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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9 17:01:01

중흥사(북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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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수도 개성에 있었던 사찰에 대한 내용은 중흥사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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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불교조계종 상징.svg 대한불교조계종
북한산 중흥사
北漢山 重興寺 | Jungheungsa
파일:삼각산중흥사.jpg
<colbgcolor=#ff8c00><colcolor=#ffffff> 설립일 고려 초기
소속국가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주지 스님 인산
위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서문길 393
외부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1. 개요2. 역사3.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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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산에 소재한 대한불교조계종 소속 사찰이다. 행정구역상 주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서문길 393이다.

고려 초기에 창건된 사찰로 조선 시대에는 수도 한양 방위를 위한 방어시설 북한산성 안의 승영사찰 13개소[1]의 수사(首寺) 즉 우두머리에 해당하는 곳이었으나 을축년 홍수로 북한산성 안의 행궁 및 여느 사찰들과 함께 소실되어 2005년에야 복원이 시작되었다.

2. 역사

고려 초기에 창건되었다는 것 말고 북한산 중흥사의 연기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자료는 많지 않다. 숙종 8년(1103년)에 주조한 중흥사 반자[2]가 북한산 중흥사와 관련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유물이다.

하지만 북한산성 안에서 가장 큰 규모인 동시에 북한산성을 대표한 사찰로 자리하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데, 고려 말기에 고승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가 중흥사에서 주석했고, 우왕 13년( 1387년)에 북한산에 증축한 산성의 이름을 중흥산성이라고 부른 것으로 보아도 중흥사가 북한산의 다른 사찰들 가운데서도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태고보우가 중흥사 주지로 온 것은 충혜왕 복위 2년( 1341년)의 일로, 충목왕 4년( 1348년)에도 태고보우는 이곳 중흥사에서 하안거를 보냈다. 특히 태고보우는 처음 중흥사에 온 해에 중흥사 동쪽에 태고암(太古庵)이라는 암자를 지었고[3], 이곳에서 5년을 머물렀다. 태고암에서 지은 '태고암가(太古庵歌)'라는 노래는 선불교의 종지를 담은 한문 가사로 평가받는다.

조선 초기에도 중흥사는 선종(禪宗)에 속한 사찰로 존재했다. 태조 7년( 1398년) 1월 24일 태조가 도당(都堂)에 명하여 중흥사와 억정사[4] 두 절에 대한 전조(田租)의 공수를 면제했고, 태종 11년( 1411년)에 중흥사에서 기우제를 올렸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조선 초기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이 과거에 응시했다 낙방하고 1453년에 여기 와서 공부하다가 2년 뒤에 세조의 찬탈 소식을 전해 듣고 격노해서 읽던 책을 불사르고 머리 깎고 출가했다는 사찰이 이곳 중흥사였다. [5]

중흥사는 성종 22년( 1491년)에 어느 노승의 실화로 그만 승당과 관음실, 종각이 모두 불타 버렸는데, 이듬해인 성종 23년( 1492년)부터 승려 지정(地井)이 중창 불사를 시작했다. 지정은 중창 불사를 모두 마무리하지 못하고 연산군 3년( 1497년) 개성 영통사의 승려 경호(冏皓)를 불러서 자신이 하던 중흥사 중창 불사 지휘를 맡겼으며, 또 이듬해에 속리산 법주사의 승려 성륜(性倫)이 지휘를 맡게 되었는데, 성륜은 미장과 목공에 능한 승려들을 모아 여름 동안에 일을 마쳤다. 이때의 불사 과정을 홍유손(洪裕孫)이 「중흥사중창기」로 남겼다. 이 글은 중흥사의 역사와 관련해 남아 전하는 유일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적병들이 이달 22일에 벽제를 멀리 나와 혜음령(惠陰嶺)까지 이르러 창릉(昌陵) ㆍ 경릉(敬陵)ㆍ 효릉(孝陵)의 주산을 불태우고 날이 저물어서야 성중으로 돌아갔습니다. 24일에도 나와 삼각산의 중흥사 등을 불태웠습니다. 그곳에 매복하던 군사인 창의중위장(倡義中衛將) 박유인(朴惟仁)과 추의중위장(秋義中衛將) 윤선정(尹先正) 및 의병장 이산휘(李山輝) 등은 중과부적으로 군사를 거두고 감히 맞붙어 싸울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적의 무리가 심히 많아서 들판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기 때문에 쉽사리 나가서 싸우기 어려웠으니, 그 형세가 그러하였습니다.
서애선생문집 제6권 서장(書狀) '군량(軍糧)과 백성의 양식을 논하는 서장'에서, 1593년 3월

중흥사가 임진왜란 때에 불탄 것은 류성룡의 편지에서 1593년 3월 22일로 그 날짜까지 적혀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 중흥사는 제2의 전성기라고도 불릴 수 있는 전기를 맞이했다. 중흥사가 위치한 삼각산에 숙종 37년(1710년) 북한산성이 세워진 것이다. 북한산성 안에는 성곽 방어를 위해 조직된 의승군(승병)이 머무는 승영사찰이 지정, 수축되었는데 이는 남한산성의 전례를 모방한 것으로, 서울을 넘어 전국 의승군의 총지휘관 및 총지휘본부라고 할 수 있는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이 중흥사에 소재했다. 그리고 그 초대 팔도도총섭이 숙종 38년( 1711년) 중흥사의 주지로 북한산성 수축 공사를 맡기도 했던 계파성능(桂坡性能)이다.

계파성능은 원래 학가산의 승려로 화엄사(華嚴寺)의 벽암각성(碧巖覺性)[6]의 문하에서 수행했고, 화엄사 각황전 중창불사도 이 사람의 작품이다. 숙종의 명으로 북한산성 수축을 맡아서 승려들을 이끌고 9개월만에 수축을 완료했다. 숙종 39년( 1712년) 4월 10일에 숙종이 북한산성 및 중흥사를 방문하기도 했다.[7]

이후 계파성능은 승대장(僧大將)이자 팔도도총섭으로써 후임 서봉(瑞鳳)에게 인계할 때까지 30년 가까이 중흥사에서 주석하면서 성능은 산성 안의 승군들을 총지휘하고 승영사찰의 창건 및 중창에 힘썼으며, 북한산성의 구조와 성문 및 각지의 승영사찰들에 대해 기록한 북한지(北漢誌, 1745년)를 남겼다. # 이 기록은 북한산성에 대해 연구하는 중요한 문헌 자료로 꼽힌다. 중흥사 경내에는 지금도 계파성능의 부도탑이 남아 있다. #

북한산성 승영사찰의 수사이자 전국 의승군의 총지휘본부로써 중흥사는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136칸의 대가람이 되었다. 또한 중흥사 동쪽의 예전 태고보우가 머무르던 동암은 거의 버려져 폐허가 되어 있던 것을 계파성능이 사찰로 중창해 태고사라고 부르게 되었다. 영조 29년( 1753년) 9월 3일 왕명으로 왕실에 있던 『능엄경』을 중흥사로 옮기도록 했다고 하며, 순조 28년( 1828년) 중창되었다. 김정희, 정약용 등 많은 문인들이 중흥사를 방문하여 시구를 남겨 놓기도 하였다.

중흥사는 조선 왕조의 몰락과 함께 쇠락의 길을 걸었다. 애초에 승영사찰이라는 시설이 종교적 수행도량보다는 산성 방위를 위한 하부 조직이라는 점에 더 치중되어 있었던 만큼 의승군 제도의 성쇠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갑오경장(1894년) 때에 의승군 제도가 폐지되면서 북한산성 경내의 승영사찰들도 따라서 대부분 쇠락 내지 폐찰되었다. 현재 북한산성에는 상운사 ‧ 태고사 ‧ 진국사(노적사) ‧ 국녕사 등이 명맥을 잇고 있다.

파일:삼각산중흥사조선말기.jpg

1902년에 세키노 타다시(關野貞)가 찍은 사진만 보더라도 중흥사는 지금의 봉은사나 흥천사 못지 않은 빽빽하게 건물이 들어선 대찰이었다. 을사늑약 1년 전인 1904년 9월 12일에 중흥사는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사찰 대부분이 전소되었다. 중흥사 복구를 위한 불사마저도 을사늑약 2년 뒤인 1907년에 중단되었고, 1909년에도 다시금 화재가 발생했다. 이후 중흥사는 재건되지 못하고 폐찰로 남고 말았다. 경술국치 이후인 1915년 8월 29일~30일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중추원 소속 도변업지(道邊業志)와 동행하여 북한산성의 유물 유적을 조사하였는데, 여기에는 " 불탄 자리에 가옥 한 채가 남아 있어서 헌병출장소로 사용했지만 다이쇼 4년(1915년) 대홍수로 그 반을 유실하였다."고 적어서 1915년 홍수로 중흥사가 피해를 입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사찰의 중건 시도가 있긴 했는지 1906년 12월에 앞서 중흥사 주지를 지낸 적도 있는 홍월초[8]가 새로 북한산 총섭으로 추천되었음에도 중흥사가 재건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정미년( 1907년)부터 한반도 각지에서 전개되던 항일 의병 항쟁과 관련이 있다고 해석되고 있다. 의병들은 군사훈련 등과 같은 군사작전이 필요한 경우에 주로 사찰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일본군은 의병에 대한 토벌 작전을 전개하면서 의병이 본거지로 삼은, 혹은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사찰들을 소각해 버리곤 했던 것이다. [9] 분명한 것은 조선 조정이 전국의 승려들을 유사시 동원 가능한 군사 집단으로 운용하면서 그 총지휘본부로 삼았던, 따라서 조선 왕실과의 커넥션이 가장 깊고 질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중흥사가 일제 총독부의 입장에서 결코 곱게 보이기는 어려웠다는 점이다.

해방 후에도 중흥사는 재건되지 못했다. 북한산이 아무래도 국립공원이고 문화유산보호지구인 데다 그린벨트로서 개발에 많은 제약이 따르다 보니 사찰 복원 역시도 규제가 많이 따를 수밖에 없었을 듯하다. 1990년대 후반 조계종 종정(8대) 서암 등이 중흥사 복원을 추진하기 시작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2005년 불광사 주지 벽암지홍이 중흥사 주지로 부임하여 불사를 새로 시작, 2012년 4월 13일에 대웅전 상량식을 치르고 8월에 요사채 1채와 함께 대웅전을 준공하였다.

그 이후 중흥사의 복원 불사가 속속 진행되어 2016년 12월 11일 만세루(萬歲樓) 기공식을 올리고 이듬해인 2017년 1월 21일 만세루 상량식을, 2018년 11월에는 중흥사 경내에 있었던 전륜전(轉輪殿), 제2요사채와 함께 만세루가 완공되었다. 발굴조사 진행 후 고고학자들의 자문을 통해 복원하는거라 거의 옛날의 모습 그대로라고 생각해도 된다.

3. 가는 길

북한산 입구에서 중흥사로 가려면 어느 정도 산을 오를 각오를 해야 한다. 길은 닦여 있지만 워낙 높은 곳에 있어서 등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쉬엄쉬엄 들렀다 온다" 생각하고 오르면 진짜 피 본다.

중흥사로 들어가기 직전 입구에는 암벽에 작게 명문을 새겨 놨는데, 철종 6년(1855)에 새긴 ‘북한승도절목(北漢僧徒節目)’으로 승병 지휘자인 총섭(摠攝)을 임명할 때 지켜야 할 규칙 3가지[10]를 새긴 것이다. 위쪽으로 비석들이 세워져 있는 것은 ‘북한산성 선정비군’이라고 해서 19세기 북한산성을 관리한 총윤청(摠戎廳)과 무위소(武衛所)의 제조(提調), 경리사(經理使)들의 선정비이다.
[1] 사찰 11곳에 암자가 두 곳. [2] 지금은 삼성가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리움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불교계에서는 불교닷컴에서 삼성가에 대해 중흥사 반자에 대한 불교계로의 환지본처를 요구한 적이 있다. # [3] 태고보우 본인은 그냥 '동암' 즉 동쪽 암자라고만 불렀다. 이곳에 '태고암'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고려 우왕 11년( 1385년) 태고보우가 입적하고 난 뒤의 일이다. 태고암은 북한산성이 세워지던 17세기에 중흥사의 주지가 된 계파성능에 의해서 태고사로 중창되었고, 일제강점기인 1937년에 종로의 각황사를 이전할 때에 이 태고사를 서울로 옮겨 짓는 형식으로 세운 사찰이 조계사( 1954년 명칭 바꿈)이다. 때문에 현재 대한불교조계종에서는 태고보우를 종단의 중창조로 삼고 있다. # [4] 충주에 있었던 사찰인데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5] 중흥사 바로 아래쪽으로는 계곡이 흐르고 있는데, 성호사설에 보면 김시습이 매번 비가 온 뒤에 산의 계곡 물이 불어나면 작은 종이 백여 장을 잘라 만들어서 붓과 벼루를 갖추어 뒤따르게 하고는 시냇물을 따라 내려가다가 여울이 급하게 흐르는 곳을 골라 앉아서 절구나 율시, 오언고풍 같은 온갖 시를 지은 다음 종이에 써서 물에 흘려 보내고, 종이가 멀리 흘러가는 것을 보면 또 쓰고 또 흘려보내고 하면서 저녁에 종이가 다 떨어질 때까지 그랬다고 한다. [6] 벽암각성은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에도 의승군을 일으켜 왜병 및 호병과 싸웠고, 남한산성 축조를 맡기도 했다. [7] 이때에 당시 왕자였던 연잉군도 함께 따랐다. 이후 왕으로 즉위한 연잉군은 1772년 다시 자신의 손자를 데리고 북한산성을 찾는다. # [8] 명진학교 초대 이사장이다. [9] 대한매일신보 융희 원년 9월 20일자 '지방정형'. 실제로 양평의 상원사와 용문사, 정산 정혜사, 청주 화양동 환장암, 금강산 심원사 등이 이런 이유로 일본군에 의해 소각되어 사라졌다. 씁쓸하게도 이런 식으로 의병 항쟁의 본거지로 몰려 소각되는 사찰들이 늘어나면서 조선 각지의 사찰들은 일본군들의 방화를 피하기 위해 자진해 일본 불교 종파의 말사로 등록되기를 총독부에 먼저 청원하는 경우도 많았고, 심지어 의병 토벌에 승군이 합세하는 경우까지 벌어졌다(대한매일신보 광무 9년 11월 7일 '합군토비'). # 이러한 점은 1911년의 조선총독부 사찰령으로 이어져 조선 불교에 친일 색채가 침투하는 악영향으로 이어졌다. # [10] 1) 다수결에 따라 선정된 이가 총섭에 임명될 수 있도록 할 것 2) 북한산성 바깥의 승려를 총섭으로 임명되게 하려는 자는 영문(營門)에 소송할 것 3) 총섭은 사찰의 폐단을 바로잡고 국가에 극진히 봉사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