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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29 12:52:04

연나라 정벌

연나라 정벌
燕國征伐
Conquest of Yan
시기 기원전 396년~ 기원전 395년
장소 연나라 전역
(오늘날의 랴오닝 성 서부, 허베이 성 북부, 베이징시)
원인 연과 조선의 외교적 마찰,
조선의 확장 욕구,
중산 환공의 복국 시도,
위의 국군 교체로 인한 구 중산국 일대 힘의 공백
교전국 조선朝鮮
중산中山
누번樓煩
연燕
조趙
지휘관 장군 고거(高巨)
부장 악자(樂子)
중산후(中山侯) 항(恒)(중산 환공(桓公))[1]
누번 대족장
연후 희재(연간공)[2]
고죽성주
무종성주
무양성주
무원성주
조나라군 대장
병력 조선군 5만 9천
중산군 5천
누번군 1만 1천

총 7만 5천여 명
연군 약 12만 9천[3]
조군 6만

총 18만 9천여 명
피해[4] 조선군 1천명 미만
중산군 2천 5백여명
누번군 4천 4백여명

총 8천여명 손실
연군 3만 7천여명
조군 5천 5백여명

총 4만 2천 5백여 명 손실
결과 연나라의 멸망, 연 (후)간공의 사망, 중산의 일시 복국, 위나라의 외교적 개입
영향 조선과 중산의 표면적 관계 단절
조선 공실이 기자의 자손으로 공인됨
조선이 중원 국가로 인정받음
위나라가 중산 재원정에 나서게 됨

1. 개요2. 배경
2.1. 중산 & 누번의 사정2.2. 조선의 사정2.3. 연 & 조의 사정
3. 전쟁의 전개
3.1. 성서격동, 벼룩의 간마저 빼먹을 조선3.2. 고죽 전투, 손쉬운 첫걸음3.3. 연의 수도를 점령하다3.4. 고 전투, 중산의 구사일생3.5. 역현 전투와 전역의 종결
4. 결말5. 전후처리
5.1. 중산과의 관계 단절5.2. 조선의 신영토 정책5.3. 친척(?) 송나라의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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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4세기, 축록중원(逐鹿中原)은 시작되었다!에 나오는 가공의 전쟁. B.C. 396~395년 동안 조선, 중산, 누번의 연합군이 연, 조와 맞붙은 전쟁이다. 플레이어 국가인 조선이 작중 최초로 치른 전쟁이며, 조선은 여기서 연을 멸망시키고 그 땅의 대부분을 정복한다. 그 결과 국력이 사실상 2배에 가깝게 뻥튀기되는 급격한 체급 향상을 이루었지만, 동시에 위나 제 등 중원의 강국들과는 여전히 격차가 있음을 확인하기도 하였다. 또한 전후 조선 공실이 기자의 후예로 공인받으면서, 조선이 중원 국가들에게 토벌해야 할 이적(夷狄)이 아닌, 열국의 일원이자 외교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2. 배경

2.1. 중산 & 누번의 사정

중산국은 본래 B.C.406년 경 위(魏)나라 문후(文侯)가 보낸 악양의 공격으로 한 차례 멸망했었다. 그러나 지도자인 중산후 선우 항(鮮虞 恒)은 도주에 성공하였고, 이후 세력을 다시 규합하여 B.C.403년에는 옛 수도인 고[5]를 탈환하고 굉장히 숙련도가 높은 병력[6] 1만여를 다시금 휘하에 두기에 이르렀다. 이에 위협을 느낀 조나라와 연나라는 협력하여 대대적인 토벌에 나선다. 같은 해에 조군 3만 9천, 연군 2만 7천이 연합하여 중산 잔당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으나, 중산 환공은 여기서도 병력 6백을 수습하여 달아나 누번에 의지하여 다시금 재기를 노렸다.

기회를 노리던 그가 포착한 것은 B.C.396년, 위문후의 사망으로 구 중산국령을 개인 영지로 관리하던 위무후(당시에는 태자 위격)가 공위를 계승하기 위해 이동하면서 발생한 힘의 공백이었다. 그러나 누번의 적극적인 지원을 합하더라도 중산과 누번만으로는 위가 빠진 연과 조의 물량조차 감당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린 중산 환공은, 연나라의 동쪽에 위치한 조선에 눈을 돌리게 된다.

2.2. 조선의 사정

흉노, 누번과 함께 동호를 압박해 그 땅을 나눠갖는 등 성공가도를 달리던 조선은, 이 시기에는 북으로 서요하까지, 서로는 연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남쪽으로는 한반도 북서부[7]로 확장해 나갈 정도로 국력을 신장한 상태였다. 또한 제나라 공위를 찬탈하게 될 전씨들과 교류하며 유학자를 초빙하고 손자병법을 수입하는 등, 외형뿐 아니라 내부 역시 일신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렇게 스스로의 실력에 대한 자신감을 키워가던 조선에게 있어, 그간 조선 공실이 꾸준히 대내외적으로 기자의 후손임을 자칭[8]해 왔음에도 자신들을 산융의 오랑캐 취급하는[9] 연 간공의 태도는 극심한 분노를 일으켰다.

이 와중 누번을 통해 전해진 중산 잔당의 협력 제안은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으로 가려운 데를 긁어주었다. 심지어 조선에 유학을 전수하러 온 학자들의 대표격인 외왕파[10] 유학사 무생마저 형세상 연과의 싸움은 필연이니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조언할 정도로 조선 내에서는 전쟁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2.3. 연 & 조의 사정

연합작전으로 중산 잔당을 몰아내고 한숨 돌린 두 나라였지만, 끝내 중산 환공을 놓치고 만 점은 그들의 경계심을 극도로 끌어올렸다. 위나라의 공격으로 한번 멸망했음에도 잔당들을 끌어모아 옛 수도를 탈환했던 그의 수완은 양국에 중산 환공을 잡거나 죽이기 전에는 안심할 수 없다는 강박을 심어주었으며, 이는 양국의 초기 대응 방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3. 전쟁의 전개

3.1. 성서격동, 벼룩의 간마저 빼먹을 조선

위에서 언급한 사정으로 서로 이해가 일치하여 연나라 공격을 위해 손을 잡은 조선과 중산 잔당이었지만, 공격 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둘의 입장 차이가 문제로 부각되었다. 중산이 복국 이후 조선과 '입술과 이 같은 사이'를 구축하여 조선의 점령지 수비를 돕는 방패의 역할을 하는데까지는 의견이 일치하였다.

문제는 전략 목표부터였다. 중산 환공은 서쪽에서 중산+누번이, 동쪽에서 조선이 연을 협공하여 자신은 복국을, 조선은 연의 동쪽 영토를 적당히 뜯어내는 정도를 계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반면 조선 세후 기식은 이 기회에 아예 연 동부에 위치한 주요 거점인 고죽과 무양을 넘어, 연의 수도인 계도 아니고 조와 접하는 서부의 요지인 무양까지 점령해 사실상 연을 멸망시키고자 하였다. 동급의 나라를 전쟁 한번으로 먹어치우겠다는 이 무모한 계획에 질린 중산 환공은 협력을 심각하게 재고했지만, 구 중산국령에서 머물던 위나라 태자 위격이 공위 계승을 위해 복귀하며 발생한 위군의 공백을 틈타 복국을 노린다는 중산 잔당의 계획이 동네방네 소문나도 좋겠냐는 세후 기식의 한 마디에 굴복하였다.

결국 국력에서도 앞서고 입장 상으로도 우위인 조선에 끌려다닌 중산 잔당은 조선에 도움을 받기는커녕 조선에 도움을 주는 형태의 작전안에 합의할 수밖에 없었다. 합의된 안은 다음과 같았다.

1) 중산 환공이 먼저 단독으로 북쪽 변경의 대(代)[11] 인근에서 연과 조의 시선을 끈다.
2) 연과 조의 경계가 중산 환공에게 쏠리면, 조선-누번 연합군이 연의 동부 국경 거점인 고죽을 들이치고, 이후 무종을 공격한다.
3) 무종까지 점령하면 누번은 연군을 피해 이동하여 중산 환공을 지원한다.
4) 조선군은 이후 단독으로 진공한다.

사실상 중산 잔당은 득달같이 달려들 연, 조를 상대할 미끼가 된 셈이지만, 다른 방도가 없으니 결국 조선의 계획에 승낙하고 일이 잘 풀리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B.C. 396년, 중산 환공은 계획대로 대 인근에서 5천 병력을 이끌고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며 연과 조의 시선을 끌었다. 일전에 중산 환공의 군사적 능력에 당황했던 두 나라는 크게 놀라 바로 대응에 들어갔다. 연나라는 중앙군 일부 등을 더해 증편한 무양군 2만 3천 병력으로 중산 환공을 직접 상대하고, 조나라는 위군이 떠난 구 중산국령 주변 지역에 4만 9천 병력을 투입, 이번에는 무조건 중산 환공을 사로잡거나 죽여서 복국 시도 자체를 끝장내 버리겠다는 만반의 각오를 다졌다. 그리고 거의 과잉전력 투사가 아닌가 싶을 정도의 이 병력 배치는 막 연나라 공격을 시작하는 조선에게는 더할 나위없는 호재였다.

3.2. 고죽 전투, 손쉬운 첫걸음

중산군이 위에서처럼 시선을 끌어주었지만, 조선후의 측근인 장군 거가 이끄는 조선의 5만 9천 대군의 진공에는 여전히 위험이 남아있었다. 요서까지 조선령이라고는 하지만, 요서는 이미 이 당시부터 요택(遼澤)이란 대규모 늪지대가 존재하고 있었다.[12] 이 때문에 대규모 병력의 이동이 한정되는 요서의 회랑 지형[13] 출구 부분에 연나라 측이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는다면 몇 배의 병력으로도 뚫기가 어려운 난감한 상황이었다.[14]

하지만 조선에게는 다행, 연나라에는 불행으로 이런 역할을 수행해야 할 접경지역 책임자인 고죽성주는 자질이 전혀 없다시피 한 인물이었다. 조선을 '산융의 일파' 취급한 연간공처럼 아예 무지한 이들도 상당수에, 나머지도 연과 조선의 국력차를 심하게 과대평가하는 분위기가 연나라 전체에 존재하기는 했지만, 그걸로도 정상참작이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본래 연나라 남부에 위치한 무원성주의 자식이었다가 고죽 쪽의 양자로 보내져 지위를 계승한 덕에 지역에 대한 이해도 엉망이었고, 그렇다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내정에 힘쓰거나 주변 정보 파악에 나서지도 않았으니 요서회랑 출구의 요충지를 지켜야겠다는 생각 씩이나(...) 되는 걸 할 리가 없었다.

덕분에 연군의 제지를 전혀 받지 않고 편하게 요서회랑을 빠져나온 조선군은, 고죽의 연군과 그 성주의 상태까지 심히 알 만 하다는 합리적인 추론까지 해 가며 공격 준비를 할 수 있었다. 방어태세도 전혀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난데없는 기습을 받게 된 고죽성주는 결국 조선군에 제대로 된 타격을 입히거나 시간을 끌어보지도 못하고 성을 함락당한 뒤 수도인 계도 아니고 그보다 남서쪽의 무양을 향해 도주하는 처지가 된다.

그리고 고죽의 성민들은 조선군을 예맥 오랑캐들이고 뭐고 출신조차 따지지 않고 막장 성주를 몰아낸 해방자(...)로 환영하였다.

3.3. 연의 수도를 점령하다

원정의 첫번째 고비인 고죽을 별다른 피해 없이 손쉽게 점령한 조선군은 이후 거점을 하나하나 점령해나가는 안전책 대신 다소 모험을 택하기로 하였다. 조선군의 총대장인 장군 거는 다음 거점인 무종은 지원하러 온 누번군에게 견제를 맡겨 시간을 끌고, 조선군 본대는 다른 지역의 지원군이 추가로 당도하거나 중산 잔당을 상대하러 간 연군이 회군하기 전에 연나라의 수도인 계(薊)를 직공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장군 거의 전략은 상정한 이상으로 잘 맞아떨어졌는데, 심지어 견제 역할로 보낸 기병 위주의 누번군조차 의외로 무종군을 상대로 한 공성전에서 무종군이 함부로 움직이기 어려울 정도의 큰 피해를 주며 선전하였다.

연간공은 주변의 지원이 제 때 당도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자 추가 징병을 통해 3만 7천여 명으로 규모를 확대해 조선군을 상대하려 했는데, 이것이 그의 패착이 되었다. 상대가 평범한 장수였다면 머릿수를 늘려 방어를 수월하게 하고 적에게 피로를 강요할 수 있었겠지만, 장군 거는 손자병법을 완벽하게 체화해낸 명장[15]이었던지라 급하게 징병한 어중이떠중이들은 조선군이 쉽게 찌르고 들어갈 약점만 되어버리고 말았다.

장기전[16]으로 버티기도 전에 전 병력의 4분의 1을 손실한 것을 깨달은 연간공은 크게 당황, 잔여병력 중 절반[17]을 이끌고 남쪽의 무원으로 도주를 시도한다. 그가 서쪽의 무종으로 도주하리라 예상[18]했던 조선군은 일시 당황하지만, 별부사마 악자 휘하의 6천 병력이 추격, 300여명을 손실하는 동안 도주를 시도한 1만 3천~1만 4천 규모 연군의 3분의 1 이상을 살해하고 나머지 대부분을 낙오시켰다. 그 결과, 연간공이 무원에 도착했을 때 남은 병력은 겨우 3천이었다. 3만 7천 연군이 3천이 되는 동안 조선군은 기껏해야 수백의 피해를 본 대승이었다.[19]

이후 입성한 조선군은 계의 성민들이 수도 주민들답게 여전히 연간공에 충성을 바치며 조선군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상황에 직면했지만, 마침 뒤늦게 도착한 무양에서 계로 보낸 지원군 1천 6백여명[20]을 추가로 1명도 남김없이 전멸시키는 것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단기적인 통제권 확보에 성공한다.

3.4. 고 전투, 중산의 구사일생

조선군이 이처럼 연의 수도까지 점령하고 군주 연간공까지 도주시키며 승승장구하는 동안, 중산 잔당은 말 그대로 지옥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우선 조선군이 고죽을 점령하고, 이후 누번군이 무종군을 견제하다가 이를 끝내고 지원하러 올 때까지 게릴라전으로 무양군을 붙들어 놓는데 어찌어찌 성공은 했지만 군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다. 아무리 게릴라전이라지만 5천 병력으로 4.5배가 넘는 2만 3천 병력을 상대하는게 쉬울리가 없던 데다, 초반에는 지도 담당자가 승산이 없다고 판단해 연군에 투항해버리기까지 하였다. 그나마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고 진지를 옮겨서 피해를 최소화 했지만, 결국 누번군이 오기 전까지 중산군 사상자 1100여명[21], 연나라 무양군 사상자 920여명[22]으로 1대 1도 못 되는 처참한 교환비를 찍다가 누번군 1만여명의 지원으로 구사일생하였다.

이후 누번군과 연합하여 판정승[23]을 거두고 연군을 철수시킨 이들은 본래 목적인 중산의 복국을 달성하기 위하여 옛 수도였던 고(顧) 땅으로 진군하였지만[24], 이번에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땅주인 위나라의 양해를 얻고 구 중산국령 인근에 포진한 조군 4만 6천여명(...)이었다. 대에서 상대했던 연군의 2배, 해당 시점 중산+누번 연합군 가용병력의 3.5~4배 가까운 수를 자랑하는 이 무지막지한 인해전술에, 중산 환공은 별 수 없이 탈환한 고의 성을 활용한 농성전으로 대응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는 새로운 문제를 가져왔다. 기병이 주력에 기본적으로 성이 익숙하지 않은 목축 생활을 하는 누번군은 농성전에 반대하였던 것. 어찌어찌 이들을 어르고 달래 농성전에 돌입했지만, 조군의 공격은 매서웠고 성은 함락 직전에까지 이르렀다. 설상가상으로 누번군은 '이럴 거면 뭐하러 농성전 했냐'고 중산군을 비난했고, 중산군도 '농성을 하지 않았으면 훨씬 전에 죽었다'며 누번군에게 일갈했다. 서로 아옹다옹하며 상대 지휘부 책임론까지 들이밀며 내분 직전까지 이르렀으니, 말 그대로 툭 건드리기만 해도 쓰러질 상황이었는데...

뜻밖에도 조군이 여기서 철수하였다. 무리해서 대병력을 동원한데다 구 중산국령은 본래 위나라가 관리하던 땅이었기에 조군은 보급에 난항을 겪고 있었고, 굶주림을 참아가며 취한 최후의 대공세마저 중산, 누번 연합군이 아슬아슬하게 막아내자 조군은 추가로 공세에 나설 여력을 완전 상실하였던 것이다. 이를 확인한 누번군과 중산군 지휘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곧바로 서로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건네며 농성 중 발생하였던 양측의 갈등을 해소하였다.

그러나 기껏 멸망시켰던 중산국이 이렇게 다시 복국하게 된 것은 위나라, 특히 해당 지역을 태자 시절에 개인 영지로 영유했던 새 국군 위무후 위격의 입장에선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조나라 역시 기껏 위나라의 눈치를 봐 가며 양해를 얻고, 무리해가며 대병력을 파견하였는데도 골칫거리 중산 환공의 목은 커녕 별 소득 없이 철수한 것은 위나라와의 관계를 생각해서건 자국의 안보 때문에건 반드시 만회해야 할 실태였다. 결국 이는 1년 뒤인 B.C. 394년, 위와 조의 중산을 향한 연합 공격으로 이어지게 된다.

3.5. 역현 전투와 전역의 종결

고 전투에서 중산-누번 연합군이 아슬아슬한 분투를 이어가는 동안, 동쪽에서는 조선군과 연군 사이에 새로운 전투가 벌어졌다. 잔병 3천을 데리고 도주한 연간공을 받아들인 무원성주[25]는 자신의 군세가 연나라 내 최정예병인 것을 믿고[26] 북상해 '오랑캐'들에게 빼앗긴 수도를 탈환하고자 했고, 반대로 조선군 역시 남하하여 화근을 제거하고자 하면서 둘이 부딪친 것.

형세는 시작부터 조선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조선군이 계를 공략하는 동안 누번을 시켜 견제했던 무종의 경우, 고죽과 계 사이의 위치로 인해 조선군에게 배후의 위협으로 작용할 수 있었지만 조선군이 수도 계를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자 조선에게 항복하였다. 무종성주 입장에서는 '더 튼튼하고 병력도 더 많은 계도 함락당했는데, 이미 누번과의 싸움으로 손상당하기까지 한 무종이 견딜 수 있을 리 없다'는 상식적인 결론이었지만, 조선군 입장에서는 점령지 수비에 필요한 최소한의 병사를 제외한 나머지 전부를 남하에 투입할 수 있게 된 상당한 호재였다.

반면 연군의 경우, 제나라에 보낸 구원 요청에는 '얼마나 약하길래 일개 이민족한테 수도까지 밀렸냐'며 조롱만 돌아온 것도 모자라, 위나라와 조나라가 중산 방면에 집중하며 소극적으로 나오면서 결국 추가적인 증원 없이 조선군을 상대하러 가야 했다. 그나마 조나라의 경우 무원 쪽의 지원을 위해 1만 4천여 명을 파병했지만, 이 병력 역시 유사시 연군의 영토 탈환까지 지원하는 적극적 목적이 아닌, 무원 수비만 지원하는 소극적 목적의 파병이었다. 무원성주가 일단 수비 태세를 취하며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면 남하하는 조선군을 상대로 이 병력의 수성 지원을 받을 수 있었겠지만, 성주는 연간공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조선군을 얕보는 우를 범하며 연군 단독으로 북상을 결정해 버리고 만다. 패잔병 3천밖에 남지 않아 발언권을 상실하다시피 한 연간공까지 '수도 계의 성민들에게 탈환하러 온 관군임을 보이기 위해선 군주의 존재가 필요하다'며 사실상 반-강제로 끌고 간 것은 덤.

B.C. 395년, 연나라의 무원성주는 무원 방위를 조군에게 위탁한 뒤 수도 탈환의 명목을 내세우며 2만 4천여 병력을 이끌고 북상하였다. 한편 조선의 장군 거는 무양성 접수, 무양군 항복 접수, 고로 향하기 전 중산-누번과의 논의 등을 끝낸 뒤 후방 안정을 위해 1만 4천을 남겨둔 채, 4만 5천의 병력을 이끌고 남하하였다. 두 군세는 중간 즈음에 위치한 역현(易縣)[27]에서 마주치는데, 초반의 포진은 연군이 우세하였다. 조선군이 강을 끼고 방어하는 연군을 상대로 도하를 시도하는 형세가 되었던 데다, 노려볼 만한 도하지점도 오로지 한 곳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군을 이끄는 장군 거는 오히려 압도적인 통솔력으로 이를 극복, 단숨에 도하를 성공시키고 오히려 연군에게 피해를 강요하는데 성공한다.[28] 우세한 지리적 요건을 전혀 살리지 못한 데다, 이제는 도하를 끝낸 거의 2배의 조선군 병력을 상대해야 하는 연군의 어수선한 분위기, 그리고 도하 저지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연군 사령관(무원성주)의 자질을 꿰뚫어본 장군 거는 이후 계속해서 연군을 몰아친다. 결국 연군은 제대로 버티지도 못한 채, '오랑캐'라고 얕보던 조선군을 상대로 전 병력의 39%, 9천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고 와해되었다.

도주한 무원성주는 연나라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 연간공을 일부러 전장에서 휩쓸려 죽게 만들고, 그 후계마저 아무도 모르게 처리한 다음, '연나라의 대통은 끊겼고 자신은 순장이라도 자원하고 싶었지만 무원 백성들을 책임져야 하니 어쩔 수 없었다'며 조나라에 귀부한다. B.C. 395년, 그렇게 연나라는 멸망했다.

조선군의 보고를 통해 이 소식을 접한 조선 조정에서는 '이미 동급의 나라인 연을 멸망시킨 상황에서 최소 연과 동급에 아마 그 이상일 조나라와 무원 때문에 연이어 전쟁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전투가 벌어졌던 역현-역수 일대까지만 접수하고 귀환을 명한다. 조선군이 이 명령을 따라 역현까지 접수하고 철군하면서, 전쟁은 종결되었다.

4. 결말

연나라의 멸망. 위나라의 외교적 개입

역현 전투에서 연간공이 후계 없이 사망하고, 조선에 점령되지 않은 잔여 세력이 조나라에 귀부하는 것으로 연나라 정벌이란 유혈극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전쟁은 끝났어도 '연나라 정벌'을 완료를 선언하기까지는 아직 한 고비가 남아있었다. 바로 위나라였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조선, 중산 잔당, 누번 연합군의 이번 군사행동은 애초에 위문후가 사망하고, 위나라 입장에서 월경지인 구 중산령을 관할하던 위무후가 본국으로 철수해 제후위를 안정적으로 승계하는데 집중하며 발생한 힘의 공백을 찌른 행위였다.

문제는 이 시기 위나라는 중원 최강국으로, 갓 연나라를 멸망시켰고 당장 점령지 소화와 조나라 견제만 해도 버거울 조선이 상대하기에는 심히 부담스러운 상대였다는 점이었다. 위문후 시기의 재상 이회가 이미 변법을 진행해 국력을 상당부분 신장시킨 데다, 당장 이름난 명장만 해도 오기[29], 악양[30]에 위무후 본인도 군재가 출중했다. 목민관으로는 서문표가 있었고, 이외에 전문, 공숙좌 등도 이름난 대신으로 명성을 떨쳤다.

전쟁 기간에는 조나라에 대응을 일임하는 태도를 보였다지만, 연나라가 완전히 멸망하고 중산이 복국해 태자 시절의 영지를 상실하기까지 한 상황은 위무후의 자존심을 긁고 신경을 건드리기에는 충분했다. 거기다 연나라의 후계가 끊겼다지만 주나라 천자를 움직여 새로운 제후를 분봉하거나, 방계 후손을 제후로 임명하고, '중화를 범한 오랑캐를 토벌하라'는 식의 칙령이라도 내리게 하면 명분도 차다 못해 넘쳤으니 이쪽도 완전히 안심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조선에는 다행스럽게도, 위무후는 중산과 조선을 한꺼번에 바로 적대하기보다는 우선 조선에 사신을 보내 상대를 파악하는 방침을 택했다. 처음 접하는 세력인데다 진위는 알 수 없지만 일단 군주가 기자의 후손을 자처하는 만큼, 처음부터 오랑캐 취급하기 보다는 허실을 탐지하고 회유의 여지를 보기로 하였다.

그렇게 파견된 위나라 사신[31]은 방문에서 조선을 상당히 높게 보는 결론을 내렸다. 이전까지 존재감도 없던 변방국인 조선이 의외로 위나 제 같은 탑티어 강국 수준은 아니어도 조, 한에는 비길 수 있을 정도로 체계가 잡혀 있으며, 공실의 예법 등을 보았을 때 조선후가 기자의 후손을 자칭하는 것도 신빙성이 높다고 본 것이다.

이런 결론에 기반해 위 사신 공숙좌는 조선후가 중원계 공실답게 오랑캐인 중산과의 동맹을 끊고 적대를 천명하고, 대신 자국(위나라)과 조나라와 화친을 맺을 것을 요구했다. 거기에 더해 실한 당근까지 눈 앞에서 흔들었으니, 순전히 자칭이던 조선후의 작위를 주 천자에게 주청해 공인받게 해 주고, 기자의 후손이란 것도 공증받게 해 주겠다 제의했다. 조선후 기식은 이 제의를 승낙, 이후 주나라 수도 낙양을 방문해 정식으로 천자에게 제후로 인정받고, 조, 위, 한의 삼진 제후들, 그리고 악양과 만남을 가진다.

이것으로 위나라와의 분쟁 여지도 해결, '조선의 연나라 정벌'은 완전히 종결되었다.

5. 전후처리

중원열국들에 이 소식이 전해지자 그 중 특히 산동에서 자웅을 겨루고 있던 노나라와 제나라는 이를 굉장히 반겼다.
원래부터 제나라는 산동반도 남부의 송-노-월 삼국의 공동대응을 당하고 있는 처지였기에 어떻게든 활로를 모색하고 있었고, 이는 제나라와 조선이 꽤나 긴밀한 교류를 가지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였다.[32]
이런 마당에 이민족 국가인 줄로만 알았던 조선이 실제로는 중원계가 맞았다는 공증이 확정되자, 제태공 전화는 아예 "기쁜 오산"이라는 표현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준의 쾌재를 불렀다.
다른 한편으로 아무리 한심했다지만 중원계 국가를 갑자기 쳐날리고 그 자리에 들어앉았던 조선을 경계했던 노나라도 중원계 국가, 그것도 송의 친척나라라는 것이 알려지자 중원계인 이상 손을 내미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33]
아예 제나라를 상대로 한 동맹에 끌어들일 목적으로 친교를 청했지만 조선은 상기한 이유로 제나라와의 친분 또한 고려하고 있어 반려되었으나, 이에 목공 희현은 도리어 선물을 전달하면서 후일을 기약하기까지 하였다.

5.1. 중산과의 관계 단절

위나라의 요구에 따라서, 조선은 중산국과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끊기 위하여 이를 알릴 사신을 보냈다. 당연하겠지만 이 역할을 맡을 사람은 통보 직후 당장 분노한 중산의 사람들에게 붙들려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으며, 따라서 목숨이 아깝지 않고 그 빈자리가 크지 않을 인물이 선정되어야 했다.

어떠한 과정을 거쳤던 간에 이 책무는 이름이 전하지 않는 어느 성의 성주에게 돌아가 그는 곧바로 환공에게 조선의 통보를 전달하기 위해 향하여, 대뜸 말하는 것에 가깝게 이를 환공에게 알렸다.

자연스럽게 이는 중산 환공의 노기를 복돋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34] 순간 환공의 뇌리에 이 통보는 "공식 석상"에서의 행동임이 스치고, 이 판단을 기초로 사신에게 관계의 단절은 전쟁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것이냐고 떠보았다. 그 대답은...
"...그건 정말 재미있겠군, 재미있는 일일 것이다!"

-성주 지 아무개

이 말을 들은 환공은 조선이 말로 적대를 천명하긴 했지만 굳이 조나 위의 환심을 사려고 행동으로까지 나서지는 않으리란 명확한 확신을 가지고 사신을 정중히 돌려보냈다. 전후사정을 모르고 보면 외교적 수사를 넘어서 이게 회담인지 잡담인지를 알 수 없는 내용으로 점철되어 있었지만, 환공은 어찌되었든 조선의 사정과 그 의중을 정확히 파악하는데 성공하였고, 이로써 조선은 중원의 국가들에게 있어 명백하게 중산국의 적이 되었다.

이후 성주는 이 명백한 외교적 공로에도 불구하고 무명으로 남았으며, 다시는 사서에 모습을 보이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35] 그러나 그 후손인 지로는 출세하여 최종적으로는 천관아경이 되었다.

5.2. 조선의 신영토 정책

한편 원하던 바 대로 연나라의 모든 지역을 얻어내고 거기에 더해 어찌되었건 중원계라는 공인을 통해 중원국가들 간의 관계를 비교적 친근하게 시작하여 연을 멸하였다는 불안 요소를 완화할 수 있었던 조선이었으나 말 위에서 얻은 천하를 말 위에서 다스릴 수 없듯, 점령한 지역을 온전히 조선의 것으로 하기 위해서는 결국 시간과 수고를 들여야 했다.

당시 예는 조선후 기식에게 이 문제를 해결할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했는데, 하나는 현지의 유력자를 기용하여 빠른 안정화를 노리는 것, 두 번째는 본인이 직접 구 연나라 지역의 본령화를 지휘하는 대신 평소 눈여겨보던 인재 2명[36]을 기용하여 행정 공백을 메우는 것이었다. 세후는 이에 후자를 택하는 동시에 당시 받아들인 중원의 관제 구조를 기반으로 대부 예를 조선상으로 승진시켰다.

동시에 거는 새로 얻은 지역의 전반적인 방비 및 통제 거점 확보를 위해 이에 중심 거점으로 적합한 후보지로 두 곳을 기식에게 소개하였다. 구 연나라 수도인데다 근처에 관문을 짓기에 적합한 산지가 있었던 계와, 개발이 미흡하나 요새로써는 이만한 입지가 없던 무양이었다.

조선의 여력으로는 두 곳을 동시에 개발할 수도 없었던데다 망했다지만 연나라의 수도였던 만큼 민심이 더 불안정했던 계에 우선도를 배정하였고, 이 곳은 훗날 조선의 새로운 수도가 되어 맥성(麥城)[37]으로 불리게 된다.

5.3. 친척(?) 송나라의 반응

조선이 중원 열국의 일원으로 공인받는 데 있어 최후의 고비는 송나라였다. 조선 공실이 '기자의 후손'을 자칭했던 게 천자국 주나라에 의해 공인받았다고 해도, 같은 상(商)나라 왕실의 후예인 자성(子姓) 제후국[38]인 '동족' 송나라에게 동족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면 두고두고 뒷말이 나오고 트집거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송나라의 반응은 상상 이상으로 열광적이었다.

삼감의 난[39] 이래 상나라의 후예는 오직 자신들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동족이 나타났다면서 실로 감동의 도가니가 된 것.

어느 정도로 감동을 받았는가 하면, 연나라가 완전 멸망하고 조선후가 주나라 천자의 책봉을 받은게 B.C.395년인데 이듬해인 B.C.394년에 송 휴공이 바로 움직였다. 그것도 송이 조선보다 예법상 서열이 위인데도[40], 조선후를 송으로 초청하지 않고 본인이 직접 조선으로 행차하고 본인이 있는데도 조선후 기식에게 제사를 주관시키기까지 하는 특례의 특례, '퍼주기'식 행보를 보인다.

그리고 송공은 조선후가 주관하는 제사를 참관하다 대성통곡하고야 만다.
조선은, 이 머나먼 오랑캐의 땅에서도 조상의 예법을 완벽히 보존해오고 있었군요....! [41]
제단의 위치부터 소소한 예법에 이르기까지, 저희가 기억하는 것과 한 치도 어긋남이 없습니다.[42]

소소한 예법까지 완벽한 걸 본 송공은 혹시나 하는 일말의 의심마저 말끔히 지워버렸고, 떠나기 전에 상나라 시절부터 내려오는 송나라의 제기를 나눠주고 사적으로 조선후를 언니라고 부르겠다면서 조선후를 송에 한번 찾아오라 초청하기까지 한다.


[1] 작중에서는 중산 환공으로 표시. [2] 작중에선 연간공으로 표시. [3] 계 중앙군 3만 7천, 고죽군 1만 8천, 무종군 2만 8천, 무양군 2만 4천 6백, 무원군 2만 1천 [4] 도주, 와해된 병력등은 제외한 순수 전투손실만 계산. [5] 현 허베이 성(河北省) 바오딩 시(保定市) 산하 딩저우 (현급)시(定州市) [6] 메타적으로 숙련도 판정 결과 92/100. [7] 현재의 평안도. [8] 진실은 조선비사 참조. [9] 조선 백성들도 예맥계 중에서도 맥족이 다수지 산융과는 무관했다. [10] 자기수양을 중시하는 내성파와는 달리 대외적 규범인 예를 중시한다. [11] 연나라 입장에선 서북쪽으로, 조나라 땅이지만 비중원계가 더 많은 변방 지역이라 이 시기엔 영유권이 불완전했다. [12] 역사에선 먼 훗날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도 도하에 애를 먹고, 돌아갈 때는 더 애를 먹은 그 요택이다. [13] 늪지대 북쪽 역시 산악 지형인 데다 곳곳에 대릉하, 대요하의 지류가 지나 대규모 군세의 이동에는 부적합하고, 따라서 해안가 인근으로 이동경로가 제한된다. [14] 이 문제는 해당 지역을 후일 완전히 영유하게 된 조선에게도 국가적인 과업의 대상이 될 정도였다. [15] 메타적으로 통솔력이 70대 수준이었다가, 손자병법 습득을 통해 춘추시대의 싸움법을 벗어나 전국시대의 원시적 총력전을 배우며 통솔 재판정에서 99(...)로 각성해 semi-손무란 별명이 붙었다. [16] 메타적으로는 4차전 이상을 장기전으로 판정한다. [17] 연간공 본인 딴에는 정예병만 데리고 달아났다지만, 수가 수인지라 어장주 말처럼 실질적으로는 부상병 등 걸리적거리는 부류만 빼고 전부 데리고 간 것. [18] 무원의 병력은 2만에 불과하고 그나마도 지도층이 연간공과는 별 관계없는 지역기반 귀족이었다. [19] 이 결과를 이끌어낸 악자 본인에게 있어서도 이 성과는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당장 자신의 무력이 날고 긴다 한들 이 중원에는 더 뛰어난 자들이 많을 것이라고 겸손을 잃지 않을 정도의 성품이었지만 일이 이 정도까지 흐르자 연군은 근성이 부족하다고 말을 바꿔야만 했고, 아무리 가려 뽑았고 적이 패주 중이었다고 하지만 워낙에 많은 이들을 흩어 놓은 셈이라 여전히 겸손한 범위의 발언이었다.(...) [20] 무양의 병력 대부분은 이미 중산 잔당을 쫓아 서쪽으로 향한 상황이라 나머지 중에서 그나마 추려보낸 게 이 정도 숫자였다. [21] 총병력 5천여명의 22% [22] 총병력 2만 3천여명의 4% [23] 중산+누번 연합군 피해 1300여명(총병력 1만 4천여명의 9%), 무양군 피해 3700여명(총병력 2만 2천여명의 17%) [24] 중간에 계를 점령하고 무양군의 귀환 이전 무양성을 접수, 이후 보급받을 배후지를 전부 잃은 무양군의 항복까지 받아내는데 성공한 조선군과 만나서 논의를 하였지만, 조선군에게 추가적인 지원은 받지 않고 나머지 연군을 계속 붙들어달라고만 하였다. 당시 조선군 별부사마 악자가 조선 임관 이전, 중산에서 벼슬하다 살해당할 뻔 했던 전적이 있는 터라 대략적인 방침 외에 자세한 논의를 하기 어려운 상황이기도 하였다. [25] 이 때쯤 고죽성주가 왜 수도를 건너뛰고 무양을 거쳐 끝끝내 무원까지 와서 의탁했는지 밝혀졌는데, 여튼 그래서 그래도 자식이라고 일단은 쿠사리 대충 수도 없이 박히는 선에서 끝냈다(...) [26] 문제는 판정결과 숙련도가 66/100이라 78/100인 조선군보다 낮았다(...) 조선군의 기본 숙련도가 40/100이었다가 제나라 전씨와의 관계를 통한 손자병법 습득 이후 훈련도 상승 판정에서 크리티컬('semi-손무에게 안 되는 건 없다(엄근진)', '확실히 전 병력을 정예화하는 건 쉬웠습니다!')이 터져서 저렇게 상승한 거라 지독히도 운이 없던 셈이었다. [27] 전한의 탁군 역현, 후한의 하간국 역현. 삼국지에서 공손찬의 역경루가 있던 곳. 오늘날의 허베이성(河北省) 바오딩시(保定市) 슝현(雄县) 북서부. [28] 조선의 도하중 조선군 피해는 총병력의 1%, 연군 피해는 총병력의 4%. [29] 손자병법과 쌍벽을 이루는 병법서로 일컬어지는 오자병법을 저술하였고, 실전에서도 후방의 예비병력을 모아 급조한 위나라 군대를 지휘해 10배의 진(秦)나라 군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는 등 명성을 떨쳤다. [30] 중산국을 정벌했다. 작중에서 중산 환공이 중산 잔당을 이끌고 복국을 노리는 이유. 그 외 조선을 플레이하는 참치들이 눈여겨볼 사항이라면 전술한 조선 별부사마 악자의 아버지라는 것 정도. [31] 위에서 언급한 위나라의 이름난 대신 중 하나인 그 공숙좌가 변장해서 갔다. 여담으로 다이스 결과에 따라서는 위무후가 직접 오는 경우도 있었다고. [32] 당장 조선 유가의 계보를 열게 된 무생은 제나라 유가의 외왕파 인사였다가 작중 시작 시점 이전 어느 때에 조선에 파견되었고, 그 외에 손자병법이랑 중원의 최신 관직 체계 등을 조선에 전수해 준 것도 제나라였다. [33] 노나라는 역사적으로도 비교대상이었던 이웃의 제나라와 대비될 정도로 완고하고 고지식한 면만은 오기의 변법과 병법을 받아들였음에도 고쳐지지 않았다. 때문에 이민족 국가는 극도로 경계했지만 동시에 중원계 국가는 친근하게 여겼던 것이 모두 작용한 것이다. [34] 메타적으로는 환공이 몸소 칼로 사절의 목을 치는 것도 가능성 중 일부였다. [35] 메타적으로는 훌륭한 성과를 낸 걸 보고 인재 판정을 했지만, 능력치가 너무 처참하게 나와 참가자들이 패스하였다. [36] 이 둘은 각각 훗날의 강양군 기황(AA:셋쇼인 키아라)과 안월(AA:츠키무라 스즈카)이다. [37] '보리 맥'자를 쓴 탓에 '조선 특산물은 사실 맥주'등 온갖 관련 드립이 튀어나왔고 일부는 이후 기정사실화되었다. [38] 조선 공실의 성씨는 자성 기씨(子姓 箕氏), 송 공실의 성씨는 자성 송씨(子姓 宋氏)로, 이 시기에는 성은 혈연을, 씨는 지연을 의미했다. [39] 작중 시점에서 700여년 전, 주나라 무왕이 상나라를 꺾고 천자국 지위를 쟁탈한지 얼마 뒤 사망하고 어린 성왕(成王)이 뒤를 잇자 일어난 반란. 주 무왕은 빠른 정세 안정을 위해 죽은 상나라 주왕(紂王)의 아들 무경(武庚)을 제후로 봉하고 대신 자기 형제 3명을 감시자로 붙였다. 그런데 무왕이 죽자 삼감(三監)이라 일컬어지던 이 감시자들까지 무경(武庚)과 결탁해 상나라 부활을 외치며 조카 성왕(成王)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다(...) 하지만 이 반란은 섭정 역할을 맡은 주공 단에 의해 결국 진압당했고, 무경(武庚)은 처형, 삼감(三監)도 전사 또는 유폐당한다. 이후 무경(武庚)이 다스리던 상 유민들을 관리하기 위해 진압에 협력한 미자(여러 설 중 작중에선 주왕(紂王)의 서형이란 쪽을 택했다)를 대신 제후로 임명했는데, 이게 송나라다. [40] 작중 판정에서 조선이 시조로 모시는 기자와 송의 시조인 미자 모두 주왕(紂王)의 서형이지만, 미자가 기자보다 연장자였던 걸로 정리되었다. [41] 사기 공자세가 편에서도 공자의 말을 빌려, "하(夏)나라 사람은 동쪽 계단에 빈소를 차렸고, 주(周)나라 사람은 서쪽 계단에 빈소를 차렸고, 은(殷)나라(상나라를 다르게 부른 표현) 사람은 양쪽 기둥 사이에 빈소를 차렸다."고 하는 등 상나라 예법과 주나라 예법은 다소 달랐다. [42] 메타적으로는 판정에서 크리티컬이 나와서 '상나라 예법 중 알던 부분 외에 잘 몰라서 찍은 부분까지 죄다 맞아떨어짐'이 되어버린 결과라 당시 참가자들은 그저 웃음만 터뜨렸다. '애초에 상나라 예법 정보는 어떻게 얻었는가?'는 조선비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