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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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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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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소왕(昭王)
(姬)
하(瑕)
생몰 기간 기원전 1027년 ~ 기원전 977년
재위 기간 기원전 995년 ~ 기원전 977년

1. 개요2. 재위 기간

1. 개요

주나라의 제4대 이자, 천자. 실질적인 중국 역사상 최초의 암군으로,[1] 강왕의 아들로 무리한 원정을 하여 주나라를 쇠퇴로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주 소왕도 죽었다.

2. 재위 기간

그는 명군 강왕의 아들로 태어나 태자가 되어 아버지 주 강왕이 죽은 뒤 왕이 되었다.

소왕 원년(기원전 995년), 동이족(東夷族)이 모반하자, 병사를 거느리고 정벌했다. 같은 해 소나라의 후작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 반란을 평정하였다.

소왕 11년(기원전 985년), 소왕은 첫번째로 초나라 정벌에 떠났으나 병력만 잃었다. 한수를 건너 큰 코뿔소만 보고온 것이 소득이었다. 그런데 그나마 소득이라는 거지. 사실은 뻘짓이다. [2]

소왕 14년(기원전 982년), 소왕은 제공과 신나라 백작과 함께 두번째로 초나라를 쳤으나 병사들만 잃었다. 가면 맨날 지냐? 반란은 진압하는데 외정이 시망

주 소왕 15년(기원전 981년), 그 당시에는 소왕은 주나라에 머물러 정사를 돌봤다.

주 소왕 16년(기원전 980년), 동이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군사를 거느리고 정벌했다. 그리고 같은 해에 초나라를 세번째로 정벌했으나 역시 소득이 없었다.[3]

소왕 17년(기원전 979년), 50승의 병력을 주나라로 돌려보냈다.

소왕 18년(기원전 978년), 소왕은 여나라에 머물러 영사도에서 기후명자기[4] 3개를 포상으로 내렸다.[5]

소왕 19년(기원전 977년), 소왕은 다시 초나라를 네번째로 정벌했으나 한수에서 빠져 죽었다. 안죽었으면 다섯번째도 갈 양반 사기에서는 남쪽에서 순수를 하다가 강에 빠져 죽었다는 식으로 나왔는데, 실은 초나라를 정벌하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 그것은 훗날 제 환공이 초나라를 칠 때 굴완이 한수를 이용해 막겠다는 말로 그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바가 있다. 잘 생각해 본다면 왕이나 되는 사람이 강물에 빠져 죽을 정도면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는 안 봐도 비디오다. 그 사실이 사기와는 달리 죽서기년에는[6] 자세하게 나온다.

《일주서》에서는 소왕이 24년(기원전 972년)[7]까지도 계속 재위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는데, 이러한 혼란은 공화 시대 당시의 혼란으로 인해 서주 초의 사료가 대다수 유실되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이 당시 음력 4월 8일, 꽤 큰 규모의 지진과 함께 지진광(earthquake light)이 관측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두고 점술사인 소유(蘇由)는 '위대한 성인이 서쪽 땅에 태어남을 알리는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지금은 천자의 치세에 끼치는 영향이 없겠으나, 1천년 뒤에는 저 성인의 가르침이 우리나라에 전해질 것입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동아시아 불교계에서는 해당 기록을 석가모니의 탄생과 연관지어왔으며, 이로 인해 남방의 상좌부 불교와는 한동안 불멸기원을 다르게 셈해 왔다.

[1] 이전 하나라 걸왕은 하나라 자체가 진짜 있던 국가가 아니란 설도 있고, 상나라 제신은 주나라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해 지나치게 까였다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2] 다만 아주 소득이 아닌 것도 아닌게, 소왕은 거기서 코뿔소를 만나보겠다고 말은 했었다. [3] 그 이유는 초나라가 한수의 험함으로 잘 지켰기 때문이다. [4] 사슴 모양으로 빚었다고 한다. [5] 정황상 여나라 제후에게 내린 듯 하다. [6] 육사(六師, 6개 군단)를 한수에서 잃었다며 패전을 암시하는 기사가 실려 있다. [7] 동아시아에서는 이를 기원전 1027년에 해당하는 연도로 셈했다. 이는 전근대 동아시아 역사가들이 주나라의 건국 연도를 기원전 1122년(기묘년)으로 보았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