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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tvN 토일 드라마 < 철인왕후>의 고증을 다루는 문서.2. 잘 반영된 부분
고증이 잘 된 부분은 아래와 같다.- 대표적으로 ' 호칭'을 들 수 있다.
- 한국 사극에서 제일 많은 오류인 마마라는 경칭은 잘 지켜 사용하고 있다.
- 정1품 후궁인 빈(嬪)을 자가님이라고 부르고, 그 이하 후궁에게는 마님[1]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사실 자가님이 아닌 자가라고 불러야 하지만, 이 정도면 호칭 부분에서는 잘 지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제조상궁인 최상궁이 대령숙수 만복을 사랑하면서도 결혼할 수 없기 때문에, 사실상 떠나보낸다는 설정은 실제 조선시대의 내명부 법도를 잘 지킨 것이다.
- 조선 후기에 궁궐에서 삼간택을 통해서 왕비를 결정하고,[2] 최종 삼간택에서 3명의 후보 중 간택이 이루어진다는 설정과 간택이 된 왕비 후보가 별궁에 머무르며 왕실의 예법을 배운 뒤 혼례를 치른다는 설정은 이 드라마가 잘 따른 것이다. 다만 세부적인 예법에 대해서는 논란 여지가 있다.
기타 극중 설정에 대한 내용은 철인왕후(드라마)/설정 문서의 해당 문단 참조 바람.
3. 시대 재현 오류
3.1. 편집 시 주의사항
- ' 퓨전사극'이라는 이 드라마의 특성상 정통사극과 같은 수준의 사실성(fact)을 기대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 현대인이 과거로 갔다는 설정부터 이미 허구(fiction, 픽션)의 영역에 진입한 것이므로 문학으로서의 존중이 필요하며, 자유로운 창작 문화의 활성화를 위하여 정통사극과 동일한 수준으로 엄격한 잣대를 들이미는 건 가능한 한 지양해야 할 것이다. 또한 문학, 예술을 낮춰보는 대한민국 특유의 사회 분위기와 문학 서사에 대한 낮은 이해도로 인해 ' 사극 = 다큐멘터리' 따위로 인식하여 '현실의 재현'에만 치중하여 고증을 논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 또한 피해야 할 것이다.
- 다만 아무리 문학 작품이라고 해도 ' 핍진성(逼眞性, verisimilitude)'을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핍진성은 사전적 정의로 '문학 작품에서의 개연성'[3][4] 정도로 정의되는데, 만약 시청자들의 입장에서 이게 부족하다고 느껴진다면 극에 대한 몰입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고증은 역사적 사실의 재현과 관련된 부분으로 핍진성과 구분이 되기는 하나, 현실과 동떨어진 설정을 하게 되면 극에 시청자들이 몰입하기 힘든 문제가 발생한다.
- 따라서 이 문단에서는 앞서 언급한 사항들을 참고하여 이 드라마의 세계관 속에서 핍진성을 떨어뜨릴 수 있는 오류를 논하고자 한다.
3.2. 전체
- 전체적으로 등장인물들의 하극상이 너무 심하다. 당장 주인공인 김소용[5]도 철종에게 계속 하대를 하며, 임금을 때리고 비녀로 위협하는 걸로도 모자라 내관과 나인들이 다보는 앞에서 임금에게 비녀를 던진다. 심지어 멱살까지 잡는데 다들 놀라기만 하고 아무도 뭐라하지 않는다. 동서양 그 어떤 문화에서도 임금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거나 위해를 가하려는 건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무례 혹은 중죄에 해당했다. 당연히 임금에게 폭력을 가하는 건 아예 상상도 못할 일이었는데[6] 이는 조선에서도 마찬가지다. 실제 역사에서 폐비 윤씨가 폐서인이 되어 사약을 받은 이유도 비상(독)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7] 비상을 가지고 있단 것만으로도 남편이자 임금인 성종을 시해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보고 폐위에 이어 사약이라는 중벌을 받았던 것. 그런데 작중에서 소용은 철종에게 직접 손찌검까지 한다. 드라마에서 철종이 이에 대해 문제 삼지 않아서 그렇지 이 행각이 알려지면 소용은 바로 폐서인되고도 남는다. 드라마에서 장봉환의 영혼이 들어간 김소용을 상궁 등 궁녀들이 말리는 모습이 나오는데, 그럼에도 이런 모습이 가능한 건 그만큼 세도 정치의 정점인 안송 김씨와 허수아비 철종의 위치를 잘 연출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으나[8][9], 실제 철종 때도 저러한 행동은 말이 되지 않는 것으로서 그냥 고증될 수도 없는 걸 써먹은 것이다.
후궁인
조화진 역시도 중전인 김소용한테 너무 버릇이 없고, 대놓고 무시하기도 한다. 비록 으르렁대고 가문끼리도 사이가 좋지 않지만, 조화진은 엄연히 일개 후궁이고 김소용은 국모이자 내명부의 수장인 중전이다. 아무리 총애받는 후궁이라도 중전의 지위는 넘사벽이다. 심지어 김소용은 같은 안송 김씨이자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있다. 김소용이 이에 대해 문제삼지 않아서 그렇지, 알려지면 폐서인 직행이다.[10] 게다가 다른 후궁들이 보는 앞에서 머리에 활을[11] 쏘고 나중에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연회에 참석했다.
김병인 또한 대놓고 철종을 감시하거나 왕의 면전에서 칼을 뽑는 듯 지나치게 선을 넘는 행동을 많이 한다. 하기 내용 참조.
- 김소용의 몸에 빙의된 장봉환이 임금을 "철종(쫑)이"라고 부르거나, 대왕대비를 "순원 언니"라고 부르는데, 엄밀히 말하면 " 철종"은 묘호이고, 순조 숙황제의 황후였던 "순원 숙황후"의 "순원" 또한 시호이다. 문제는 묘호와 시호 모두 죽은 군주 혹은 왕비를 부르는 명칭인지라, 장봉환은 본의 아니게 둘에게 고인드립을 시전한 셈이 된다.[12]
- 3화 후반부에서 김소용이 '아아 이것은 훈연이라는 것이다' 라고 보여주고 궁궐 사람들이 놀라는 장면이 있는데, 실은 조선시대 때 이미 훈제 기술이 있었다. 조선시대 당시 연기를 쏘여 말린 청어를 연관목(烟貫目)[13]이라 불렀고, 조선시대 햄이라고 할만한 납육(臘肉)은 고기를 훈연하여 만든 것이다.
- 등장인물들이 각각 1인 1상으로 식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겸상하는데 하나의 상으로 같이 식사를 한다. 원래 전통적인 우리나라의 식사 방식은 서로 각자 상에서 식사를 했다는 것이다. 현대인들에게는 당연히 여러명이 큰 상 또는 식탁에 다같이 앉아서 식사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근대까지는 아니었다. 6.25 전쟁 이후 살기 바빠 다같이 겸상으로 하는 게 점차 보편화된 것이다. 큰 상에 다같이 앉아 겸상하는 것은 큰 잔치에서나 보이는 모습이고 부자(父子) 사이에서도 한 상에 겸상을 하지 않았다.
- 극중 등장인물들 중 무장한 무사들이 칼을 허리에 안 차고 왼손에 들고 다닌다. 고증이 되지도 않았음에도 널리 퍼진 '도검 휴대법'인데 이는 현재 한국 사극의 고질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 극중 철인왕후 김소용의 당의에 용보가 아니고 봉황이 수놓아있고 대비, 대왕대비의 보는 용보이다. 실제로 용보를 왕비의 당의에 붙인것 고종 이후이다.
- 사실 근래 제작되는 조선시대 배경 사극 대부분의 문제지만 이 극에서도 대왕대비, 왕대비, 중전, 빈이 착용한 첩지는 모두 당시 시대에 맞지 않는 물건이다.[14] 첩지는 가체를 대신해서 영조 시기 도입한 것으로 평평한 몸체에 꼬리 부분만 위로 향하는 날렵한 곡선이며, 착용자의 지위에 따라 재질과 앞머리 부분의 장식만 다르게 했다. 대왕대비부터 후궁까지 너나할 것 없이 첩지 밑에 온갖 배씨댕기[15] 같은 판들을 붙이고 있는데, 첩지의 동체받침은 얇은 원기둥을 눕힌 모양으로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오히려 14화에서는 후궁들이 실제 첩지와 거의 비슷한 형태의 첩지를 하고 나온다. 실제 역사적 설정을 지켰다 말았다 아이러니한 부분. 또한 조화진이 9화까지 개구리 첩지를 하고 나오는데, 개구리 첩지는 궁녀들이나 외명부 여인들이 하는 것이었다.
- 덧붙여 근래 제작되는 조선시대 배경 사극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당의 속 회장저고리를 입지 않는다. 겨드랑이가 파인 당의 아래 저고리 없이 치마말기가 그대로 보인다. #
- 극중 철종은 테두리가 물결 모양인 용보를 가슴, 배, 양 어깨에 달고 나오는데 철종 어진 융복본[16]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철종 시기에는 테두리가 완전히 동그란 용보를 사용하였다. 테두리가 물결 모양인 용보를 쓴 것은 고종, 순종 시기이다.
- 극중 중전인 김소용이 반지(半指)를 끼고 나오는데, 조선시대에서 반지는 미혼여성이 착용하는 것으로 기혼여성은 가락지를 착용했고 중전도 가락지를 착용하여야 한다. 가락지는 반지 둘을 한쌍으로 끼는 것이다. 반지는 가락지의 절반이기에 반지(半指)이다.
- 극중 8년 전 이원범이 조화진에게 잘못 돌려준 동몽선습 연습장이 다시 철종의 손에 있다. 왜 조화진이 동몽선습 연습장을 철종에게 주었는지 개연성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특히나 철종이 동몽선습 연습장 속에 동비의 암호를 적은 것을 실제 주인인 김소용에게 돌려주어 김병인이 책 속의 동비 암호를 거론해 철종을 출정시키는 점에서 철종이 동몽선습 연습장을 가지고 있어야 극 전개의 큰 줄기가 성립되지만 주인이 바뀐 것의 개연성 부족은 납득하기 어렵다.
- 최상궁은 원래부터 내명부 나인 출신이고 홍연은 김소용이 태어날 때부터 모신 김소용의 몸종 출신인데 마치 최상궁이 사가 시절부터 김소용을 모셨거나 홍연이 김소용이 간택되기 전부터 궁녀였던 것처럼 말하는 장면들이 등장한다.
- 극중에서는 만복의 직책인 대령숙수가 수라간의 총 책임자를 뜻하고 대령숙수가 밑의 숙수들을 거느리는 것처럼 나오는데 대령숙수의 대령(待令)이란 왕명을 기다린다는 뜻이고 숙수(熟手)는 요리사라는 뜻이다. 즉, 수라간에서 품계를 가지고 일하는 요리사들은 모두 대령숙수이다. 극중에서 대령숙수가 마치 일반 숙수들의 우두머리인 것 처럼 나오는 것은 잘못되었다.
- 극중에서 조대비가 김소용의 시어머니, 대왕대비가 김소용의 시할머니인 것으로 나오는데 철종은 순조의 양자로 입적하여 왕위에 올랐으므로 순조의 정비인 대왕대비가 김소용의 시어머니이고, 순조의 조카뻘인 헌종의 어머니인 조대비는 김소용의 손윗동서인 것이 맞다. 순원왕후가 대왕대비인 이유는 대왕대비가 굳이 왕의 할머니가 아니더라도 선선대 군주의 정실부인이 갖는 지위이기 때문이다.
3.3. 1회
- 철종은 묘호이므로 살아있는 왕을 철종이라고 부르기는 고사하고 군주의 묘호가 뭔지 알 방도가 없는 게 정상이지만, 작중에서 철종을 언급하는 사람은 조선시대 이후 대한민국 시간대의 지식을 갖고 있는 김소용(정확히는 장봉환) 뿐이라 딱히 고증에 관해선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같이 있던 최 상궁은 어디까지나 김소용이 물어본 "선왕의 묘호"에 대한 대답으로 헌종이 언급되었을 때 그에 맞춰 박수를 쳤을 뿐이다. 현재 시간대가 헌종 사후 2년이라고 했으니, 헌종의 묘호가 정해지기에는 충분한 시간. 실제 헌종의 묘호는 철종 즉위 5일만에 결정되었다. 물론 김소용이 철종 이후의 묘호를 언급한 것을 듣고 최 상궁이 놀라지 않는 부분이 간접적으로 있을 수 없는 고증일 수는 있겠지만, 최 상궁의 입장에서는 워낙 이상한 소리를 많이 하고 있는 김소용(정확히는 장봉환)의 말이니 그냥 넘어갔을 수 있다.
- 궁중 예복을 차려입는 장면에서 다리속곳을 속속곳이라 칭하는데 다리속곳이 팬티 모양이고, 속속곳은 바지 비슷한 모양이다. 드라마 촬영상 의상문제나 한여름 촬영의 더위 문제로 많이 껴입을 수 없었다해도 많이 간략화된 차림새이다. 가슴가리개 다리속곳 속속곳 속바지 단속곳 너른바지 무지기치마 대슘치마에 속적삼을 입은 후 스란치마 대란치마 분홍저고리 전행웃치마 송화색저고리 회장저고리 당의 적의 하피 순이다. #
- 또, 같은 장면에서 철종이 쓴 면류관의 옥줄 수가 모두 열둘인데, 황제의 복제에 해당한다. 제후국의 국왕인 철종은 옥줄 수가 아홉인 면류관을 착용하고 있어야 한다. 이후 12회의 연회와 20회의 즉위식 장면에서는 각각 철종 및 새 임금으로 선정된 어린 왕자가 옥줄 수가 아홉인 면류관을 착용하고 있다.
- 가례 장면에서 왕과 왕비가 백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인정전 앞 뜰에서 마주보고 교배례(交拜禮)와 근배례(巹拜禮)를 하는 걸로 나오는데 가례에서[17][18] 왕과 왕비가 얼굴을 마주보는 것은 조선전기에는 동뢰(同牢)가 처음이며 이 동뢰연은 실내에서 행하는 것으로 문무백관과 왕대비 등이 참여하지 않는다. 조선후기에는 별궁친영(別宮親迎)이 이뤄지며 별궁에서 왕이 왕비에게 읍을 하는 절차가 있으니(殿下揖王妃) 왕비가 왕의 용안을 처음 보게 된다. 하지만 별궁친영 절차 중에 교배례(交拜禮)나 근배례(巹拜禮)[19]는 없다. 별궁에서 친영을 한 이후에 하는 동뢰(同牢)에는 근배례는 있지만 교배례는 없다. 왕비가 왕대비와 백관을 만나는 것은 동뢰(同牢) 다음날 이뤄진다. [20][21] 왕세자가 세자빈을 맞이할때나 대군이 부인을 맞이할때는 동뢰연에서 교배례를 행한다. 이때 세자빈과 세자 모두 두 번 절했다. 그리고 가례 장면 교배례에서 장봉환이 요즘 풍습의 두 번 절하고 한 번 읍하자 최상궁이 제사를 지내는 게 아니라고 하는데 조선시대 예법상 제사 지낼 때 남성은 재배(2번) 여성은 사배(4번)가 기본이며 왕에게 하는 절은 무조건 네 번(사배)이다.
- 초야 장면에서 김소용이 초야를 치르는 것을 모면하기 위해 369 게임을 하려는데, 철종이 이해하지 못하자 '지금 구구단이 우리나라에 들어왔던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2011년 구구단이 적혀 있는 백제시대 목간이 발굴되면서 삼국시대부터 이미 우리나라에서 구구단이 사용되어 왔음이 밝혀졌다. 하지만 이부분은 김소용이 그 부분에 대해서 몰랐다면 해결되는 문제이긴 하다. 그리고 구구단을 안다고 해서 369 게임을 했다는 보장도 없다.
3.4. 2회
- 장봉환이 "주색으로 유명한 왕의 실체가... 조선왕조실록도 한낱 찌라시네."라고 속으로 생각하지만, 연산군일기 외에는 조선왕조실록에 왕이 주색을 밝힌 것 따위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사관과 주서는 왕의 합궁을 참관하지 않는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왕이 주색에 탐닉했다는 기록이 남으려면 왕과 신하의 발언이나 상소문 또는 사관의 논평이 있어야 하는데 연산군일기를 제외하면 그러한 기록은 없다. 철 종이 정무에 뜻을 잃고 주색에 탐닉했다는 것도 집권 후기의 세도정치에 막혀 힘을 쓰지 못하고 임술농민봉기가 일어나고 삼정이정청의 실패가 겹쳐 철종의 개혁이 모두 좌절된 이후의 일이다. 그나마 실록에 나쁜 평가가 실린 게 중종, 명종 정도이다. 전공자도 아닌 장봉환이 임금 한 명 단위로 편찬되는 실록에 총서, 행장, 묘지문 정도나 읽을 수 있지 십수년이 넘는 재위 기간의 일을 모두 읽는 건 불가능하다. 무얼 기준으로 실록에 주색을 밝혔다고 나온거라 판단하는지 실체가 모호하다.
- 왕실 여인들이 사용하는 떠구지가 목제이다. 실제로는 목제 떠구지는 궁녀들이 사용하였으며, 대왕대비나 왕비같은 왕실 여인들은 진짜 머리카락으로 만든 떠구지를 사용하였다.
- 김소용이 가례 후 순원왕후와 신정왕후에게 문안인사를 하는 자리에서 신정왕후가 밤일에 대해 열정적인 19금 묘사를 하지만 조선의 중전은 주상과의 동침에서 궁중 법도상 가만히 누워있기만 해야 한다. 또한 곁방에서 숙위하는 궁녀들이 살아있는 닭을 들고 왕의 합궁을 지휘하였고 조선시대 왕과 왕세자의 구체적 성교육은 모두 궁녀가 담당하였지 실제 왕비나 왕대비는 구체적인 성교육은 일절 담당하지 않은 바 명백히 역사적 사실에 없는 내용이다. 조선시대 왕세자의 경우 궁녀와 성교육 서책들을 통해 성적 행동에 관한 교육이 이루어졌으며, 왕세자빈이나 왕비의 경우 주로 사가에서 데려온 몸종들이 성교육에 관해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지칭하였다. 일국의 왕대비가 성교육을 시키더라도 궁녀에게 명을 하여 시키는 것이지 드라마상처럼 구체적 성적 행동 지시를 왕비에게 실제로 궁인들 보는 앞에서 한다는 내용은 판타지라고 하여도 기본적인 핍진성 면에서 황당하다는 지적을 들을 내용이다.
- 홍연이 남장을 한 김소용에게 가짜 호패에 적힌 이름의 뜻풀이를 하는데 省蘉을 생망으로 읽으려면 '살필 생'이 아니라 '덜 생'이 된다. 살핀다는 뜻의 발음은 '성'이다. 즉 살피고 힘쓴다는 뜻이라면 '이성망'이다. 실제 기록으로도 확인이 가능한 비씨(妃氏), 시궐(屍厥), 재산호(再山呼), 천천세수(千千歲壽), 축일공상(逐日供上), 축삭공상(逐朔供上), 사삭일개(四朔一改) 등 일반인은 들어보지 못한 당시 용어를 찾아내 쓰면서 省(살필 '성', 덜 '생')자를 살필 '생'으로 쓰는 등 기초적인 오류를 냈다.
3.5. 3회
- 도설리가 1년치 쓸 기름을 모조리 가져왔다고 하는데 가마솥의 반도 차지 않는다. 국역 만기요람 재용편 중궁전 축일공상을 보면 1년에 쓰는 참기름만 8석 7두 4승 4홉이다. 소곡의 경우 1석은 15두(말)로 1년에 127 말이나 되는 엄청난 양이다.[22] 이는 중궁전에만 올리는 참기름의 양으로 대전(23석 10두 1승 8홉), 대왕대비전(13석 6두 7승 8홉), 왕대비전(13석 6두 7승 8홉) 등 모두 합하면 더 엄청난 양이 나온다.[23] 더구나 도설리가 가져온 기름 중에는 유채씨기름도 있는데 재래종 유채씨기름은 쓴 맛이 나는데다가 심장에 안 좋은 에루크산 성분이 들어있어 공업용으로나 사용되던 것이다. 현재 시판되는 식품용 유채씨기름은 GMO로 개발된 신품종 유채로 만든 카놀라유가 등장하면서부터 식품으로 섭취하게 되었다.
3.6. 4회
3.7. 5회
- 김병인이 김좌근에게 의금부장이 되겠다고 하자 김좌근이 한낱 무사 자리가 뭐가 좋으냐며 넋두리를 하는데 의금부장이라는 직책은 조선 관제 어디에도 없었으며 의금부의 수장은 "판의금부사"이다.[후속회차] 또한 의금부 문서를 참고하면 알겠지만 판의금부사를 비롯한 의금부의 고위관직은 비변사의 당상관들이 겸직하게 되어있는데다 판의금부사는 종 1품의 고위직으로 훈련대장인 김좌근의 정 2품보다 높은 관직이다.[25] 즉 한낱 무사 자리가 아닌 엄연히 조선 내 최고의 권력 기관장이자 정보 수장에 해당하는 자리이며 아무리 세도 정치로 국가 질서가 문란해졌다지만 경력 사항이 제로에 가까운 김병인을 앉히는 것도 불가능하다.[26] 극중 김병인은 과거에 급제하여 출사하지 않고 있었다고 나온다.
3.8. 6회
- 최상궁이 궁 밖으로 나갈 때 광화문을 나서는데 이 또한 고증오류이다. 광화문을 포함한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사실상 방치된 상태였으며 고종 때가 되어서야 복원되었다. 따라서 철종 시기까지는 창덕궁 등에 거주하는 것이 옳다.[27]
-
최상궁이 궁 밖으로 나가
대나무숲에 가는데 이론상으로 대나무의 자생이 가능한 곳은 태안반도-추풍령-대관령을 잇는 선의 아래라고 한다. 지구온난화가 시작되기 전인 극중 19세기에는 중부 지방에서는 대나무가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것이 정상이다.
3.9. 7회
- 김병인과 의금부 병졸들의 발검(拔劍)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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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방영 장면 #에서 나오듯이, 김병인은 친부한테 버림 받은, 사실상 김좌근 집안에 팔려온 아이였다. 그가 안송 김씨에 왔을 때 처음 만난 사람이 김소용이었으며, 상처 많은 그 아이에게 먼저 따뜻한 손길을 내민 게 바로 그녀였다. 수년간 그녀와 함께하면서, 비록 그녀가 중전의 자리에 올라서 더는 가까이 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은 진심인데다가 누구보다도 컸을 것으로 보인다. [29] 작중 김병인이 한 '너는 내 것이어야 했다'라는 대사나 묘선 이후의 입맞춤 장면 등 끝까지 김소용에게 집착하는 근친(近親)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근친(近親)을 이용해 주인공이 살아남는 극 전개에 그 이유마저 미방영하여 작가 스스로 핍진성 부족을 초래했다. 중전인 김소용을 연모하는 것에 대해 작중 김환이 "사촌을 사모하다니 이 무슨 천륜을 거스를 일이란 말입니까? 동성동본 근친상간이나 마찬가지인데. 게다가 주상전하와 혼인을 한 남의 여인 아닙니까? 미친게죠. 곱게 미친 것도 아니고 아주 드럽게 미친게죠."라고 말하는데 김환의 입을 빌린 작가의 말대로라면 김병인은 드럽게 미친 근친마가 맞다.
- 2회에서 병인이 가장 큰 애착을 가진 김소용에게 암살의 위협이 닥쳐온다. 다행히도 그때 김병인이 등장하여 암살자( 철종)와 한바탕 혈투를 벌였으며 그때 얻은 잘린 도포 자락을 바탕으로 중전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한 철종을 향해 수사망을 좁히고 있었다. 김병인은 이미 도설리를 통해서 철종 측이 증거 인멸을 위해 해당 도포를 태워 없애려고 한 걸 확인하고 타다가 남은 도포까지 확보한 상태였으며, 종국에는 철종이 무슨 이유로든 김소용을 죽일 수도 있는 위험한 존재라는 걸 확신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김병인은 철종과 영평군 중 누가 도포 자락의 주인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고 수릿날 연회의 대련에서야 진짜 도포자락의 주인이 철종임을 알게 된다.
- 또한 철종의 입장에서 발검 행위가 무례한 일이더라도, 극중 상황에서는 오로지 그 사실만으로 김병인과 그 수하를 역모로 처단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 철종은 그동안 지킬처럼 두 얼굴을 하고 돌아다녔으며 심지어 안송 김씨의 일족인 중전 김소용을 죽이려고 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김병인에게 들켰다. '정보의 비대칭성'도 문제인데, 철종의 입장에서는 김병인이 수사망을 좁혀오면서 자신에게 위협이 될 만한 증거를 이미 수집했는지 알 수가 없다. 김병인과 그의 양부 김좌근, 더 나아가 안송 김씨 세력을 완벽히 제거할 수 있는 명분이 없는 한 오로지 김병인의 무례함을 근거로 역모라고 문제삼다가는, 상대쪽에서 자길 칠 수 있는 증거를 들이밀며 옥좌에서 끌어내릴 수도 있다.
- 따라서 이러한 맥락을 감안하더라도 시청자가 납득할 수 없었다는 건 작가가 고스란히 감당해야 할 '정당한 비평'이겠지만, 전후 사정을 무시한 채 오로지 사실성만 가지고 비평을 하는 건 '정당한 비평이라고 볼 수 없다.'
3.10. 8회
- 김병인의 용돈벌이 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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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소용의 회상에 묘선[32] 후 철종으로부터 직접 책봉 교지를 받는 것으로 나오지만 국조오례의 가례의식 책비의(冊妃儀)에 따르면 주상이 왕비를 책봉하는 의식[33]과 비씨가 왕비책봉을 받는 의식[34]은 각기 다른 공간에서 행해졌고 왕은 비씨를 직접 만나지 않았다. 세종실록 오례 가례의식에도 중전 책봉시 교지를 내리지 않고 교명, 옥책, 금보를 함께 내리도록 되어있다. # 책비례를 통해 왕이 비씨에게 내릴 교명, 옥책, 금보를 사신들에게 맡기고 사신들은 비수책례에 따라 교명, 옥책, 금보를 전달하였다.
3.11. 9회
3.12. 10회
- 후궁인 조화진이 중전 사가를 들락날락하는데,[35] 애초에 내명부 여인이 궁 밖으로 나가는 일은 쉽지 않으며[36] 나간다고 해도 본가가 아닌 왕비의 친정에 왔다갔다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3.13. 11회
- 철종이 후궁 책봉 때 자신을 '짐'이라고 하는데 조선의 임금은 여(余)/(予)나 고(孤)를 많이 썼다. 사극에서 흔히 보던 과인(寡人)은 스스로를 낮출 때[37] 쓰는 표현으로 평상시에는 여(余)/(予)나 고(孤)를 쓴다.[38][39][40]
- 19회에서 축일공상만으로도 날마다 50대 이상의 진상품 수레가 궁으로 들어간다고 하는데 수릿날 연회에 쓰일 생물 진상품 수레가 단 한 대 뿐이다. 진상품 수레가 도착하지 않자 영평군이 직접 3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말 6필을 끌고 운반하려 한다.
- 신정왕후가 시어머니인 순원왕후에게 크게 소리치며 대드는 장면이 나온다. 그것도 단 둘만 있는 장소가 아니라 지켜보는 눈이 많은 연회자리였다. 효가 중시되는 조선 사회에서 왕대비 조씨의 행동은 감히 용서받지 못했을 것이다.
3.14. 12회
- 영평군이 말 두 필에 나눠 싣고 연회 음식 재료를 직접 가져오다 김좌근의 사주를 받은 자들의 방해로 막히는데 그 양이 너무 소박하다. 수레 한 대 분에서 말 두 필 안장 옆에 매달 분량으로 줄었고 필요한 것이 생물 진상품이라더니 쌀 서너 말과 바구니 두개가 고작이다. 백성들이 포대에서 쏟아진 쌀을 길바닥에서 주워담는데 이는 조리질을 하면 이물질을 걸러내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에야 모래와 돌이 없는 쌀이 시중에 바로 판매되지만 30년 전만 해도 밥먹다 돌 씹는게 흔한 일이었고 조리질을 해서 이물질을 걸러내고 밥을 지어 먹었다. 쌀독에 모래가 들어갔다고 밥을 못 하는 극 전개는 시대착오적이다. 쌀독에 돌이 들어간 것보다 물동이에 독을 타서 재료를 씻지도 못하게 된 것이 훨씬 더 심각한데 오히려 이 점을 간과하였다.
3.15. 13회
- 순원왕후가 동생인 김좌근에게 외명부를 맡겼다고 하는데, 외치(外治)를 잘못 말했을 가능성이 크다. 명부에 속한 이들은 모두 여인으로, 나인, 상궁, 후궁처럼 궁궐 내 여인은 내명부에 속하고, 대신들의 부인이나 공주, 옹주 등은 외명부에 속한다.[41][42] 애초에 외명부가 크게 중요하게 여겨지지도 않는데다가 중전이 버젓이 살아있는데 남자인 김좌근에게 외명부를 맡기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 브런치를 婦連致라는 한자로 음차한 자막과 함께 한글 표기도 같이 나갔는데, 連이 란으로 읽힐 때에는 '산 이름'이란 뜻을 가지고 있지만, 애초에 극중 김소용이 직접 連을 두고 ‘이을 란’이라고 직접 음성 언어로 언급했으므로 이건 '산이름 란'에서 따왔다고 변호할 수도 없다. 그리고 당연히 이두나 향찰로 음차한 기록도 없다. 덧붙여 부와 치를 婦와 致로 음차하는 용례조차 거의 없었다. 連은 중학용 한자이자 기초 한자에 속하며 사용 용례도 많은데 이조차도 신경 못 쓴다는 건 문제가 있어 보인다는 지적이 있다.
3.16. 14회
- 애기나인 담향이가 중전에게 돌을 던졌다는 이유로 사약[43]을 받고 죽는데 조선시대에는 원칙적으로 15세 미만의 어린아이, 특히 여자아이라면 사형을 시키지 않았다. 때문에 역모에 휘말린 경우라도 어린아이라면 부모의 가산을 몰수하거나 노비로 강등하는 식으로 끝내는 게 대부분이였고 담향이 같은 경우라면 출신도 노비이고 내명부 소속의 애기나인이기 때문에 출궁시키거나 노비로 다시 강등시키는 등으로 죽이지 않는 선에서도 충분히 처벌이 가능했다. 다만 극중 설정상 출궁한 나인이 암살당한 사례가 있으므로 철종이 담향이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부러 사약을 내려 죽인 것으로 위장했기 때문에 이해 가능한 선이긴 하다.
- 불가능한 것은 아니나, 해당 회차의 배경인 조선시대 여름에 비소가 들어간 얼음을 육각형 모양으로 만든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무언가가 들어간 얼음을 만들려면 얼음을 얼리는 과정이 필요한데, 조선시대 얼음은 겨울에 서빙고 등에 저장해놓은 얼음을 잘라서 꺼내오는 형태였다. 얼음을 얼릴만한 영하의 냉동 시설은 없다보니 얼음에 구멍을 뚫고 비소를 넣어 다시 그 구멍을 막아서 육각형의 예쁜 의심받지 않을만한 퀄리티의 얼음을 만들려면 소금을 사용한다든지 등의 여러가지 화학적인 수고가 필요하고, 그런 수고를 거쳐도 꽁꽁 언 얼음이 아닌 샤베트 같은 살얼음 정도만 얼 확률이 높다.
- 관노가 된 남동생을 구한다 운운하는 대사가 나오는데 공노비들은 1801년, 순조 시절에 정순왕후의 결단으로 이미 다 해방된 후다.
- 대신들이 담향이를 처벌하지 않으면 철종도 동학 불순사상에 물든 것으로 보겠다고 협박질하는데 이 역시 대역죄다. 하지만 이 드라마 돌아가는 꼬라지가 전반적으로 이렇다.
3.17. 15회
- 철종이 "관노가 된 어미를 면천시켜 함께 한양을 떠나 살도록 준비시켜 뒀습니다."라고 말하는데 관노(奴)는 남자이고, 관비(婢)가 여자이다.
- 김병인이 의금부장에서 병조판서가 된 모습이 나오는데 병조판서 자리 역시 낙하산으로 들어갈 자리가 아닐 뿐더러 병조판서(정2품)가 판의금부사(종1품)보다 품계가 더 낮다.[44]
- 김병인이 병조판서로 임명되는 자리에서 '칭신'을 하지 않는다. 더구나 병조판서를 임명하는데 비변사에서 의망(擬望)을 통해 임금의 윤허도 받지 않고 비변사 자의로 병조판서로 임명했다. 아무리 비변사에서 관직 후보자를 지명해 올리더라도 왕이 윤허하는 구색을 갖추는 게 맞다. # 허수아비 왕처럼 보이게끔 묘사하고 싶었겠지만 왕의 윤허도 없이 임명되는 병조판서가 칭신도 하지 않는 건 왕의 신하임을 거부한 것이나 진배 없다.
-
김소용이 한심옹을 내시로 만들라고 하는데 조선시대에는 죄인을 강제로 거세하여 내시로 만들었다는 기록은
안타깝게도존재하지 않는다.[45] 조선시대의 내시는 대부분 개에 중요부위를 물리는 등 사고를 당해 성불구가 된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가난 때문에 내시로라도 들어가기 위하여 일부러 거세를 하는 경우가 있기는 했으나 부모가 자식의 성기를 훼손하는 것은 처벌대상이었다. 또한 조선시대의 법도라면 왕이 아닌 왕실의 다른 이가 함부로 형벌을 명령하거나 집행할 수 없었고[46] 왕이라 할지라도 의금부나 형조를 통해 재판 절차를 밟아야 했다.[47]
3.18. 16회
- 극중 김소용이 입헌군주제를 설명하는데 입헌군주제는 군주의 권한이 헌법으로 규정되어 있을 뿐 반드시 민주주의적 선거를 채택하지는 않는다. 또한 입헌군주제라고 해서 무조건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성립하는 것도 아니다.[48] 헌법에서 군주에게 무제한적인 권한을 부여한다면 형식은 입헌군주제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전제군주제에 가까운 통치가 이뤄진다. 대한제국도 ' 대한국 국제'라는 헌법을 제정했는데 황제는 무한 불가침의 군권을 향유하며 입법 ·사법 ·행정 ·선전(宣戰) ·강화 ·계엄 ·해엄에 관한 권한을 가지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국호인 북한도 헌법이 있고 투표를 통해 대의원을 선출하며 선출된 대의원이 입법을 하지만 아무도 북한을 민주국가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3.19. 17회
-
신정왕후가
조화진에게 "중전의 자리에 오를 절호의 기회다."라고 했는데, 숙종 대에서부터
희빈 장씨 이후로 후궁은 왕비의 자리에 오를 수 없게 되었다. 만약 철인왕후가 죽게 되면 계비 간택이 이루어질 뿐, 의빈이 중전으로 책봉될 일은 없다.
그리고 조화진은 스스로 철종한테 본인의 폐출을 자청해서 궁을 나갔다.
- 대조전에 찾아온 신정왕후와 순원왕후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데, 이는 예법에 어긋난다. 대왕대비인 순원왕후가 왕대비 신정왕후보다 존귀하니 앞 자리에 앉고, 왕대비는 그 옆으로 돌려 앉거나 뒤에 앉아야 한다.[49] 원칙적으로는 상석인 안쪽 자리에 대왕대비가 앉아야 하지만 중전이 몸이 좋지 않아 상석에서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를 감안해도 왕대비의 자리가 바뀌는 게 맞다. 중전이 일어나지 않아도 되도록 허락한 것 역시 대왕대비이기 때문.
- 순원왕후가 김병인에게 중전의 목을 베어오라고 하는데,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국모인 왕비의 몸에 상처를 입히지는 않았다. 역모에 휘말려도 폐서인한 후 사약을 내리는게 고작. 다만 이는 그냥 죽이라는 말을 빗댄 관용적 표현일 수도 있다. 그리고 애초에 중전이 외간남자와 간통하여 임신을 했다는 소문이 났다면 당장 김병인과 중궁전 궁녀들부터 의금부에 잡아다 추국을 하는 게 정상이고 조대비가 소문을 퍼뜨린 것을 대단한 지략인양 희희낙락하는데 궁녀들 잡아족치면 소문이 어디서 나왔는지 안나올리도 없고 자충수에 불과하다.
- 김병인이 삼도민란 진압을 구실로 1천명의 병력을 뽑으려하면서 왕에게 대놓고 두렵냐고 빈정대는데 역시 대역죄다. 그냥 드라마 전체가 대역죄로 가득 차 있다.
3.20. 18회
- 순원왕후가 "마음 같아선 당장 새 주상을 자리에 앉히고 싶지만, 닷새동안 죽은 왕의 부활을 기다리는 풍습을 어겼다간 후일 정치적 반대를 위해 쓰일 것이 뻔하니"라고 말하는데 헌종 사후[50] 이원범을[51] 3일만에[52] 즉위시킨 게 순원왕후 본인이다. 세자/세제/세손이 아닌 상태에서 내명부 최고 웃어른[53]의 후계자 지명을 받고 왕위에 오른 성종, 명종, 선조, 철종, 고종의 경우 대행왕이 승하한 당일에 후계자 지명을 받았는데 특히 성종의 경우 대행왕 승하 당일에 바로 즉위하였다.[54] 철종을 죽이려한 사람들이 여유롭게 고작 '후일의 정치적 반대'를 신경쓰며 닷새를 기다려 즉위식을 하려는 건 극 전개상 철종이 환궁하는 5일을 벌어주기 위함이나 뒤늦게 즉위식을 서두르는 점에서 핍진성이 매우 부족하다.
- 순원왕후가 사왕(嗣王)으로 "민흥대원군 12대손 이경원을 추대하는 바이다."라고 언문 교지를 내리는데, 대원군은 방계 승통한 왕의 생부에게 붙는 작호로 "민흥군 12대손 이경원"이 되어야 맞다. 이경원의 생부는 민흥군 11대손으로 대원군이 되는 것. 만약 민흥대원군이 설정상 실존하는 인물이라면 그 아들은 이미 왕위에 올랐기에 "(민흥대원군의 아들인) 어느 임금의 11대손 이경원"이나 "(민흥대원군의 아들인 어느 임금의 몇째 아들) 아무개 군의 몇대손 이경원"으로 지칭해야 옳다.
-
약초꾼에 의해 목숨을 구한 철종이 천막 안에서 보게 된 쪽지에는 동비들이 주고 받은 암호가 적혀 있다.
ᄀᆞ초디ㅈᆞㄲ녀ㅎ너ㅊ
고모ㄷㅁㆍㄴ어ㅊ우ㅊ
이것을 뒤에서부터 거꾸로 읽으며 뜻풀이 하면 " 충청남도 목천현[55]"까지 도착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 철종의 재위 기간 중 조선의 지방행정구역은 팔도 체제였고 암호에 언급된 충청남도는 생겨나지 않았을 시점이다. 이 당시 충청도는 남도와 북도로 분도되지 않은 상태였고[56] 오늘날처럼 충청도가 남도와 북도로 분도된 것은 고종 재위 시기인 1896년이다.
3.21. 19회
- 영길리에서 수입한 조총으로 M1 개런드가 나왔다. 아예 그쪽 소총도 아닌데다 심지어 총구는 M1903이다. 두 소총 모두 철종이 죽고 수십 년은 지난 뒤에 출시된 물건들이다. 철종 재위 시기상 가장 합당한 최신형 소총은 드라이제 소총으로, 1836년에 개발된 최초의 볼트액션 후미장전식 소총이다. [57]
- 철종과 중전이 도성에 들어갈 방법을 논의 하던 중 좋은 방법이 있다는 중전의 말에 철종이 그 신박한 방법이 뭐냐 라고 묻는다. 신박하다는 말은 디씨인사이드에서 만들어진 신조어이므로 철종이 쓰는 것은 이상하다. 자세한건 신박하다 참조. 16회에서도 철종은 '중전은 듣도보도 못한 신박한 무기를 구상하고 있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철종이 중전과 어울리면서 배웠을 수도 있다.
3.22. 20회
- 극중 즉위식을 실내에서 진행하는데 실제 사위(嗣位)[58]에 의한 즉위 의례는 전(殿)이 아닌 문(門)에 어좌를 놓고 실외에서 거행했다. 이는 선왕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차마 그 자리에 나아가지 못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문을 통과해야만 전에 나아갈 수 있으므로, 선왕을 돌아가시게 한 불초자가 왕위에 오르는 의례를 ‘전’에서 편히 치를 수 없다는 의미를 지닌다.
- 김좌근의 살수가 허리에 탄띠를 두르고 있는데 황동제 금속탄피이며 탄두는 풀 메탈 재킷이다. 황동제 금속탄피가 처음 개발된 것은 1850년대의 림파이어 탄약이 시초이나 본격적으로 제식화 된 것은 1860년대로 센터파이어 탄약이다. 김좌근의 살수가 허리에 두른 황동제 금속탄피는 림리스 구조의 센터파이어 탄약이 맞다. 풀 메탈 재킷 탄두는 19세기 말에 개발된 것이다. 가장 이른 시기에 금속탄피를 사용한 소총은 프랑스의 그라 소총이나 프로이센의 게베어 1871이 있으나 1870년대에 개발된 것으로 시기상으로 맞지 않다.[59] 철종 시기의 최신식 후미장전식 볼트액션 소총인 드라이제소총의 경우 금속탄피가 아닌 종이탄피를 썼다. 그나마 작중에선 총을 한발 쏜 후 다음 탄알을 탄띠에서 따로 꺼내 장전하면서 연발총이 아닌 단발총임을 표현하긴 했다.
- 장봉환이 깨어나 한권짜리 조선왕조실록을 뒤적이는데 철조실록 항목 9번에 입헌군주제 대한제국의 탄생이라고 적힌 바로 밑에 명성왕후, 왕권과 의회라는 항목이 적혀있다. 김소용의 영향으로 철종시기 대한제국이 수립되어 역사가 변한 것으로 보인다.
[1]
마님, 마마님 모두 가능.
[2]
삼간택은 광해군 대에서부터 기록에 등장한다.
[3]
예를 들어 12화에서 초청숙수 이생망으로 가장하여 수랏간에 등장한
김소용이 "공식적으로 마마께선 연회장에 계신 게 맞잖아?"라는 식으로 선을 그어서 소용인 줄 눈치 챈
만복이 예의없이 말을 툭툭 놓고 "같은 숙수끼리 놈놈 소리도 못 하냐?"라고 큰소리 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어의가 눈치 없이 "이놈"이라며 선 넘을 때 알아서 제지하기도 했고, 김소용은 실은 조리가 더 급한 터라 더는 그 일에 크게 문제 삼지도 않았다. 이게 해당 작품의 세계관에서 허용되는 개연성인 '핍진성'이다.
[4]
또한 극중
김소용의 나이는 실제 역사에서의 10대 나이가 아니라 20대 초반 정도에 중전으로 간택되는데, 당시 수명이나 노산을 생각하면 현실에 맞지 않다. 이때 극의 전개에 크게 지장을 주는 경우가 아닌 한 '아~ 이 드라마는 그 나이대에 중전으로 간택되어도 문제없는 세계관이구나'로 이해할 수 있는 것도 '핍진성'의 일환이다.
[5]
영혼은 장봉환이지만 주변 인물들에겐 일단 김소용이다.
[6]
태국에서는 왕족의 몸에 손대면 사형감이었는데, 이 때문에 공주가 물에 빠졌을 때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결국 공주가
익사한 후에야 법을 바꿨다.
[7]
참고로 윤씨가 성종의 얼굴을 할퀴어 손톱 자국을 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기는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야사다.
[8]
다만 아무리 세도정치 시기라도 선을 넘는 행위는 용납되지 못한다. 이는
헌종 시기 왕의 면전에서 안경을 쓰는 무례를 저지른 조병구의 사례만 봐도 알 수 있다.
[9]
사실 세도정치가라면 오히려 외형적으로는 왕의 권위를 살려야 한다. (물론 실질적인 의사결정 과정에선 허수아비지만) 세도정치의 원리 자체가 왕의 권위를 등에 업고 왕의 이름을 빌려서 자신의 마음대로 나라를 뒤흔드는 것이다. 즉, "왕의 권위" 자체가 없다면 세도정치가의 권력 자체가 힘을 잃는다. 만약 저런 식으로 왕을 대놓고 무시하는 상태라면 왕의 이름을 빌려봐야 쓸모가 없는 상태, 즉 사실상 왕조 자체가 무너지기 직전인 것이다. 간단히 말해 "어명으로 네놈을 처단하노라!"라고 하는데 왕의 권위가 없다면 무슨 의미겠는가? 즉, 허수아비 왕을 내세운 세도정치가라면 실질적으론 자기 마음대로 해도 최소한 겉보기에는 왕이 절대적인 존재처럼 보이게 해야한다. 그래야 그 절대적인 존재를 조종하는 자신의 힘이 지켜지니까.
[10]
실제 역사에서도 왕의 총애를 믿고 기고만장하게 굴었다가 벌을 받는 후궁들이 수두룩했다. 대표적으로
영조의 후궁
숙의 문씨가 있다.
[11]
활촉이 없는 화살이다.
[12]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되는 철종 2년(1851년)까지 순원왕후가 받은 존호는 명경문인광성융희정렬선휘(明敬文仁光聖隆禧正烈)이다. 이중 '명경'은 왕비 시절 존호, '문인광성융희'는 헌종 임금이 올린 존호, '정렬'은 철종이 재위 2년까지 올린 존호이다. 따라서 철종 2년(1851년) 당시의 순원왕후의 정식 칭호는 '명경문인광성융희정렬 대왕대비 전하'였다.
[13]
오주연문장전산고에 기록되어 있다.
[14]
궁녀들은 개구리 첩지를 알맞게 하고 나온다.
[15]
배씨댕기는 태어난지 얼마 안 된 여아들이 댕기머리를 하지 못할 정도로 머리카락 길이가 짧아서 하는 것이다. 첩지가 실제로 고증된 것과 지나치게 벗어나
배씨댕기인지
첩지인지도 구분이 안가는 물건으로 나온다.
[16]
1861년, 철종의 나이 31세 때에 그려졌다.
[17]
실제로
삼간택,
택일,
납채(納采)/비씨제 수납채(妃氏第受納采),
납징(納徵)/비씨제 수납징(妃氏第受納徵),
고기(告期)/비씨제 수고기(妃氏第受告期),
책비(冊妃)/비수책(妃受冊),
별궁친영(別宮親迎)[60],
동뢰(同牢),
왕비조왕대비
(王妃朝王大妃), 왕비 수백관하(王妃受百官賀), 전하 회백관(殿下會百官), 왕비 수외명부 조회(王妃受外命婦朝會)의 절차를 거친다.
[18]
역사상 철종과 철인왕후의 실제 가례는 삼간택부터 왕대비의 조현례까지 35일이 걸렸다.
[19]
또는 합근례(合巹禮)
[20]
백관이 중전을 배알하는 것은 왕비 수백관하(王妃受百官賀)절차에서 이뤄지며 "천천세수(千千歲壽)를 올립니다."라고 일제히 외치는 것은 전하 회백관(는下會百官)/왕비 수외명부 조회(王妃受外命婦朝會) 절차에서 이뤄진다.
[21]
흉례 의식 중 사위(嗣位)[61] 절차에서는 문무백관이 산호(山呼) 구령에 천세(千歲), 재산호(再山呼) 구령에 천천세(千千歲)를 외친다.
[22]
환산하면 1997리터이다.
[23]
이중 60% 가량은 등잔에 쓸 기름이다.
[후속회차]
6화에서 임명할 때 정확하게 "종1품 판의금부사"라고 칭한 것으로 보아 김병인은 판의금부사가 맞고 편의상 의금부장이라 불렀다고 보는 게 타당할 듯.
[25]
현대 대한민국으로 따지면 판의금부사라는 자리는 5공 시절의 안기부장(!)과 동일한 자리이다. 안기부장 자리는 민주화 이후인 문민정부 시절까지도 대통령, 총리에 이은 행정부 내 권력 서열 3위로 꼽히던 요직이자 4대 권력 기관장들 중에서도 가장 압도적인 권력을 자랑했다.
[26]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비슷한 예시로 세조의 조카인
구성군은 25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1년만에 낙하산으로 병조판서가 된 후 다시 1년 후 영의정이 되었다. 하지만 구성군은 아직 질서가 잡히지 않은 조선초의 왕족이었고, 세도정치기에 접어들면 세도가 자제들이라고 해도 기본적으로 과거급제는 한 후에 단계별 고속승진을 거치는 식으로 했지 이런 낙하산은 안했다.
[27]
다만 김소용의 침전인 대조전이나 대비가 아지트처럼 사용하는 선원전 등은 모두 창덕궁의 전각이므로 극중 배경은 창덕궁이 맞다.
[28]
임금은 곧 부모라고 하였다. 제아무리 극중에서 철종이 허수아비 임금이라고는 하나 작중에서 김병인의 행위는 엄연히 부모에게 칼을 들이민 것이나 다름없을 패륜적인 행태이다.
[29]
이 장면은 본편에서 방영되면 좋았을 장면이었지만, 결국 종영 뒤에서야 공개된 터라 방영 2개월동안 붕뜬 캐릭터가 되어 버렸다. 19화에서 김소용을 살수로부터 지키려고 하다가 사망한 이후에야 불평이 어느정도 사그라들었다.
[30]
출처: 인문채널 휴 hue 뇌물의 역사편 임용한 박사님
[31]
해당 장면은 2화 참조.
[32]
삼간택에 최종 낙점되는 것
[33]
책비(冊妃)
[34]
비수책(妃受冊)
[35]
심지어는 집주인 일가인 중전과 부원군조차 모르게.
[36]
윗전의 허락을 받아야 겨우 나갈 수 있는데, 대왕대비가 허락했을 리가 만무하다.
[37]
겸양하거나 자책할 때
[38]
조선은 왕의 묘호와 XX왕후(后)라는 시호를 썼으며, 왕과 왕후의 무덤에 능(陵)이라는 명칭을 쓰고 환구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가 하면 황제국에서나 쓰는 후궁등의 용어를 사용하다 청나라에
들켜 사신이 혼나는 등 제후국의 예를 다 지킨 것은 아니었다.
[39]
영조 시기 짐(朕)이란 표현을 썼다고 한다. 영조가 직접 구술하여 지은 어제사도세자묘지문(御製思悼世子墓誌文)에 "... 오호라 이는 누구의 허물인고 하니 짐이 교도를하지 못한 소치일진데 어찌 너에게 허물이 있겠는가? .... 이것은 신하가 대신 쓰는 것은 아니며 내가 누워서 받아적게 하여 짐의 30년 의를 밝힌 것이니…"라고 적혀있다.
[40]
실제로 정조/순조시기 일성록에는 여(予)를 사용했다.
[41]
예를 들어 후궁은 내명부 정1품부터 종4품까지의 품계를 가지며, 왕비의 모친은
부부인으로서 외명부 정1품의 지위를 갖게 된다. 품계를 초월한 이들도 있었다.
왕비와
왕세자빈은 내명부 무계, 공주와 옹주는 외명부 무계로 급을 따질 수 없는 고귀한 신분이었다. 내명부가 외명부보다 높게 여겨지며 왕비가 내·외명부의 수장이 된다.
[42]
작중 인물을 기준으로 보면 대왕대비 김씨, 왕대비 조씨, 왕비 김씨가 내명부 무계, 의빈 조씨가 내명부 정1품이다. 등장하지는 않았으나 김좌근이 정2품 훈련대장이니 김좌근 부인은 외명부 정2품 정부인이 된다.
[43]
사실 사약은 왕족이나 사대부 등이 정치적인 이유로 피치 못해 사형을 당할 경우 죽는 이의 명예를 존중한다는 뜻에서 왕이 하사하는 것으로 사약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은 극히 제한적이였다. 이는 조선의 통치이념인 성리학에서 부모가 물려준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하는 것을 최악의 불효로 여겼기 때문에 몸이 상하지 않는 선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인 사약은 그만큼 죽는 이의 명예를 존중하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때문에 사약이라는 이름도 단순히 죽이는 약(死藥)이 아니라 임금이 하사하는 약(賜藥)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44]
다만 실권 자체는 병조판서가 훨씬 막강했다. 무관들의 인사권과 병권을 쥐고 있기 때문. 이는 현재 대한민국에서도 유효해서 국방장관이 장관들 중에서 유독 입김이 센 편이다.
[45]
물론 이러한 형벌 자체는
궁형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긴 했으나 조선에서는 너무 잔인하다는 이유로 행해지지 않았고 주로 명나라, 청나라 때에 준가르, 할하 몽골 등의 반란이 일어났을 경우 해당 민족을 말살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했다.
[46]
시대상 신분을 통해서 법을 무시하는 건 흔한 일이니 내시로는 못 만들어도 죽이는 건 별로 어렵지 않다.
[47]
이는 궁형이 빈번하게 행해졌던 명나라나 청나라 역시 어전회의나 재판절차 정도는 밟고 진행했다.
물론 너무 옛날이라 그렇지 안 그런
사례도 있긴 하다.
[48]
대표적으로 국왕이 군부의 인사를 좌지우지하고 쿠데타를 조장해서 내각을 뒤엎어버린 태국이라는 사례가 있다.
[49]
이를 곡좌의 예법이라고 하는데, 영조와
귀인 조씨의 친딸
화유옹주가
혜경궁 홍씨와 나란히 앉자
인원왕후가 엄히 혼낸 적이 있었다. 혜경궁은 왕세자빈으로
내명부 무품이고,
옹주는
외명부 무품이니 세자빈이 상석에 앉아야 한다.
[50]
헌종의 사망 역사기록
[51]
이원범을 후계로 정한다는 역사기록
[52]
3일만에 즉위한 역사기록
[53]
대왕대비 또는 중전
[54]
흉례 의식(凶禮儀式)은 고명(顧命), 초종(初終), 부(復), 역복불식(易服不食), 계령(戒令), 목욕(沐浴), 습(襲), 전(奠), 위위곡(爲位哭), 거림(擧臨), 함(含), 설빙(設冰), 영좌(靈座), 명정(銘旌), 고사묘(告社廟), 소렴(小斂), 전(奠), 치비(治椑), 대렴(大斂), 전(奠), 성빈(成殯), 전(奠), 여차(廬次), 성복(成服), 복제(服制), 사위(嗣位), 반교서(頒敎書) 등의 절차를 거쳤다. 5일동안 시신을 목욕하고 염습을 마치고 시신을 얼음으로 보존하는 등의 절차를 거친 후에 즉위식을 하고 즉위 교서를 반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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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현재의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일대
[56]
다만 임의적으로 지역을 구분하기 위해 동도와 서도로 구분하기는 했으나 행정구역이 정확히 나뉜 것은 아니었다.
[57]
M1 개런드에서 발사된
.30-06 Springfield 7.62×63mm 탄은 무려
저격총과
분대지원화기에 쓰인다! 총구에너지는 150그레인(10g) 탄두 기준 3820J에 달하는 엄청난 고위력탄이다. 아무리 장봉환이 신지식을 이용해 만들었다고 해도 조선시대 기술의 방탄복으로 막을 위력이 아니다.
NIJ 인증 기준으로 최고등급인 레벨 4 방탄복이 필요하다.
[58]
대행왕의 승하로 귈위된 왕위에 오르는 것
[59]
그라 소총이나
게베어 1871 둘다
대한제국군에서 운용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