시나마 벼락출세의 달콤함을 맛보았던 것이다.
[5]
당시 이들의 상대들 중 하나에는 훗날 자유민권운동가인 동시에 정한론자인
이타가키 다이스케(당시 총독 겸 대대 사령)도 있었다.
[6]
신센구미를 탈퇴하고 적대하던
고료우에지의 생존자인 카노 와시오, 키요하라 키요시
[7]
중국의 지명. 안녹산의 난 때 이곳에서 결사적으로 항전한 충신
장순(張巡)을 비유하여 일컫는다. 곤도가 자신의 처지를 장순에 비유하는 이유는, 장순은 항전하다 잡혀 처형당했기 때문.
[8]
신센구미가 교토의 이케다야라는 여관에 있었던 유신지사들을 습격한 이케다야 사건 때 했던 말로 설정되어있다.
오다 노부나가 의 "어쩔 수 없군"만큼이나 유명한 대사로 많은 창작물에서 패러디되곤 한다. 일례로
다이쇼 야구 소녀의
츠쿠바에 토모에 는 밤에 야구방망이(...)를 들고 나가 '길거리 타자'로 유명 중학교 투수들의 공을 치며 이 대사를 내뱉기도 했다.
[9]
코테츠는 장인 나가소네 코테츠가 만든 일련의 검들을 통틀어 이르는 것으로 현대로 치면 일종의 브랜드명이다.
[10]
이케다야 사건 때 다른 대원(오키타 쇼지 포함)들의 검은 휘어지거나 부러져 있었는데 멀쩡한 것이 곤도 이사미의 검 하나뿐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건 그냥 곤도 이사미가 싸울 때 상대의 검과 검을 서로 부딪치는 불필요한 동작을 거의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면 사용하는 검이 명검이든 아니든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평범한 검도 명검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인 셈.
[11]
참고로 싱고는 연예계 활동 초기 당시 그게 원래 특기였다고 한다.
[12]
실제 역사에서는 이케다야 사건 당시 선봉으로 뛰어들어 날뛰었으면서, 오키타나 나가쿠라가 부상을 입는 와중에도 혼자 멀쩡했다는 일화가 있어 숨은 강자 취급받기도 한다.
[13]
험악하고 강렬한 외모 덕분에 악역 전문 배우가 됐지만, 부드러운 성격 때문에 악역 연기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14]
사실 기절해 있을 때 이미 K가 수술을 끝낸 뒤였지만 그의 성공을 위해 아내가 일부러 함구하고 있었다.
[15]
성격도 닮은 편. 둘 다 사람을 잘 믿는 편이다.
[16]
거의 소개 수준이지만..
[17]
왼쪽은
히지카타 토시조
[18]
str 510. 유파 특수능력 중 적 공격력을 줄여주는 걸 가장 좋은 걸로 장착해도 50% 데미지가 들어오며, 기본 유파인 무신류의 경우 그냥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