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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난 바나나 | 로버트 무가베 | 에머슨 음낭가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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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바브웨 공화국 초대 대통령 카난 소딘도 바나나 Canaan Sodindo Banan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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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d2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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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000> 출생 | 1936년 3월 5일 |
대영제국 남로디지아 식민지 에섹스베일 (現 짐바브웨 남마타벨랜드 주 에섹스베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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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2003년 11월 10일 (향년 67세) |
영국 런던 | |
국적 |
[[영국령 남로디지아| ]][[틀:국기| ]][[틀:국기| ]]1936~1965 [[로디지아| ]][[틀:국기| ]][[틀:국기| ]]1965~1979 짐바브웨 로디지아1979 [[짐바브웨| ]][[틀:국기| ]][[틀:국기| ]]1979~2003 |
학력 | 에프워스 신학교 (신학 / 학사) |
소속 정당 |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 연맹-애국전선 |
임기 | 1980년 4월 18일 ~ 1987년 12월 31일 |
배우자 | 자넷 음부야즈웨 |
자녀 | 아들 너선 바나나 등 4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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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난 소딘도 바나나(영어: Canaan Sodindo Banana, 1936년 3월 5일 ~ 2003년 11월 10일)는 짐바브웨의 정치인이자 초대 짐바브웨 대통령이다.2. 생애
1936년 3월 5일에 은데벨레족 어머니와 레소토에서 이주한 바소토족 출신의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솔즈베리[1]의 엡워스 신학 대학에서 신학 학위를 얻었고, 1962년에 연합감리교회 목사가 되었다. 이후 한동안은 목사로 일하다가 1969년부터 1971년까지 불라와요 교회 협의회의 의장을 역임했고, 1970년부터 1973년까지는 전 아프리카 교회 협의회의 일부인 남아프리카 콘텐츠 그룹의 의장도 역임하며 아프리카의 기독교계에서 이름을 날리게 된다.1960년대부터 바나나는 강단에서 로디지아의 백인 식민체제를 비난하며 흑인 해방신학을 전도했고, 도입을 '게토에 있는 우리 아버지'로 바꾸는 등 일부 수정을 가한 주기도문을 출판하기도 했으며, 사회주의 기독교 신학을 수용하고는 "게릴라를 볼 때 예수 그리스도를 본다"고 선언했다.
1971년에 영국 정부가 로디지아에 대한 제재를 중단하는 대가로 이안 스미스와 거래를 하자, 바나나는 이에 반발하며 동료 감리교 성직자 아벨 무조레와(Abel Muzorewa, 1925~2010)와 함께 연합 아프리카 국가 평의회(UANC)라는 흑인 정당[2]을 창설했으나 이 당도 로디지아의 박해를 받자 1961년에 결혼한 아내 재닛 바나나(Janet Banana, 1938~2021)와 4명의 자녀들[3]과 함께 로디지아를 떠나 보츠와나, 일본[4]을 거치며 마침내 1973년에 미국의 워싱턴 D.C.에 정착하였고, 1974년부터 1975년까지 웨슬리 신학교에서 신학 석사 학위를 얻었다.
이후 1975년에 고국으로 돌아온 바나나는 곧바로 체포되어 1년간 수감되었다가 석방된 후 가택연금에 처해졌는데, 이 무렵에 로버트 무가베의 ZANU에 합류했다가 1976년 12월에 다시 한 번 체포되었고, 이후 3년간 다시 옥살이를 하다가 1979년 12월 11일에 크리스토퍼 솜스[5]가 남로디지아의 총독으로 임명되자 감옥에서 풀려났다.
결국 1979년에 백인정권은 항복하여 1980년 4월 18일자로 짐바브웨는 꿈에 그리던 독립을 하게 되었고, 같은 날부터 바나나는 자신이 '아프리카의 위대한 태양'이라고 찬미했던 무가베가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헌법을 수정하고 대통령 직위를 차지한 1987년 12월 31일까지 직함뿐인 짐바브웨 대통령에 임명되었다. 실질적인 통치권은 총리가 된 무가베에게 있었다. 대통령직에서 사실상 쫓겨나고는 무가베가 주도한 은데벨레족에 대한 학살인 '구쿠라훈디'의 종결과 ZANU와 ZAPU를 통합한 ZANU-PF의 결성에 공헌했으며, 아프리카 통일 기구의 외교관과 짐바브웨 대학교의 종교 부서장을 역임하며 순조롭게 살아가는 듯했다.
그러나 1997년에 바나나는 1983년부터 1986년까지 본인의 경호원이었던 제프타 두베(Jefta Dube, 1961~)의 살인에 대한 재판에서 동성애 혐의가 제기되며 몰락하기 시작한다. 두베는 1995년 9월에 '너는 바나나의 동성애 아내다.'라고 말했던 경찰관 패트릭 마쉬리(Patrick Mashiri)를 총살한 혐의로 재판을 받은 두베는 바나나가 마약이 든 술을 마시고는 자신을 반복적으로 성추행, 성폭행했다고 주장했다. 바나나는 자신의 동성 강간 주장이 '내 정치 경력을 파괴하기 위한 병리학적 거짓말'이며 무가베가 자기를 죽이려 한다며 혐의를 전면 부인했으나, 이후 바나나가 정원사, 경찰관, 심지어는 신학 교수 시절 제자들까지 강간했다는 폭로가 이어지며 결국 바나나는 11건의 남색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으며 이미지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는다.[6]
바나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도피했으나 1998년 12월에 넬슨 만델라를 만난 후 만델라에게 설득을 듣고는 다시 짐바브웨로 돌아가 1999년 1월 18일에 징역 10년, 집행유예 9년을 선고받았고, 성직자 직위에서 해임당했다. 이후 카난 바나나는 2001년 1월에 석방된 후 영국의 런던으로 망명했고,[7] 2003년 11월 10일에 런던에서 암으로 사망하고는 짐바브웨에 전직 국가 원수를 위한 예우 하나 없이 매장되었다. 이후 자넷 바나나는 2006년에 영국 시민권을 받고 무가베가 사망한 2019년에 고국으로 돌아왔고, 2021년 7월 29일에 향년 83세로 사망했다.
3. 기타
- 바나나(Banana)라는 이름은 실제 성씨이다. 과일 이름 바나나와 알파벳 철자까지 같다. 이 때문에 짐바브웨내에서 농담거리가 되었는데, 바나나 본인도 이 유머를 질리게 들은탓인지 1982년에 자신의 성에 관련된 농담을 금지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물론 동성애 혐의로 몰락하고나서는 사문화되었고, 바나나가 좋아한 바나나는 남자의 바나나였다는 식의 성인유머가 짐바브웨 사람들에게 돌아다녔다.
- 바나나 가족은 영국에 망명한 후 짐바브웨에 못 들어오고 있다가 에머슨 음낭가과가 자넷 음부야즈웨에게 고급 승용차를 아무 이유 없이 선물하고 짐바브웨 예산으로 연급을 지급하고 의료지원까지 도와주자 짐바브웨로 귀국했다.
[1]
짐바브웨의 독립 2주년인
1982년 4월 18일에
하라레로 개칭되었다.
[2]
이는 폭력 저항을 거부한 로디지아의 유일한 합법적 흑인 정당이었다. 실제로 UANC는 조슈아 은코모(Joshua Nkomo, 1917~1999)의 짐바브웨 아프리카 인민 연맹(ZAPU)와 로버트 무가베의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 연맹(ZANU)보다 온건했다고 한다.
[3]
참고로 아들 1명은 총살 혐의가 있고, 다른 아들 1명은 무장 강도 혐의가 있다.
[4]
이때
오사카에 머무르며
간사이대학교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5]
Christopher Soames, 1920~1987. 참고로 이 사람의 부인이
윈스턴 처칠의 셋째 딸이었다.
[6]
참고로 바나나가 집권하던 1980년대에는 미국이나 서유럽도 동성애에 대한 인식이 썩 좋다고는 말할수는 없던 시절이었고, 아프리카는 현재도 동성애에 대한 인식이 좋지못한 국가들이 많으며, 무가베도 대통령 집권 시기에는 극단적인 동성애 혐오로 악명이 높았다. 마침 무가베는 바나나의 동성애 행각의 폭로 직전에 '동성애자들은 개나 돼지만도 못하다'는 발언을 남긴 판이었으니 짐바브웨에 이 폭로의 파장이 얼마나 컸을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여담으로 사실 바나나는 이 폭로 전에도 동성애에 관련된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7]
이 망명은 아내가 딸과 함께 2000년 10월에 신청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