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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8 01:27:04

중대전술기지


1. 개요2. 특징3. 형태4. 장점5. 단점6. 결론
6.1. 중대전술기지 신화에 대한 보론
7. 관련문서8. 대중매체에서

1. 개요

파일:중대전술기지2.jpg
베트남 전쟁 당시 대한민국 국군의 중대전술기지
/ Company Tactical Base, Fire Support Base(Firebase)[1]
국군은 베트남 전에서 기본 전술 단위 부대인 대대보다 작은 중대 단위로 진지를 구축하는 중대전술기지 개념을 발전시켰다. 6.25 전쟁 기간 동안 국군 최초의 유격 부대인 백골병단을 지휘하며 풍부한 게릴라전 경험을 쌓은 채명신 장군은 게릴라전에서는 중대 단위 작전 수행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세부적인 기지 설계안을 마련하였다. 지름 150~300m 크기의 원형 구조 중심에는 관망대와 헬기장이 배치되었고, 외곽에는 철조망을 설치하였다. 철조망 안쪽에는 산병호와 공용화기 진지를 구축하였고, 이들은 교통호를 통해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철조망 바깥쪽에는 지뢰 지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러한 구조의 중대전술기지는 사앞뒤 좌우 360도 방향에서 방어가 가능하였다. 중대전술기지는 최소 3일 분량의 식량과 탄약을 비축할 수 있었고, 아군 포병의 지원 사정권 안에 진지를 구축해 화력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으므로 적 연대 규모의 공격에도 48시간 이상 버틸 수 있었다.
전쟁기념관 공식 설명문
대한민국 국군 베트남전 당시 운용한 야전 축성 및 장악 교리. 채명신이 기존에 있던 중대전술기지에 6.25전쟁 당시의 경험을 섞어 보완해 고안하였고 도입하였으며 훌륭한 전공에 미국도 채명신이 고안한 이 중대전술기지를 연구하고 웨스트포인트서 가르치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다.

대포가 등장한 이래 고전적으로 검증된 요새 구조인 성형 요새에서 성벽 대신 참호와 철조망을 깔아놓은 야전 축성물이다. 격자가 사방에서 두들겨 맞게 만드는 구조에 기반하였으므로 현대화된 성형 요새라고 볼 수 있다.

베트남전의 특수성을 감안하여, 최대한 오래 죽치고 앉아서 시간을 끌며 아군측 피해를 줄이려 고려된 교리였다. 전역을 섹터 단위로 나눠서, 야전 축성물을 설치해 적의 출입을 차단하여 섹터 전체를 봉쇄, "난 안 움직인다. 꼬우면 니가 오든가"를 시전한 것이었다.

개개의 중대 전술기지는 요새라 불러도 충분할 만큼 대단한 저지력을 가지고 있다. 다만 요새 Fortress와 달리 중대전술기지는 형태적으로 아주 다르다.

요새 / Fortress는 중요한 길목에 알박기로 설치해 "좋든 싫든 점령하고 지나가게 만들어" 시간을 끄는 축성물이다. 이와 달리 중대전술기지는 모양과 기능은 요새인데, 설치한 목적은 방벽 / Wall인 해괴한 축성물이다.

뜬금 없이 20세기에 등장한 성형 요새인 중대전술기지는 베트남 전쟁이라는 괴상한 환경만을 고려하여 등장하였다. 정상적인 전쟁이라면 마지노선처럼 구태의연한 교리로 치부되었을 것이다. 실용성은 둘째치더라도 "나는 공격 안 하겠소"란 의도가 대놓고 드러나는 탓에 미군은 중대전술기지 개념을 매우 부정적으로 여겼으며 채명신 장군이 이 중대전술기지를 설치하자 "각개격파 당할 위험이 높으니 그 전술은 안하는게 나을것"이라며 압박을 넣기도 하였다.

채명신은 파병된 국군과 작전지역의 남베트남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최대한 소극적으로 작전을 펼치고자 이 교리를 고안했다. 그는 베트남 전쟁에서 남베트남 영토를 지키기에 급급한 미군이 공세를 펼칠 수 없으며, 북진도 가능성이 없어 승리가 불가능함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군 통수권자인 박정희 대통령의 본심과 무관하게 이런 방법을 쓰게 되었다. 물론 최소한의 실익은 거두기 위해 이런 기묘한 전략을 취하게 되었다고 보인다.

한국의 베트남 파병의 이유 중 중요한 하나는 65년부터 미국이 전면전을 결정하면서, 병력투입을 위해 당시 경제력이 동등했고 군사력에 있어서는 남한 단독으로는 우세를 점하기 힘들 정도의 군사력을 북한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북한의 침공을 막아줄 방패역할을 하던 주한미군을 베트남에 전용하려는 걸 막기 위함이었다. 도미노 효과로 한국의 안보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구정 공세 이후로 제 코가 석 자가 된 미국이 또 주한미군을 빼니 마니 하면서 한국 입장에서도 불만이 상당했다. 실제로 전쟁이 장기화된 68년 이후에는 호치민이 한반도의 상황을 이용해 북한을 자극해 1.21 사건같은 군사도발을 일으켜 실제 안보불안이 현실화 되었을 정도니. 적극적으로 싸울 정치·외교적 이유도 약해지니 갈수록 공세에 소극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구정 공세 이후에는 미군도 충격으로 한동안 매우 소극적, 방어적으로 변했다.

즉, 파병 한국군 사령관인 채명신의 상황에서 남베트남과 미군의 패배를 점치는 상황인식에서 한국군의 역할을 하되 결과적으로는 최대한 한국군의 인명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나온 극단적인 전술이라고 하겠다.

베트남 전쟁의 기이함은 짧게 설명할 수 없다. 어쨌든 이 전장에서는 공세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현대판 성형요새인 중대전술기지 교리는 목표한 바를 거의 완벽하게 달성한다. 물론 후술할 안케패스 전투로 인해 조금 빛이 바래긴 했다.

운영 당시 기지는 2중으로 구성된다. 2개 소대는 기지의 바깥쪽 원에 배치되고 1개 소대는 기지의 안쪽 원에 배치한다. 경우에 따라 3개 소대를 모두 외곽에 배치하기도 한다. 이 경우 내곽은 중대본부 요원이나 화기소대 요원들이 담당하였다.

2. 특징

파일:중대전술기지3.jpg
파일:중대전술기지1.jpg
중대전술기지의 모식도와 모형
중대전술기지 개념의 1차적 성공은 완벽한 경계로 적이 감히 넘볼 수 없게 하는 것이고, 2차적 성공은 기지를 중심으로 대민지원 및 민사심리전을 전개하여 책임지역 내 양민과 베트콩을 분리시키는 한편 베트콩을 섬멸 후 지역 평정을 완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경계와 함께 대민지원을 통한 민사심리전을 전개해야 한다.
채명신, 《베트남 전쟁과 나》, 팔복원, pp 202~203
사단의 중대전술기지는 이러한 적정의 광활한 지역에 적절히 배치되어 있었으므로, 적과 아군의 관계가 전선과 후방, 적측과 아군 지역이 따로 분리되지 않고 상호 얽혀, 적 지역과 아군 지역을 명확히 구분하는 그런 전장 배치가 아니다.
따라서 중대전술기지 어느 방향에서 적이 기습할지 모르기 때문에 맹호 장병은 전면 방어 형태를 24시간 계속 유지해야 했다.
중대전술기지 개념은 우리만의 독특한 것으로, 미군이나 월남군에게는 매우 생소하여, 한국군의 중대전술기지가 언젠가는 적에게 유린될 것이라는 우려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까지 최소 대대단위는 되어야 적의 공격에 버틸 수 있다는 것이 상식인데, 내 고집 하나로 중대단위로 분산해서 배치했으니 한국군이 언젠가는 크게 다칠 것이라는 위험천만한 일로 외국인의 눈에 비쳤던 것이다. 나는 6·25 전쟁을 통해서 적지에 들어가 게릴라전을 전개했으므로 거기에서 얻은 경험에 의거, 중대가 견뎌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모든 중대전술기지가 사단 포병화력의 지원사격 거리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 확인은 더 굳어졌었다. 간혹 보병대대가 지원 거리밖에 배치되었던 경우가 있었는데, 그런 경우는 1개 포대의 포병과 4.2인치 중박격포 소대로 묶은 직접 지원 화력으로 감당하게 하였다.
그렇게 포병화력을 운용함에 따라 사단 전술 책임지역 어느 중대전술기지도 포병 지원 사격권 밖에 버려두는 경우는 없었다.
채명신, 《베트남 전쟁과 나》, 팔복원, pp 267~268
중대전술기지는 중요 길목을 막고 적의 기동을 방해하려고 따로 지은 축성물이라는 점에서는 요새(Fortress)에 가깝다. 개개의 중대전술기지를 운용하는 교리 단위로 보면 그냥 제발 지나가지 말고 섹터 안에서 곱게 갇혀있어라란 발상으로 설치하였다. 따라서 요새가 아니라 요새인 척 하는 요소들의 모임이 방벽 Wall으로 작동하게 만든 것이다.

기동의 범위가 전선 단위로 확장된 이래, 온전한 의미로의 요새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고 실상은 방벽인 경우가 많았다. 대서양 방벽이나, 지크프리트 선이나 마지노 선 같은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국지적인 전술적 기동 방해는 잘 수행했으나 단지 그 역할에 그쳤다.[2] [3]

대서양 방벽은 그냥 놔두고 정비하면서 힘을 보태 한방에 확실히 밀어 재끼는 방법으로 간단히 돌파가 가능했다. 연합군의 진격을 늦추긴 했으나, 전황을 개선할 기회는 제공할 수 없었다. 마지노선은 대놓고 우회했다. 지크프리트 선 가짜 전쟁에 그치게 하여 투자한 값을 톡톡히 했다. 어쨌든 원천적인 적의 기동을 막을 수는 없었으며, 애초에 그런 기대를 하고 만든 시설 역시도 아니었다.

이렇듯 방어력 자체는 축성물이 가장 비효율적이다. 그저 적이 지나지 말라고 지어놓을 뿐이기 때문이다. 잠깐 시간을 끌 수는 있어도, 꼬우면 그냥 놔두거나 피해가면 그만이기에 설치 비용에 비해 전략적 가치가 빈약하다.

중대전술기지는 발상을 전환한다. 시대에 뒤떨어졌다 여겨진 방벽을 놓아버린 것이다. 베트남 전장은 매우 특수한 환경이었고, 전쟁을 종결할 공세가 불가능한 불합리한 상황에 놓였다. 중대전술기지의 섹터 봉쇄는 게릴라전으로 인한 피해라도 억제하려 고안되었다. 이는 게릴라전 세력이 현지 주민과 협력해야만 유지될 수 있음을 노려, 이 협력 관계의 성립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역할도 수행했다.

바로 그렇게 적당히 성형 요새를 듬성 듬성 알박아 놓고 " 니가와"를 시전한 것을 월맹군으로썬 도저히 뚫을 수가 없었다. 이 교리는 베트남 전쟁의 전황 악화를 늦추는데 아주 쏠쏠한 역할을 수행했다. 안캐페스 전투란 최악의 졸전을 빼면 이길 수 없는 전쟁에서 아측 피해를 최소화한다는 목적 또한 달성했다.

3. 형태

중대 전술 기지는 원형으로 둘러싼 철조망에 별 모양으로 설치한 철조망을 같이 배치한다. 그 안에 미로처럼 복잡한 참호와, 기관총좌 및 박격포가 들어간 야전 축성물이다. 이 성형 요새 구조는 오랜시간 동안 검증된, 접근하는 적에게 화력을 집중해 접근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데 가장 이상적인 구조를 띈다. 과거의 명성에 걸맞은 막강한 저지력을 갖추었다.

또한, 성형요새의 전성기에는 없었던 신기술 - 향상된 통신이나 긴 사거리의 정밀한 화기 등 - 으로 위력은 더 강해졌다. 듬성듬성 떨어져 있는 전술기지간의 상호 지원과 감시가 가능해진 것이다. 일렬로 벽을 새우지 않고, 전략적으로는 블록 하우스 수준에 불과한 자그마한 축성물 가지고 정규 요새 못지않은 저지력으로 섹터 규모를 통째로 봉쇄하는 일도 가능했다.

과거와 달리 현대전에서는 외부 포병 및 공군 지원으로 요새포와 구원군 역할을 대체할 수 있다. 기지간의 간격이 굉장히 멀어도 구멍이 뚫리지 않게 봉쇄망을 구성할 수 있다. 이 덕분에 장벽이나 Lime 같은 선방어 시설[4]들의 문제점인 너무 큰 방어 비용 문제를 상당부분 해결할 수 있었다.

즉, 요새포는 외부 곡사포 지원으로, 기병과 구원군은 항공 지원으로 대체해 외주를 줌 셈이다. 비록 완전한 대체는 불가능하지만, 각 기지를 요새로 쓰기엔 너무 수가 많고, 방벽으로 쓰기엔 수가 너무 적다는 문제점을 어느정도 완화할 수는 있었다. 무적의 제공 우세와 화력 우세를 보장하는 미군이 있었기에 실제로도 문제를 거의 대부분 피할 수 있었다.

각 중대 전술기지는 최소한 48시간 동안 적의 전면적 공격을 견뎌낼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아무리 튼튼하게 지어도 무한정 버틸 수는 없으므로 48시간 후에는 반드시 증원을 받아야만 했으며, 이 역시 요새포와 소티를 대체하는 외부 화력 지원을 전재하였다.

기지 간의 거리가 멀어서 증원을 받을 때 까지 시간이 상당히 오래 걸리게 된다. 그래서 중대전술기지의 주둔군은 옥쇄를 각오하고 싸워야 했다. 중대전술기지 내부 참호들은 아군과 적 모두에게 미로와 다를 게 없는 구조로 되어 있으며, 탈출로는 없다. 만약 중대전술기지가 터져버린다면 주둔 병력이 완전히 전멸했다는 의미가 된다.

이렇듯 현대의 공세적 교리와는 거리가 멀다. 크게 개선되었기는 했으나, 성형요새가 가진 근본적인 단점이 사라지진 않았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미군은 firebase 개념을 개편할 때 중대전술기지 교리를 참고하긴 했어도 재현하지는 않았다.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 전선에 미군이 지은 firebase를 살피면 중대전술기지의 형태와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4. 장점

성형 요새 구조로 역사적으로 검증된 야전 축성물 답게 어마어마한 저지력을 제공한다. 제공 우세와 화력 우세가 전무했던 월맹군 입장에서는 공격하자니 너무 피해가 크고 공격 안 하자니 거슬리는 답이 안 나오는 견고한 야전 방어시설이었다.

참호- 철조망- 기관총이 결합되는 순간 러일전쟁- 1차대전- 2차대전-현대까지 순수 보병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 뚫는다. 21세기에 들어서도 이는 달라지지 않았다.[5]

현대에도 중대전술기지와 비슷한 보방식 축성물이 등장할 때가 있다. 이걸 뚫으려면 미군처럼 "공군!"을 외치거나 작정하고 포병을 끌고 와서 기지 째로 날려버리는 것 말곤 답이 없다. 하물며 미군이 상대 공군과 대규모 포병을 억제해주는 상황이라면 돌파할 방법은 없다. 그나마 화력이 비등한 상황에서 전차를 동원하는 방법은 있겠다. 다만 미군의 공군이 가하는 폭격의 무서움을 잘 알고있기에 월맹군은 베트남의 울창한 정글을 통해 게릴라전을 펼치는것에 주력했고 그때문에 전차를 굴릴일이 거의 없었다.

또한, 콘크리트 벙커를 설치하지 않고 철조망과 참호만으로 구성된 요새라 저지력에 비해 비용이 저렴했다. 야삽과 철조망만 있으면 공사를 할 수 있고, 주둔 부대도 고작 보병 중대 1개 뿐이다. 상술했듯 외부 화력 지원을 바탕으로 기지간 상호 지원을 필요한 시간을 벌도록 했여 구역 하나를 봉쇄하기 위해 필요한 자산의 수가 완전한 방벽에 비해선 적게 필요했다.

방벽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인 최악의 가성비를 어느정도 해결했다는 의미는 컸다. 중대전술기지 교리의 가장 큰 성과라도 봐도 좋다. 수비측에는 큰 부담 없이 수백개씩 알박아 놓을 수 있는 자그마한 둥그렇고 뾰쪽한 철조망 & 참호 덩어리에 불과했다. 그러나 공격하는 입장에선, 정면 돌격으로 공략하자니 고작 보병 중대 1개 병력을 상대하기 위해 최소한 1개 연대가 소멸 되는 막대한 손실을 감수했다.

어쨌든 (저렴한 비용치고는) 굉장히 튼튼한 축성물이라 공성전이 필요하다. 포위와 함께 대규모 포병 화력 투사나 공군 지원으로 하루 종일 두들겨서 방어를 포기할 시점을 기다림이 최선이다. 그러나 월맹군이 제공권은 물론 압도적인 포병 화력이 있던 미군에 맞서고 있는 상황이니 화력으로 압도하기란 난망했다. 오히려 서로 멀찍히 떨어진 중대전술기지들의 포위를 뚫으려 발버둥 처야만 했고, 덕분에 미군이 각개격파 당할수 있다는 우려와는 달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월맹군 입장에선 지역을 돌파하려면 상대의 중대전술기지들을 큰 피해를 입더라도 탈취하여 역으로 빅엿을 선사하는 것 말곤 답이 없었다. 강대국 군대라면 막강한 화력으로 기지 전체를 지워버리거나 아니면 엄청난 기동력으로 우회해서 대처하거나 전술 무기, 곧 화학무기나 전술 핵무기를 투입해야할 것이다. 사실 진짜 콘크리트 요새가 아니라 그냥 철조망 참호 기지니 알보병 물량이라도 때려박거나 포위를 하면 되지만, 앞서 말했듯이 월맹군이 보병을 대규모로 모으든 기지를 포위하든, 미군이 얼씨구나 하고 달려와서 모조리 때려잡으면 그만이다. 월맹군에 그런 역량은 없었으며, 설령 그런 역량이 있었더라도 자그마한 중대전술기지 따위를 밀자고 그런 비싼 자산을 동원하는 것만으로도 큰 손해를 본다.

미군 입장에서 베트콩과 월맹군은 여기저기 숨어있어서 귀찮은 게릴라일 뿐이었다. 자기네가 직접 달려와주면 고맙게 화력과 인력을 퍼부어 싹 쓸어버리면 그만이다. 포위를 하자니 지원군이 달려오고, 대포를 가져오자니 폭격기에게 날아간다. 게릴라전 자체가 '흩어지는 것'이 전제인데, 전술기지를 공략하려면 '모여야' 하니 외통수라 할 수 있다. 특히 베트콩은 디엔비엔푸 전투의 전훈으로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활용한 포위작전으로 중대전술기지쯤 병력만 모이면 쉽게 쓸어버릴 수 있겠지 생각했다가 크게 데였다.

미군과 파병된 한국군 측이 공세를 못하는 상황이었다. 시간을 끌면 언젠가 월남군이 알아서 무너져서 승리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를 위한 비용과 시간, 그동안 받는 피해가[6] 천정부지로 솟구쳐버렸으니 월맹군 입장에선 속이 터질 노릇이었을 것이다.

5. 단점

중대전술기지는 근본적으로 요새인 척 하는 방벽이다. 비록 미군의 힘을 빌어 요새와 방벽의 기능을 모두 수행할 수 있었지만, 근본적인 한계는 여전했으며, 또한 요새가 가지는 한계, 적의 기동을 방해해서 전황을 개선할 시간을 벌어주는 용도라는 한계도 똑같았다.

즉, 중대전술기지는 답이 안 나오는 막장 전쟁에서 아측 피해를 상당히 줄여준 꽤나 성공적인 축성물이자 축성물 운용 교리였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로 어쨌든 중대전술기지가 베트남전을 승리로 이끌 수는 없었다.

만약 적에게 탈취 당하면 그동안 적이 느껴온 고통을 고스란히 되돌려 받게 된다는 약점이 있다. 빼앗길 경우 답이 없다.[7] 또한, 재수복에 실패하여 봉쇄망이 붕괴하게 된다면, 미군이 우려한 상황이 그대로 벌어지며 서로마 제국 멸망을 직접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만약 상대가 중대전술기지를 뺏았고, 더불어 시설과 교리를 이해하고 활용하기 시작한다면 역으로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게 된다. 실제로 짜빈동 전투를 역으로 돌려받은 꼴인, 안케패스의 638 고지 전투에서 이 문제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안케패스 전투는 베트남전을 넘어 대한민국 국군 역사상 최악의 졸전으로 꼽히는 전투다. 이전에 안케패스의 638 고지에서 철수하면서 거기에 설치했던 중대전술기지를 제대로 철거하지 않고 버려둔 것이 치명타로 작용했다. 월맹군은 중대전술기지 교리의 원리를 상당히 잘 파악하고 안케패스의 638 고지에 방치된 중대전술기지를 역으로 써먹었다. 이것이 중대 단위 작전에서 사단이 갈려나가는 참사를 만들어냈다.

현대에서 상대가 중대전술기지를 압도할 전력을 가지고 있다면 된다면 지을 이유가 없다.[8]

물론, 적측의 자원 소모를 유도할 수는 있지만, 몇 달을 굴러가며 지은 요새가 한순간에 지워지는 꼴이니 가성비 부분에서 유효성이 성립되기엔 조건이 까다롭다.

결정적 문제점은 공세를 거부하고 지역 봉인(?)에 치중하는 매우 소극적인 교리라는 것에 있다. 미군이 중대전술기지 교리를 보고 어처구니없어하며 비판한 이유도 일견 정당했다. 방벽형 축성물 설치가 가지는 근본적 문제[9] 뿐만 아니라 "기껏 파병 왔으면서 안 싸우겠다는 거냐"는 당연한 불만도 큰 이유였다.

6. 결론

베트남전의 특이한 전장을 벗어나서는 다시 등장하지 않으리라 여겨졌지만 실상은 달랐다. 전 세계적으로(우크라이나 전을 제외하고) 저강도분쟁이 이어지면서 저렴한 알보병으로 다수의 게릴라를 제압할 수 있는 수단이 되어준 것이다.

이라크와 아프간 전역에서는 중대전술기지와 어느정도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는 요새화된 전술적 야전 축성물 개념 만큼은 기어코 부활했다. 문제는, 여전히 미군이 이런 사방이 게릴라들인 적지에 고립되어 존버하면서 터를 다지는 적성국 게릴라부대의 전략에 베트남 전쟁이후 주구장창 당하면서도 전훈을 복습하는데는 전혀 관심없이 물량전,화력전을 밀어붙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아프간전도 베트남전과 똑같은 결말을 맞이했다.

대한민국은 6.25 전쟁 후에도 지속적으로 빨치산 토벌과 북한의 무장공비 투입같은 게릴라전이 이어졌다. 채명신은 베트남전과 같은 게릴라전에는 이미 이골이 난 상태였고, 어차피 게릴라전은 단시간에 승패가 결정나지 않음을 잘 알았다. 최소한 남베트남 민간인은 작전 중에 베트콩으로 돌리지 말자라는 계획하에 중대전술기지를 전략촌처럼 활용해 베트콩에게 시달리던 남베트남 농민들을 보호하는데 주력했다. 전쟁 중 총부리를 맞댄 국가임에도 전후 베트남과의 관계를 비교적 온건하게 개선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이에 연유한다.

가난했던 70년대 대한민국 국군도 중대마다 하나씩 베트남 현지에서 구축해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구축비용은 물론 드는 시간 자체도 꽤 저렴하게 먹히는 게 중대전술기지가 선보인 현대판 선형 요새 설계였다.

하물며 이미 비싼 외부 지원 수단을 보유하고 있어 추가적 비용이 들지 않으며, 자산 비용 문제도 이미 비싼 장비 바리바리 싸들고 온 다국적군 입장에서는 매력적인 가격에 안전을 보장하는 쏠쏠한 축성법이다.

요새와 비슷한 기능을 수행하는 야전 축성물은 전성기에 비하면 그 능력이 제한적이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서는 꽤 유용하여 비슷한 형태의 요새화 시설이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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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리카 말리 전선에 축성된 프랑스군의 파이어 베이스
성형 요새가 훌륭한 요새 설계 중 하나임을 증명하는 사례들이 지금도 발견된다. 드물게 작전이 꼬여서 위기에 처하면 급한대로 중대전술기지처럼 동그란 철조망 기지에 별모양 철조망을 추가로 두른 후 참호를 파 축성물을 급조하는 사례가 있다. 다만, 이 시대에도 유사시 쓸 수 있도록 장교들이 숙달되어 있다는 점이 특이사항. 물론, 애당초 이런 걸 설치해야만 하는 상황을 피해야겠지만, 전투는 마음대로 풀리지 않기 마련이다.

위 사진의 프랑스군 주둔지는 지역 반군들의 활동을 감시하고 차단하며 작전을 펼치는 병력을 게릴라 습격으로부터 보호하려 설치되었다. 이를 빠르고 든든하게 짓기 위한 전용 축성 키트가 따로 고안되어 프랑스와 영국 모두 요긴하게 쓰인다.

중대전술기지는 잊힐 뻔했던 야전 축성을 통한 거점 확보가 현대전에서도 유효할 수 있음을 상기했다. 베트남전이란 특수한 환경 밖에서도 큰 의미를 가지며, 미군의 파이어 베이스와 FOB 와 같은 요새화된 거점 축성에 무시못할 영향을 주었다.

6.1. 중대전술기지 신화에 대한 보론

전선의 이동이 빈번한 재래식 정규전과 비교해 볼 때, 베트남 전쟁에서 군사작전을 위한 기지(base)의 운용은 일반적이었다. 한국군뿐만 아니라 미군과 남베트남군을 비롯한 연합군 역시 작전 수행을 위해 기지를 운영했다. 전술 책임 지역을 부여받은 각 군대가 해당 지역의 평정을 위한 대반란전 또는 대게릴라전을 수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미군은 그들의 기지를 화력 기지(Fire Base, FB) 또는 화력 지원 기지(Fire Support Base, FSB)로 불렀다. 소모전 전략 속에서 작전적으로는 공세를 취하려는 미 육군에게 기동력과 함께 화력은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적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강요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따라서 미군 기지가 지닌 주요 목적과 기능은 ‘탐색격멸(Search and Destroy)’이라는 정규전 형태의 공세적 군사작전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통상 기지에는 155mm 포 6문을 보유한 한 개 포대가 위치하여 보병의 탐색격멸 작전에 포병 화력을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미군은 최초 기지 구축에 있어서도 효과적인 방어를 위해 기지를 견고하게 구축했다. 기지에는 최소 1개 보병 대대가 주둔하여 방어하며, 기지는 스스로 최소 3일 최대 14일까지 적의 공격에 지탱할 수 있어야 하며 상황에 따라서는 반영구적인 형태로 고안되었다.1이처럼 미군의 기지 운용은 화력 지원과 기지 방어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대반란전의 수행에 있어서도 기지는 “적의 공격에 민간인 사상자를 줄이고 보안 문제를 최소화하기 위해 주민 밀접 지역과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겼다.
- 심호섭. (2021). 주월한국군의 중대전술기지 운용이 지닌 이상과 현실 - 둑꼬 전투(1966)를 중심으로 -. 군사,(120), 79-130.
둑꼬 전투의 승리를 계기로 중대전술기지 신화가 탄생했고, 한국군 고위 장교단은 더 나아가 미군이 한국군 기지 개념을 채택했다고 주장했다. 1969년의 인터뷰에서 채명신은 미군의 화력 기지가 한국군의 기지 개념으로부터 유래했다고 말했다. 수도사단 1연대 3대대장 박경석 중령 역시 위 주장에 동의한다. 그는 둑꼬 전투 등에서의 성공 이후 한국군의 기지 운용 방식이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의 일반적인 베트남 전쟁 수행에 반영되었다고 말했다. 반면에, 미군의 한 문서에서는 “그들[한국군-필자]이 채택한 방어 전술은 독특한 산물이 아니며, 그들의 성공에는 어떠한 비밀도 없다. 그들이 한 것은 미군 고문단들로부터 배운 것이며 우리의 교범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며, 한국군의 기지 운용이 독특한 개념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 심호섭. (2021). 주월한국군의 중대전술기지 운용이 지닌 이상과 현실 - 둑꼬 전투(1966)를 중심으로 -. 군사,(120), 79-130.

채명신 장군의 회고록과 전쟁기념관에서는 중대전술기지를 한국군이 개발한 것으로 소개하고 있으나 이는 사실과 거리가 멀다. 상술했듯 미군 남베트남군 역시 전술기지를 운용했다. 또한 미군은 자신들의 화력기지 전술이 한국군으로부터 배워온 것이라는 채명신 중장과 주월사의 주장을 부정하며, 오히려 반대로 한국군이 자신들로부터 배워간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한다.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의 심호섭 조교수 역시 2021년 국군의 학술지인 "군사"에 개제한 논문에서 미군이 한국군으로부터 화력기지 전술을 배웠다는 국군의 주장은 다시 검토될 필요가 있다며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했다. 그는 중대전술기지에 대한 기존의 사관이 ' 신화'이며, 다각적으로 깊게 연구되지 않고 주월사의 주장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또한 베트남군에게 있어 한국군의 중대전술기지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베트남군 사령관 보응우옌잡은 회고록 <디엔비엔푸> 에서 이 전술이 '베트남에서 침략자들이 수행한 전쟁의 특징적인 형태'라고 평가하며 딱히 특정 국가의 특징으로 한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프랑스군의 전술기지를 상대하며 그 파훼법을 체득한 바 있었다. 당시 프랑스군은 부족한 병력을 바탕으로 베트남을 재점령하고자 시도하면서 1950년 이래 집단전술기지라는 이름으로 중대 또는 대대급 전술기지들을 곳곳에 배치했다. '고슴도치 방어 전략(Défense en hérisson)'이라 불린 이 전략은 본래 1940년 프랑스 침공 당시 프랑스군 총사령관 막심 베이강이 독일군의 기동전을 막기 위해 고안한 아이디어를 응용한 것이다. 한국군의 그것처럼 프랑스군 역시 지뢰와 철조망으로 기지를 둘러쳤고, 원거리 화력 지원 범위 내에 기지를 배치했다. 각 기지간 상호 지원이 가능하도록 연계했음은 물론이며 비행장의 항공 지원을 바탕으로 물자를 보급받았다.

보응우옌잡은 프랑스군의 전술이 도로와 지역을 차단하여 베트민군의 행동을 크게 제약시켰다고 평가하였다. 그전까지 베트민군의 주 방침은 속공속승, 즉 기동성을 살린 공격으로 빠르게 승리한다는 원칙이었으나 전술기지들의 등장으로 이 방식은 더 이상 효과를 내기 힘들었다.
가. 포위전투를 수행할 때, 우리는 적 저항의 외곽을 무너뜨리고, 포위망을 압축해 들어가며, 적 점령 지역을 축소시키고, 적의 보급로를 제한, 차단한다.
나. 상황이 우리에게 유리해지면, 총공격으로 전환해 모든 적군을 소멸한다.
- 디엔비엔푸 공략에 대한 개념화. 보응우옌잡의 회고록 <디엔비엔푸> 459p에서 발췌.
1953년 2월 말 베트남군은 전훈 분석을 통해 각 전술기지가 오직 화력에만 의존하고 기동예비를 통해 서로를 적극적으로 구원하지는 않는다는 점에 주목했다. 따라서 보응우옌잡은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대량의 중화기와 대공 무기를 들여와 적의 항공 및 화력 지원을 차단했다. 또한 각 기지 사이의 공간을 막아 증원을 차단하며, 야간 기습을 적극 활용하고, 병력 우위를 유지하면서 일단 한번 장악한 기지는 사수했다. 작전 방침 역시 속공속승에서 연공연진, 즉 연속적으로 공격하며 꾸준히 진격한다는 것으로 바꾸었다. 그는 이 방식으로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디엔비엔푸는 대규모 전술기지 클러스터였고, 그 개념은 중대전술기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같은 이유로 인해 한국군 중대전술기지가 베트콩이 아닌 본격적인 북베트남 정규군과의 교전에서까지 효과를 발휘했을지는 매우 불명확하다. 전술기지 전략은 너무나도 정적이고 수세적이며, 따라서 적의 공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가 매우 어렵다. 한국의 중대전술기지는 미국의 압도적인 항공 우세와 비정규군 적이라는 조건이 맞물려 한정적으로 효과를 발휘했던 것이다. 프랑스의 선례는 이러한 조건들이 달성되지 않는다면 전술기지는 무력화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이다.

이는 한국군 역시 실제로 겪을 뻔 했던 일이다. 대표적인 한국군 중대전술기지의 승전으로 꼽히는 두코 전투 역시 중대전술기지 그 자체만이 승리의 비결이 아니었다는 것이 종합적인 평가다. 한국군은 중대전술기지의 견고함을 주된 승리 비결로 꼽았으나, 미군은 한국군의 견고한 방어를 인정하면서도 미국 측의 압도적인 포격 지원이 보다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고 파악했다. 심호섭 교수는 2021년의 논문에서 여기에 추가적으로 북베트남군의 잘못된 돌격 위치 선정과[10] 박격포탄의 높은 불발률 등 운적인 요소 역시 상당히 작용했다고 파악한다. 만일 베트남군이 조금만 더 끈질기게 공격했더라면, 야간 기습을 허용했던 9중대 기지는 보급이 떨어져 함락되었을 것이라는 게 심 교수의 냉정한 평가다.

추가적으로 당시 한국군의 중대전술기지는 각 기지가 지나치게 넓은 지역을 담당하였다는 것도 문제였다. 각 기지의 한정된 인원만으로 약 70제곱킬로미터의 넓은 영역을 커버해야 했으며 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민간 촌락에 인접하여 지역을 장악하고 평정한다는 한국군의 전략적 목표는 달성할 수 없었다. 기지의 안전을 위해서는 민간 거주구가 아닌 따로 떨어진 높은 고지에 위치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주월사는 위험에 노출된 기지들의 문제를 중대원들의 사기와 규율 부족으로 돌리면서 문제를 축소했다. 병사들이 지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넓은 담당구역으로 인한 피로 누적이었다는 점에서 이 결론은 매우 부적절한 것이었다.

요약하자면 중대전술기지는 딱히 한국만의 특별한 전술도 아니며, 무적의 전술도 아니었다. 견고했고 대부분의 경우 훌륭하게 작동하였으나 너무 소극적이었기에 적의 본격적인 공격에 맞닥뜨렸을 때 그 한계는 명확했다. 동시에 한국군의 한정된 병력으로 너무 넓은 지역을 방어하다 보니 본래 중대전술기지를 도입한 전략적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소극적인 방법으로 지역을 평정한다는 적극적 전략을 이뤄야 한다는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결국 한국군은 지역 안정화라는 전략 목표 달성에 실패했으며, 최소한의 희생자를 낸다는 전술적인 목표만을 달성할 채 철군하였다. 결국 중대전술기지 신화는 주월한국군 스스로와 당시 한국 언론이 만들어낸 여러 무적 신화들 중 하나일 뿐이며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7. 관련문서

8. 대중매체에서


[1] 후자의 경우 부대 규모에 관계 없이 채명신이 구상한 방식으로 지어지는 모든 진지를 말한다. [2] 그럼에도 이들이 전략적 기동 방해에 하등 쓸모가 없었다던가 한 것은 결코 아니다. 단적으로 마지노선은, 독일군의 해당 방면으로의 침공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였고 독일군은 벨기에를 통한 북프랑스 침공으로 적 주력군을 포위섬멸한다는 지극히 노골적이고 예측 가능한 전술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만슈타인 계획 이전의 Fall Gelb 안은 전부 이런식이었고, 그러한 방식의 침공은 연합군이 오히려 두손들고 환영할 지경이었다. 마지노선의 문제점은 개념적 측면보다는 실제 운용과 관련한 부분이 컸는데, 마지노선의 방어력에 대한 일종의 환상이라도 있었는지 요새가 필요로하는 인원수를 크게 넘어서는 병력을 배치시킨 것이 가장 단적인 예이다. 축성요새의 역할은 대체로 적은 수의 병력으로 보다 다수의 적군을 막아내는 데에 있는데 이를 완전히 어겨버린 것이다. [3] 다만 연합군의 딜 계획의 브레다 변형은 조공인 B집단군의 공세를 견디지 못하여 브레다 까지 진출했음에도 방어선을 연장시키지 못하고 다시 엔트워프까지 철수한 바 있어 기존의 Fall Gelb 안에 의해서도 덩케르크 까지는 어케어케 밀고 들어갔었을 수도 있다. 그도 그럴것이 프랑스의 7군을 포함한 병력이 철수해서 밀려난 곳이 덩케르크였고, 그러는 사이에 룩셈부르크 방면의 주공이 깊숙히 치고들어가 형성된 것이 바로 덩케르크 포켓이다. [4] 물론 고대 로마도 이름부터가 limit인, Lime을 국경선에 늘어놓고 선방어 교리로 쓴 게 멍청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때는 정말 그것 말고는 적이 종심으로 들어오는 것을 늦출 방법이 없었고, limetes와 commentatus로 조기 대응 체계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로마 제국의 서부가 싹 날아가고 동부마저도 어지간한 제국은 그냥 사라질 수준의 여러 위기를 겪으며 박살이 나고 난 이후에는, 좀 더 적을 진짜 "종심" 안으로 들어오게 허용하는 형태로 교리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는 러시아의 광활한 동토 마냥 "진짜 종심"과는 거리가 먼 온갖 잉여 영토가 많았기에, 적이 깊이 들어와도 별 문제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땅 자체가 줄어들어버렸으니 어쩔 수 없이 좀 더 핵심적인 영역이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건 나중에는 테마 제도로 정립된다. [5] 2차 대전기만 해도 열강 정규군조차 볼트액션 소총만 덜렁 들고 다녔던 20세기와 탈레반 자동소총 RPG를 들고 다니는 21세기의 보병 화력은 차이가 크지만, 문제는 그들의 보병 화력이 강해진만큼 기지에 들어간 보병 화력도 또한 강해졌다는 것이다. [6] 특히 호치민 루트로 대표되는 보급선이 공습으로 엄청나게 피해를 봤다. [7] 진짜로 파월 한국군이 중대전술기지를 빼앗기고 재탈환을 시도했을때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미군의 막강한 화력투사로 그냥 밀어버렸다. [8] 위에서 누차 언급된 것처럼 알보병만으로 이를 돌파, 점거하기는 극히 어렵겠으나, 안정적으로 차폐물을 제공해주는 구조물이 적은 특성상 보병대대에도 굴러다니는 대구경 박격포만 가져와도 다소 성가신 표적지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9] 일례로 독일군은 단단한 마지노선을 돌아서 파리를 점령했다. [10] 개활지에서 공격했다. 여기다 미군이 쏘아올린 조명탄 불빛에 노출되면서 한국군의 사격에 일방적으로 쓸려나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