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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13:15:47

조공책봉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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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토 주권에 대한 임대·양도 행위의 분류
조차
( 조계)
할양 종속
( 종속국 · 종속 지역 · 보호 · 식민화 · 속령)
병합
특수한 관계 괴뢰정부 · 자치령 · 조공국( 조공책봉) · 위임통치 · 신탁통치
파일:772px-Fengshitu.jpg
1725년, 청 칙사 악둔(阿克敦, Akdun)을 영은문에서 맞이하는 영조와 신료들.
1. 개요2. 명칭3. 동아시아의 전통적 국제체제
3.1. 내용
4. 논의
4.1. 다원성에 대하여
4.1.1. 원 간섭기에 대하여
4.2. 일반화에 대하여
4.2.1. 강압성에 대하여
4.3. 보편성에 대하여4.4. 명칭에 대하여4.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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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공책봉관계(朝貢冊封關係)는 중원 국가와 주변 국가 간의 주종관계로, 조공은 주변 국가의 수장이 현시점에서 중원에서 가장 강력한 위세를 가진 국가이며 스스로를 황제로 칭하는 나라에[1] 대해 신속하는 정치적 의례, 책봉은 조공에 대응하여 조공을 받은 황제가 그 수장들에게 특정 관작과 물품을 사여하여 신속시키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2] 조공책봉관계는 국제 질서의 변동에 따라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며, 시대에 따라 의례적 성격을 보이기도 하고, 실질적인 구속관계를 보이기도 한다.[3]

2. 명칭

조공책봉관계는 학계에서 논자에 따라 '책봉-조공관계', '조공체제(tribute system)', '책봉체제', '조공관계', '종번관계', '종번제도', '종번체제', '종번 질서', '번속관계', '속국체제', '조공관계', '조공제도', '책봉관계', '전통조공관계', '조공관계체제' 등 다양한 용어로 지칭되고 있다.[4]

3. 동아시아의 전통적 국제체제

파일:청나라와 가신국.png
청나라와 조공책봉을 맺은 이웃나라(주황)[5]
오늘날 21세기에는 유럽의 영향을 깊게 받아 「 주권」 이라는 개념과 함께 국가 간의 관계를 국가 대 국가로서 동등한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 외교적 시스템[6]이 국제적으로 통용되고 있지만, 전통적으로 옛 동아시아에서는 국가 간의 관계를 위계질서적인 관점[7]으로 바라보았다. 유교는 위와 아래를 구분하는 정치사상이었고 이는 국제 정치외교에도 적용되어 국가 간의 관계도 위와 아래가 있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계질서적인 관점은 「조공•책봉」과 같은 특수한 개념을 동아시아에 확립시켰고,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동아시아만의 독자적인 외교 시스템이 구축되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동아시아 고유의 국제정치질서는 19세기 중반 이후 서구의 도전과 문명표준의 확산으로 말미암아 종언을 고했다. 이때부터 동아시아 각국은 서구의 국제정치질서를 일방적으로 수입할 수밖에 없었고, 주권국가들 사이의 평등한 관계를 전제로 한 서유럽의 베스트팔렌 체제에 편입되었다.

3.1. 내용

오늘날에는 독립국이라면 반드시 국가 간의 관계가 동등해야 한다고 여기고 있지만, 동아시아에서는 국가 간의 관계가 동등해야 한다는 개념이 전무했다. 유교의 영향을 깊게 받은 동아시아에서는 외교관계를 맺을 때면 어찌 되던간에 반드시 위계서열을 정하려고 했으며, 보다 더 강한나라가 높은 위계서열을 갖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외교적 상식이었다. 오늘날에는 강대국과 약소국 간의 관계를 황제 대 신하 간의 관계로 취급하지 않고, 국가 대 국가로서 동등하게 바라보지만, 옛 동아시아에서는 위계질서적인 관점으로 보았다. 천하에서 가장 강한 나라가 황제국이 되는 것이고, 그보다 약한 나라는 신하국이 되는 것이었다.[8] 모든 동아시아의 국가들은 위계질서적인 외교관계를 가졌다.[9] 그리고 동아시아는 어느 나라가 강국인가에 따라 위계서열이 바뀌는 유동적인 세계였다.[10]

국가 간의 수평적인 외교관계가 보편적으로 확립된 요즘과는 달리 옛 동아시아에서는 외교관계에 있어서 국가 간의 관계가 서로 평등함을 인정한 사례는 찾아보기가 힘들며, 평등한 관계는 동아시아에서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동아시아의 모든 국가들은 맺어진 모든 외교관계를 위계질서적인 것으로 보았다.[11] 국력이 비슷하더라도 서로 간의 우위를 주장하며 위계서열을 세우려고 했다. 다만 두 국가 간에 국력의 차이가 있음이 확실할 때는 황제-가신 관계가 형성되었는데 약소국은 이에 수치심이나 불평등함을 느끼는 것이 전혀 없었고.[12] 외교에 있어서 대외적으로 신하가 되는 것을 당연시 하였다.[13][14] 자국을 황제국이라고 여겼어도, 외교를 하기 위해서는 대외적으로 신하국이 되었다.[15] 동아시아에서는 황제-가신 관계 이외에도 다양한 위계질서적인 형태의 관계가 존재했다.[16]

'조공책봉'이라는 외교적 관례는 천자국이 외국과 외교관계를 맺을 때 사용되었는데. 오늘날로 치면 국교수립[17][18]이었다. 그리고 ' 조공'은 오늘날로 치면 국가 간의 무역이었다.[19] 그런 것들이 싫으면 일본처럼 관계를 단절하였다.[20]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조공책봉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양자간 합의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는 강제성이 동반되기도 하였다.[21] '조공책봉'은 천자국이 외국과 외교관계(국교)를 수립할 때 사용되었던 외교적 관례였을 뿐. 대외적으로 천자국이 아닌 나라들끼리 외교관계를 맺거나, 서로 국력이 비슷한 나라들끼리 외교관계를 맺을 때는 조공책봉이라는 외교적 관례를 가지지 않았다.[22] 대외적으로 천자국을 자처한 나라는 극히 소수임을 감안 할 때 과연 그 수 많은 동아시아의 외교관계들 중 조공책봉을 맺은 사례가 도대체 몇이나 될까를 생각해본다면 별로 많지는 않을 것이다.[23]

이러한 특수한 외교 시스템 때문에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는 엄청난 오해가 생기게 되는데. 위계질서적인 외교 시스템을 가지고 있던 동아시아에서는 19세기부터 수평적인 관계를 원칙으로 하는 베스트팔렌 체제를 도입하게 되면서 기존에 맺어진 관계를 '신하국=속국'으로 해석해버리는 오류를 범하게 되어버린다. 이는 중국에서 "한반도는 중국의 일부"라는 주장이 나오게 된 계기가 되었고, 동시에 일본에서는 " 한반도는 역사적으로 일본의 속국"라는 매우 상반된 주장을 양국이 동시에서 제기하게 되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야기하게 된다. 한국도 예전에는 일본을 속국으로 보았는데, 19세기 이전까지 한국과 일본이 서로를 속국 취급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지금도 한국인들과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서로서로를 옛 속국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식으로 서로가 서로를 속국 취급한 사례는 동아시아에서 흔히 볼 수 있었는데. 당장 고구려, 백제, 신라를 보더라도 삼국은 서로를 속국 취급하였다. #

19세기 청나라는 1882년 임오군란을 계기로 조선을 청나라에 편입시키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청나라는 기존에 맺어진 관계로서의 군신관계를 재해석하며 신하국 지위를 가지던 조선을 속국으로 해석하였고, 임오군란을 계기로 간섭의 명분이 생긴 청나라는 1882년부터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하기 이전까지 조선의 조정에 노골적인 간섭을 행하기 시작하게 된다.[24] 이는 조선의 근대화 실패를 야기하게 된 매우 치명적인 원인이 되었다. 반면 19세기 일본은 "조선은 신라 때부터 19세기까지 쭉 조선은 일본의 속국이었다"고 하여 일본에서는 정한론이 퍼져나가게 된다. 당장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보아도 "조선은 일본의 신하로서 명나라 정벌에 앞장서라"[25]라는 말도안되는 요구를 하였고 이를 대마도 도주가 순화시켜서 조선의 조정에 보낸 메시지가 "정명가도"였다. 그렇게 수정해서 보낸 "정명가도" 조차 문서의 내용 중 조선을 속방으로 칭하여 조선의 반발과 당혹감을 샀었다. 이런식으로 일본은 통일신라 시대부터 한국을 일본의 속국으로 여겨온 반면 한국은 백제 때 부터 고려와 조선시대[26]까지 일본을 한국의 속국으로 보았다.

청일전쟁 이후 전근대적인 조공책봉관계가 종식되면서 조선은 주권평등의 원칙을 가진 베스트팔렌 체제에 편입되게 된다. 당시 인식으로는 "왕국=황제의 신하국"를 의미했던 지라 황제국이 아니면 주권국이 아니라는 인식이 조선에서 팽배했었고, 이른 인지한 고종은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개칭하고, 칭제건원을 하게 된다. 대한제국의 성립은 조선이 평등을 원칙으로 하는 베스트팔렌 체제에 편입되고, 오래전부터 동아시아에서 이어져온 전통적 외교체제의 종말을 고한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평가된다.

4. 논의

현재 학계에서는 조공체제론을 자기완결적 논리 구조를 가진 하나의 완성된 체제라는 통념에 대한 비판 등이 제기되고 있다. #

4.1. 다원성에 대하여

이재석은 책봉-조공 관계와 함께 '맹약-조공 관계'를 시론적으로 설정하여,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 유형이 일률적, 일원적일 필요가 없음을 지적하였다. 그에 따르면 중원을 포함하여 북방・서역의 지역 세계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고대 삼국과 왜(일본) 등까지 아우르는 광범위한 '조공-맹약의 유형'이 지속되고 있었다.[27]

윤영인은 10~12세기 국제질서를 두고, 이 시기를 '조공체제'로 논하는 것은 가정을 사실로 간주하고 진행하는 논리적 오류라고 비판하면서, 이 시기 국제질서는 "한족 중심적 조공체제의 와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따르면, 송은 조공체제의 이상을 실현할 실질적인 힘을 가지지 못하여, 고려의 조공, 즉 방물에 대해 후하게 보상하거나 고려 사신을 국신사로 대우하였으나, 고려는 송의 요구에 크게 부응하지 않아 송의 구 법당이 파별 투쟁 중에 고려에 대한 비난을 표출하기도 했다. 거란(요)에 대한 조공도, 거란이 고려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을 전제로 지속되었기에 그 이후의 까지 고려의 조공은 명목상에 지나지 않았으며, 남송이 금에 바친 세폐나 고려 후기 조선 시기와는 대조적으로 조공이 국가 재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분석했다.[28]

오누마 타카히로(小沼孝博)는 청-카자흐의 정치적 관계를 필두로 코칸트, 키르기즈, 파미르 고원과의 관계를 분석해본 결과, 이 관계는 유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종번관계의 형태를 띠지 않고 형성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관계를, 청의 지배하에 있는 몽골 부족들 사이에 형성된 '어전-알바투 관계'(ejen-albatu Relationship)로 정의하여, 중앙아시아의 많은 집단들이 이 관계에 포섭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선행연구들이, 특이 청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연구들이 '종번관계'라는 개념을 절대적 전제함으로써, 그 논의가 처음부터 종번관계를 유지한 '조공'과 '책봉'의 체계에 관한 설명으로 한정되어버렸다고 비판하였다.[29]

김민규는 선행연구가 조공체제와 조약체제에 의한 이분법적 방법에 의한 것이 대부분으로, 청말의 역사상을 애매모호하게 서술할 수 밖에 없다는 한계를 지적하면서, 유길준의 '양절 체제론'에 대한 재검토를 통해, 종래의 '내치와 자주'라는 조공체제가 조약체제를 편입함으로써 강화, 변질되어 청이 조선의 자주를 완전히 무시하고 침해하는 과도기적 체제가 형성되었다고 밝히며, 이를 '조규 체제'로 명명하였다. 그에 따르면, 청의 '조규 체제'는 청이 일본 및 조선과 조약 대신 '조규'와 '장정'을 체결하여 당사국들을 대등한 존재로 인정하지 않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또한 청이 조선과 서양 열강의 조약을 주선하여, 자국을 최상위에 위치시키고자 하였다고 주장했다.[30]

유바다는 청이 1864년 《만국공법》을 번역해내면서 조공(朝貢), 책봉(冊封), 속국(屬國)과 같은 기존의 개념들을 매개로 《만국공법》의 진공(Tributary), 번속(Vassal)과 연결 시켜 상시적인 조공국, 즉 조선, 안남, 유구와 같은 존재들을 국제법적인 속국·반주지국(半主之國), 즉 반주·속국(半主 屬國)으로 재해석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거기다 《만국공법》에서 번속(Vassal State)은 경우에 따라 자주지국(自主之國)일 수 있었지만, 《공법회통》 단계에 와서는 병번(屏藩, Vasallenstaten)은 분명히 반주·속국으로 분류되고 상국(上國, 종주국)과 종속적인 관계를 지닌 존재로 정의되고 있었기 때문에, 청은 1880년대 《공법회통》을 번역한 이후 자국의 지위를 국제법적인 상국(上國)으로 재해석하고 조선과의 봉건적인 군신관계를 국제법적인 상국-병번(반주·속국) 관계로 전환시킬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이것이 바로 중화적 질서와 국제법 질서 사이에 존재했던 '상이한 요소들'이 국제법을 매개로 관계를 맺은(그중 어떤 것들은 새로운 것이고, 어떤 것들은 이미 존재했던) 작업의 결과였다.[31]

이동욱은 청말 국제법 체계의 수용과정에서 번역의 모호성과 복합성에 주목하였는데, 그에 따르면 19세기 말 청이 전통적 개념을 그대로 활용하여 서양의 여러 개념들을 번역한 결과 당시 '속국'이나 '속방' 개념이 전통적 속국 개념, 국제법 질서 속에서 일정 정도의 주권을 인정받는 반주국(semi-sovereign state)/속국(dependent state) 개념, 아예 주권이 없는 식민지(colony) 개념을 포괄하게 되었다. 더불어 서양의 연방 정부, 식민 모국, 보호국 등 또한 전통적 상국 개념으로 번역되면서, 청 조야를 시작으로 청의 관료들은 서양의 다양한 사례를 그 차이를 명확히 인지하지 않은 채 참조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때문에 결국 청조의 대조선 정책은 전통적 속국과 반주국/속국 그리고 식민화 정책이 착종되는 복합적인 양상을 보이게 됐다고 해석했다.[32]

하마시타 타케시(浜下武志)는 이른바 '조공무역체제'와 비조직 네트워크 등으로 연결된 '아시아교역권', 아시아 광역지역질서의 역동성에 주목해, 서구권이 아시아적인 국제질서인 조공체제를 전적으로 부정하고 조약체제를 새로 구축하였다는 기존의 통념을 비판한다. 그는 조공체제가 적극적으로 자신의 변화 안에 조약체제를 흡수하였다고 유럽의 충격을 상대화한다. 그에게 유럽의 충격이란 기존 아시아 조공권의 네트워크를 이용하고 편승한 것에 불과하였고, 일본의 공업화가 화교상인을 극복하는 과정으로 인식된다. 즉 일본의 근대화는 전통적인 조공무역체제를 타파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19세기 중엽부터 반세기에 걸친 아시아 지역질서를 이끈 조공적 종속관계의 병존은 1912년의 중화민국 국가주의를 표방하면서 종언했다고 본다.[33]

4.1.1. 원 간섭기에 대하여

1980~9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 학계에서는 이익주 등이 필두가 되어, '조공책봉관계'의 연장선에서 '세조구제론'이라는 틀로 '원 간섭기'를 이해하고 있다.[34]

그러나 동양사쪽 입장은 좀 다른데, 1990년대 오토사 토모코(乙坂智子)는 몽골과 주변국 간 실제적 복속관계가 중국적 체제와 다르다고 보고, '육사(六事)'의 이행 등을 특징으로 하는 그 관계를 '내부체제(內附體制)'로 명명하였으며, 고려와 티베트를 대표적인 사례로 꼽았다.[35]

모리히라 마사히코(森平雅彦)는 고려국왕이 몽골제국의 부마의 위상을 얻으면서 양자가 '부마고려국왕'이라는 일체화를 보였다고 해석했다. 고려본국은 비록 특수하지만, 사실상 다른 종왕들에 비해 특수한 것에 불과한, 고려본국이 부마고려국왕의 투하령(投下領)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고 분석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부마고려국왕이 무신정권의 유산을 담습할 수 있던 것도, 제국 체제 안의 부마에게 주어진 케식, 비체치 등의 몽골 제도를 통한 것이었고, 입성론의 지속적인 제기도 정동행성으로 재편된 본국이 기본적으로 제국 체제 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책봉', '조공', '연호', '반력', '왕인(王印)' 등은 중국적 형식이지만, 이는 단지 '차용'에 불과했다.[36]

김호동은 고려와 원 양측의 관계를 '속국관계'와 '혼인관계'로 구분하고, 고려가 대몽골 울루스의 속국이 된 것은 1260년의 일, 이때 쿠빌라이 칸은 속국과 맺는 관례에 따라 '본속지속'의 유지와 국가적 독자성을 인정했으나, 쿠빌라이가 서방 울루스들의 분립 등이라는 혼란속에서 명목상 대칸으로 변모한 카안 울루스의 수장으로 변화하면서 이때 '혼인관계'로 고려 왕실이 몽골제국의 부마가가 되어 고려는 부마의 '속령'이라는 이중적 지위를 갖게 되었다. 그에 따르면 몽골제국과 고려의 외교적 관계는 이러한 이중적 "불안정성"을 보였으며, 분립이 진행될 수록, 부마의 속령이라는 측면이 강조되었다. 그 결과 입성론의 제기나 정동행성의 증치가 이루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고려가 전통적인 사대관계의 연장선에서 '세조구제'를 내세운 것이었다. 그는 본질적인 측면에서 세조구제의 근본적 틀은 칭기스 칸 아래 정치적 독립을 보장하는 관례로, "몽골적인 속국관계"에 있음을 지적했다. 양자의 관계에서 전통적 사대관계의 용어들이 등장하는 것에 대해서는, 과거에는 명분적 관계에 불과했다면, 이때에는 몽골지배층의 독특한 인식이 반영되어 실제로 구-서 관계가 작동하게 되었음을 지적했다.[37]

고명수는 원 간섭기를 '조공책봉관계'로 보는 시각에 대하여, 국가 간 외교관계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서 '형식'이 아닌 '실제'에 부합하는 용어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38] '내정 불간섭'이 '책봉조공관계'의 핵심적 특징으로 인정된다는 가정이 사실이라면, 화친 이후 고려의 고유한 통치권이 인정되었지만, 고려국왕이 몽골 카안에게 철저하게 예속되어 고려의 정치적 자주성이 훼손됐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책봉조공관계와 상이함을 보인다고 하였다.[39] 이 점에서 정치적 자주성의 정도로 책봉조공관계의 여부를 판단하면 몽골-고려 관계는 한중관계의 일반적 형태, 성격과 근본적으로 달랐다고 해석했다. 결국 그에 따르면 선대정권과 쿠빌라이의 고려정책은 단지 책봉조공의 형식 채용 측면에서만 다를 뿐, 근본적인 변화는 없었다.[40]

이명미는 전통시대 대다수의 피책봉국들의 '정치적 자율성'이 '원칙적'이라는 데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제후국의 정치적 자율성을 보장한 '성교자유(聲敎自由)'나 '자위성교(自爲聲敎)'는 조선 시대 이후의 사례에다가, 이러한 '명시'는 고려국왕의 상위권력으로 작동, 권위로 기능한 몽골 황제권이 내정에 작용한다는 '현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전근대시기 국제관계를 '책봉조공관계'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고, '책봉'과 '조공'이 군신관계를 내포하는 만큼, 고려의 '정치적 자율성' 침해 또한 군신관계의 다양한 범주 내에서 논할 수 있다는 여지를 두었다. 또한 그녀에 따르면, 책봉조공관계의 요소와 몽골적 관계의 요소는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하나의 관계'를 이루었던 측면도 있다고 보면서, 두 요소가 매우 유기적으로 양국관계 및 고려국왕-몽골황제의 관계를 구성하고 있었다고 해석했다. 가령 '국왕친조'를 책봉조공의 예법으로든, 몽골적 제도적 장치로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공민왕 5년 이후 그러한 물리적인 힘이 밑받침하는 몽골적 관계가 물리력의 약화와 함께 상당수 탈각하고 책봉-조공 관계의 요소가 남게 되었던 것이라고 해석했다.[41]

정동훈은 충렬왕이 몽골 황실과의 통혼으로 부마고려국왕(駙馬高麗國王)이라는 제왕(諸王)의 지위를 획득하면서 그때까지 고려에 부과되었던 세공은 공식적으로 면제됐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의 고려의 물자 조공은 대부분 ‘방물(方物)’로 표현되는데, 이는 고려의 특산물을 정해진 품목이나 액수의 제한 없이, 비정기적으로 바치는, 송ㆍ거란ㆍ금-고려 관계에서 나타났던 전통적 의미의 조공과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고 해석했다.  쿠빌라이 카안 재위 중반 이후로 중국적인 제도와 관행을 대거 차용하고 중국적 논리가 적극적으로 동원되는 과정에서 고려의 세공은 몽골적ㆍ유목적 의미의 수취 성격이 사라지고, 고래로 이어져온 중국적 의미의 조공으로 변화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고려와 명이 외교관계를 맺은 초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선행연구에서 충렬왕의 부마 지위 획득이 이후 여몽관계에서 몽골적인 요소가 대거 도입, 혹은 적용되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물자 수수 관계에 있어서는 역으로 기존의 몽골적 요소들이 대거 약화되고 오히려 전통적인 중국적 논리가 더 많이 활용되기 시작했다고 해석했다. 오히려 기존의 고려-거란, 고려-금 관계, 혹은 1280년대 이후 고려-몽골 관계에서의 ‘조공’과는 성격이 완전히 다르고 이례적인 것은, 우왕 대 명 측에서 금, 은, 포, 그리고 공마 등의 품목과 액수를 지정해서 요구한 것이었다. 홍무제가 지정한 총량이 연간 은 23,500냥(최초 발화 기준)에 달할 정도로 막대한 양이었으며, 황제의 언급에서 “고려가 복속되었다는 증거로 삼겠다”는 표현이 항상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것이 정치적 상하관계를 표시하는 의례적 수준의 선물이라는 기존의 조공에 대한 통설과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비판했다.[42]

4.2. 일반화에 대하여

가령 제임스 밀워드(James Millward)는 카자흐와 청 사이의 말 무역을 청 측이 공마(貢馬)로 간주했다는 점을 들어, 전근대 중국의 대외관계를 모두 조공관계로 설명하는 중화적 시각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음을 지적하였고,[43] 한지선은 인도양 제국과 명과의 관계에서 조공이 없어도 호시는 있었다는 지적과 함께 조공국이라고 하더라도 그 편차는 매우 커서 인도양 주변 지역에서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조공책봉관계에서 보이는 엄숙한 의례나 의례의 규칙성 등을 수반하는 정치적 관계가 나타나지 않음을 꼬집었다.[44] 정동훈은 11세기 초 귀주대첩이라는 대승을 거둔 후 고려가 거란에 제공한 물자와, 17세기 중반 병자호란에서 탐패한 조선이 청에 바쳐야 했던 물자는 비교할 수 없는 등, 양자 모두 '조공'이라는 영속적 관행으로 표현되었지만, 그 실체를 주체별로 달랐음을 지적하였다.[45]

후마 스스무는 베트남이 명청조와 조공책봉관계를 맺으면서도, 대월황제(大越皇帝)라 칭하고 중국이 그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대월황제를 안남국왕이라 적고 조공을 받고 책봉을 해온 점을 거론하며, 조선의 경우 그 통치자가 스스로를 '황제'라고 하고 연호를 사용했다면 중국이 눈을 감고 계속해서 그들을 책봉해주는 것은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점과 명청의 대조선 정책에서는 찬탈자에게 책봉을 해야하는지 여부를 두고 중국에서 열띤 논쟁이 있던 반면, 대베트남 정책의 경우 그런 열띤 논쟁은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며 조공과 책봉 제도가 이론에 기초한 추상화와 형식화가 진행될수록 동아시아의 개별 국가에 대한 명청의 정책 현실을 파악하기가 더욱 어려워질 수 있다고 비판하였다.[46]

구범진은, 명과 티무르, 영국과 청 관계 같이 칭신을 전제하지 않은 조공은 그 시점에서 이미 '조공'이라고 볼 수 없고, 책봉에 있어서도 1회성이나 이벤트성 영봉을 제외하면 결국 청의 조공국은 잘쳐줘도 조선, 베트남, 류큐, 타이의 네 나라만을 인정할 수 있으며, 17세기 중엽 청과 정상적인 책봉-조공관계를 맺은 곳은 조선 뿐이라고 일축하였다. 그는 '책봉-조공 패러다임'이 이제 더 이상 역사상의 분석 틀로서 그 효용성을 인정할 수 없을 정도의 위기에 직면해있으며, 그것이 '동아시아' 전체로 일반화해 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비판했다.[47]

정동훈은 명의 '조공시스템'이란 애시당초 기획된 적도 없으며, 개별적 상황에서 각각 창출된 몇가지 제도, 관례를 후대의 사가들이 임의로 창출한 논리에 불과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에 따르면 홍무제나 식자층이 미구로 자신들이 고안해낸 관례들을 《주례》와 같은 고전을 재현해낸 척 하였으나, 실제로는 고려와 안남이 주체적으로 봉표칭신한 우발적 사건을 계기로 등장하여 진일보했다고 주장했다.[48]

시슈렌(习書仁)은 삼국으로부터 조선에 이르는 관계의 성격을 '종번관계'로 규정하고 종번관계가 시시각각 변하고 변화하는 현실, 즉 종번관계의 확립과 지속적인 발전을 중심으로 한중관계를 요약한다. 그는 3~4세기 신라 백제가 주동적으로 중국에 '칭신납공(稱臣納貢)'의 관계를 수립하였고,[49] 원대에 종번관계가 강제성이 있었지만, 그것을 짧은 기간 비정상으로 본다. 뒤이은 명조와 청조가 그 초기에 각종 간섭과 조공 부담을 가중하였지만 그것은 주로 조선이 주동적으로 참여한 종번관계의 유구함에 있어 짧은 기간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종번관계는 중국이 조선을 비롯한 주변국과 특정한 조건하에 형성된 독특한 국가관계로, 이 체제하에서 종주국과 번속국 사이에는 수많은 불평등한 요소가 있었으나, 종주국의 대다수 통치자는 한국의 내정과 경제에 간섭하거나 수탈하지 않았다. 종주국은 '천하공주(天下公主)'로 주변국을 우대했고, 주변국은 그 지위와 명분을 중시했다고 설명한다. 이는 근대 식민제도와는 크게 다른 것이었다.[50]

4.2.1. 강압성에 대하여

책봉 문제 외에도 조공 품목과 수량의 조정 문제(15세기), 명의 조선군 징병 문제(15세기), 임진왜란 중의 작전지휘권 행사 및 갖가지 간섭(16세기), 감군어사와 모문룡 문제(17세기), 청의 조선군 징병(17세기), 인사문제 관 여 및 두 차례의 심옥(17세기), 현종에 대한 벌은(罰銀) 처벌(17세기), 범월 처리 관련 술한 칙서와 명령(17~19세기), 개항 과정 및 그 이후의 심각한 내정간섭(19세기) 등은 다 그런 예이다. 이런 간섭에서 칼자루는 언제나 명청이 쥐고 있었다. 이에 대해 학계 일부에서는 위의 사실들을 예외적인 사례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유사한 내정간섭 사례가 반복하여 통시적으로 나타난다면, 그것은 이미 예외일 수 없다. ... 이럴 경우, 간섭하지 않으면 그것은 책봉국의 관용과 은혜가 된다. 임진왜란 때처럼 비상시에 도와주는 것만 은혜는 아니다. 만약 책봉국이 조공국의 내정에 간섭해 올지라도, 조공국 입장에서는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의지가 없는 한 그것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사정이 이런데도 내정간섭이 없었다는 한마디 말로 책봉 조공 관계의 실상을 슬쩍 지나칠 수는 없다.
계승범(2020), "조선 시대 한중관계 이해의 몇 가지 문제",《동아시아사 입문》, pp. 576~577.

일찍이 이와이 시게키(岩井茂樹)는 홍타이지의 치세에 무력 행사에 의해 청에 굴복한 속국적(屬國的)인 입장에 놓여 있었고, 다른 조공국들과 동일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을지 모른다는 의문을 제기하였다.[51] 이는 단순한 문제의식에 그치지 않았는데, 계승범은 조선의 경우 무역과 같은 비정치적 요인에 책봉-조공관계라는 외피가 입혀진 것이 아니라, 책봉-조공 관계의 주 목적이 정치적, 전략적 필요성에 직결되어 있음을 지적하였다.[52] 그에 따르면 몽골 이래 일원적 제국으로 국제질서가 강력하게 편제된 이상 원 간섭기 고려나 이후의 조선으로서도 북경을 중심으로 한 명·청에 대해 다른 옵션같은 것은 없었기 때문에 그 의존도는 거의 절대적이며, 그만큼 자주성도 크게 훼손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는 이러한 구조속에서 유사한 내정간섭 사례가 반복하여 통시적으로 나타나는 이상 결국 조선시대에 국한해 볼 때, 조공책봉관계는 형식적인 외교 방식이 아니라 군신 관계에 기초하여 실질적으로 작동한 국제질서였다고 평가했다. 그는 임진왜란 중 강화협상 테이블에 조선이 앉지 못한 사실이나, 개항 후 조선의 외교관계 수립에 청이 늘 후견인처럼 개입한 점은 과연 조선이 독자적 외교권을 행사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였고, 조선이 '인신무외교(人臣無外交)'[53] 원칙을 문자 그대로 지키려고 노력한 역사상 거의 유일한 국가라 평가하며 조선에게 조공-책봉 관계가 형식상 관념이 아니라 국제관계에서 준수해야할 실재하는 존재로 받아들여졌음을 강조했다.[54]

장춘우(張存武)는 봉공종번체제(封貢宗藩制度)가 중국 왕조의 문화적 역량에 따라 맺게 되는 것으로, 조청관계가 전형적 조공관계라는 전해종의 의견(Korea was the model tributary)을 반박했다. 이른바 “수문덕이래지(修文德以來之)”에 의한 것으로 송명의 경우가 전형적일 뿐, 조청관계는 종번체제에서 탈궤한 것은 아니지만 전쟁을 통해 강압적으로 맺어진 종속관계라고 주장한다. 가령 1696년 청 황제가 조선의 왕세자 책봉 주청을 불허한 사례를 통해 주도권이 황제에 있음을 논증했고, 사법에 있어서는 양국간의 범죄 처리에 있어 불평등성이 확인된다고 하였다. 아울러 군사나 교빙에 있어서는, 주대 봉건제에 따라 본디 열국이 교빙할 수 있기는 하나, 만력연간 조선에 대한 외교적, 군사적 개입을 근거로 19세기 후반 청조의 개입은 서양의 양향을 받았음에도 본래의 구제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해석했다. 그에게 있어 간섭 여부는 전통적인가 근대적(식민주의)인가의 문제가 아니었다.[55]

천웨이팡은 중국과 조선의 종번관계가 기타 주변 국가들과의 번속관계와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불평등한 통치관계였다고 단언한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관계는 항상 군사 정복 및 군사적 위협하에서 이루어진 불평등과 지배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속국의 통치자는 중국의 통치자에게 복종하고 중국을 상국으로 받들어야 하는 불평등한 위치에 있었다. 중국은 통상적으로 속국의 내정과 외교를 공개적으로 간섭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전혀 간섭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아울러 중국의 대외전쟁에 있어, 속국의 파병을 요구하거나, 속국에서 직접 병사와 안부 그리고 기타 물자를 징발하기도 했음을 지적했다.[56]

박홍서는 임진왜란 같은 안보위기 상황을 제외하곤 조선의 내적 자율성이 보장됐다는 주장 등에 대하여, 방법론적으로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지적하면서, 전통시기 동아시아 국가간 안보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안보위기 상황 속에서도 그 특수성이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되고, 만약 논증하지 못한다면, 그 논리는 일상적, 의례적 관계만을 설명하는 제한된 범위의 논리일 뿐이라고 일축하였다.[57]

홍선이는 조공책봉관계를 조선의 '주체적인 입장에서의 실리적인' 선택의 결과로 보는 시각에 대하여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멀다고 지적하면서, 병자호란으로 패전국의 위치에서 청과의 관계를 맺은 조선이 바친 조공 중 세폐는 청이 강제한 것으로, 총액규모도 상당하여 호조 재정 규모를 초과하는 수준에다가, 방물과 달리 황제의 하사품이 지급되지 않았다는 '비정상성'을 규명하였다.[58]

후마 스스무는 국제질서 속에서 피책봉 국가가 그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한, 종주국과의 역학관계에 따라 강력한 압박을 받을 수 있다고 보았다. '예'를 보다 이념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학자들이 약소국이 취해야 할 중국에 대한 '사대의 예'에서, '사대'란 서구적 생존경쟁 논리인 '종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그는 '예'와 불가분적 관계의 '문죄'에 주목한다. 명청 양조는 조선에게 예로부터 일탈한 것인지 조선 쪽에서 '염치를 아는' 마음으로 스스로 깨닫지 않으면 안 되도록 하는 한편, 그 여부는 자신들이 자의적으로 판단했다. 이렇게 조선과의 문제들을 '예'와 관련된 문제로 둔갑하고, '문죄' 대상으로 치환했다. 즉, 책봉을 비롯한 의례들은 종주국이 피책봉 국가가 예가 엄수하는지 안하는지를 점검하고 혹시 예의 세계에서 일탈했다고 판단되면 다시금 예의 세계로도 돌리는 방식으로 그 나라를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결국 통설에서는 피책봉 국가가 내정에 있어서 자주(自主)가 허용되었다고 하지만, 그러나 왕위계승 등은 본래 내정임에도 불구하고 종주국에서 책봉을 받아야만 정식 국왕이 되는 것인 만큼 이와 같이 강한 간섭을 피할 수 없었다. 그렇게 명청 양조는 북경 지근거리의 조선에 대한 군사적 통제를 어느 국가보다 강화할 수 있었으며, 조선에서 스스로 예의 내면화가 급속히 진전됨에 따라 중국의 대동아시아 외교에서 대조선 외교는 '예'에 의한 통제를 강요하여 가장 성공한 사례였다.[59]

정동훈은 원명청과의 관계를 의례적, 상호 이익, 호혜적임을 시사하는 천샹성의 시각에 대하여, 15세기 영락연간 사이에 명 사신 94%가 환관이며, 이들은 무리한 요구로 조선 정부와 백성들을 괴롭혔음에도 명 측 기록에서 사신들의 무례한 행동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였고, 원명청이 한반도에 보낸 하사품이 조공의 가치와 비슷한 조건으로 거래됐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고려는 몽골과의 관계 초기부터 1280년대까지 막대한 연간 공물(세공)을 보냈고 이후에는 의례적인 선물을 보냈으나, 원이 이에 수반하는 공물을 고려에게 지속적으로 보냈다는 것은 근거가 없으며, 이는 조선과 명의 관계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청, 조선 관계에 대해서도 그 관계는 조선의 핵심에 충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연간 조공(세폐)를 바치게 하여 조공관계로 조선이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고 비판하였다.[60]

4.3. 보편성에 대하여

진공국(Tributary States), 그리고 서로 봉건적인 질서를 맺고 있는 국가들은 그들의 주권(Sovereignty)이 이 관계에 영향을 받지 않는 한 자주국(sovereign)으로 인식된다. 그러므로 유럽의 주요 해양 세력이 바르바리 국가들(Barbary States)에게 이전에 지불했던 조공은, 전자의 주권(sovereignty)과 독립(independence)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는 것이 명백하다. 그래서 나폴리왕 11세기부터 교황청의 명목상 속국(vassal)이었으나, 1818년에 폐지된 이 봉건적 종속(feudal dependence)은 나폴리 왕의 주권(sovereignty)을 손상시키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오스만 조정과 바르바리 국가들 사이의 정치적 관계는 매우 이례적인 성격이었다. 그들이 왕왕 술탄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비정기적인 조공을 바치는 것과 함께 유럽과 미국의 기독교 강대국들에 의해 전쟁과 평화의 국제관계가 유지되는 독립국가로 인식되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Henry Wheaton(1836), 《Elements of International Law》, Sixth Edition by William Beach Lawrence, Boston: Little Brown and Company, Advertisement to the first Edition, Part First Chapter Ⅱ §14, Tributary and vassal States, pp. 51~55.

1930년대 장팅푸는 1882년 이후 청군의 주둔과 상무위원의 파견 그리고 조선해관 및 전신의 장악이 종번관계에 따른 정책이 아니며, 이후 서구 열강과 일본이 조선에 대한 청조의 독점적 위상을 인정하면서 청일전쟁 이전까지 청조의 종주권이 사실상 통치권으로 변모했다고 보았다. 번속(vassal state)의 내정에 문제가 야기되거나 외침이 있는 경우 종주국이 보호의 의무를 지지만, 그 외에는 모두 조선에 맡겨졌다고 보기 때문이다.[61] 한편 한국 학계에서는 만국공법 상의 조공국(tributary state)과 속국을 구분, 조공책봉관계를 국제적 상호승인을 위한 의례적 성격으로 규정했다. 따라서 '속국(조공국)'은 책봉국의 정치적 간섭 없이 내정과 외교 등 제반 국사를 자주적으로 처리하였다는 점을 근거로 그것이 서양의 '피보호국(protectorate)' 또는 '반주권국(semi-sovereign state)'과는 근본적 차이가 있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1880년대 이후 청의 대조선 정책을 조선을 속국(vassal state, dependent state)로 전유하려는 근대적 속국 내지는 식민화 정책으로 이해하였으나,[62] 박상수는 전통시대 '성교자유'가 실질과는 거리가 먼 정치적 레토릭에 불과하고, 청이 조선을 속국(속방)으로 규정하고자 한 의도가 어찌되었건, 만국공법에서는 조공국(tributary state) 또는 속국(vassal state)은 개개별의 차이는 있어도 대부분 고유의 주권이 인정되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63]

계승범에 따르면, 서구 학계는 국제무대에서 조선이 누린 정치적 권한을 '자치(autonomy)'로 이해한다고 한다. '자치'에는 '독립(independence)'의 의미가 없지는 않지만 대개는 '자치'의 의미로 쓰인다고 한다. 아울러 그것은 《만국공법》에서 사용한 '자주(sovereign)'의 의미와도 크게 다르다. 조선은 명·청의 외국이되 스스로 사대함으로써 간섭받지 않는 자치 국가라는 뜻에서, 조선을 명·청조의 '봉신국(vassal)' 또는 조공국(tributary)'이라 표현한다고 한다.[64] # 계승범은 명청의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이 통시로 일어났음을 상기하면서, 만국공법 유포의 계기로 속국의 의미가 크게 변하기 전까지 속국은 외국이었으며, 그 속국이 내정을 '자주(自主)'한다는 말은 현대어로 대응하자면 '자치(自治)'가 최적이라고 한다. 그에 따르면 현대 인식 속에서는 속국과 자주를 대립하는 개념이지만, 19세기 중반까지는 속국이 곧 자주국이고, 이때문에 조선인들이 근대 번역어 '독립국'을 자주국으로 이해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해석해야만 일본이 강화도 조약에서 조선을 만국공법상의 '자주국(sovereign state)'으로 선언하여 청의 간섭을 방지하고자 한 이유를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65]

유바다는 선행 연구에서 만국공법에 대한 검토가 사실상 결여되어 있음을 꼬집으면서, 휘튼의 《국제법의 원리》(1836)은 제목에서부터 진공국(Tributary States)과 번속(Vassal States)을 등가관계임을 논증했다. 그는 만국공법이 진공국이나 번속이라도 자주와 자립권을 폭넓게 인정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첫문장인 "진공국과 번속은 봉건적 관계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 한(so far as their sovereignty is not affected by this relation) 자주국으로 인식된다"는 내용을 들어 반주지국(Semi-sovereign State)이 될 여지도 충분함을 지적하였다. 그는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국제법 체계에서도 피보호국, 진공국, 봉신국 등의 반주권국가들이 주권 국가 간의 체계에서 일부로 잔존하고 있음을 들어 전근대와 근대를 인위적, 단절적으로 보는 선행 연구의 흐름을 근대중심주의적이라고 비판하였다. 그에 따르면 결국 조공책봉관계와 같은 수직적 질서는 국제법 체계에서도 존재할 수 있었는데, 조선은 조선국왕이 황제로부터 책봉을 받아야만 그 지위가 유지되고, 조공 및 봉삭을 의무적으로 행해야 했다. 그는 책봉과 조공이 결여된 조선국왕이라는 존재는 중화질서에서 "상상하기 어려웠다"고 하면서 법제적, 예제적으로 명시된 양자의 관계는 국제법 체계의 종주국(Suzerain)-봉신(Vassal)관계와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고 해석했다.[66]

청대에 이르러 실질적인 '조공책봉관계'를 유지한 나라는 사실상 조선 뿐이었으며, 잘봐줘도 '조공-책봉 패러다임'에는 청, 조선, 류큐, 베트남, 사얌만이 있을 뿐이었다. 명청대 조선의 속국 지위는 조선을 제외하면 류큐, 베트남, 사얌에서만 어느정도 구현되었을 뿐이며, 이마저도 허례적인 측면이 상대적으로 강했다. 그 점에서 조선의 특수한 위상을 동아시아의 보편적 외교관계로 둔갑시키는 해석은 역사 왜곡에 가깝다고 판단되고, 자칫하면 유라시아의 교역 방식의 일부인 조공 무역의 성격을 크게 왜곡할 우려가 있다. #

4.4. 명칭에 대하여

천웨이팡은 '종번관계'라는 용어에 대해, 서방 식민체제의 관념을 억지로 중국과 주변국가 간의 전통관계에 소급하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중국에는 식민체제 하의 ‘종주권(Suzerainty)’이 없었고, '번속'은 실제로 독립주권국가였으며, 서양의 봉신국(Vassal state)과도 다르다고 하였다. 이러한 관계를 '동방식 봉공체제(東方式封貢體系)'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67]

존 윌스(John E. Wills)와 제임스 헤비아(J. Hevia) 등은 '조공체제'를 과장할 것이 아니라, 중국과 외국이 만나는 시점에서 이루어지는 의례 연구에 한정하고 주목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윌스는 '조공체제'라는 것은 명청대 중국의 대외관계의 일련의 제도 혹은 관례로 보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헤비아는 그의 연구를 대거 인용하면서 '조공체제'를 중국의 대외관계에 대한 총체적 규정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고, 단지 명청대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에서 관철된 중국의 관료제적 규정, 특히 빈례에서의 제도화, 관료화된 형식을 가리키는 것으로 한정해야한다고 역설했다.[68]

천샹성(陳尙勝)은 중국 봉건 왕조에서 조공하는 국가를 '번방(藩邦)', '번속(藩屬)', '속국(屬國)' 등으로 지칭하고, 이들이 중국을 천조(天朝) 내지 상국(上國)으로 부른 적은 있어도, 종주국으로 부른 적은 없었다는 사실을 거론하면서, 종주국은 서방국가가 식민지와 번속을 지칭하는 명칭이기 때문에 '종번관계'로 전통시대 중국의 대외관계를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69]

피터 퍼듀(Peter C. Perdue)는 페어뱅크가 제시한 '조공체제'라는 영문 역어의 한계를 지적한다. 그는 청대 조공의 관행에서 외국인과 토착민 모두 각각의 상황과 의례절차에 따라 청에 '공(貢)'을 납부했음을 들어, '야만'이나 '외국'의 의미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페어뱅크가 모든 '공(貢)'의 의미를 일반화해서 파악했을 뿐반 아니라, 대외관계에서만 나타나는 것으로 잘못 해석했다고 평가했다.[70]

쑹녠선은 서양 학계에서의 '조공(tributary)'이라는 용어는 로마제국에서 부의 교환을 의미하던 것에서 유래했으므로, 서주 시대에서 이래 대외관계로 확대된 역사성과 더불어 사회적, 철학적, 가부장적, 우주론적 계보를 잘 설명하는 '종번관계'가 더 적절하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조공'이라는 용어 자체가 경제적 측면을 부각하는 용어로, 위계성을 띄는 중국의 국제질서를 표현하는 것은 무리다. 그는 국제법을 외교관계의 보편적 규범으로 받아들이는 현대 학자들이 '종번' 구조를 '비정상적'인 것으로 비판하는 경향에 대해, 그것을 중국이 주변 국가들에 강요한 강압적 권력관계로 말하는 것을 "평가절하"한다고 지적하거나, 제임스 헤비아(James Hevia)의 말을 빌려 "근대의 국제관계 이론이야말로 특정한 역사적 맥락에 뿌리를 둔 패권주의적 담론이다."이라고 비판한다. 쑹녠선은 근대적 국제질서 이론이 '동양'의 과거와 '보편적 근대'를 분절해서 보는 인위적인 경계성을 설정해서 종번관계의 복합성과 유연성을 무시한다고 비판하며, 여타 국제질서와 마찬가지로 종번관계 역시 단순히 강제한 것이 아니라 상호관계 속에서 형성됐다고 본다.[71]

왕위안총(王元崇)은 중국과 주변 국가 사이의 관계를 서양의 '종주-속국 관계(suzerain-vassal relations)'와 다른 '종번체계(宗藩體系)'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종번관계'는 서주에서 유래한 가부장적이고 유사혈연적인 체제에서 발전해온 체제다. 군사력이나 지정학적 중요성, 그리고 종주권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유교 사상을 바탕으로 한 '상호합의(bilateral arrangement)'를 통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양자는 보편이념으로서 '종번주의'와 천하질서를 공유하고, 불평등한 불평등성, 위계성을 자연스럽게 인식한다. 그는 청말의 대조선 정책이 제국주의적 간섭이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의 문제에 간여하고 훈계하는 것과 같은 성격을 가지는 전통적인 '종번주의'하에서의 개입이었다고 해석한다. 그는 종번관계의 가족성과 가부장성을 논증하기 위해 왕세손 이산의 국왕 책봉 당시 건륭제가 세손의 책봉 근거를 찾고자 하자, 예부가 홍치연간 숙공왕(肅恭王) 주공종(朱貢錝)의 손자를 세손으로 책봉한 사례를 들어, "외번과 종번의 일은 서로 같다(外藩之與宗藩, 事屬相同)"는 명분을 제안했다는 사례를 꼽고 있다.[72]

손성욱은 쑹녠선 등의 '종번주의'에 대해 서양의 학술장에서기존의 전근대 중국의 국제질서를 다룬 이론들을 극복 하기 위한 시도로 의의가 크다고 긍정하지만, 동시에 '종번관계' 역시 비역사적이라고 본다. 그에 따르면 1930년대 '종번'이라는 용어를 본격적으로 사용한 것은 외부의 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하지 못한 청조와, 서구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비판이었다. 즉, 역사적 용어라기보다는 당시의 현실의식이 상당히 투영된 개념이었던 것이다. 그는 '종번'이 전근대에 사용되던 역사성을 지닌 용어는 맞지만, 시대에 따라 그 의미가 변해왔으며, 19세기 이후에는 중국적 질서와 서구 질서의 충돌 속에서 '근대적 ‘종주권' 개념에 의해 오염되었다. 따라서 '종번'이라는 틀을 통해 전근대 중국의 대외관계 및 질서를 설명하는 것이 얼마나 부적합한지 드러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73]

김선민은 실제로 청대에 조공 혹은 진공(進貢)은 무역과 대외관계에서 널리 활용되었다. 가령 조선국왕이 황제의 책봉을 전제로 조공을 한 반면, 흑룡강 일대의 수렵인들이 하사품 내지 교역을 전제로 공납한 초피는 같은 '공(貢)'이었다.하지만 그 성격은 전혀 달랐고, 따라서 청과 조선의 비대칭적인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조공관계' 보다는 '종번관계'가 더 정확한 용어라고 보았다.[74]

리다룽(李大龍)은 중국과 '반독립(半獨立)'적인 부속상태(附屬狀態)의 정권들간 관계에 대해 정치적인 '천하'의 형성과 운영을 결정하고 촉진하는 것은 그 정치적 속성에 따른 것이라고 보면서, '조공체계', '조공체제', '조공관계', '조공무역체제'라는 용어는 본질을 파악할 수 없는 부정확한 용어라고, '종번'은 서한 시대부터 쓰인 용어이지만 송대부터 청대까지 종번은 황실 구성원이나 번왕을 지칭하는 용어였을 뿐 주변 국가와의 관계에서 사용된 적은 없었다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부속관계는 '번속체계(藩屬體系)'나 '번속체제(藩屬體制)'라고 부르는 것이 보다 적절하다.[75]

4.5. 기타

정동훈은 명은 고려・조선에 3년 1공을 요구하고, 고려와 조선은 1년 3공을 요구하였다는 한중관계사를 설명하는 개설적인 통설을 재검토함으로써, 홍무 연간에는 3년 1행을 보내게 되어 있었는데, 건문 연간에 1년 3행으로 전환되었다는 서술은 오류라는 결론을 도출했다. 그에 따르면 홍무제는 간혹 3년 1사 요구로 고려·조선을 압박했으나, 양국 관계가 극도로 경색되었던 한동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기간 1년 3사가 유지되었다. 이와 별개로 홍무제가 요구했던 ‘3년 1공’은 고려에 요구했던 막대한 양의 '세공(歲貢)'을 삭감하는 대신 3년 1공으로, 말 50필을 바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우연한 이유로 4년에 한 번으로 바뀌었고, 그 관행 역시 17세기초까지 유지되었다고 한다. 즉 3년 1공(실제로는 4년 1공)과 1년 3사는 대립되는 관계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개념의 행위로서 약 2세기 반 동안 거의 중단 없이 병행되었다는 점을 논증했다.[76]

하마시타 타케시(浜下武志)는 1980년대 이후 '조공무역체제'라는 틀로 '아시아교역권'을 주창했다. 그는 기존의 조공체제'를 실증적으로 분석하고자 하였는데, 현대 국가 중심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하마시타는 종주권 주권을 조공체제를 통해 살펴본다. 그에 따르면 '종주-번속(藩屬) 관계'는 하나의 통치이념의 형태로, 이들의 근대주권도 여기서 기원한다. 그에 따르면 종주권, 조공, 비조직 네트워크 3가지로 구성된 동아시아-동남아시아의 광역지역질서 안에서 종주권은 조공체제를 형성하고, 그 체제 하에서는 종주-번속의 관계로서 표현된다고 보았으며, 이 종주-번속의 관계는 시대에 따라 양자간의 입장을 바꾸어 자신을 주장하여 왔다. 게다가 조공체제는 조공과 책봉이라는 양자의 관계만이 아니라 구성원 상호간의 대등한 정치권이자, 동시에 교역권(=경제권=은유통권)이었다. 이런 '비조직 네트워크'를 포함하면서 큰 틀에서는 완만한 하나의 통일적인 통치질서를 갖고 있었다고 하였다. 그에게 조공체제로 유지된 중심-주변부의 질서는 인도 아대륙 및 그 주변에 만들어진 연합체적 지역질서 그리고 종교적 이념으로 체현된 이슬람 지역질서와 유사한 것이다.[77]


[1] 즉, 조공을 받는 황제가 꼭 한족 왕조의 황제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고구려와 선비족 왕조인 북위간 조공외교가 그렇다. [2] 임기환(2019), "고대의 한.중관계와 책봉.조공 -4~7세기를 중심으로 -", 《내일을 여는 한.중 관계사》 p. 21. [3] 손성욱(2021), "‘우리’의 동아시아사 깊이 읽기 - 『동아시아사 입문』 (동북아역사재단, 2020)", 《동북아역사논총》 73. p. 186. [4] 후마 스스무(2008), "1609년 일본의 류큐 합병 이후 중국, 조선의 對류큐 외교 ― 동아시아4국의 책봉, 통신 그리고 두절 ―", 《이화사학연구》, pp. 1~2; 이영옥(2009), "청대 번속제도와 그 성격「중국고대번속제도적완비」의 비판적 검토", 《중국 번속이론과 허상》, p. 199; 김선민(2019), "1812년 洪景來의 亂으로 본 朝淸관계", 《中國學報》 70, p. 236. [5] 진한 노란색은 중국 본토다. [6] 베스트팔렌 체제 [7] 주군과 신하, 형과 아우, 장인과 사위, 스승과 제자 등 [8] 황제국을 못하면 유럽처럼 그저 평범한 중립국이 되면 되는데 왜 굳이 신하국이 되었는지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는 외교관계를 맺을 때면 반드시 대외적으로 위계질서적인 방식으로 관계를 맺었다. 천자국과 관계를 맺을 땐 신하국의 지위를 가지며 관계를 맺었는데. 황제는 세상에서 단 하나 뿐이고, 황제는 온 세상의 왕이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에서 '왕국'이라는 지위는 황제의 신하국을 의미했다. 신하가 되길 거부하는 경우는 스스로를 천자임을 자처하는 경우에만 해당되었고, 만약 주변에 대외적으로 천자국임을 자처하는 국가가 있다면, 두 강국은 전쟁을 통해 문제를 해결했다. [9] 일례로 조선 중국과 조공책봉을 맺어 신하국으로서 예를 갖추던 나라였지만, 동시에 조선의 조정은 여진 일본을 신하 취급하며 그들에게서 조공을 받기도 하였다. 반대로 일본은 조선을 자신들의 신하라고 여겼으며 조선이 보낸 조선통신사를 조공사절단이라고 선전하기도 했다. 이는 동아시아의 외교체제가 절대적인 위계질서 세계였음을 보여준다. [10] 중국이라고 항상 동아시아에서 위계서열 1등을 유지했던 것도 아니다. 북방민족들은 자주 중국의 우위를 부정했고, 중국을 향하여 조공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중국은 흉노, 돌궐, 거란, 여진, 몽골, 만주 등 북방민족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며 조공을 바친 전력이 적지 않다. 당장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관계를 살펴보아도 삼국은 서로서로를 신하국으로 여겼었고, 누가 강국인지 시기에 따라 지속적으로 위계서열이 바뀌었다. [11] 몇몇 현대 중국인들은 옛 중국이 수많은 속국들을 거느렸으며, 이들 나라에 대한 종주권을 가졌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중국이 타국과 맺었던 모든 외교관계를 종속관계 였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중국은 자국과 외교관계를 맺었던 모든 나라들을 자신들의 속국이었다고 주장하는 셈. 천자국은 자신들과 맺어지는 모든 외교관계를 황제-가신 관계로 보았다. [12] 그러나 입장이 역전되어 전통적으로 상국이었던 나라가 전통적으로 신하국이었던 나라의 신하가 되어야 했을 때는 엄청난 수치심을 느꼈는데. 예를 들어 조선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를 섬겨야 하는 것에 수치심을 느꼈는데. 그러한 연유는 한민족은 정말 오래전부터 숙신계 민족(여진족)을 자신들의 가신으로 여겨왔는데 그 입장이 바뀌게 되었으니 그것이 분했던 것이다. 또 다른 예시로 중국이 북방민족의 신하를 자처한 경우가 있는데. 그때도 마찬가지로 중국은 엄청난 수치심을 느꼈다. 그러나 외교에서는 강국을 섬기는 것이 동아시아의 외교방식이었다. [13] 지금으로서는 이해 할 수 없지만. 동아시아에서는 자국 스스로가 신하를 자처하고 타국의 군주를 "주군"이라고 칭하는 외교문서가 많았다. [14] 일국(一國)의 왕이 스스로를 진심으로 자신이 누군가의 신하라고 여긴 것이 아니라 그저 외교하는 방식이 그리하였다. [15] 자국을 천자국이라고 여기지 않은 비슷한 국력의 나라들끼리는 양국 간의 친목을 다지기 위해 상대국을 상전이라 높여주고 자국을 신하라고 스스로를 낮추는 경우도 있었다. [16] 주군(황제)과 신하(왕), 형과 아우, 장인과 사위, 스승과 제자 등 [17] 조공책봉을 맺게 되면 두가지 경우로 나뉘게 되는데. 지리적으로 멀리떨어져 있어서 교류가 활발하지 않으면 의례적 성격을 보였고, 거리가 가까워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질 때는 실질적인 구속관계를 보이기도 하였다. 일례로 천자국이 신하국에게 지나친 조공을 요구하여 신하국에 정치적 보복을 가하는 경우를 후자의 예시로 뽑을 수 있다. [18] 때로는 조공책봉이 (오늘날로 치면) '주권인정'으로 여겨지기도 하였는데 이성계 쿠데타 이후 조선을 건국했는데 왕족의 혈통이 아니어서 그 당위성이 부족했다. 그러나 명나라의 조공책봉을 받음으로서 그 당위성을 확보했다. [19] 동아시아에서는 민간무역이 허용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리고 만일 민간무역을 허용한다고 해도 조공을 안바치면 천자국은 그 나라와의 무역을 불허(不許)하였다. 조공은 국가에서 허락하는 거의 유일한 무역의 방법이었는데. 가신국에서 천자국에게 조공을 바치면 천자국은 체면유지를 위해 그보다 더 높은 가치의 상품들을 하사하는 형식인지라. 조공을 많이 하는 것은 쉽게 주어지지 않는 특혜였다. 외왕내제 나라들의 경우 국력이 약하면 약할 수록 조공의 기회는 적었다. [20] 일본의 경우 바다 너머에 떨어져 있어서 굳이 조공책봉관계에 연연하지 않아도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데다가, 유교가 관학이면서 동시에 큰 힘을 쓰지 못하는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만주족들이 세운 청나라를 천자국으로 인정할 수 없다며 모든 외교관계를 완강히 거부했다. 물론 이것은 공적인 차원에서의 이야기이고 사적으로는 교류가 있었다. 청에서 천계령이 해제된 이후 많은 청 상인들이 나가사키에서 교역하며 일본의 국부를 유출하자 1715년 에도 막부에서 신패를 발급받은 상인들만 교역하게 하면서 청 상인들의 국부 유출을 막으려 한 적도 있다. [21]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병자호란 이후 조선 청나라의 관계인데. 천자는 천하에 단 하나 만 있을 수 밖에 없는지라 조선 명나라를 천자국으로 여기고, 청나라는 천자국으로 여기지 않았는데. 그러한 조선이 아니꼬왔던 청나라는 조선과의 전쟁을 일으키게 되고, 조선은 전쟁에서 청나라에게 패전하게 되면서 조선은 명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청나라의 신하가 되게된다. [22] 예시에는 조선-여진 관계, 조선-일본 관계, 조선-류큐 관계 등이 있다 [23] 그리고 동아시아에서는 누가 더 강국인지에 따라 외교관계의 성격과 위계서열이 바뀌었다. [24] 청나라가 맺는 모든 외교관계는 군신관계였다. 아편전쟁 이전의 유럽도 청나라와 무역할 때는 예외가 아니었다. 이는 청나라가 스스로를 천자국으로 여긴것도 한몫하며, 외국은 청나라와 외교를 하기 위해서는 청나라와 위계질서적인 방식으로 관계를 맺었어야 했다. 당시 동아시아의 외교상식 자체가 그리하였다. 그러다가 19세기부터 청나라는 조선을 외국으로 보다가 조선을 속국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25] 정명향도 [26] 임진왜란 이전(16세기 중반). 그 이후로는 더 이상 일본을 신하국으로 보지 않았다. 그러나 "옛 속국"이라는 인식 정도는 남아있었다. [27] 이재석(2020), "고대 동아시아의 다원적 국제관계와 <盟約> -<조공-맹약>체제의 가능성-", 《韓國史學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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