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생 축구선수에 대한 내용은 주영광(축구선수) 문서 참고하십시오.
주영광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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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 |
8대, 16대 |
대한민국의 전 축구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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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광 朱榮光 | Chu Yung-kwa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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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20년 12월 1일 | |
평안남도 평양부 | ||
사망 | 1982년 9월 28일 (향년 61세) | |
직업 |
축구 선수(하프백 / 은퇴) 축구 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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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
평양 선발팀 (?-?) 해군 축구단[1] (?-?) |
감독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1956) 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 (1959)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1960) 연세대학교 축구부 (?~19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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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
대한축구협회 선수선발위원 (1966) 1968 서울 아시아 청소년 축구대회 조직위원 (1968) MBC 축구 해설위원 (1970~1982) 대한축구협회 상임이사 (19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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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 10경기( 대한민국 / 1950~19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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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축구 감독. 1970년대와 80년대 MBC의 축구 해설위원으로 올드 축구팬들에게 유명하다.2. 생애
2.1. 선수 생활
주영광은 1920년에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는 경평축구대항전에서 평양 팀의 센터하프로 활약하며 이름을 알렸고[2],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50년부터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로 뽑히기 시작했다.일제강점기 시절이 주영광의 선수 경력 중 전성기 시점이라 현재까지 많이 알려진 선수는 아니지만, 수비적 능력이 좋은 선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2.1.1. 국가대표
주영광은 1954년 월드컵 당시 대한민국 대표팀의 주장을 맡았다. 주영광은 조별 리그 첫 경기였던 헝가리전에 레프트 하프백으로 출전해 헝가리의 주장 푸슈카시 페렌츠와 악수를 나눴는데 이 사진은 대한민국의 FIFA 월드컵 역사에서 꽤 유명하다. 그러나 헝가리는 당대를 넘어 역대 국가대표팀 역사상 최강을 다툴 정도의 강팀이었고 대한민국의 선수들의 사력을 다한 투혼으로도 0:9, 9골차 패배를 받아들여야 했다.
주영광은 다음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고 그는 이 때 30대가 넘은 노장이었기 때문에 대회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현역 생활을 정리했다.
2.2. 이후
선수 은퇴 후 주영광은 1956년 멜버른 올림픽 아시아 지역예선에 나서는 국가대표팀의 감독을 맡았다. 그는 4년 뒤에 한번 더 대표팀 감독을 맡아 메르데카컵 대회를 지휘했다. 주영광은 60년대 중반부터는 감독직 대신 행정직 위주로 축구계에서 일했는데 대한축구협회 내부의 여러 직책을 두루 맡으며 행정 업무를 봤다.1970년대 들어 FIFA 월드컵 중계가 국내에 시작되자 주영광은 MBC의 축구 해설위원으로 일했다.[3] 70년대의 국가대표 경기와 월드컵 등 국제대회 경기, 그리고 차범근의 분데스리가 진출 후에는 분데스리가 해설도 맡아 자세한 해설로 올드 축구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즉, 주영광은 대한민국의 1세대 해외 축구 전문 해설자인 셈이다.
주영광은 1980년대엔 자신의 모교 연세대학교의 총감독을 맡아 대회를 지휘하며 일선에 잠시 복귀하기도 했다.
2.3. 별세
그러나 주영광은 1982년 9월 24일~ 9월 25일에 열린 연고전에서 후배들을 지도하고 난 뒤 9월 26일 급성 과로로 인한 호흡장애로 혼수상태에 빠졌다. 그는 9월 28일 오후 7시 40분, 경희의료원에서 향년 61세로 사망했다.3. 수상
3.1. 선수
3.1.1. 국가대표
[1]
1954년 월드컵 출전 당시 소속팀이었다.
[2]
당시 경성 팀의 핵심이었던
민병대와 자주 비교되곤 했다.
[3]
현재 업계 탑으로 불리는
한준희 해설위원이 항상 존경하는 해설위원으로 꼽는 인물이다.
2006년 기사,
2018년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