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사령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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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e400>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제3·5대 사령관 쩐반짜 陣文茶 (진문차) | Trần Văn Tr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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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399ff> 출생 | 1919년 9월 15일 | ||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틴롱 (現 베트남 꽝응아이 성 꽝응아이 틴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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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96년 4월 20일 (향년 76세) | ||
베트남 호찌민시 | |||
재임기간 | 제3대 사령관 | ||
1963년 ~ 1967년 | |||
제5대 사령관 | |||
1973년 ~ 1975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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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399ff><colcolor=#ffe400> 복무 | 베트남 인민군 | |
1946년 ~ 1982년 | |||
최종 계급 | 상장 (베트남 인민군) | ||
주요 참전 |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베트남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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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트남의 독립운동가이자 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콩의 사령관이다. 1975년 사이공을 함락시켜 유명해졌다.2. 생애
2.1. 프랑스와의 대결
남베트남 출신으로, 1930년대 애국적인 반불 사상을 가지고 베트남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이어 호치민이 이끝 베트남독립동맹회 (베트민)에 가입한 후 프랑스군과 싸웠다.2.2. 미군과의 대결
프랑스군이 물러나고 미국의 개입이 본격화되자, 북베트남 정부의 지령을 받아 남베트남에 뛰어들어 지하에서 베트콩을 지휘하였다. 북베트남에서 파견되었지만, 현지 사정과 동떨어진 지령을 내리는 북베트남 중앙과 마찰을 자주 빚었다고 한다. 어쨌든 그는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성공적으로 베트콩을 지휘하였고, 구정 공세 에서 베트콩이 궤멸적 타격을 입을 때도 살아남아 베트콩을 지휘하여 남베트남 및 미군을 골탁먹였다.
2.3. 남베트남 항복
1973년 휴전협정이 조인되자 북베트남으로 돌아가 머물다가, 다시 남북베트남의 교전이 재개되자 남베트남으로 파견되었고, 최후의 공세를 지휘하여 사이공을 함락시키고 남베트남 최후의 총통 즈엉반민의 항복을 받았다. 이후 공산베트남의 국방부 차장(1978-1982)을 지냈다.
파일:external/2.bp.blogspot.com/The%2BFall%2Bof%2BSaigon%2C%2B1975%2B(29).jpg
사이공 총통궁을 함락시킨 후 외신 기자회견을 하는 쩐반짜 상장 (중앙의 안경쓴 군인) .1975년 4월 30일
2.4. 통일후: 토사구팽
하지만 1960년대부터 북베트남 중앙정부와 마찰을 빚던 그는 통일후에도 남베트남 출신 베트콩 참전용사들이 대한 대접이 미흡하다며 계속 항의를 했고, 1982년 독자적으로 베트콩의 활약상을 회고한 회고록 <30년 전쟁의 종말(Kết thúc cuộc chiến tranh 30 năm)>을 출판했다. 이 회고록에서 그는 남베트남과 미국을 패퇴시킨 것은 북베트남군이 아니라 막대한 희생을 치르면서도 불굴의 애국적 열정으로 미군을 물고 늘어진 베트콩 전사의 역할이 가장 컸으며, 이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베트남 공산당을 비판했다. 여기에 구정 공세에서 북베트남이 제때 지원하지 않아 남베트남 출신이 주축이 된 베트콩이 큰 피해를 입었다고 비난했다. 이는 정권을 잡고 있떤 북베트남 출신 정치가들의 어그로를 끌었고, 바로 정권에서 쫓겨난데다가, 회고록은 회수되어 모조리 소각되었다. 그렇지만 워낙 전설적인 활약을 펼쳤기 때문에 숙청되어 수용소에 간게 아니라 그저 실권에서 배제되고 상징적인 지위만을 맡았다. 그리하여 얼마간 호치민시의 고급 주택가에서 가택연금에 처해졌다고 한다.
이 양반은 비교적 안전한 하노이에서 군을 지휘하던 국방장관겸 베트남 인민군 총사령 보응우옌잡 대장이나 총참모장 반띠엔중 대장과는 달리 남베트남 현지에 파견되어 미군이나 남베트남군 사이에서 숱하게 죽을 고비를 넘기며 직접 싸워왔기 때문에 북베트남의 승리에 있어서는 특등공신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당의 방침과 어긋나는 회고록을 써서 당의 권위를 실추시켰다는 죄목으로 상장과 국방부 차장에서 승진을 그치고 한동안 감시를 받으며 상징적인 지위만을 맡았다. 베트남 전쟁 종전시에는 군서열 3-4위였으나, 그와 서열이 비슷했던 쭈후이먼이 1980년대 대장까지 승진했고, 그보다 서열이 낮았던 레둑안도 대장에 오른 것뿐만 아니라 1992년 정무직으로 최고지위인 주석(대통령으로도 번역됨) 까지 올랐지만, 쩐반짜는 상장에 머무른데다가 회고록 출판 이후에는 죽을때까지 야인으로 지냈으니 씁쓸한 토사구팽이 아닐 수 없다.
만년의 쩐반짜(왼쪽). 옆은 베트남 인민군 총사령이었던 보응우옌잡 대장.
서방소스의 자료에는 죽을때까지 가택연금에 처해졌다고 기록되어 있고, 일부 반공 자료들이 이를 과장해서 베트남 전쟁후 베트콩 세력이 숙청되었다는 잘못된 사실이 한국 밀덕계에 알려져 있으나, 만년에는 복권된 모양이다. 위의 정복차림의 프로필 사진도 승전기념행사에 촬영된 것이며, 바로 위의 사진과 같이 과거 상관이었던 보응우옌잡과 사복차림으로 만난 사진도 있다.
금서가 되었던 회고록 30년전쟁의 종말은 2005년 해금되어 현재 베트남에선 쉽게 구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