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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6 04:01:00

조 게이젠스

조 게이텐스에서 넘어옴
아이티의 前 축구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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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000,#e5e5e5> 이름 조 게이젠스
Joe Gaetjens
본명 조셉 에두아르드 게이젠스
Joseph Edouard Gaetjens
출생 1924년 3월 19일
아이티 포르토프랭스
실종 1964년 7월 10일 (실종당시 40세)
국적
[[아이티|]][[틀:국기|]][[틀:국기|]]
포지션 중앙 공격수
신체조건 178cm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000,#e5e5e5> 선수 에투알 아이티엥 (1938~1947)
브룩해턴 (1947~1950)
RC 파리 (1951~1952)
올랭피크 아를 (1952~1953)
에투알 아이티엥 (1953~1957)
국가대표 3경기 0골 (1944~1953 / 아이티)
3경기 1골 (1950 / 미국)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선수 생활2.3. 실종
3. 뒷이야기4. 수상
4.1. 클럽4.2. 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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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이티의 축구 선수.

1950 FIFA 월드컵 브라질 대회에서 잉글랜드를 무너뜨린 결승골을 넣은 선수로 유명하다.

2. 생애[1]

2.1. 어린 시절

게이젠스는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의 부아 베르나(Bois Bernat)에서 태어났다. 당시 부아 베르나는 포르토프랭스의 부촌이었지만 게이젠스가 태어날 당시 그의 집안은 다소 몰락한 상태였다. 게이젠스의 증조부 토마스는 원래 베를린 출신의 독일인이었고 아이티에 특사로 건너와 아이티에 그의 가족이 정착한 것이었다.

2.2. 선수 생활

2.2.1. 클럽

게이젠스는 14세부터 에투알 아이티엔(Etoile Haïtienne)에 소속되었고 두 차례 아이티 리그 우승을 맛보았다.

게이젠스의 클럽 커리어 중 하이라이트는 1942년에 있었던 라싱 클뢰브 아이티엔(Racing Club Haïtien)과의 라이벌전이었다. 전반전이 끝날 때 에투알은 라싱 클뢰브에 0대3으로 끌려가고 있었고 라싱 클뢰브는 후반에 수비적인 전술로 굳히기에 들어갔다. 그러나 에투알은 게이젠스의 2골을 포함, 종료 직전에 4대3으로 경기를 뒤집었다.

게이젠스는 1947년, 아이티 정부의 지원으로 컬럼비아 대학교에 유학을 왔고 브룩하탄에서 3년을 보냈다. 게이젠스는 미국에서 뛰어난 득점력을 선보였고 게임당 25달러를 받았다. 이 시기에 그는 브룩하탄 구단의 레스토랑에서 설거지를 하기도 했다.

1951년, 게이젠스는 프랑스의 라싱 클뢰브 드 프랑스에서 1시즌을 보내고 1953년에 아이티로 돌아와 1957년까지 에투알에서 뛰었다.

2.2.2. 국가대표

2.2.2.1. 아이티
게이젠스는 아이티 소속으로 친선 경기 3경기를 뛰었지만 득점은 없었다.
2.2.2.2. 미국
1950년 월드컵 출전으로 인해 축구선수가 갑자기 필요해진[2] 미국은 선수들을 되는 대로 모집했고 모집 조건이 상당히 파격적이었다. 불법체류자든 합법적으로 체류하는 사람이든 외국인이라도 대표팀에 지원하고 본인이 원한다면 미국 국적을 주겠다는 조건으로 선수를 모집했다. 당시 브룩하탄에서 뛰던 게이젠스도 응해서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1950년 월드컵에 출전했다.[3]

조별 리그에 미국은 스페인, 칠레와 더불어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라는 잉글랜드와 같은 조에 배정받았다. 첫경기 스페인전에서 미국은 선제골을 넣었음에도 후반 10분을 못 버티고 1-3으로 와르르 무너졌다. 하지만 미국은 그 다음 경기인 잉글랜드전에서 그야말로 전설을 썼다.

잉글랜드전에서 미국은 시종일관 밀렸지만 실점은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전반 38분경, 월터 바르에 이어 게이젠스가 때린 2차 슈팅이 선제골이 되고 말았다. 미국이 선제골을 넣은 경기 양상은 스페인전과 비슷했지만 잉글랜드가 스페인보다 강한 전력을 가진 게 당연하다고 믿었던 관중들은 모두 눈을 잠시 의심했다. 그러나 관중들은 스페인전처럼 미국이 또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곧 평정을 되찾았다. 게이젠스의 선제골 이후 잉글랜드의 공격수들은 그야말로 성난 사자처럼 미국의 골문을 노렸고 이로 인해 미국의 프랭크 보기 골키퍼는 찰리 콜롬보를 축으로 한 하프백 라인을 앞에 두고 그야말로 환상의 선방쇼를 보여줬다. 그리고 이번엔 달랐다. 보기 골키퍼와 미국의 수비진은 스페인전에서의 후반전이 예방 주사라도 된듯 수십개에 달하는 잉글랜드 공격수들의 슈팅을 온갖 방법으로 막아냈다. 결국 미국은 게이젠스의 골을 끝까지 지켜내며 잉글랜드를 격파하는 이변을 보여줬다.

하지만 잉글랜드와의 경기에서 힘을 다 쏟아부었는지 미국은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인 칠레전에서 5골이나 헌납한 끝에 조 꼴찌로 광탈해버렸다. 하지만 게이젠스의 철퇴 한방만큼은 FIFA 월드컵 역사에 길이 남아 앞으로도 회자될 것이다.

2.3. 실종

게이젠스는 1953년에 아이티로 돌아왔는데 문제는 당시의 아이티가 그 악명높은 프랑수아 뒤발리에 치하였다는 것, 더 큰 문제는 게이젠스 본인은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그의 가족들은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1957년 아이티 대통령 선거에서 뒤발리에에 패한 루이 데주아(Louis Déjoie)는 게이젠스의 친척이었고 동생 장피에르와 프레드는 도미니카 공화국의 아이티 망명자들과 연계해 쿠데타를 시도했다.

이런 상황에서 뒤발리에가 1964년 6월의 영구집권 투표에서 얻은 99.9%의 득표로 7월 8일, 영구집권을 선언하자 게이젠스의 가족들은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러나 게이젠스만은 "난 정치에 큰 관심이 없는 그냥 운동 선수일 뿐인데 설마 어찌 하겠어?"하는 안이한 심정과 뒤발리에 정권이 곧 무너질 것이라는 판단으로 아이티에 남아있었다가 7월 10일에 비밀경찰에게 끌려간 뒤 행방이 묘연해졌다. 생사여부조차 아무도 알 수 없고, 시신도 발견되지 않아서 어떻게 숨졌는지 알 수 없다. 게이젠스가 살아있다고 해도 현재 [age(1924-03-19)]세의 고령이므로 이미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3. 뒷이야기

4. 수상

4.1. 클럽

4.2. 개인



[1] 출처: 위키피디아 [2] 월드컵은 선수 엔트리를 미리 제출해야 해서 큰 상관은 없었지만 월드컵 개막과 동시에 한국 전쟁이 터진 바람에 운동 선수들마저 전선으로 투입됐다. 당시 미국은 징병제를 실시 중이었다. [3] 당시 미국 대표팀에서 뛰었던 모든 선수들이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지는 않았다. 게이젠스도 그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