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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18:12:42

파비오 칸나바로

칸나바로에서 넘어옴
파비오 칸나바로의 역임 직책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둘러보기 틀 모음
대표팀
파일:중국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대행
클럽

광저우 헝다 타오바오 역대 감독
마르첼로 리피
(2012~2014)
<colbgcolor=#990033> 파비오 칸나바로
(2014~2015)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
(2015~ 2017)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
(2015~2017)
파비오 칸나바로
(2017~2021)
정즈
(2021~ )

톈진 취안젠 역대 감독
반데를레이 루솀부르구
(2015~2016)
파비오 칸나바로
(2016~2017)
파울루 소자
(2018)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파올로 말디니
(1994~2002)
파비오 칸나바로
(2002~2010)
잔루이지 부폰
(2010~2018)
}}} ||
파비오 칸나바로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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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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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실버볼.png
2006 FIFA 월드컵 실버볼
파일:발롱도르 트로피.png
파일:FIFAWorldPlayer.png
파일:World Soccer.png
베스트팀
파일:attachment/FIFPro_logo.png
2006 · 2007
파일:UEFA 유로 2000 심볼.svg
파일:ESM.png
파일:2006 FIFA 월드컵 독일 심볼.svg
파일:유럽 축구 연맹 로고.svg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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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비오 칸나바로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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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655ba, #0655ba)"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655ba> 파일: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엠블럼(홈).svg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FIFA 센추리 클럽 가입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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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ddd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fff> 순서 선수 이름 출전 횟수 첫 경기 마지막 경기
1 잔루이지 부폰 176회 1997.10.29 2018.3.23
2 파비오 칸나바로 136회 1997.1.22 2010.6.24
3 파올로 말디니 126회 1988.3.31 2002.6.18
4 레오나르도 보누치 121회 2010.3.3 2023.6.15
5 다니엘레 데 로시 117회 2004.9.4 2017.11.10
6 조르조 키엘리니 2004.11.17 2022.6.1
7 안드레아 피를로 116회 2002.9.7 2015.9.3
8 디노 조프 112회 1968.4.20 1983.5.29
}}}}}}}}}}}}}}} ||
이탈리아의 축구 감독
파일:7934.jpg
<colbgcolor=#eeeeee><colcolor=#000000> 이름 파비오 칸나바로
Fabio Cannavaro
출생 1973년 9월 13일 ([age(1973-09-13)]세)
캄파니아주 나폴리
국적
[[이탈리아|]][[틀:국기|]][[틀:국기|]]
신체 176cm / 체중 75kg
직업 축구 선수 ( 센터백[1]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colcolor=#000000> 선수 SSC 나폴리 (1988~1992 / 유스)
SSC 나폴리 (1992~1995)
파르마 AC (1995~2002)
인테르나치오날레 (2002~2004)
유벤투스 FC (2004~2006)
레알 마드리드 CF (2006~2009)
유벤투스 FC (2009~2010)
알 아흘리 클럽 (2010~2011)
감독 알 아흘리 클럽 (2013~2014 / 수석 코치)
광저우 헝다 타오바오 (2014~2015)
알 나스르 FC (2015~2016)
톈진 취안젠 (2016~2017)
광저우 FC (2017~2021)
중국 대표팀 (2019)[2]
베네벤토 칼초 (2022~2023)
우디네세 칼초 (2024)
기타 알 아흘리 클럽 (2011~2013 / 기술 고문)
국가대표 136경기[3] 2골 ( 이탈리아 / 1997~2010)
SNS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 파일:틱톡 아이콘.svg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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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eeeeee><colcolor=#000000> 가족 동생 파올로 칸나바로
장남 크리스티안 칸나바로(1999년생)
장녀 마르티나 칸나바로(2001년생)
차남 안드레아 칸나바로(2004년생)
등번호 SSC 나폴리 - 5
파르마 AC - 17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 13, 17
유벤투스 FC - 28, 5
레알 마드리드 CF - 5
알 아흘리 클럽 - 23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 5
}}}}}}}}} ||

1. 개요2. 선수 경력
2.1. 클럽2.2. 국가대표
3. 플레이 스타일4. 평가5. 지도자 경력6. 기록
6.1. 선수
6.1.1. 대회 기록6.1.2. 개인 수상6.1.3. 출전 기록
6.2. 감독
6.2.1. 대회 기록6.2.2. 개인 수상
6.3. 수훈
7. 칸나바로에 대한 헌사8. 이야깃거리9.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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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 축구 선수 출신 감독. 선수 시절 포지션은 센터백.

이탈리아 2006 월드컵 우승을 이끌고 수비수라는 포지션에서 발롱도르 FIFA 올해의 선수까지 거머쥔 레전드.[4] 역대 세 번째 수비수 발롱도르 위너이자 스위퍼가 아닌 수비수로서는 유일한 수상자이다.[5]

2. 선수 경력

2.1. 클럽

칸나바로가 10대 청소년일 때, 칸나바로의 고향팀 나폴리에서는 마라도나가 그라운드를 누비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남자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당연히 칸나바로도 축구에 열광할 수 밖에 없었다. 나중에 축구 선수로 유명해지고 나서 마라도나의 팬이었다고 공공연히 말했다.

나폴리 유스 팀에 입단한 칸나바로는 곧 위기를 맞게 되었는데, 딱히 공격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수비수를 시키기엔 키가 작았기 때문에 영 믿음직하지 않았다. 하지만 칸나바로는 뛰어난 위치 선정과 점프력으로 제공권의 약점을 보완하면서 당시 세계 최고의 리그였던 세리에 A에 성공적으로 데뷔한다. 하지만 나폴리의 재정난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칸나바로는 파르마로 이적하게 된다.
파일:8666.jpg
칸나바로는 파르마에서 영혼의 파트너였던 릴리앙 튀랑과 함께 호흡을 맞추며 전성기를 맞이했고, 이러한 활약 덕분에 개인적으로는 세계적인 센터백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1998-99 시즌에는 팀에 UEFA컵 트로피를 안겨준다. 당시 파르마의 수비라인은 상대팀에게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 미칠듯한 피지컬로 달려드는 튀랑과 바로 옆에서 전부다 커팅해내는 칸나바로를 겨우 뚫어내면 뒤에는 당시 최고의 골키퍼 유망주로 평가받던 잔루이지 부폰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러한 세 선수의 엄청난 활약으로 파르마는 중소규모의 클럽임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강호들과 함께 7공주라 불리며 세리에 A의 다크호스로 인정받게 된다.

다만, 이후 이적한 인테르 시절은 부상과 그로 인한 컨디션 난조가 겹치면서 부진에 빠졌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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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04년, 유벤투스의 서드 키퍼인 파비안 카리니와 트레이드되며 팀에 합류한 칸나바로는 재기에 성공하며 자신의 커리어에서 절정을 맞는다.[7] 잠브로타 - 튀랑 - 칸나바로 - 조나단 제비나로 이루어진 유벤투스의 수비 라인은 그야말로 통곡의 벽이었다. 이들을 넘는 것만 해도 빠듯한데, 그 뒤에는 역시 레전설 골키퍼 부폰이 버티고 있었다. 그의 첫번째 전성기였던 파르마에서의 공포의 라인업이 더욱 원숙해진 기량으로 그대로 재현된 것이다. 완벽하게 부활에 성공한 칸나바로의 활약으로 유벤투스는 2년 연속 스쿠데토를 얻었고, 개인적으로도 2004-05, 2005-06 시즌 세리에 A 올해의 수비수와 2005-06 시즌 세리에 A 올해의 선수에 선정된 것은 물론, 2006년에는 월드컵에서의 활약을 인정받아 발롱도르, FIFA 올해의 선수,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까지 수상하며 선수 인생 최고의 영광을 누리게 된다.
하지만 칸나바로의 몰락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다가왔다. 바로 이탈리아 축구 최악의 흑역사인 칼초폴리사건이다. 이 칼초폴리로 유벤투스는 2004-05, 2005-06 시즌 2번의 리그 우승 기록을 박탈당했으며, 당연히 칸나바로의 커리어에도 유벤투스 시절 우승 기록은 하나도 없다. 발롱도르와 FIFA 올해의 선수,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세리에 A 올해의 선수, 2006 월드컵 실버볼로 정점을 찍은 기량도, 커리어도 이때를 기점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유벤투스가 세리에 B로 강등되자, 칸나바로는 카펠로 감독을 따라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다. 칸나바로는 레알에서도 2번의 리그 우승을 차지하긴 했으나 새로운 리그에서의 적응 실패와 30대 중반에 들어선 나이로 인한 신체 능력 저하로 인해서 라리가에서 가장 쉽게 돌파당하는 수비수로 선정되는 등, 바로 얼마 전 발롱도르와 FIFA 올해의 선수,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세리에 A 올해의 선수, 2006 월드컵 실버볼을 수상했던 명성과는 전혀 딴 판이었다.[8] 결국 다시 유벤투스로 돌아왔을 때는 레알 시절보다 노쇠화가 더 진행된 상황이어서 당시 최악의 암흑기를 보내고 있었던 팀에 전혀 보탬이 되지 못했고 결국 2009년 유벤투스는 칠벤투스가 되어버린다.

칸나바로의 추락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유벤투스에서 뛰기에는 기량이 갑자기 급하락하여 결국 2009-10 시즌이 끝나고 방출, 알 아흘리로 이적하였다. 이어서 1년 뒤인 2011년 6월 21일, 기대에 못 미치는 활약을 보였다는 사유로 알 아흘리 구단 측이 공식적으로 방출을 선언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수비수가 말년에 이렇게 허망하게 은퇴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어느 정도 리딩능력이 생긴건 말년에 들어서였고[9] 기본적으로 작은 체구에도 적극적인 몸싸움과 뛰어난 운동능력으로 공을 탈취하는 파이터형 수비수였던지라 나이가 들어 신체능력이 떨어지자 급격하게 내리막을 걸었다. 역시나 같은 파이터형 수비수인 제이미 캐러거 카를레스 푸욜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캐러거는 30대 초반에 확 몰락했고 푸욜은 그나마 기량은 유지했지만 부상을 달고 살았다.

2.2. 국가대표

1994, 1996 UEFA U-21 챔피언십에서 이탈리아 U-21 대표로 출전해 우승컵을 들었으며, 특히 1996년 대회에서는 MVP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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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성인 메이저 대회로 1998 프랑스 월드컵에 주전으로 참가하였다. 조별 리그 1차전 칠레전에서 마르셀로 살라스의 역전 헤딩골을 제대로 커버하지 못했으나 전체적으로 훌륭한 활약을 보여주었고 이후 경기들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8강 프랑스전에서는 스테판 기바르쉬에게 팔꿈치로 얼굴을 가격당하는 등 몸을 아끼지 않는 플레이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팀은 승부차기 끝에 패배하였다.

유로 2000에서는 파올로 말디니, 알레산드로 네스타와 함께 카테나치오의 축을 이루어 이탈리아의 준우승을 이끌면서 세계적인 센터백으로 거듭난다. 비록 결승전에서 프랑스에게 통한의 역전패를 당하기는 했지만[10] 이때 보여준 카테나치오의 위용은 프랑스의 철의 포백과 함께 당대 최고의 수비라인으로 평가받기에 충분했다. 특히 4강 네덜란드전에서 잔루카 잠브로타가 퇴장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무실점으로 버텨낸 이탈리아의 수비력[11]은 당시 축구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2002 한일 월드컵 유럽 예선에서 조반니 트라파토니 감독은 3-4-1-2 포메이션을 사용했는데, 말디니 - 네스타 - 칸나바로라는 희대의 조합이 완성되면서 극강의 수비력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트라파토니 감독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본선에서는 4-2-3-1을 사용했고, 칸나바로는 네스타와 조합을 이뤄 준수한 활약을 펼쳤으나 이탈리아의 경기력은 저조했다. 네스타가 도중에 부상으로 아웃되고 칸나바로는 조별 리그 마지막 경기인 멕시코전에서 경고를 받으면서 16강전에 출장정지를 먹는다. 그렇게 네스타와 칸나바로가 빠진 이탈리아는 대전에서 한국과 16강전을 치르게 되었고 이탈리아는 크리스티안 비에리의 선제골로 승리 직전까지 갔지만 이탈리아가 8강에 가는 일은 없었다. 공격수만 6명[12]이 투입된 한국에 거짓말처럼 1:2 역전패를 당하고 만 것이다. 파누치가 삽질을 해 설기현에게 동점골을 허용한 것이 치명타.

말디니의 은퇴 이후 칸나바로는 대표팀의 주장이 되었고 유로 2004에서 참가하지만 경고 누적으로 인해 조별리그 3차전은 출전하지 못했고, 에이스인 프란체스코 토티도 조별 리그 1차전인 덴마크와의 경기에서 상대 수비수 크리스티안 폴센에게 침을 뱉은것이 발각되어 출전정지 라는 중징계를 받고 나오지 못하면서 이탈리아는 조별리그 광탈했다.[13]
파일:V1.jpg
2006 독일 월드컵에도 출전한 칸나바로는 수비수로는 월드컵 역대 최고의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대회 실버볼을 수상,[14] 이탈리아를 우승으로 이끌었다.[15] 당시 칸나바로의 플레이는 통곡의 벽 그 자체. 어떤 식으로 공이 들어오던 간에 그 특유의 과감한 커팅과 아크로바틱한 클리어링로 모든 공격을 다 막아내며, 1대1 돌파 횟수 0회라는 기록을 세운다. 그리고 전 경기 풀타임 출장(690분)과 옐로카드 0개[16]라는 월드컵 역대 최고의 퍼포먼스였다. 파비오 그로소 - 마르코 마테라치[17] - 잔루카 잠브로타와 함께 또 한번 철의 4백을 형성, 안드레아 피를로, 젠나로 가투소가 4백을 보호하고, 그 뒤를 이들 4백이 지키고, 최후방에 부폰이 버틴 이탈리아는 역대 최소 실점(2실점)으로 월드컵 우승을 차지한다.[18]

이후 유로 2008에도 참가할 예정이었으나 대회 직전 부상으로 인해 엔트리에서 제외 되었다.

2010 남아공 월드컵에 참가했다. 유벤투스에서도 노쇠화 때문에 기량이 예전 같지 않다는 비판이 있었지만 세대교체를 할 겨를이 없었던 이탈리아는 4년 전 라인업을 거의 그대로 뜯어갔고, 이는 재앙 수준의 결과를 가져왔다. 이탈리아의 4백은 꿀 대진 취급받았던 조별 리그에서 철저하게 유린당했다.

파라과이, 뉴질랜드와 연달아 무승부에 그친 데 이어 특히 2차전 뉴질랜드와의 경기에선 본인의 실수로 뉴질랜드에게 선취골을 허용하는 등 민폐를 제대로 끼쳤고, 슬로바키아 쇼크로도 잘 알려진 슬로바키아전에서도 구멍이 되며 2:3으로 패배하였다. 끝내 팀의 광탈을 막지 못한 채 오열하고 있는 콸리아렐라[19]를 위로하며 쓸쓸하게 라커룸으로 퇴장하는 칸나바로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불과 4년 전 대회에서 아주리의 4번째 월드컵 우승의 주역이자 팀의 주장으로서 피파컵을 번쩍 들어올렸던 영광과 대조해보면 처절한 몰락이었다. 사실 당시에도 칠벤투스가 되어 버린 유벤투스 위주의 선수를 뽑는다고 대표팀에 말이 많았다. 그럼에도 마땅한 대체자도 못찾고 결국 재앙이 온 것이었다. 실로 초라한 국가대표 경력의 마무리가 아닐 수 없다.

3. 플레이 스타일


파비오 칸나바로는 역동적이고 적극적인 수비 스타일을 가진 대표했던, 파워 플레이형 센터백의 정수와도 같은 수비수이다. 2006년 월드컵때 이탈리아가 우승을 하는데 큰 기여를 했으며 통곡의 벽 같은 수비력으로 본인이 한 “공은 내 앞에서 멈춘다”라는 말을 적극 실천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후반까지 10여년의 시간 동안 세계 최고의 수비수 중 한 명으로 널리 이름을 날렸던 선수답게 수많은 장점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가장 돋보였던 것은 엄청난 운동능력을 기반으로 한 적극적인 대인 수비 능력이었다. 공격수의 동작에 반응하는 속도가 매우 빨랐고 이를 기반으로 공격수를 쉴 새 없이 압박했다. 또한 아주 끈질긴 수비로도 정평이 나 있었는데, 칸나바로의 경우 스피드까지 매우 빠르다보니 공격수 입장에서는 발재간을 부려도 금방 따라잡히거나 빼앗겨 버렸다.

정말 우직하게 플레이하는 선수였다. 플레이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부상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하지 않는 선수처럼 보였다. 무서운 기세로 뛰어가 공격수를 압박하면서 정확하게 공만 건드려 빼앗는 데 능했고, 역동적인 슬라이딩 태클도 굉장히 자주 활용했다. 태클 자체는 상당히 정확했으나 동작이 워낙 역동적이었기 때문에 다소 깊은 태클을 거는 경우가 많았고, 상대 선수들은 이런 점을 교활하게 활용해 많은 파울을 얻어내기도 했다.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거친 몸싸움을 즐기는 강심장이었다. 상대가 안드리 셰브첸코 같은 피지컬 괴물이든, 올리버 비어호프 같은 거인이든간에 적극적으로 몸싸움을 시도하고 태클을 걸었다. 그래서 칸나바로를 상대하는 공격수들은 몇 번 경합하고 나서는 풀이 죽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칸나바로의 특별한 장기는 화려하면서도 정확한 클리어링이다. 몸의 밸런스가 무너진 상태에서도 어떻게든 공에 발을 갖다 대서 아크로바틱하게 공을 처리했다. 특히 바이시클 킥을 이용한 클리어링은 그의 전매특허다. 공격수에게 압박을 가하다가 공격수가 잠깐의 틈이라도 보이면 바로 달려들어서 공을 상대 진영으로 뻥 차버렸다.

주력이 빠르고 매우 민첩하며 지구력까지 아주 뛰어났기 때문에 라이트백 포지션에도 제 활약을 펼칠 수 있었고, 수많은 드리블러들을 방어하며 이름을 날렸다. 일례로 유로 2000 준결승전에서 잠브로타가 퇴장당한 와중에 칸나바로 홀로 오른쪽을 지키며 훌륭한 마킹능력을 보여주었고, 그 덕에 바우데베인 젠던, 데니스 베르캄프 등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테크니션들이 이탈리아의 오른쪽 진영을 넘보지 못했다. 결승전에서도 마찬가지로 칸나바로의 적극적인 수비 때문에 크리스토프 뒤가리가 소극적인 플레이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다.
파일:깐나바로점프.jpg 파일:칸나바로점프.jpg
176cm의 신장을 가지고 있다. 당연히 센터백치고는 단신인데, 오죽하면 센터백이라는 포지션에도 불구하고 2006 월드컵 이탈리아 대표팀 중 최단신이었다.[20] 이러한 신체 조건에도 불구하고 날아다닌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높이 점프할 수 있었기 때문에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선술했듯 상대가 장신이든 아니든 전혀 신경쓰지 않고 덤벼들어 공중볼 경합을 했다. 그러다 보니 엄청난 점프력으로 상대 공격수 어깨를 훌쩍 넘어 헤딩 경합을 시도하다가 공중에서 균형을 잃고 떨어지는 아찔한 장면도 꽤 있었다.

선수 생활 초기에는 적극적이고 빠르며 아크로바틱한 수비수로 이름을 날렸고 수비진을 이끄는 능력은 많이 부각되지 않았는데, 2006년 월드컵에서는 네스타가 수비라인 조율, 빌드업 같은 역할들을 부상으로 인해 할 수 없게 되자 본인이 그 역할을 대신 수행했다. 그렇게 종횡무진 뛰어다니던 칸나바로가 맞는가 싶을 정도로 엄격하게 경기에 임했으며 이런 변화는 곧 대회 기간 내내 1:1 돌파 허용 0회라는 대기록을 낳았다. 그동안 사람들은 칸나바로를 파이터형 센터백으로만 여겼지만, 사실은 굳이 뻘뻘 돌아다면서 수비하지 않는 커맨더형 센터백으로서도 이런 클래스를 보여줄 수 있는 선수였던 것이다. 이것은 그가 수비수로서 얼마나 출중한 재능을 가졌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작은 체구를 폭발적인 운동능력으로 보완하고 적극적인 경합 위주의 수비 스타일을 가진 선수들은 크진 않아도 잔부상을 달고 다니는 경우가 많은데 정말 이상하리만치 부상을 안 당했다. 급격하게 하향세를 탄 2006년 이후로도 노쇠화로 자연스런 운동능력 저하가 왔을 뿐 별다른 부상은 없었다. 1998년 월드컵 8강전에서는 스테판 기바르쉬에게 팔꿈치 가격을 당했는데도 아픈 티를 전혀 안 내고 멀쩡히 플레이했다. 같은 시대를 대표한 수비수인 알레산드로 네스타, 카를레스 푸욜이 부상 때문에 각종 대회에 참여하지 못하고 상대적으로 평판이 깎일 수밖에 없었는지 생각해보면 사실 축구선수로서는 부상을 안 당하는 게 가장 큰 장점이기도 하다. 또 웬만해서는 주심의 판정에 항의하지 않고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며, 경고나 퇴장을 받아도 별 반응이 없다. 반칙이 자신의 실수라는 것을 잘 인정하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보인다. 경기 중 보여주는 매너가 아주 훌륭하고 모범적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브라질의 카푸와도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단점도 존재했는데 발밑이 유려하지 않고 패스의 정밀도가 부족했다는 것이다. 후방 빌드업 상황에서 상황을 통제하거나 컨트롤 하는 능력은 동시대 최고의 센터백[21]들에 비해 떨어지는 편이었고 칸나바로의 볼터치는 말디니나 네스타가 보여주는 유려한 발기술과는 거리가 있었다. 때문에 레알 마드리드 시절에는 가뜩이나 나빠진 피지컬과 신체능력에 투박한 발밑과 부족한 빌드업 능력이 부각되어 급격한 하락세를 맞게 된다.

4. 평가

알레산드로 네스타, 카를레스 푸욜, 존 테리와 함께 2000년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센터백 중 한 명이자 세리에 A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수비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먼저 국가대표 커리어는 그 어떤 수비수들과 비교하여도 굉장히 화려한 편인데 유로 2000에서 대회 내내 맹활약을 펼치며 아주리 군단을 준우승에 올리는데 크게 기여하고, 칸나바로 본인은 대회 올스타팀에도 선정되었다. 이후 2006 독일 월드컵에서는 월드컵 역대 최고의 수비수 퍼포먼스를 보여주면서 조국의 통산 네 번째 월드컵 우승에 크게 기여하고, 칸나바로 본인은 실버볼과 올스타팀을 수상한다. 비록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노쇠화로 인해 슬로바키아 쇼크를 겪게 된다.

클럽 커리어는 화려한 국가대표 커리어에 비해서는 약간 아쉽지만 그래도 파르마 릴리앙 튀랑, 잔루이지 부폰과 함께 엄청난 수비력을 보여주면서 세리에 7공주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만들었고, 코파 이탈리아 2회 우승, UEFA컵 1회 우승을 이끌면서 팀의 최전성기를 함께하였다. 이후 인테르 시절은 부진하였지만 유벤투스 시절에는 다시 기량을 회복하면서 팀의 수비력 향상에 크게 기여하였다. 세리에 A 2회 우승도 있었지만 칼초폴리로 박탈당하고 만다. 2006 월드컵 직후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고 라리가 적응에 애를 먹지만 그래도 리그 2회 우승에 성공한다. 하지만 노쇠화로 인해 점차 레알에서 주전 자리에서 밀려버리고, 이후 다시 이적한 유벤투스에서는 노쇠화가 심각해져 리그 7위를 기록하고 만다. 그래서 클럽 커리어는 같은 국적의 알레산드로 네스타에게 크게 밀리는 편이다.

개인 커리어는 수비수로서는 정말 화려한 편인데 수비수 사상 네 번째 발롱도르 수상과 최초의 FIFA 올해의 선수 수상, 두 번째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수상자이다. 그 외에도 2006 독일 월드컵 실버볼과 2005-06 시즌 세리에 A 올해의 선수를 수상했고, 세리에 A 올해의 수비수도 2회 수상하였다. 그리고 베스트팀도 FIFA FIFPro 월드 XI에 2회, UEFA 올해의 팀 ESM 올해의 팀에 1회씩 선정되었으며, 유로 2000과 2006 독일 월드컵에서는 대회 올스타팀에 선정되었다.

5. 지도자 경력

5.1. 알 아흘리 클럽

2011년 8월, 은퇴 후 곧바로 알 아흘리에서 기술 이사 겸 엠버서더 직으로 2013년 7월까지 2년동안 활동했다. 그 후 2013-14시즌 알 아흘리의 수석코치로 임명되어 알 아흘리를 UAE 프로 리그와 UAE 리그컵 우승을 이끌었다.

5.2. 광저우 헝다 타오바오

그리고 2014년 11월 5일 스승 마르셀로 리피 감독의 뒤를 이어 광저우 헝다 감독에 선임되었다. 광저우 헝다의 감독으로 활동하던 도중인 2015년 2월, 탈세 혐의로 나폴리 법원으로부터 10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2015년 6월 5일, 광저우 헝다 감독직 수행 6개월 만에 경질되었다. 천신만고 끝에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 8강에 진출했고 리그에서 잠시 주춤한 건 사실이지만 어쨌든 리그 1위 자리는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행보에 물음표가 붙는 상황인데, 광저우 구단에서는 경력이 일천한 칸나바로를 완전히 신임하지 못해 리피가 총책임자로 구단에 계속 남아 있어주길 바랬지만 리피는 지난 2월 광저우를 완전히 떠났기 때문에 리피의 비호를 받지 못한 칸나바로는 바로 경질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사실 성적은 1위를 계속 달리고 있었고 아챔에서도 순항중이었는데, 6경기 동안 연속 무승에 아챔에서는 성남 FC, 슈퍼 리그에서는 톈진 터다와 2:2로 비긴 후 전격 경질되었다. 사실 이 경질은 칸나바로의 탈세 혐의로 인한 구단 이미지와 함께, 아직 초짜 감독이었던 칸나바로를 믿지 못한 광저우 구단주의 입김이 작용했다. 어떻게 보면 광저우가 2부에서 1부로 팀을 승격시킨 이장수를 경질할 때와 비슷한 상황이다.

성적 자체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팬들은 강력 반발했고, 칸나바로가 광저우를 떠날 때, 많은 팬들이 작별인사를 위해 광저우 바이윈 국제공항에 배웅을 와서 인산인해를 이루었을 정도였다.

5.3. 알 나스르 FC

2015년 10월 26일 사우디 프로리그의 알 나스르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전 시즌 우승팀인 알 나스로를 시즌 중반 리그 6위로 추락시킨 책임으로 2016년 2월 11일, 4개월만에 경질되었다.

은퇴 후 체계적인 지도자 코스를 밟지 않고 광저우 헝다와 알 나스로 등 아시아와 중동 리그를 떠돌면서도 2번 연속으로 감독직에서 실패를 경험했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 걱정을 하는 팬들도 많았는데...

5.4. 톈진 취안젠

2016년 6월 10일 중국 갑급 리그의 톈진 취안젠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계약기간은 2년 6개월이다 톈진 취안젠은 반데를레이 루솀부르구 감독이 맡고 있었으나, 칸나바로가 취임하기 직전에는 리그 8위를 달리고 있었다. 칸나바로는 연승행진을 달리면서 2016년 갑급 리그 우승을 통해서 감독 경력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로써 광저우와 알나르스에서의 두번의 실패를 만회하고 지도력을 입증했다.

갑급리그의 우승으로 취안젠은 중국 슈퍼 리그로 승격되었다. 슈퍼리그에서도 상위권을 마크하고 있다. 권경원을 총애하여 알 아흘리에서 직접 영입했다고 한다. 2017년 시즌 막판을 앞둔 11월 1일, 스콜라리가 퇴임하는 광저우 헝다의 차기감독으로 내정되었다는 보도가 중국언론으로부터 나오고 있다.

2017년 시즌을 4-5위권으로 유지했는데, 당해 승격팀 치고는 꽤 잘한 셈. 공교롭게도 2017년 마지막 경기는 감독 부임설이 나돌고 있는 광저우 헝다전이다.

광저우 헝다와의 시즌 마지막 경기를 2-1로 승리, 페예그리니 허베이 화샤가 이날 패해 4위로 떨어짐으로써 극적으로 3위로 시즌을 마감하고 아챔 티켓을 획득했다. 광저우도 리그에서 우승해서 아챔 티켓을 따냈으므로, 칸나바로가 광저우로 가든지 톈진에 남든지 아챔에서 그의 지휘를 볼 수 있게 되었다.

2017년 11월 6일 구단측과 합의로 계약을 상호해지했다. 광저우 감독 취임을 위해 사직. 언론 보도에 의하면 6주전에 이미 구단측에 통보했다고 한다. 다만 아챔 티켓이 걸려있었기 때문에 팀웍의 동요를 막기 위해 엠바고를 건 듯.

톈진구단은 후임으로 파울루 소자를 임명했다.

5.5. 광저우 헝다 타오바오 / 광저우 FC 2기

2017년 11월 광저우 헝다와 3년계약으로 계약했다.(5년이라는 설도 있다. 자세한 세부내역은 공개되지 않았다.) 2년전 경험이 일천하다는 이유로 구단주의 신임을 못얻어 쫓겨났는데, 당당하게 톈진을 갑급 리그 우승, 슈퍼 리그에서 3위를 시켜 리더십을 증명하고 친정으로 되돌아왔다. 한때 황사머니의 선봉장이었던 광저우는 2016년 잭슨 마르티네스가 먹튀짓을 한 것을 끝으로 특급 외국인 영입을 자제하고 보수적 경영을 고수하고 있는데, 칸나바로가 계속 연속 우승 기록을 경신할 수 있을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5월까지 리그 5위를 달리면서 아챔에서는 16강에서 톈진 취안젠에게 무패 탈락, FA컵에서는 하필이면 리그 최하위 구이저우 즈청에게 승부차기 패배로 인연이 없게 되었다. 중국 언론에서는 리그에서 반등하지 못하면 칸나바로가 경질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고 있다.

후반기가 시작되면서 네마냐 구데이, 김영권을 후보엔트리에 밀어넣고 데려온 탈리스카 파울리뉴가 맹활약, 7경기에서 6승 1패라는 놀라운 성적으로 8월말 1위와 베이징 궈안에 한라운드 덜 마친 가운데 승점 3점차로 바짝 뒤쫓고 있다. 이 추세라면 광저우의 8연패도 불가능하지는 않은 듯. 그러나 상하이 상강에게 7년만에 리그 우승을 내주면서 팀은 무관이라는 최악의 결과를 맞이해버렸다. 아무튼 정황상 경질은 유력해보이는 추세였으나 어찌 유임은 될 듯 하다.

사실 광저우의 8연패 실패는 칸나바로 책임보다는 쓸데없이 "선수 영입에 돈을 안쓴다"는 언플을 하면서 수준이하의 선수인 네마냐 구데이 파울리뉴의 공백을 땜방한 프런트의 책임이 더 크다. 중국리그에서는 감독보다는 선수영입이 중요하고, 전반기 마칠 때는 선두와 승점 12점차였는데, 탈리스카 파울리뉴를 수혈받은 후반기 27라운드에 선두 상하이 상강에 2점까지 따라 붙었기 때문에 칸나바로는 기회를 한번 더 받았다.

2019년 7월까지 광저우가 리그에서 2위를 달리고는 있지만, 구단주의 전폭적인 신임을 얻지는 못하는 듯, 광저우와 무리뉴의 링크설이 떴다.

거액의 연봉제의에도 무리뉴가 가족을 핑계로 난색을 보여 칸나바로는 자리를 지키게 되었지만, 리그에서 1위를 하지 못하면 시즌 후 경질될 가능성이 높다. 이미 4년전에도 리그 1위임에도 연속 무승이 계속되자 가차없이 경질된 바 있으니 리그 2위를 달리다가 경질되는 것은 구단주 입장에서는 이상한 일도 아닐 것이다.

이후 우라와 레드와의 ACL 4강 1차전에서 0-2로 완패하면서 광저우 헝다가 ACL에서 탈락할 경우 파비오 칸나바로 감독을 경질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타이탄 스포츠'에 따르면 광저우가 우라와에 패한 2일은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주년이 딱 하루 지난 날로 중국 창립일은 중국에서 국경절인데 국경절 다음 날 그것도 근현대사에 있어 철천지 원수인 일본 팀을 상대로 졌기에 문제가 됐다는 분석이다. #

결국 2차전에도 0-1로 패하여 아챔은 탈락했고, 이후 허난전 2:2 무승부 이후 "모기업 문화 연수"를 이유로 감독직에서 잠시 물러난다고 발표되었다. 말이 연수이지 사실상 경질을 돌려말하는 듯 하며, 감독 대행은 광저우의 현역 노장 정즈가 맡게 되었다. 구단주 쉬자인 회장은 칸나바로에게 "그룹 문화를 배우면서 포기하지 않는 정신을 기르라"는 훈시를 했다고 한다.

경질이 유력해 보였으나, 11월 A매치 브레이크를 마치고 칸나바로도 감독직에 복귀했으며 11월 23일 숙적 상하이 상강을 2-0으로 완파하고 1위로 복귀, 기사회생하게 되었다.

12월 1일 상하이 선화와의 최종전에서 3-0으로 가볍게 이기고 슈퍼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광저우로서는 2018년 빼앗긴 권좌를 찾아온 것이고, 칸나바로는 감독직을 맡은 후 개인 최초로 1부 리그 우승에 성공했다.

아마 별 이변이 없다면 칸나바로도 다음 시즌 계속 광저우를 맡을 듯 하지만, 쉬자인 구단주의 눈이 워낙 높아서 AFC 챔피언스리그를 우승한 것도 아니고 리그에서 가까스로 우승한 칸나바로에 대한 신임은 그다지 높지 않은 듯 하다. 예를 들어 2012년 5월에는 이장수 감독이 전해 우승, 당시 리그 1위를 달리고 있었음에도 2012 ACL 16강에서 탈락하자,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며 바로 경질된 바 있다.(그리고 리피가 와서 2013 ACL 우승) 겨울 이적 시장의 유럽리그에서 특급감독들이 매물로 나오면 교체될 가능성도 있다. 이미 2014년에도 칸나바로는 리그 선두를 달리고 있었음에도 가차없이 경질되고 스콜라리가 온 바 있다.

2020년 리그는 코로나 사태때문에 A,B 조별 토너먼트 및 결승 리그로 치러졌다. 광저우는 A조 1위로 결승 토너먼트까지 올라갔으나, A조 2위로 B조 1위인 상하이 상강을 준결승에서 꺾고 올라온 장쑤 쑤닝에게 의외로 져서 (0-0, 1-2) 리그 2위로 시즌을 끝마치고 말았다. AFC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을 하지 못하면 경질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챔피언스리그에서도 마지막 라운드에서 극적으로 비셀 고베를 잡은 수원 삼성 블루윙즈에게 골득실에 밀려 조별리그 3위로 탈락했다. 광저우 구단 측에서 대대적 개편을 예고했으며 칸나바로도 곧 경질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쫓겨나면 광저우로부터 5년계약의 나머지 2년 연봉 3,000만불을 거져 받게 된다고 한다. #

하지만 2021년에도 어쨌든 칸나바로에 팀을 맡기는걸로 가닥 잡혔는데, 광저우 구단의 모기업인 헝다그룹은 원래 부동산 기업인데 2020년 코로나19 사태로 주택수요가 급감하여 그룹 사정이 어려워졌고, 자금회수를 위해 때문에 신축아파트를 원래 분양가의 70%로 할인판매를 할 정도로 급전을 구했다. 칸나바로를 해고한다고 해서 칸나바로에게 줘야할 돈이 없어지지 않는 만큼, 새로운 감독을 구하기보다는 칸나바로에게 계속 맡길 듯 하다.

그러나 헝다 그룹의 파산 위기 때문에 광저우 구단이 해체 위기에놓이면서 상호 계약 해지 방식으로 결국 팀과 결별했다. #

2022년 1월, 라파엘 베니테즈가 경질된 에버튼의 차기 감독으로 링크가 뜨고 있디.

5.5.1. 중국 대표팀 겸직

2019년 3월 7일 광저우 에버그란데 감독직을 유지하는 형태로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까지 하게 되면서 3월 말에 있을 차이나컵을 지휘하게 된다.

결국 3월 15일, 공식적으로 중국 축구협회를 통해 칸나바로의 감독 선임이 발표되었다. # 한 때 아시안컵 이후 거스 히딩크 U-21팀 감독이 A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지 않을까란 이야기가 많았지만, 중국 축구협회는 새로운 지도자를 선임해서 또다시 갈아 엎고 시작하기보다는 리피의 지도 철학을 계승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3월 21일, 중국 국가대표팀 감독 데뷔전이었던 2019년 차이나컵 태국전에서 0-1로 졌다. 대표팀 에이스 우레이가 없는 상황이긴 했지만 태국의 날카로운 역습에 수비가 번번이 약점을 드러낸 것 역시 악재다. 이어진 우즈벡과의 3위 결정전에서도 무기력하게 0-1로 패하고 말았다. 중국 대표팀 감독 부임 후 2연패.

차이나컵에서는 그동안 리피의 2019 아시안컵에서 "세대교체가 미진하다"는 비판을 의식한 듯, 그동안 중국 국대의 주축이었던 광저우 헝다의 노장들을 대거 빼고[22], 대표팀을 차세대 위주로 뽑았는데, 아시안컵에서 잡았던 태국에도 지는 굴욕을 당했다. 하지만 중국 축협은 (히딩크를 고려중이라는) 한국에서의 보도와는 달리 어느정도 리피의 후원을 받고 있는 칸나바로를 신임하는 듯 하며, 오히려 소속팀 광저우 헝다에서 칸나바로가 겸직하기 힘들다고 판단, 칸나바로를 중국 국대 전직으로 보내고, 유럽 출신 명장을 수소문 중이라는 보도가 있다.

2019년 4월 29일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2경기 만에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사퇴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사(골닷컴) 사퇴의 표면적 이유는 '가족과 함께할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가족 운운은 전형적인 핑계고 리그나 아챔에서도 딱히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이 불확실했기 때문이다. 광저우 헝다는 중국 축협에서 3명까지 허용한 용병을 팀 자체적으로 2명만 내보낸다는 규정을 만들었다가, 리그에서 3위로 전락했고, 아챔 H조에서도 3위로 16강 탈락의 위기에 있었다.(5월 22일 대구전에서 승리하여 16강은 간신히 올랐다.) 이렇게 광저우에서 죽쑤다가 경질이라도 되면 A매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힘든 중국 국대 감독도 유지하기 힘들기 때문에, 소속팀에 집중하기로 마음을 먹은 듯 하다.

5.6. 베네벤토 칼초

광저우 헝다와 결별한지 약 1년만인 2022년 9월 21일, 감독 선임 오피셜이 발표되었다. #

그러나 두달 동안 리그 7경기에서 1승 4무 2패를 기록하며 강등권 성적을 기록했고, 2023년 2월 5일에 전격 경질되었다. #

2023년 4월 전북 현대 모터스 김상식 감독이 계속 졸전을 펼치면서 팀을 강등 위기까지 몰아넣는 가운데, 전북에서 후임 감독 후보로 접촉하고 있다는 설이 돌기도 했다.

5.7. 우디네세 칼초

2024년 4월 22일, 가브리엘레 초피의 후임으로 세리에 A의 우디네세의 새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강등권에 놓인 우디네세를 강등권에서 탈출시키고 우디네세를 떠나게 되었다.

이후 소후닷컴에 따르면 이반코비치 중국 국대 경질시 후임 감독으로 선임할 것이라고 보도하였다.

6. 기록

6.1. 선수

6.1.1. 대회 기록

6.1.2. 개인 수상

6.1.3. 출전 기록

시즌 클럽 소속리그 리그 FA컵 대륙대회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1992-93 나폴리 세리에 A 2 0 1 0 0 0
1993-94 나폴리 세리에 A 27 0 2 0 - -
1994-95 나폴리 세리에 A 29 1 4 0 3 0
1995-96 파르마 세리에 A 29 1 0 0 6 0
1996-97 파르마 세리에 A 27 0 1 0 2 0
1997-98 파르마 세리에 A 31 0 6 0 7 0
1998-99 파르마 세리에 A 30 1 7 0 8 0
1999-00 파르마 세리에 A 34 2 3 0 9 1
2000-01 파르마 세리에 A 34 0 7 0 6 0
2001-02 파르마 세리에 A 31 1 5 0 9 0
2002-03 인테르 세리에 A 28 0 0 0 12 1
2003-04 인테르 세리에 A 22 2 3 0 9 0
2004-05 유벤투스 세리에 A 38 2 0 0 9 1
2005-06 유벤투스 세리에 A 36 4 2 0 9 0
2006-07 레알 마드리드 라리가 32 0 1 0 6 0
2007-08 레알 마드리드 라리가 33 0 1 0 6 0
2008-09 레알 마드리드 라리가 29 0 1 0 7 0
2009-10 유벤투스 세리에 A 27 0 1 0 5 0
2010-11 알 아흘리 클럽 아라비안 걸프 리그 16 2 0 0 0 0

6.2. 감독

6.2.1. 대회 기록

6.2.2. 개인 수상

6.3. 수훈

7. 칸나바로에 대한 헌사

파일:파비오 칸나바로.jpg
카테나치오란 말을 그대로 보여주는 선수. 그가 있으면 동료들은 안심할 것이다.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상당히 힘들지만 말이야.
- 디에고 포를란
칸나바로에게 수비 당한다는것. 그것은 아무것도 못하고 피치를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 구티
상대편 스트라이커를 물고 놔주지않는 말 그대로 골문앞의 경비견.
- 필리포 인자기
존경을 받아 마땅한 진짜 리더. 같이 플레이했던 선수 중 단연 최고의 센터백이다.
- 안드레아 피를로
월드컵에선 정신적, 감정적으로 승리를 다룰 줄 알아야한다. 현재 잉글랜드 선수진은 아주 훌륭한 선수들이다. 하지만 아직 이기는 방법을 모른다고 생각한다. 월드컵에서 우승한 팀들을 보면 정신적 지주가 있었다. 세르히오 라모스나 칸나바로가 그랬다. 하지만 잉글랜드는 그 부분이 부족하다.
- 토니 아담스

8. 이야깃거리

파일:external/photos1.blogger.com/2.0.jpg
파르마 FC 시절

9. 같이 보기

1 톨도 · 2 베르고미 · 3 말디니 ⓒ · 4 칸나바로 · 5 코스타쿠르타 · 6 네스타 · 7 페소토 · 8 토리첼리 · 9 알베르티니
10 델 피에로 · 11 바조 D. · 12 팔리우카 · 13 코이스 · 14 디 비아조 · 15 디 리비오 · 16 디 마테오 · 17 모리에로
18 바조 R. · 19 인자기 · 20 키에사 · 21 비에리 · 22 부폰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체사레 말디니

1 아비아티 · 2 페라라 · 3 말디니 ⓒ · 4 알베르티니 · 5 칸나바로 · 6 네그로 · 7 디 리비오 · 8 콘테 · 9 인자기
10 델 피에로 · 11 페소토 · 12 톨도 · 13 네스타 · 14 디 비아조 · 15 율리아노 · 16 암브로시니 · 17 잠브로타
18 피오레 · 19 몬텔라 · 20 토티 · 21 델베키오 · 22 안토니올리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디노 조프

1 부폰 · 2 자카르도 · 3 그로소 · 4 데 로시 · 5 칸나바로 ⓒ · 6 바르잘리 · 7 델 피에로 · 8 가투소 · 9 토니
10 토티 · 11 질라르디노 · 12 페루치 · 13 네스타 · 14 아멜리아 · 15 이아퀸타 · 16 카모라네시 · 17 바로네
18 인자기 · 19 잠브로타 · 20 페로타 · 21 피를로 · 22 오도 · 23 마테라치

[1] 아주 가끔 라이트백이나 레프트백으로도 기용되었으나 그 경기 수는 매우 적었다. [2] 광저우 감독직과 겸임. 2019년 차이나컵 2경기만 치르고 자진 사퇴. [3]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출전 2위. [4] 역대 최초의 수비수 발롱도르 수상자는 아니다. 프란츠 베켄바워 마티아스 자머가 이미 발롱도르를 받은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베켄바워와 자머는 본래 미드필더 출신이고 전문 수비수가 아니라 꽤 자유롭게 경기장을 누비며 하고 싶은거 하던 리베로였는데, 특히 베켄바워는 심심하면 전방으로 올라가 공격하고 심지어 월드컵에서 팀내 득점 1위도 해본적 있다. 칸나바로는 순수한 전문 수비수 스토퍼로선 유일한 사례가 맞다. 또한 발롱도르에 묻혀 잘 부각되진 않지만 FIFA 올해의 선수는 칸나바로가 유일한 수비수 수상 사례다. 거기에 2020년대 현재까지 수비수와 이탈리아인으로서는 마지막 발롱도르, FIFA 올해의 선수 수상자이기도 하다. 수비수 기준으로는 이후 버질 반 다이크가 2019년 발롱도르와 FIFA 올해의 선수 포디움에 들었지만 모두 2위에 그치고, 이탈리아인 기준으로는 조르지뉴가 2021년 발롱도르 포디움에 들었지만 3위에 그치고 만다. [5] 하지만 그가 받은 발롱도르는 호사가들 사이에서 칸나바로의 기량에 대해 논쟁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월드컵 활약으로 수상한 발롱도르로 과대평가 된다는 주장이 나왔고, 월드컵 직후 레알로 이적하여 시원찮았던 것은 이를 증폭시켰다. 그러나 자세히 생각해보면 칸나바로는 1973년생으로 2006년에 이미 만 33세였다. 오히려 그 나이까지 꾸준히 정상의 기량을 유지하다가 월드컵에서 그 정도의 퍼포먼스를 보여준 것이 대단한 것이며, 자세히 파고 들면 그의 신체적인 전성기는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 파르마 시절이다. 특히 수비 스타일에 있어서 민첩하고 유연한 운동능력을 바탕으로 한 거친 수비가 주무기였던 칸나바로에게 나이로 인한 신체 능력의 저하는 치명적이었으며, 전성기가 지난 이후로 생소했던 라리가에서의 적응 실패 또한 부진의 원인 중 하나였다. 칸나바로는 은퇴 후 인터뷰에서 라리가와 세리에의 수비방식과 전술이 지역방어와 대인방어의 면에서 현저히 다르다면서 이런 부분에 적응하는 것이 몹시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6] 인테르 역시 오랫동안 네스타의 영입에 공을 들였고, 거의 이적 직전까지 갔지만 끝내 결렬되면서 차선책으로 칸나바로를 택하면서 서로에게 루즈-루즈가 된 케이스다. [7] 이적 과정에서 루치아노 모지의 협박이 있었다는 카더라도 있다. 내용은 간단히 요약하자면 "너 유벤투스 안 오면 그날로 국가대표팀과는 영원히 이별이다." [8] 후일 칸나바로는 레알 시절에 대해서, "유벤투스에서는 수비가 우선이고 공격이 나중이었지만 레알에서는 공격이 먼저고 수비가 후순위였다. 어느 것이 옳고 틀리다는 것이 아니라 스타일의 차이였고, 그 차이가 나에게 맞지 않았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9] 그렇기에 30대 중반에 들어서던 월드컵에서 절정의 활약을 보여줄 수 있었다. 짝으로는 신체 능력과 어그로 능력을 매우 잘 활용하는 마르코 마테라치가 있어줬고 파비오 그로소와 잠브로타 역시 매우 좋은 활약을 해줬기에 칸나바로가 최고의 활약을 할 수 있었다. [10] 안타깝게도 이때 터진 프랑스의 동점골은 칸나바로의 클리어링 미스가 빌미였다. [11] 사실 페널티킥을 두번이나 허용했기에 완벽한 수비였다고 볼 수는 없다. 골키퍼 프란체스코 톨도가 페널티킥을 모두 선방한 덕분에 무실점으로 버틸 수 있었던 것. [12] 황선홍, 안정환, 설기현, 이천수, 박지성, 차두리 [13] 스웨덴, 덴마크, 이탈리아 모두 1승 2무를 기록했고 승자승과 승자승 득실점까지 비교하여 가장 낮은 이탈리아가 3위로 탈락했다. [14] 당시 골든볼이었던 지네딘 지단이 2012점이었고, 칸나바로는 1977점으로 아깝게 실버볼 수상에 그쳤다. 사실 골든볼 투표가 결승전 후반전 종료 직후 이루어졌기에 경기 결과나 지단의 박치기 퇴장 등의 요소를 반영할 수 없었다. 만약 경기가 끝난 후에 투표가 이루어졌다면 칸나바로가 골든볼을 수상했을 가능성도 높았다. [15] 이 대회에서 보여준 칸나바로의 압도적인 퍼포먼스는 1930 우루과이 월드컵 호세 나사치, 1966 잉글랜드 월드컵 바비 무어, 1974 서독 월드컵 프란츠 베켄바워, 1998 프랑스 월드컵 릴리앙 튀랑 등과 함께 월드컵 역대 최고의 수비수 퍼포먼스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간혹 그 중에서도 역대 최고로 평가되기도 한다. [16] 앞선 두 대회인 2002 월드컵 유로 2004에서 칸나바로가 경고누적으로 인해 뛰지 못했다는 점을 고려해 봤을때 엄청난 기록이다. [17] 네스타는 또 조별 리그에서 부상당했다. [18] 이탈리아는 이 대회에서 7경기 동안 총 2실점했는데, 그마저도 조별리그에서 크리스티안 자카르도가 넣은 자책골과 결승전에서 지네딘 지단에게 내준 PK골이 전부였다. 월드컵이 끝난 직후 독일 언론은 그에게 "이탈리아 골문 앞에는 베를린 장벽이 세워져 있었다"는 찬사를 보냈다. [19] 이탈리아 공격진 이아퀸타, 질라르디노가 경기 내내 부진한 모습으로 일관하며 한심한 경기력만 보여준 반면 그나마 콸리아렐라는 딱 한경기 교체 투입되어 45분 밖에 소화하지 않았음에도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며 밥값을 톡톡히 해줬다. 운만 좋았으면 해트트릭도 가능했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20] 단순히 다른 선수에 비해 1,2cm 차이로 최단신이 아닌, 자신 다음으로 작은 잔루카 잠브로타와도 프로필상 키 차이가 무려 5cm나 난다. 아이러니하게 레프트백이었던 파비오 그로소는 풀백임에도 무려 190cm의 거구였다. [21] 알레산드로 네스타, 카를레스 푸욜, 존 테리, 리오 퍼디난드. [22] 2019 아시안컵 당시 팀의 주축이었던 광저우 소속 장린펑, 펑샤오팅, 가오린 및 30대 노장들이 모두 제외되거나 이름은 올렸지만 출전하지 않았다. [23] 실제로도 긴 머리가 휘날리는 탓에 연습이나 경기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머리를 시원하게 밀어버리거나 반대로 더 많이 길러서 머리 띠를 이용하여 머리를 뒤로 넘기거나 묶어서 날리지 않게 끔 고정 시키는 경우도 많이 있다. [24] 후에 칸나바로가 머리를 기르자 탈모가 아니었다는 것에 놀라는 일부 팬이 있다. [25] 반대로 대표팀에서 같이 활약했던 파올로 말디니는 오히려 선수 시절 때 보다 은퇴 이후 짧은 머리를 유지하고 있는 중이다. [26] 아시아 쿼터 폐지 및 5명보유 3명 출전 [27] 상하이 선화 카를로스 테베스를 겨냥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슈퍼 리그 최고연봉을 받고 있지만, 매우 부진한 활약을 보이고 있다. [28] 여기서 칸나바로가 말한 김민재를 잃었을때 가장 큰 손실은 라치오 전, 챔피언스 리그 23-24 시즌 조별리그 에서도 증명이 됐다. 물론 챔피언스 리그 조별 라운드에선 상대가 라리가에서 밥먹듯이 우승하는 넘사벽으로 강한 레알 마드리드라 솔직히 김민재가 나폴리에 잔류 했다고 해도 빅클럽을 이긴다는건 불가능 한건 맞다. 만일 하나 김민재가 레알 공격수들을 지워버리고 나폴리가 레알을 상대로 2연승을 했다면 김민재는 역대급 하이 커리어를 찍을 수 있다. [29] 상대 팀인 FC 스피어의 감독은 티에리 앙리가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