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는 언니와 함께 강둑에 앉아 있었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자니 점차 몹시 지루해졌죠. 언니가 읽는 책을 한두 번 흘깃 바라보았는데 거기엔 그림도 없고 대화도 없었어요. "그림도 없고 대화도 없으면 책이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는거지?" 라고 앨리스는 생각했지요.』
"그렇지. 책은 역시 만화책이지."
화자는 지크하트가 정해진 대사 이외의 발언을 하는게 못마땅한지 눈을 흘기곤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차라리 데이지 꽃다발이나 만드는 게 낫곘다고 생각한 앨리스가 데이지 꽃을 뽑기 시작한 그 순간이었어요. 그때, 갑자기 분홍 빛 눈의 하얀 토끼 한 마리가 가까이 뛰어오는게 아니겠어요?』
『딱히 특별할 것이라고는 없었어요. 심지어 토끼가 하는 혼잣말을 들었을 때도 말이죠. 앨리스는 나중에야 이 시점에서 놀랐어야 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때는 너무도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 보였어요. 하지만 토끼가 조끼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 보고 서두르자, 그제서야 이전에는 조끼를 걸치거나 조끼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는 토끼를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 스쳐 지나갔고, 호기심에 불타올라서 토끼를 쫓아 들판을 가로질러 달리기 시작했어요.』
"...귀찮아."
『달리기 시작했어요. 시작했다니까요?』
화자의 언성이 높아졌지만 앨리스, 그러니까 지크하트는 뭉그적댈 뿐이었다.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린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거 그거지? 린 네 꿈."
린의 자장가는 주술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대단히 효과적이였다. 잠들 수 없을 만큼 피곤해서 끙끙 거리고 있다가도 린의 자장가를 들으면 편히 잠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날 아침이라면 어김없이 털고 일어날 수 있을 정도로 상쾌해지기 때문에 많은 그랜드체이스 대원들은 린의 자장가로 부터 도움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린이 매실주에 취한 날에는 아무도 그녀에게 자장가를 부탁하지 않았다. 취기가 오른 린의 자장가를 들으면 그녀의 꿈에 끌려가 버렸기 때문이다. 린의 말도 안되는 꿈 속에서 헤매다 보면 심신이 모두 지쳐버리게 되니 잠을 안 잔 것만 못하게 되었다.
'차라리 밤을 새울지언정 취한 린의 곁에서 잠을 청하지 마라' 라는 것은 그랜드체이스 대원들이 가슴 깊이 새기고 있는 격언이였다.
"귀찮은 건 딱 질색이란 말이야. 난 그냥 아침이 올 때까지 여기 누워서 기다리련다.
"......"
언니 역의 마리는 무언으로 긍정했다.
말하자면 이곳은 린이 꾸는 꿈의 도입부 같은 것이다. 여기서 더 호응하지만 않으면 괴상한 꿈 속 이야기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다. 반대로 얘기하자면, 누군가 호응해 린 꿈속으로 본격적으로 빠져들면 좋든 싫든 꿈의 결말부를 향해 달려가야만 했다.
그렇기 때문에 린은 지크하트를 설득하려 노력하지 않았다. 이미 그녀의 꿈에 취한 토끼 라임이 충실히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앨리스는 운 좋게도 토끼가 울타리 바로 밑의 큰 토끼굴로 쏙 들어가는 걸 볼 수 있었어요.』
"야! 라임! 쓸데없는 얘기는 안들어도 되잖아!"
지크하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라임을 뜯어말리려 했다. 라임이 토끼굴로 굴러 떨어지는 것 보다 지크하트가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아 들어올리는 것이 더 빨랐다.
그러나 그보다 라임이 '시계'를 꺼내들고 시간을 확인하는 게 더 빨랐다.
"늦었어! 큰일이야, 늦었다구!"
"허리춤에 평범한 회중시계 있잖아? 왜 마치 무기처럼 손잡이가 달린 커다란 시계를 꺼내드는 거야?"
커다란 시계가 된 블레싱 해머로 땅바닥을 내리친 것은 그 직후였다.
쩌적.
땅이 갈라졌고 토끼와 앨리스, 라임과 지크하트는 기어코 토끼굴을 통해서 린의 꿈 속으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아야!"
『토끼굴은 갑자기 아래로 푹 꺼져버렸어요. 너무 갑작스러워 멈추어야겠다는 생각조차 할 시간이 없어서, 상황을 알아차렸을 때에는 이미 아주 깊은 우물속으로 떨어지고 있었답니다.』
약속 시간에 늦은 주제에 저 천하태평인 목소리는 틀림없이 지크하트의 것이었다. 이렇게 얘기하니 지크하트 가문의 사람들은 시간관념이 없다는 것처럼 들린다. 왜 그 옛날 여왕폐하께서는 에르크나드 지크하트에게 그냥 지크하트란 이름을 쓸 수 있게 해주신걸까? 엘리시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문을 열어주었다. 역시나 방문자는 지크하트였다.
"여!" "기껏 새옷을 보냈더니.. 옷 상태가 왜 이런거야?" "의복이라는게 뻣뻣하면 쓰나? 당연히 받은 그 순간부터 입고 다니면서 길들였지!"
옷은 자고로 편한 게 좋다. 그 말에는 엘리시스도 십분 공간하고 있었기에 이견이 없었다. 하지만 옷을 길들이는 것과 험하게 함부로 입는 것은 엄연히 달랐다. 세상에 누가 예복을 평상복처럼 입고 다닌 말인가? 게다가 지크하트가 평소에 하는 일을 생각하면 단순히 험하게 입은 정도가 아니다. 한복의 여기저기가 손상된 게 눈에 밟혔다.
눈총을 주는데도 지크하트는 끄떡 없었다. 되려 기고만장하게 콧대를 세우며 말했다.
"새해에 왜 새옷을 해입는 줄 알아? 집안 어르신이나 조상님께 새해에도 잘부탁한다고 새옷을 해입는 거란 말이지! 난 엘리시스에게 아주아주 높은 집안 어르신이잖아? 그러므로 내가 새옷을 차려 입을 필요는 없단 말이지." "어디 말이나 못하면.." "후훗, 잘 어울리는데? 이 할애비 보여주려고 맞춰 입은 옷이야?" "절대 아니거든? 늦었으니까 별 수 없지. 일단 서두르자." "서두르다니 어딜? 이제 막 왔는데? 오늘 붉은 기사단의 신년행사날이 아니었어?"
지크하트는 갸웃거리며 앞장서는 엘리시스 쫒아갔다. 엘리시스는 그런 지크하트가 어이가 없다는 듯 돌아보았다.
"붉은 기사단 신년행사에 지크하트를 왜 초대하겠어? 이미 600년도 전에 탈퇴했잖아?" "아니 그건 그렇지만.. 그럼 지금 어디 가는 거야?" "어디긴.. 당연히 왕실에서 주최하는 신년행사지." "엑!"
평소 유들유들하기 짝이 없는 지크하트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하니 여왕폐하를 뵈러가는 길이었단 말인가? 그제서야 지크하트는 엘리시스가 어지간한 일로는 새옷 같은 걸 챙겨주지 않았을거란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새삼 지크하트는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보았다. 불과 얼마전까지만해도 새옷이었던 헌옷이 그자리에 있었다.
"왜? 뒤늦게 후회가 돼?" "왕실로 향하는 중간에 몬스터의 습격을 받았다고 하면 안될까?" "미안하지만 이 일대에 몬스터는 붉은 기사단에서 깨끗하게 청소했어." "내 몫은 좀 남겨둘 수도 있는 거잖아!"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억지야? 옷차림은 넝마에 지각까지할 셈이야?" "으윽, 으으으."
지크하트는 머리를 감싸쥐며 생각이 짧았던 자신의 행동을 반성했다.
2019년 1월 29일 로난, 엘리시스, 라임과 함께 한복 아바타가 출시되었다. 지크하트는 필살기 일러스트는 호평을 받고 있지만 일반 일러스트는 호불호가 갈린다. 대표적으로 웬 한복에 벨트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느냐고 지적받는다.
[1]
이야기 순서는 지크하트 → 라임 → 린.
[2]
이야기에서 말하는 화자가
린이다.
[3]
재판매로 인한 가격인상
[4]
원래 중간중간에 인게임 화면이 나오나 수정한 버전이다. 전체 연출을 보고 싶다면
이쪽으로.
[5]
게임 파일 마이닝으로 구현한 이미지며 실제 게임 플레이시 보라색 배경이 반투명으로 나와 게임 UI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