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3-02-06 02:52:02

타니 산쥬로

파일:신센구미 깃발.svg
신센구미
{{{#!wiki style="margin:0 -10px -5px;min-height:1.8em;"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word-break:keep-all;"
국장 · 국장 보조
<colbgcolor=#068fb0><colcolor=#fff> 국장 곤도 이사미
총장 야마나미 케이스케 <colbgcolor=#068fb0><colcolor=#fff> 참모 이토 카시타로
부장 히지카타 토시조 군사 타케다 간류사이
조장
1번대 오키타 소지 6번대 이노우에 겐자부로
2번대 나가쿠라 신파치 7번대 타니 산쥬로
3번대 사이토 하지메 8번대 토도 헤이스케
4번대 마츠바라 츄지 9번대 스즈키 미키사부로
5번대 타케다 간류사이 10번대 하라다 사노스케
감찰 · 회계
감찰 야마자키 스스무 · 핫토리 타케오 · 요시무라 칸이치로 · 시노하라 타이노신
제사취조역 및 감찰 시마다 카이 · 오이시 쿠와지로
회계 카와이 키사부로
미부 로시구미 시절 인물
국장 세리자와 카모 · 니이미 니시키 }}}}}}}}}

신센구미 7번대 조장
타니 산쥬로
谷三十郎
<colbgcolor=#068fb0> 출생 생년 미상
빗추국 죠보군
(現 오카야마현 타카하시시)
사망 1866년 5월 15일
야마시로국 교토 히가시야마 기온 신사
(現 교토부 교토시 히가시야마구 야사카 신사)
재임기간 신센구미 7번대 조장
1864년 ~ 1866년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068fb0> 토모쿠니(供国)
형제 타니 만타로(谷万太郎)
타니 슈헤이(谷周平)[1]
}}}}}}}}} ||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신센구미의 7번대 조장.

2. 생애

빗추 국의 마츠야마 번 출신으로, 타니 산지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산지로는 군의 깃발이나 말의 표식 등을 관장하는 하타봉행(旗奉行)을 맡은 상급무사로, 산쥬로는 어릴 때부터 직심류[2] 검술의 사범이었던 아버지에게 검술을 배웠다. 타니 만타로(谷万太郎)와 타니 쥬헤이(谷周平)라는 동생들도 있다. 가에이 6년(1853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문을 잇고, 주군이자 빗추 국의 마츠야마 번 제7대 번주인 이타쿠라 카츠키요(板倉勝静)를 가까이서 섬기기도 하였으나, 안세이 3년(1856년) 10월, 여성문제로 인해 가문이 단절되자 동생 타니 만타로와 함께 오사카에서 도장을 경영하게 된다.

분큐 3년(1863년) 가을 무렵, 교토에서 반(反)막부 세력을 단속하던 낭인부대 신센구미에 입대하여 부장 보좌직과 8번대 조장을 맡는다. 겐지 원년(1864년) 6월, 신센구미가 반막부 세력이 모여 있던 숙소 이케다야를 습격하였을 때, 히지카타 부대의 일원으로서 활약하여 포상금 17냥을 하사받았다. 같은 해 7월에는 교토에서 일어난 조슈 번의 상경 전투인 금문(禁門)의 변에서는 패잔병 색출 작전을 통해, 패잔병 다나카 큐이치로를 체포하는 등 많은 곳에서 활약하였다.[3] 게이오 원년(1865년) 4월, 7번대 조장 및 창술사범을 역임하던 중, 도사 번 내의 존왕양이 집단인 도사근왕당(土佐勤王党) 일파의 오사카 성 탈취 계획을 알아낸다. 그는 타니 만타로, 마사키 나오타로, 아베 쥬로와 함께 도사근왕당의 모임장소인 젠자이야를 습격하였고, 그 과정에서 부상을 입기도 하였다. 그 밖에도 오사카의 번두들에 아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그 뒤 산쥬로는 또 다른 동생인 마사타케[4]를 신센구미의 국장 곤도 이사미의 양자로 들여보내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였으나, 게이오 2년(1866년) 4월, 교토 히가시야마의 기온 신사(祇園神社)에서 급사하고 만다. 그의 사인에 대해 명확히 밝혀진 바는 없고, 사이토 하지메에게 암살당했다는 설[5], 술을 마시고 뇌졸중으로 병사했다는 설 등의 설만 존재한다.


[1] 곤도 이사미의 양자 [2] 直心流 : 검술 유파 중 하나. 신명류검술, 신음류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3] 금문의 변이 종결된 이후에는, 동문에게 "강한 대사가 적어서 자신이 직접 선두에 서게 되어버렸다"고 하소연했다. [4] 후에 곤도 슈헤이로 개명하게 된다. [5] 바람의 검 신선조에서는 이 설을 채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