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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6 00:32:10

아치볼드 더글러스(제3대 더글러스 백작)

<colcolor=#000000> 제3대 더글러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
Archibald Douglas, 3rd Earl of Douglas
<colbgcolor=#838F7E> 성명 아치볼드 더글러스
Archibald Douglas
생몰년도 1330년 ~ 1400년 12월 24일
출생지 스코틀랜드 왕국 미상
사망지 스코틀랜드 왕국 커크커드브라이트셔 쓰리브 성
아버지 제임스 더글러스
형제 윌리엄 더글러스
아내 조앤 드 모라비아
자녀 아치볼드, 제임스, 마조리, 헬렌, 엘레노어, 윌리엄( 사생아)
작위 제3대 더글러스 백작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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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 시기에 잉글랜드군에 맞서 싸웠다.

2. 생애

1330년경 제임스 더글러스의 아들로 출생했다. 아버지 제임스 더글러스는 로버트 1세의 최측근으로서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서 맹활약했고, 레콩키스타에 참여했다가 그라나다 공방전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 인치컴 수도원장이자 스코틀랜드 연대기 작가 월터 바워는 "그는 귀족이라기보다는 요리하는 소년에 더 가깝고, 어둡고 추악했다"고 기술했는데, 학자들은 그가 제임스 더글러스의 사생아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라고 추정한다. 백년전쟁 전반기의 연대기 작가 장 프루아사르는 그를 거대한 검을 휘두를 수 있는 덩치 큰 남자로 묘사했다. 형제로 윌리엄 더글러스가 있었는데, 1332년 8월 할리돈 힐 전투에서 에드워드 발리올을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세우려는 잉글랜드 귀족들의 침략에 맞서다가 전사했다.

현대 학자들은 그가 스코틀랜드 국왕 데이비드 2세와 함께 프랑스로 망명해서 사촌인 윌리엄 더글러스와 함께 했으리라 추정한다. 하지만 그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1342년 더글러스 영지의 상속자로서 그의 이름이 포함되었을 때였다. 1356년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스군에 가담했다가 잉글랜드군에 생포되었다. 당시 아치볼드가 입은 갑옷과 마구가 훌륭하게 제작되었기에, 그를 사로잡은 잉글랜드 장병들은 그를 귀중한 포로로 여겼다고 한다. 이후 잉글랜드에 억류되었던 그는 콜루티의 윌리엄 램지와 짜고 탈출극을 벌이기로 했다.

램지는 먼저 아치볼드가 자기 사촌의 갑옷을 훔쳐서, 사촌이 갑옷을 제대로 챙기지 못해 잉글랜드군 화살에 맞아 죽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램지는 아치볼드에게 부츠를 벗으라고 요구했고, 아치볼드는 이에 따랐다. 그가 부츠 하나를 벗자, 램지는 그것으로 아치볼드의 머리를 때렸다. 이에 잉글랜드군 장병 하나가 개입해 아치볼드는 스코틀랜드 고위 귀족의 아들이므로 존중받아야 한다고 했다. 이에 램지는 "내가 장담하건대, 그는 비열하고 도적이다"라고 반박한 후, 아치볼드에게 "너희 악당에게 가서 살해당한 자들 사이에서 주인의 시신을 찾아 적어도 그에게 괜찮은 장례식을 제공할 수 있도록 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잉글랜드인들은 그가 실은 별것 아닌 포로였다고 여기고 풀어줬고, 아치볼드는 램지의 명령에 따라 스코틀랜드로 가서 잉글랜드로 돌아가지 않았다.

1360년, 아치볼드는 에딘버러 보안관과 에딘버러 성의 순경으로 선임되어 1364년까지 이 직책을 역임했다. 1364년에는 서북 국경지대의 사령관에 선임되었다. 이후 잉글랜드 국경지대에 거의 매년 공격을 가했고, 1368년 국경 전역의 감시관에 선임되었다. 이후 1369년과 1371년에 프랑스에 두 차례 샂러로 파견되었다. 첫번째는 교황 우르바노 5세에서 스코틀랜드 국왕 데이비드 2세의 두번째 왕비 마거릿 드러먼드가 항소를 제기한 것에 항의하는 것이었고, 두번째 사절은 프랑스와 스코틀랜드 간의 동맹을 갱신하기 위한 것으로, 그 결과 벵센 조약이 체결되어 프랑스군이 스코틀랜드로 파견되어 잉글랜드를 치는 데 협력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1369년 데이비드 2세에 의해 갤로웨이 영주로 선임되었고, 1372년에 동부의 지배권을 재확인한 후 위그타운 백작 토머스 플래밍으로부터 위그턴 영지를 획득해 갤로웨이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했다. 1378년, 아치볼드의 조카인 댈하우지의 알락산더르 램지가 50명의 병력과 함께 베릭을 기습 공격했다가 메릭 마을을 지키는 임무를 맡고 있던 토머스 드 머스그레이브에게 포위되었다. 그는 구원군을 이끌고 조카를 구하러 진군했지가, 베릭에 접근했을 때 정찰병으로부터 성 주변의 잉글랜드군이 10,000명에 달하며, 궁수, 공성 무기, 중기병 및 선박이 길을 막고 있다고 알렸다. 이에 아치볼드는 멜로즈로 퇴각했고 머스그레이브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추격했다. 아치볼드는 멜로즈에서 병력을 집결시키고 주변의 민병대를 끌어모은 뒤 반격했고, 머스그레이브는 크게 패하고 생포되었다.

1384년 초대 더글러스 백작 윌리엄 더글러스가 사망했고 그의 아들 제임스 더글러스가 제2대 더글러스 백작이 되었다. 제임스 더글러스는 4년 후인 1388년 오터번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으나 전투 도중에 전사했다. 그는 그 뒤를 이어 제3대 더글러스 백작이 되었으며, 모든 더글러스 영지를 상속받음으로써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강력한 대귀족이 되었다. 그는 잉글랜드와의 전쟁 기간 동안 잉글랜드와의 국경을 지키는 영주들을 봉신으로 삼았고, 국경 방비를 위한 특별 규정을 반포하는 등,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3세를 제치고 실질적인 권력자로 군림했다. 또한 1390년에 자기 아들이자 후계자인 아치볼드 더글러스를 스코틀랜드 공주 마거릿과 결혼시켰으며, 1399년 딸 마조리를 로스세이 공작이자 왕위 계승자 데이비드 스튜어트와 결혼시키는 등 스튜어트 왕조와 의 관계를 굳건히 했다.

데이비드 스튜어트는 본래 던바 및 마치 백작 조지 1세 드 던바의 딸인 엘리자베스 던바와 결혼하기로 계약되어 있었고, 조지는 이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많은 액수를 지불하기도 했지만, 더글러스 가문의 압력으로 무산되었다. 이에 반감을 품은 조지는 스코틀랜드에 있는 자신의 재산과 로버트 3세에 대한 충성을 포기하고 온 가족을 잉글랜드로 이주시켜 잉글랜드 국왕 헨리 4세의 궁정에 합류했고, 잉글랜드 편에 서서 스코틀랜드군과 맞섰다. 그러다가 1408년 아치볼드의 후계자인 아치볼드 더글러스와 화해하고 이듬해에 스코틀랜드로 돌아갔다.

1400년 12월 24일, 아치볼드는 커크커드브라이트셔 쓰리브 성에서 사망했고, 보스웰에 안장되었다. 이후 장남 아치볼드 더글러스가 제4대 더글러스 백작이 되었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