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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4세기, 축록중원(逐鹿中原)은 시작되었다! 속 일련의 사건. 작중의 조선 왕실이 기자의 후예를 자처하게 된 과정[1], 실제로 기자의 출신국인 상나라 예법을 중원진출 이전부터 습득할 수 있었던 뒷배경[2], 조선의 상징물 중 하나인 '청동 옥좌'의 연원을 다루고 있다. '비사(秘史)'라고 표현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작중 시점에서는 표면으로 드러나기 어렵고, 실제로 기억하는 이도 극소수 혹은 전무한 사건이다.[3]2. 구성
기원전 11세기 무렵의 실제 기자의 행적을 알아보는 것으로 시작해 본래 예맥계인 조선 공실의 혈통세탁 과정, 상나라 예법의 입수 경로, 청동 옥좌의 연원 등을 종합적으로 알아보고 있다.2.1. 기원전 11세기, 기자 일족의 운명
상주 역성혁명에 의해 중원의 천자국이 상(商)에서 주(周)로 교체되었지만, 당시 주나라가 획득한 천자국의 지위는 아직 불안정한 상태였다. 기존의 맹주 상나라에 비하면 예법 등 문화적인 면에서 여러모로 부족한 상태였으며, 곳곳에 남아있는 상나라 충성파는 상나라의 재흥을 노리고 있었다. 때문에 역성혁명을 성공시킨 주나라 무왕조차 상나라 주왕의 아들 무경을 - 무왕 본인의 동생 셋을 감시역으로 붙이는 조건이 붙긴 했지만 - 다시금 제후로 분봉해 상나라 유민들을 달래야 할 정도였다.[4] 기자를 주나라에서 멀리 떨어진 요동 지역에 봉한 것은 골수 주나라 반대파들을 기자한테 딸려보내 최대한 멀찍이 떨어뜨려놓기 위한 일종의 방편이었다.[5]한편, 훗날 조선의 모태가 되는 예맥계 부족 역시 기자가 분봉받아 요동으로 향하던 때와 비슷한 시기에 요동에 정착하였다. 당시 기자 일족은 요동의 기존 부족들에 비해 선진적인 문명을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이들의 정착 및 국가 형성 시도는 요동의 예맥계 부족들에게 큰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 조선의 조상되는 부족은 기자 일족에 맞서기 위해 요동의 예맥계 부족들이 협력하는 과정에서 이 연합의 맹주로 떠오르게 된다.
당시 기자 일족의 세력은 인근의 일반적인 예맥 부족들보다는 훨씬 강대했지만 조선의 조상들과는 엇비슷한 수준이었다. 결국 예맥 부족연합의 여타 소속부족과의 다툼으로 힘을 뺀 기자 일족은 조선의 조상들에게 끝내 패퇴하였으며, 패배한 이후 다른 예맥 부족들과 쌓은 원한으로 인해 몰살당하게 된다. 그러나 정작 조선의 조상들은 다른 부족들이 먼저 소모되면서 그리 큰 피해를 보지 않았다. 이에 따라 연합의 다른 예맥 부족들에게 기자가 '서쪽에서 건너온 마왕' 정도로 전승되며 공포심이 각인된 것과 달리, 조선 부족은 기자의 일을 빠르게 잊어버리게 된다.
2.2. 기원전 6세기, 요동통일전쟁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기자가 재조명 된 때는 기원전 6세기, 본편 진입 약 200년 전이었다. 조선이 양평을 중심으로 요동 일대의 강역을 확정짓고 좀 강한 일개 부족에서 고대국가로 발돋움한 요동통일전쟁의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이었다.중원의 전란을 피해 온 유민들은 여타 부족들이 기자를 마왕 취급하는 것과는 달리, 기자에 대해 별 악감정이 남지 않았던 조선으로 쏠렸다. 이렇게 유입된 중원계는 중원의 선진문물을 같이 가져오며 발전을 촉진하였다. 이를 확인한 당시 조선 부족장 부루[6]는 기자를 존숭하기 시작하였다. 한편으로는 중원계의 조선 유입을 더 촉진하기 위한 방편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변의 다른 예맥 부족들을 상대로 '마왕' 기자의 이름을 빌려 공포심을 심고 지배력을 확대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마침 기원전 576년, 송공공이 사망한 뒤 사마 탕택의 난으로 송나라가 혼란해지면서 송나라 고위층에서 망명자가 다수 발생하였다. 그 중 일부가 떠돌다 기자동래설을 믿고 조선에까지 이르렀는데, 부루는 상 유민들이 세운 송나라 출신인 그들을 환대하며 상나라 예법을 전수받는다.
충격적인 부분은 이후의 뒷처리였다. 부족장 부루는 상나라 예법전수가 끝난 뒤 배은망덕하게도 이들을 몰살시키고(...), 그 예법을 바탕으로 6세기 중반 기자 존숭을 넘어 아예 스스로 기자의 후손, 자성 기씨를 자처하며 '마왕'답게 주변 부족들을 정복하여 요동통일전쟁을 완수한다. 이후 스스로 조선후를 자칭하였으니, 작중 조선은 시작 배경부터 캐릭터성이 배신과 협잡, 힘과 공포에 기반해 주인공인지 악당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던 셈이다.
2.3. 청동 옥좌의 연원
조선 국군들이 앉는 청동 옥좌[7]는 기원전 10세기 무렵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초기에는 조선 부족을 맹주로 한 여타 제부족들의 화합을 상징하는 의미로, 공동의 적을 상대하면서 빼앗은 청동기도 사용되었지만, 대체로 우호 부족들이 선물로 보낸 청동기 역시 옥좌의 제작에 사용되었다.옥좌의 의미가 바뀐 것은 기원전 6세기 요동통일전쟁 무렵으로, 이때부터 청동 옥좌는 지배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이 되었다. 오로지 정복한 지역의 무기를 녹여서 붙이는 전통은 이때부터 확립되었다. 이 전통은 심지어 조선이 연나라를 정복하고 중원 열국의 일원이 된 뒤에도 계승되었으며, 훨씬 뒤의 칭왕 시기까지도 이어지게 된다.[8]
3. 결과
오래전에 노옹(老翁)에게 들은 이야기 중에 사람 가죽을 뒤집어 쓰고 사람으로 변장하여 사람들의 사이로 숨어들어가 사람의 심장을 파먹는 귀신의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후략)[9]
조선 국군들은 한 때의 숙적이던 기자를 자신들의 조상으로 받들게 되었으며, 기자는 자신들을 멸족시킨 원수의 후예들에게 제삿밥을 받아먹는 아이러니한 처지가 되었다. 다만 2차 창작이지만 진행자[10]의 매 편[11] 표지[12]에도 링크되면서 사실상 준공식 취급받는 '조선세가'[13]에도 서술된 점은 특기할 만하다. 해당 작품에서 사관이 '우연히 관련 기록을 접하게 되어 내용을 서술해둔다'는 식으로 묘사되었기 때문에, 먼 훗날에나마 '진실은 결국 밝혀진다'가 되었을지, 아니면 해당 사관이 숙청되고 기록은 봉인 혹은 검열 되었을지는 순전히 상상의 영역이 되었다.
참치(참가자)들 역시 다소 예상 외였다는 반응이었으며, 후에 조선이 '신의 없는' 행동을 할 때마다 종종 '원래 이런 나라였다'면서 가끔 언급된다. 때로는 여태까지의 행적을 돌이키는 자조적인 의미로, 때로는 참치들 스스로가 선택한 배신의 책임을 떠넘기는 의미로 다양하게 쓰이는 편이다.
[1]
메타적으로는 스타팅 판정에서 국군 가문의 성씨 판정에서 '기씨'가 걸렸기 때문이었다.
[2]
연나라 정벌 이후
송휴공의 방문 때 예법 판정 결과 조선 공실이 상나라 예법을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언급되었다. 다만 당시에는 판정 결과가 크리티컬이 나오면서 '몰랐던 부분까지 죄다 찍어서 맞춤'이란 부분에서 다들 웃음이 터져버렸다. 그래서 '이전까지 연, 제와도 제한적인 교류 정도만을 하던 조선 공실이 어떻게 상나라 예법을 알고 있는가? 정말 기자의 자손인가?' 하는 부분은 훨씬 뒤에 판정하게 된다.
[3]
때문에 본편의 전개와는 사실상 별 관련이 없으며, 다만 이미 전개된 내용의 개연성을 더하기 위해 잡담판에서 판정하여 알아본 부분이다.
[4]
실제 역사에서도 있었던 일이다.
[5]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 무왕 사후 상나라 재흥을 외친 '삼감의 난'은 역사와 똑같이 발생하였다.
[6]
해당 판정 시에는 그냥 '조선 부족장', '초대 (자칭) 조선후'로 표기되었고, 한동안 그냥 AA캐릭터 이름인 '브로리'로 불렸다. 그러나 이후 '브로리'와 '부루'의 명칭적 유사성, 그리고 <이 인물의 이름이 '부루'가 될 경우 기묘하게도
제왕운기의 관련 내용이 작중 조선 이야기를 신화적으로 포장했다고 해석 가능해진다>는 주장이 67잡담판 끝부분에 등장한다. 이후 본편 193어장의 1000으로 '초대 조선후의 이름은 부루'가 신청되면서 이전까지 '초대 조선후', '브로리' 정도로 통칭되던 그의 이름은 부루로 확정된다.
[7]
1000번 앵커(= 각 연재 편의 1천번째 작성 글) 특례로 설정에 편입되었으며, 시작은
얼음과 불의 노래에 나온
철왕좌의 패러디적인 의미였다.
[8]
일단 본편의 5대 조선 국군이자 3대 조선왕인 기설 시기(179어장 초반)의 판정에서 이러한 청동 옥좌 확장은 여전히 계속중인 것으로 드러났다. 다만 과거의 과시적 의미는 사라졌으며, 그냥 전통이니까(...) 계속하는 의례적인 행위가 되었다.
[9]
준오피셜 2차 창작인 '조선세가' 중에서
[10]
연재처인
참치 인터넷 어장 용어로 '어장주'
[11]
연재처 용어로 '어장'
[12]
연재처 용어로 '>>0' 또는 '0번 글'
[13]
작중 전개를 조선 중심으로 실제 사서를 한글번역한 풍의 문체로 묘사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