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당시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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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47년 11월 3일부터 11월 29일까지 벌어진 스위스의 내전이다. 한국어 위키백과에는 스위스 통일전쟁이라는 표제로 등록되었다.
2. 전개
존더분트(Sonderbund, 분리연방)란 스위스에서 가톨릭을 믿는 7개 주( 루체른, 프리부르, 발레, 우리, 슈비츠, 운터발덴[1], 추크)가 1840년에 제안된 자유주의 성향의 신헌법에 반대하여 조직한 동맹이다.[2]존더분트[3]란 말은 사실 멸칭에 가깝고 당시 존더분트에 속한 주들 스스로 칭한 정식명칭은 방어동맹(Schutzvereinigung)이다. 연방정부의 권력을 확대하는 신헌법에 반대하여 기존에 각 주의 주권을 보장하던 국가연합 형태의 스위스 연합 체제를 수호한다는 의미.
아이러니한 것은 존더분트에 속한 우리, 슈비츠, 운터발덴 주는 1291년 영구맹약을 체결하여 스위스 연합을 창설한 원년 멤버주였다는 것.[4] 전쟁의 결과를 생각하면 말그대로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낸 격이다.
내전 결과 기욤 앙리 뒤프르 장군이 이끄는 자유주의 연방군이 11월 14일 프리부르를 제압했고, 11월 21일에는 추크 주 주의회가 항복을 결정했다. 연방군은 11월 24일 루체른을 점령하면서 사실상 승리하였다. 11월 25일부터 사흘간 차례로 운터발덴, 슈비츠, 우리 주가 항복했고, 마지막으로 11월 29일[5] 발레 주가 항복하면서 존더분트는 해체되었다. 연방군은 60명, 존더분트는 26명이 전사했다. 존더분트의 지도자 콘스탄틴 지크바르트뮐러는 10년간 망명 생활을 하다가 귀국해야 했다.
내전 패배 후 존더분트 주들의 정부들은 몰락하였다. 1848년 평화협정에서는 과거 존더분트에 가입했던 주들은 전쟁 비용으로 600만 프랑을 배상하도록 하고, 중립을 지켜 연방에 군대를 보내지 않은 아펜첼이너로덴과 뇌샤텔 주에도 각각 1만 5,000 프랑과 30만 프랑의 벌금을 부과했는데 이 돈은 전쟁 고아와 미망인을 돕는 기금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느슨한 국가 연합이였던 스위스는 이듬해인 1848년에 연방 헌법이 발효되어 연방 국가로 조직된다.
스위스에서는 예수회가 추방당하고 1973년 개헌될 때까지 헌법으로 예수회의 활동이 금지된다. 1844년 루체른 주에서는 당시 자유주의자들의 혐오 대상이었던 예수회를 초청하여 종교 교육을 하게 했는데 이것이 내전의 한 발단이 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