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로버트 4세 드 움프라빌 Robert IV de Umfravil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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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1437년 1월 27일 | |
출생지 | 잉글랜드 왕국 움프라빌 영지 | |
사망지 | 잉글랜드 왕국 뉴민스터 | |
아버지 | 토머스 1세 드 움프라빌 | |
어머니 | 조앤 로담 | |
형제 | 토머스 2세 | |
아내 | 이사벨라 | |
직위 | 리즈데일 남작, 노섬벌랜드 카운티 보안관, 가터 기사단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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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에서 스코틀랜드군과 프랑스군에 맞섰다.2. 생애
움프라빌 가문은 시조인 로버트 1세 드 움프라빌이 1155년경 잉글랜드 국왕 헨리 1세에 의해 프라도와 리즈데일의 영주권을 수여받은 이래로 수 세기 동안 잉글랜드 북동부에서 강력한 영향력은 발휘했다. 그들은 노섬벌랜드, 요크셔, 러틀랜드 및 서퍽에서 광범위한 부동산을 소유했으며, 길버트 2세 드 움프라빌이 1243년 앵거스 여백작 마틸다와 결혼하면서 스코틀랜드에도 영지를 확보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서 잉글랜드가 패배한 후, 엥거스 영지를 상실했다. 1375년에 앵거스 3대 백작 길버트 4세 드 움프라빌이 프라도 영주권을 제4대 퍼시 남작 헨리 퍼시에게 매각하면서, 잉글랜드 북부에서 움프라빌 가문의 영향력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잉글랜드 북부에서 알아주는 귀족 집안이었다.아버지 토머스 1세 드 움프라빌은 제2대 앵거스 백작 로버트 3세 드 움프라빌의 막내 아들로, 아버지가 사망한 후 가문의 소유물과 칭호 대부분은 큰형인 길버트 4세 드 움프라빌에게 넘어간 뒤 기사로 복무했다. 그러다가 길버트 4세가 1381년 자녀 없이 사망하면서 리즈데일을 물려받았지만, 그 외의 영지는 제4대 퍼시 남작 헨리 퍼시에게 넘어갔기에 수입이 많지 않았고, 잉글랜드 의회에 소환되지도 않았다. 또한, 그는 아버지의 첫 부인이자 계모인 루시 드 카임으로부터 카임 남작위를 물려받았다. 토머스 1세는 기사 아담 로담의 딸인 조앤과 결혼해 토머스 2세와 로버트 4세를 낳았다.
로버트 4세가 언제 태어났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지만, 1387년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는 미성년자였다. 이후 초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의 피후견인이 되었다. 이후 군대에 복무했으며, 1388년 헨리 '핫스퍼' 퍼시 휘하에 들어가 오터번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에 맞섰다. 이때 그는 북쪽의 숲을 통과하는 우회 경로를 통해 스코틀랜드 진영 후방으로 접근했고, 스코틀랜드인들이 적과 맞서 싸우느라 비워진 진영에 들어서서 약탈했지만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왔던 경로로 되돌아갔다. 그 바람에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한 헨리 퍼시는 머레이 백작의 공격으로 부상을 입고 생포되었다가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1390년 스코틀랜드로의 습격 작전을 지휘했고, 이후에도 비슷한 습격 작전을 두 번 이상 수행했다. 1390년대 노섬벌랜드 카운티의 다양한 정부 위원회의 일원을 맡았고, 1401년 노섬벌랜드 보안관이 되었다. 1399년과 1400년 스코틀랜드를 향한 습격 작전 및 국경 전투에 참여했으며, 1402년 호밀돈 언덕 전투에서 헨리 '핫스퍼' 퍼시의 부관으로서 참전해 승리에 기여했다. 1402년 12월 14일 잉글랜드 국왕 헨리 4세로부터 연간 40파운드의 수입을 보장받았으며, 1404년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가 이전에 맡았던 베릭 성주에 선임되었다.
1405년 워크워스 성주가 되었고, 명예 랭글리 남작 직을 수여받았다. 1405년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가 헨리 4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의 부관으로서 반란군을 토벌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반란 진압 후 다시 노섬벌랜드 보안관이 되었으며, 잉글랜드-스코틀랜드 국경 방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 후 그는 동부 국경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은 헨리 4세의 아들인 랭커스터의 존의 고문이 되었다.
한편, 그는 1391년 사망한 형 토머스 2세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길버트 5세 드 움프라빌의 후견인이 되었으며, 미성년자인 길버트 5세를 대신해 리즈데일 남작령을 관리했다. 1407년 9월 4일 더럼 대성당에서 열린 새로운 더럼 주교 토머스 랭글리의 즉위식에 조카와 함께 참석했으며, 1408년 조카와 함께 스코틀랜드의 티비옷데일을 습격해 심각한 약탈을 자행했다. 이 공로로 1408년 9월 가터 기사단의 기사가 되었다. 1410년 토머스 보퍼트 제독 휘하의 북부 함대 부관으로서 포스 만에서 스코틀랜드 선박에 대한 습격 작전을 이끌었으며, 1411년 7월 11일 6년간 록스버그 성의 후견인을 맡았다.
1413년 헨리 5세가 잉글랜드 왕위에 오른 후, 그는 스코틀랜드로 피신한 퍼시 가문에 대한 동정심을 품고 있다는 의심을 받았고, 1415년 헨리 5세를 암살하려 했던 사우샘프턴 음모에도 관여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기에 무사히 넘어갔다. 1415년 7월 말 스코틀랜드군이 침공하자 이를 격파했다. 하지만 헨리 5세는 자신이 잉글랜드를 떠나 있는 동안 그가 반란을 일으킬 수 있을 수도 있다고 여겨 그를 록스버그 성주 직에서 해임하고 프랑스로 소환했다. 그는 1416년 프랑스로 건너가서 헨리 5세에게 경의를 표했고, 헨리 5세는 그에 대한 의심을 풀었다.
1417년 잉글랜드 북부로 돌아가 올버니 공작 로버트 스튜어트가 노섬벌랜드 일대를 약탈했을 때 버윅 성을 성공적으로 지켰다. 이후 2년간 스코틀랜드 국경 지대에 대한 습격전을 감행해, 휴전 협정을 위반한 스코틀랜드인들에게 보복했다. 이는 1419년 피블스 시를 공략하고 초토화한 것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1421년 3월 22일, 조카 길버트 5세가 보제 전투에서 전사했다. 길버트 5세는 자녀를 남기지 않았기에, 그는 리즈데일 남작위를 물려받았다. 이후 국경지대 수비를 맡으면서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와의 평화 협상에 참석했으며, 1428년 노섬벌랜드 카운티에서 윌리엄 헤론이 피살된 후 헤론 가문과 매너스 가문간의 갈등이 3년간 지속되는 상황을 중재해, 양자가 1431년 5월 24일 뉴캐슬에서 화해 의식을 거행하게 했다.
로버트 4세는 더럼 수도원장인 존 웨싱턴의 친구이기도 했으며, 이내 이사벨라와 함께 더럼 기사단의 일원이 되기도 했다. 1428년 6월 27일 뉴캐슬 남서쪽의 파르나크레스 영지에 자신과 아내 이사벨라, 헨리 4세와 헨리 5세, 그리고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기사들을 기념하기 위한 예배당을 세웠다. 1436년 3월 14일 스코틀랜드와의 휴전 협상에 참여한 것을 마지막으로 공식 활동을 마무리했고, 1437년 1월 27일 뉴민스터에서 사망해 그곳의 사원에 안장되었다. 그의 미망인 이사벨라는 1438년 6월 27일에 사망했고 남편 옆에 묻혔다. 로버트는 자녀를 낳지 못했으며, 움프라빌 가문의 마지막 인물이었다. 그래서 사촌인 윌리엄 탈보이스가 영지를 물려받았다.