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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6 01:34:28

제임스 더글러스

파일:제임스 더글러스.png
성명 제임스 더글러스
James Douglas
생몰년도 1358년 ~ 1388년 8월 5일
출생지 스코틀랜드 왕국 라나크셔 더글러스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노섬벌랜드 오터번
아버지 윌리엄 더글러스
어머니 마르의 마거릿
형제 이사벨라
아내 이사벨 스튜어트
자녀 윌리엄( 사생아), 아치볼드(사생아)
직위 2대 더글러스 백작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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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 시기에 잉글랜드군에 맞서 싸웠지만 오터번 전투에서 전사했다.

2. 생애

1358년경 스코틀랜드 왕국 라나크셔 더글러스에서 초대 더글러스 백작 윌리엄 더글러스와 마르의 영주 돔놀 2세의 딸인 마르의 마거릿 사이의 아들로 출생했다. 누이로 이사벨라[1]가 있었다. 1380년 아버지로부터 리데스데일을 물려받은 뒤 리데스데일의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1384년 5월 아버지가 사망한 뒤 제2대 더글러스 백작이 되었다. 이 무렵 프랑스군 기사단이 몬트로즈에 상륙해 잉글랜드군에 맞서는 스코틀랜드군을 돕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자, 그는 초대 크로포드 백작 데이비드 린제이와 함께 군대를 소집해 프랑스군과 연합했다.

1384년 6월, 제임스는 프랑스 기사들과 함께 잉글랜드로 진격해 초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와 초대 노퍽 공작 토머스 모브레이의 영지를 황폐화했다. 그 해 7월 7일, 스코틀랜드 왕국은 잉글랜드와 이듬해 5월까지 지속되는 휴전에 동의했다. 이후 프랑스 기사들은 프랑스로 돌아갔지만, 가능한 한 빨리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1385년 5월 휴전이 만료된 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간의 전쟁이 재개되었다. 프랑스 제독 장 드 비엔이 이끄는 맨앳암즈 1,000명, 기마 궁수병 500명 등이 상륙한 후, 제임스는 4,000명에 달하는 스코틀랜드군을 동원해 프랑스군과 함께 노섬벌렌드를 침략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하지만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대규모로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제임스는 잉글랜드군이 에든버러로 진격하도록 내버려두고 고산지대로 후퇴했다. 잉글랜드군은 멜로즈 수도원, 뉴배틀 수도원, 드라이버그 수도원을 파괴하는 등,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를 포함한 로우랜드 지방 대부분을 약탈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프랑스 연합군이 결전을 회피하고 지연전을 벌이는 동안 겨울이 다가오자 보급 문제로 회군했다. 이후 제임스 등 스코트랜드 귀족들은 프랑스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고 여겨 장 드 비엔 등 프랑스 장성들을 강제로 억류한 뒤 보상금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이에 프랑스에서는 잉글랜드와 2, 3년 정도 평화 조약을 맺고 스코틀랜드를 침략해 완전히 파괴하자는 여론이 생길 정도로 격분했지만, 적을 늘릴 수는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보상금을 내주고 프랑스 장성들을 돌려받았다. 그 후 프랑스와 스코틀랜드간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1386년,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와 존 네빌이 동부 국경의 지휘권을 놓고 다툼을 벌였다. 서부 국경 김사관이었던 제5대 클리포드 남작 로저 클리퍼드가 이들을 중재하기 위해 동쪽으로 가 있자, 제임스는 이 때를 틈타 파이프 백작[2] 로버트 스튜어트와 함께 쳐들어가서 컴벌랜드 일대를 휩쓸어 수많은 영지를 파괴하고 약탈한 뒤 귀환했다. 1388년, 스코틀랜드 고위 귀족들은 국왕 로버트 2세를 제쳐놓고 체드버그에 모여서 잉글랜드를 공격하는 문제를 놓고 열띤 회의를 열었다. 그들은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의 나이가 어려서 측근들에 의지하고 있고, 왕과 의회파 귀족들간의 분쟁이 갈수록 격화되는 등 잉글랜드의 정치 상황이 혼란스러운 점에 주목하고, 1385년 자국을 침략해 큰 피해를 안긴 자들에게 복수할 기회가 왔다고 여겼다.

이에 국경을 넘어 공격하기로 결심한 이들은 1388년 8월 체비엇 힐스의 옛홀름 마을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제임스가 총사령관을 맡았고, 머레이 백작 존 던버, 파이프 백작 로버트 스튜어트, 기사 제임스 린치 등이 1,200명의 맨앳암즈와 다수의 일반 병사들을 데리고 왔다. 얼마 후, 스코틀랜드군은 잉글랜드 스파이를 체포했다. 스파이는 고문을 받은 끝에 잉글랜드군이 국경 남쪽에 집결하면서 스코틀랜드군의 침공이 서쪽 경로와 동쪽 경로 중 어느 쪽으로 이뤄지는 지가 분명해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정했다고 진술했다. 만약 스코틀랜드군이 한 쪽을 택한다면, 잉글랜드는 다른 경로를 통해 반격을 가할 터였다. 이에 스코틀랜드군은 두 경로로 동시에 잉글랜드를 공격하기로 했다. 제임스가 300명의 맨앳암스와 2,000보병을 이끌고 동쪽 경로를 통해 더햄으로 진군하는 동안, 린치 백작은 더 많은 군대를 인솔해 서쪽 경로를 통해 리더데일과 칼라일로 행진하기로 했다.

스코틀랜드군이 두 경로를 통해 노섬벌랜드에 쳐들어오자, 랄프 퍼시의 잉글랜드군은 칼라일로 달려갔고 헨리 퍼시는 뉴캐슬로 이동했다. 그 후 제임스의 군대가 뉴캐슬을 지나치자, 헨리 퍼시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성에서 출격해 적을 공격했다. 프루아사르의 연대기에 따르면, 제임스와 헨리 퍼시는 전투 도중 서로 만나서 일기토를 벌였고, 제임스가 퍼시를 쫓아내고 퍼시의 창과 페넌트를 노획했다고 한다. 제임스는 퍼시가 빼앗긴 것을 되찾으려 할 것이라 여기고 도발했지만, 헨리 퍼시는 증원군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당국의 엄격한 지시에 따라 가만히 있었다.

그 후 제임스의 군대는 폰테랜드 성을 파괴한 뒤 오터번 성을 포위했다. 그들은 한쪽에는 습지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숲이 우거진 언덕이 있는 강변에 진을 쳤다. 한편 헨리 퍼시는 제임스의 군대가 스코틀랜드군의 분견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즉시 맨앳암스와 보병대를 이끌고 제임스를 쫓아갔다. 당대의 몇몇 사료에 따르면 퍼시에겐 6,000명의 맨앳암스와 8,000명의 보병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 학자들은 그의 군대가 그정도로 클 가능성은 없다고 간주하며, 스코틀랜드군보다 다소 많은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1388년 8월 5일 일몰 무렵, 퍼시의 잉글랜드군은 스코틀랜드 진영 인근에 도착했다. 주력군이 적 진영으로 접근하는 동안, 리즈데일의 영주인 로버트 4세 드 움프라빌은 북쪽의 숲을 통과하는 우회 경로를 통해 스코틀랜드 진영 후방으로 접근했다. 당시 스코틀랜드군은 공성전을 마친 뒤 저녁식사를 한 후 잠자리에 들어서, 적이 나타나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이윽고 잉글랜드군이 공격을 개시하자, 그제야 적이 나타났다는 것을 깨달은 스코틀랜드 병사들은 사전에 숙영지 주변에 둥그렇게 세워둔 마차를 앞에 둔 채 맞섰다. 당시 제임스는 투구도 쓰지 않은 채 숙소 바깥으로 뛰쳐나와 병사들을 진두지휘했다.

잉글랜드군은 적 숙영지와 강 사이로 침투하려 했지만 습지대에 가로막혀 꼼짝 못했고, 제임스는 기병대를 모은 뒤 언덕을 돌아서 적의 측면을 공격했다. 이윽고 어둠이 완전히 깔리고 달과 별빛만 가지고 적을 판별해야 할 정도로 시야가 불량했지만, 양측은 개의치 않고 전투를 이어갔다. 도중에 제임스가 전투용 도끼를 휘두르며 적 대열을 휘젓다가 전사했지만, 존 스윈튼이 그를 대신해 군대를 잘 이끌었고, 스코틀랜드군은 지휘관이 죽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분전했다.

한편 적의 후방으로 이동하던 로버트 4세 드 움프라빌은 스코틀랜드인들이 적과 맞서 싸우느라 비워진 진영에 들어서서 약탈했지만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왔던 경로로 되돌아갔다. 그 바람에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한 헨리 퍼시는 머레이 백작의 공격으로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다. 지휘관이 잡혔다는 것을 알게 된 잉글랜드군은 달아났고, 스코틀랜드인들은 이들을 추격해 모조리 죽이거나 사로잡았다.이날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은 제임스 외에 로버트 헤리엇, 존 투리스, 윌리엄 린던 등 기사 몇 명과 병사 100명이 전사했다고 전해지며, 잉글랜드군은 1,800명이 전사하고 1,000명이 포로로 잡혔다고 한다. 전투가 끝난 후, 스코틀랜드군은 그제야 제임스가 전사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곧바로 본국으로 철수했다. 제임스의 유해는 멜로즈 수도원에 마련된 조상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는 생전에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2세의 딸인 이사벨라와 결혼했지만 자식을 낳지 못했다. 이 때문에 더글러스 백작위와 영지는 아버지 윌리엄 더글러스의 사촌인 아치볼드 더글러스에게 넘어갔다. 사생아 윌리엄과 아치볼드는 퀸즈베리 후작과 카브르의 더글러스 가문의 조상이 되었다.


[1] 1360 ~ 1408, 기사이자 로버트 3세의 처남인 말콤 드러먼드의 부인, 마르 여백작. [2] 훗날 올버니 공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